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 ]

위로 이동

* 옥 (獄) *



시작노트

" 옥 (獄) " 詩作 note

단언컨대 세상은 거대한 감옥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감옥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몸부림이다. 고로 감옥 속에 갇혀있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어차피 원죄를 타고 태어난 처지인지라, 인간은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부역을 한다. 즐거운 일도, 행복한 일도, 혹은 괴로운 일이나, 불행한 일이나, 따지고 보면 모두 가소로운 옥중 생활의 연장선 상에 있다. 영원할 것도, 찬란할 것도 없다. 단지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는 찰나의 옥중 일기일 뿐이다.

모처럼 작심하고 고집부리는 필자의 주장에 구태여 토를 달 필요는 없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의 독자들이 떼로 성토할 이유도 없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사실 아니면 그만이다. 자신은 지금 감옥에서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혹자가 있다면, 그 또한 그의 자유 의지다. 그러니 피차 시비 걸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탈출할 계획이나 묘책을 갖고는 있는지 묻고 싶다.

어쩌면 끝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던 영화나 권력 등이 하루 아침에 사그러들거나, 행복한 삶의 여정을 자손 만대까지 누리게 될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현실이 어느 날 걷잡을 수 없는 나락과 파멸로 점철되며, 돌파구가 없는 어둠을 불쑥 가져다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제서야 자신의 우매하고 맹목적이었던 믿음을 탓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때에는 이미 늦다. 대안도 방비책도 없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심력과 체력의 낭비만 있게 되고, 급기야 방전과 소모를 통한 브루클린의 비상구를 거쳐 최후의 광야에 홀로 서게 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 한 날에 무슨 스릴러 영화같이 으스스한 주제로 시작노트를 시작하는가 싶은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식을 줄 모르는 폭염과, 연일 기록을 이어가는 열대야에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 진 지금인데, 속 시원한 이야기는 못할망정 뜬금없는 감옥타령이라니, 필자의 심술도 이 쯤 되면 수준급이다.

그렇지만 알 건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작되어졌고, 죽음에 직면하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도 실상은, 삶의 주인공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우리에게 그 권리가 온전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냥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하루들이 차례로 연결되어 우리의 일생이 되는 것이다. 바로 내일의 삶이라고 해도 짐작이나 예상을 하지 못할진대, 하물며 그 뒤의 미래는 당연히 우리의 의사대로 풀려가는 건 절대 아니다.

이제 다시 시작노트 본래의 색깔로 돌아오고 말았다. 역시 오늘도 또 이런 많은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걱정만 하거나, 남의 탓만 하면서 기회를 잃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제언으로, 단원이 귀결되어가고 있다. 허기사 필자의 성격상 시비거리를 오래 동안 붙잡고 주저앉아 칼질을 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그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행복을 공유하자는 대의가 우선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모범답안일 지 모른다. 예컨대 고금동서가 따로 없는 진리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 있는 확신과 자기 암시가 필요하다. 이른바 삶의 요인이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다. 작은 진실에서 큰 성공의 단서가 나온다. 그렇게 믿으면 된다. 믿는 사람에게 좋은 끝이 찾아온다. ‘브라질’의 ‘리우올림픽’이 이제 막바지를 향하여 치닫고 있다. 열기도 한껏 고조되어 있다. 마지막 메달 경쟁에 각 나라들이 최선을 다하여 임하고 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밤잠을 못 이루면서 응원의 함성에 힘을 보탠다.

지난 주부터 15초 정도의 동영상이 온라인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다. 펜싱 남자 ‘에페’에 출전한 ‘박상영’ 선수가 마지막 라운드 직전 혼잣말하는 모습이다. 그는 작은 심호흡 뒤 고개를 끄덕이면서 반복한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벼랑 끝에 몰린 10 대 14. 경기에 나간 박상영 선수는 연속 5점을 획득하는, 기적같은 역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믿기 힘든 대역전승이었다.

단판 승부로 희비가 갈리는 올림픽 종목에선 적지 않은 역전 드라마가 연출된다. 박상영 선수의 역전극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그는 역전의 감동보다 더 중요한 메세지를 전 국민에게 던졌다. 정치, 경제 등 많은 분야가 정지된 듯한 대한민국 현실에서 모두가 잊고 있었던 “할 수 있다”는 믿음, 꿈과 희망에 대한 자기확신을 표현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15초 혼잣말 동영상을 반복해 보면서 뭉클해하는 것은 그 간결한 한 마디가 일으키는 울림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위대한 이 시대의 영웅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 하면 된다는 확신으로 고도성장을 성취했다. 하지만 소수의 리더가 밀어붙이던, 하면 된다는 구호는 장기 경제 침체와 계층 간, 지역 간 갈등 속에서 힘을 잃고 있다. “하면 된다”고 하면 “해도 안 된다”는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다. 그러나 박 선수는 최악의 벼랑에서 과거 세대와는 전혀 다른 해답을 제시했다. 해설자도, 시청자도 모두 포기했을 때 홀로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주문을 자신의 온 몸에 투입해 멋있게 성공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시도였고 결과였다.

박 선수는 세계 랭킹 21위로 올림픽에 나섰다. 작년엔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도 입었다. 그는 펜싱을 하기 전엔 칭찬을 거의 듣지 못하는 아이였다고 했다. 그의 스마트폰엔 ‘아인슈타인’의 말이 입력돼 있다고 한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다. 아무 기적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 그리고 모든 일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스무 살 청년이 답답한 우리 사회에 ‘긍정 의 씨앗’을 한껏 뿌려주었다. 이게 바로 기적이다.

어차피 하루 하루 사는 게 기적을 경험하는 것인데, 우리가 다만 느끼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작은 기적들이 서로에게 흐뭇한 미소와 뿌듯한 감성을 선사하고, 그런 작은 기적의 이야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어 또 다른 기적의 생산으로 이어져갈 때, 우리의 삶은 더없이 아름답고 멋진 사연을 쌓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커다랗고 웅장한 기적의 탑만을 우러러보면서 자신의 소유로 하기 위한 버거운 행보를 이어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터무니 없는 과욕과 실수를 일삼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상상 그 이상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한 의사가 ‘아프리카’의 어느 외진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하다가, 외국에서 선진 축산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마을의 젊은 청년을 알게 되었다. 그 마을에는 독특한 결혼풍습이 있었는데, 청혼을 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이 암소를 받고 딸을 제게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특등 신부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부감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의 신부감이라면 암소 한 마리로도 승낙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의사는 이 청년이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에 둘러싸여 어디론가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청년이 몰고 나온 청혼 선물은 살찐 암소 아홉 마리였다. 사람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면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청년은 마을 촌장집도, 지역유지인 바나나 농장주인 집도, 마을 여선생의 집도 그냥 지나쳤다. 그렇게 한참을 걷더니 어느 허름한 집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는 그 집 노인의 딸에게 청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노인의 딸은 큰 키에 비해 너무 마르고 심약해 보이는 초라한 여자였다. 암소 한 마리로 청혼할 상대에 불과한데 암소 아홉 마리를 데리고 간 것을 보고 동네 청년들이 수근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처녀가 마법으로 청년을 홀린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게 되었다. 그 뒤로 의사는 의료봉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되돌아왔다. 가끔 그 청년을 생각할 때마다 ‘그 때 왜 아홉 마리의 암소를 몰고, 그 보잘 것 없는 처녀에게 청혼을 했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휴가차 다시 그 마을을 찾아간 의사는 큰 사업가가 되어있는 옛날의 그 청년을 만났고,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식사를 하면서 의사는 그에게 예전 청혼 선물로는 과도하게 아홉 마리를 건넨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는 빙긋 웃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궁금증만 더 커져갈 즈음에 찻물을 들고 한 여인이 들어왔다. 아름답고 우아한 흑인 여인이었다. 유창한 영어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까지 아름다웠다.

의사는 마음속으로, ‘아~, 이 사람이 그 때의 말라깽이 처녀 말고 또 다른 아내를 맞이했구나, 하긴 저 정도는 되어야 이 사람과 어울리지.’ 라고 생각했다. 그 때 사업가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선생님, 저 사람이 그 때 제가 청혼했던 처녀입니다.” 의사의 놀란 모습을 보고 사업가는 말을 이었다. “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저 사람을 사랑했고 저 사람과의 결혼을 꿈꿔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마을에선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여자들의 세계에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저도 그런 관습을 무시할 수 없어서 암소를 몰고 갔습니다. 사실 당시에 아내는 한 마리의 암소면 충분히 혼인 승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사랑한 여인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 값에 한정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을 두 마리나 세 마리를 받았던 처녀들과 비교하면서 움츠려져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청혼 때 몇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평생 동안 자기 가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세 마리를 훨씬 뛰어넘는 아홉 마리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외모를 꾸미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사랑했고, 또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주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무척 놀라하던 아내가 차츰 저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나에게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 아내는 ‘암소 아홉 마리’에 걸맞는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더욱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내를 똑같이 사랑하지만, 이제 아내는 결혼할 당시의 모습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수근대던 동네 아낙들도 요즘은 제 아내의 밝은 미소를 사랑해줍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자신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자신과 배우자, 혹은 친구의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투자해보자. 그것이 삶을 살지게 하는 중요한 인자가 될 수도 있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삶의 지표가 되어질 때 우리는 누구도 상상치 못한 보람과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삶의 기적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는 ‘버핏’의 수첩을 들여다본 것을 계기로 그의 삶의 방식을 알게 되면서, 의미 없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그 후부터 그는 중요한 일에만 집중하고, 불필요한 것에는 확실히 “노(NO)!” 라고 밝히기 시작했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사는 법’이다. 더불어 탁월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근원이기도 하다. 당시 빌 게이츠는 쉴 틈 없이 바빴다. 낮에는 계속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고 밤에는 쏟아져 들어오는 이메일을 읽고 답장을 썼다. 1년의 25% 정도는 해외 출장을 떠났다. ‘생각하는 시간’이라고 부른 휴가는 1년에 2주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나 본 ‘워렌 버핏’은 자신과 반대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회의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전화통화도 최소한으로 제한했으며, 컴퓨터는 온라인게임 브릿지를 하는 용도로만 사용했다. 수첩의 일정표는 거의 비어 있었고, 버핏의 ‘생각하는 시간’은 1년에 50주에 달했다. 게이츠는 버핏을 보며 ‘의미 없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정말 의미 있는 것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 진정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결실도 가져다준다는 깨달음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갑부를 만드는 데 일조를 담당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고, 누구나 갑부가 되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환경과 요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결과이기에 어느 누구도 미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런 생각들이 선결적으로 있었기에, 성공의 문을 여는 열쇠의 역할을 하고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결론이 있다면, ‘의미 있는 생각과 행동’이 바로 자신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집착이나 그릇된 고집을 주장하면서, 합리화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는 전제가 병행되어야 한다. 때로는 평생에 걸쳐서 확실하다고 믿는 부분까지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경우가 있고, 도저히 변경하기 힘든 신념도 수정해야 할 때가 있다. 세계적인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 보면 ‘밤비 신드롬’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랑이 때로는 증오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아기사슴을 자주 만나게 된다. 어미가 멀리 있지 않음에도 그 아기사슴은 외롭고 쓸쓸해 보이기가 십상이다. 산보하는 사람들은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커다란 플러시천 인형처럼 마냥 순하게만 보이는 동물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기쁘기도 해서, 그 아기사슴을 쓰다듬어주고 싶어 한다. 사람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면 아기사슴은 더욱 온순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만지는 것이 아기사슴에게는 치명적인 행위가 된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처음 몇 주 동안 어미사슴은 오로지 냄새를 통해서만 자기 새끼를 알아본다. 그 손길이 아무리 다정스러웠다 해도 일단 사람의 손길이 닿고 나면 아기사슴의 몸에 사람의 냄새가 배어든다. 미약하지만 오염성이 강한 그 냄새는 아기사슴의 후각적인 신분증명서를 쓸모 없게 만들어버린다. 아기사슴은 가족을 만나자 마자 버림받는 신세가 된다. 당연히 그 아기사슴은 굶어죽는 형벌에 처해진 거나 다름이 없다.

죽음을 불러오는 그런 애무를 일컬어 ‘밤비 신드롬’ 또는 ‘월트디즈니 신드롬’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며, 다른 종들을 대하는 관점도 확연하게 인간중심적이다. 인간의 가치로 동물을 평가하고, 인간이 느끼는 감정으로 애정과 혐오의 시선을 보낸다.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자연을 의인화하는 것을 종종 ‘밤비 콤플렉스’ 또는 ‘밤비 신드롬’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동물에 대한 지나친 감상주의적, 동정적 태도를 일컫는 말이라 한다.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는 감상적인 사냥 반대론자와 자연보호주의자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사용된다고 하며, 여기서 ‘밤비’란 ‘오스트리아’ 작가 ‘펠리스 잘텐’의 소설 ‘밤비’에 나오는 주인공인 아기사슴의 이름을 말한다고 한다. 원하지 않는 불행을 엉겁결에, 본의 아니게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스타벅스’는 1971년 커피를 사랑하는 세 명의 사업가로부터 시작되었다. 세 사업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꿈이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통해 표현되길 바랐다. 그를 위해 ‘테리 해클러’라는 디자이너를 고용했다. 처음의 오리지널 스케치는 전설 속에 전해오는 두 개의 꼬리를 가진 인어 ‘사이렌(siren)’이 모티브였다. 세 명의 사업가는 자신들의 커피가 굉장한 매력을 갖고 사람들을 끌어당기길 원했고, 그 바람을 마성의 목소리를 가진 사이렌의 모습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15세기 나무 판화에 새겨진 인어의 모습을 본떠 그렸던 스케치는 가슴이 너무 드러나 있었다. 딜리버리를 위한 트럭과 거리에 걸어놓기에는 지나치게 노출이 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담당 디자인 에이전시인 ‘해클러 어소시에이츠’는 그녀에게 긴 머리를 선물하고 머리카락으로 노출된 상반신을 가리도록 했다. 하지만 많은 여성단체들을 통해 계속해서 노출에 대한 항의를 받고, 점점 더 풍성해진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다.

결국 1992년에는 그녀의 상반신이 거의 대부분 가려지게 되었다. 약 20년 동안 조금씩 변화해온 인어의 모습이 지금 우리 주변에 어디든 있는 스타벅스의 인어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그 후 20년 동안 사용된 로고는 2011년 또 한 번 변화를 맞게 된다. 2011년 스타벅스는 새로운 로고를 위한 스타벅스 내에 자신만의 크리에이티브 팀을 결성한다.

브랜드 에이전시인 ‘리핀코트’와 함께 파트너쉽을 맺고, 새로운 로고 개발 프로젝트를 착수한다. 스타벅스 로고는 스케치를 펜툴로 자동으로 디지털화하는 오토 트레이스를 통해 개발되어서 스트로크가 다소 딱딱하고 거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리핀코트와 함께 한 스타벅스는 더 정교하고 부드러운 라인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1971년 ‘시애틀’에서 시작된 스타벅스는 이제 50여 국가, 1,600개가 훌쩍 넘는 커피의 대명사가 되었고 사람들은 녹색과 인어를 보면 의심의 여지 없이 스타벅스를 떠올린다. 스타벅스와 리핀코트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녹색과 인어를 제외한 모든 걸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이것이 지금의 스타벅스 로고가 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단순하고 간결한 어떤 의미들은, 사실은 많은 인고의 세월 동안 숫한 도전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면면이 이어진 노력의 결과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단면만 부각되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보다 더 중요한 진실의 눈은 속에 감추어져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이 거대한 감옥이며, 그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결국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죄인에 불과할지언정, 우리에게는 진실을 향한 노력과 꿈을 바라보는 의미가 존재하기에 오늘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진실로 바라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 뿐인 이 삶이, 세상에서 가장 올곧게 빛나면서, 더없이 아름다운 무지개 색으로 흠뻑 물들여지고, 실로 아름다운 감옥을 건설하는 찬연한 기적과 같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거리에서 만나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 서로 손 맞잡아 격려하면서, 기꺼이 마음으로부터의 인사를 나누고 싶다. “저와 함께 이 감옥에 머무르고 계신 걸 축하합니다. 그리고 저처럼 죄인이 되신 걸 축하합니다.”


" 옥 (獄) " 詩作 note 닫기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옥마당 내려앉아있던 산꿩
겨드랑이 차며 푸드덕 날아오르자
조용히 고여있는 풀내음 뭉클 피어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일출 하늘 가
높이 떠 희미한 낮달

싱그럽게 아침 햇살은
옥방 속 울연히 비쳐지는데
밤 졌건만 안즉도 처량히 남아있는
밤새 소리

청좋은 그 목소리
쌍그렇게 이슬찬 허공으로
옥문 부술 듯 흩어지면
바람타고 날아가는 하이얀 낮달
넘실넘실 춤추고

이미 결딴난 밤 그림자 군락
낮달 속 엉킨 아침 햇살 뚫으며 소리는,
옥창 너머로 떨어져가다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