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동인지 형식이 아니고 단독 출판한 詩集으로는
林森의 첫번째 공식詩集으로서
92년3월20일 '도서출판 명보'에서 인쇄하였습니다.

처음 詩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의 作品을 총 망라하여
그 중에서 61편만을 선정한 詩集이며
序詩의 제목은 '정',
내용은 총 5개의 章으로 분류하여 엮었는데 순서대로
'序曲의 章' '發端의 章' '矛盾의 章' '追求의 章' '反省의 章'입니다.

고인이 되신 작사가 '박건호님'의 권두시가 처음에 있고
'박일송님, 이외수님, 정화석님, 최성현님, 박재우님'의 추천사가
'사색의 창을 열면서'라는 프롤로그에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林森,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가호성님'이 적어주셨습니다.

林森의 초기 詩風을 짐작할 수 있는 詩集입니다.
[ 도서출판 명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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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고 없는 자리에 서리 내리면 *



시작노트

" 가고 없는 자리에 서리 내리면 " 詩作 note

필자의 첫 번 째 시집에 게재되었던 시이니 아마도 얼추 30년은 더 된 듯 하다. 가만히 보니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필자의 허망함은 그저 하나로 통한다. 예컨대 사는 게 고해라고 했던가? 어차피 고해를 헤쳐 나가는 고행이 삶의 본질인 것이니 편하고 순탄하리라고 고대하는 건 아니지만, 늘상 변함없는 삶의 모양새가 여간 고단한 게 아니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낸 걸 보면 필자의 오기도 자못 심오한 것으로 여겨져 자못 대견하다. 그리고 그런 본능적인 의미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숙명이며 업보다.

그저 오늘보다는 좀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막연하고 원천적인 기대와 꿈으로 헤쳐 나가는 고생의 바다는 그 거센 물결의 이빨을 드러내고 오늘도 우리를 위협하지만, 맥없이 죽을 수는 없는, 살아야 하는 명분과 고집을 앞세운 사람들의 저력은 그 어떤 난관이나 역경이라도 다 극복하고,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남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고 편안하고자 부단하게 무진 애를 쓰는 실상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우니, 정말 아이러니하고도 불가사의한 역사와 신화의 윤회다.

그 거룩한 숙명의 장 앞에 오늘도 우리는 엄숙한 태세로 임하고 있다. 아침의 햇살이 밝아오는 시점에서 지축을 흔드는 우리의 행보는 매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기왕지사 밝아온 새 해의 각오와 다짐도 늘 새롭게 다지며, 미래의 영광과 번영을 위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들은 위대하고 장엄하다. 찬란하고 축복받아 마땅하다. 필자가 스스로는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축원과 덕담의 멧세지를 조심스레 전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들의 오욕칠정이 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삶의 전방에 걸쳐 펼쳐지니, 누구도 함부로 단편적인 삶의 정의를 명료하게 단정짓지는 못하겠지만, 설사 예상치 않는 기대와 판단이 깔려 있어서, 미상불 어떤 의외의 얼굴이나 제목으로 쌓아가는 삶의 탑이라 할지라도, 하나로 소중하고 고귀한 걸음걸이임에는 틀림이 없다. 가슴 아픈 이별과 살을 에는 슬픔으로 점철된 삶은 물론이거니와, 비천하고 소외된 처참한 삶의 이름마저도, 우리가 쉽사리 업신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역시 동일하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사계절처럼 변화무쌍하고, 천태만상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지구촌의 온 누리에 평화와 안정의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유 또한 한 모습이다. 필자가 수십년 전이나 오늘이나 별로 나아지지도 않는 현실에 버거워 하면서도, 꿈을 잃지 않고 매진하는 건 그렇게 꿈을 꿀 수 있는 내일이 어떤 모양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며, 더불어 신비하고 가슴 떨리는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찬란한 내일의 기다림에 우리의 독자들을 모두 초대하고 싶다.

수많은 의문과 호기심을 모두의 가슴에 품어 안고, 아직은 열려지지 않은 내일의 삶에서 답을 찾기 위한 우리의 걸음의 대열에, 손 잡고 함께 나아가고 싶다. 세상의 위대한 역사들은 하나같이 질문과 탐구에서 기인했다. 모든 발명과 발견들은 인류의 끊임없는 호기심에 대한 공식과 해답을 제시하면서 실체를 드러내왔다. 만일 인류가 단편적인 만족과 안주에 머물렀다면 지금의 편의와 기적은 아마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미개하고 낙후된 상황에 고착되어진 상태로 웃고 울고 뒹굴면서, 그것이 최상인 양 여기며 재미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태양이 움직이고 있을까? 아니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했다. “공기의 저항을 무시한 상태에서 질량이 다른 두 물체를 높은 곳에서 동시에 낙하시키면 어느 것이 먼저 떨어질까?” 하는 의문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밤잠을 설쳤다. “사과는 왜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라는 궁금증에 ‘아이작 뉴턴’의 고민은 그침이 없었다. “만일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이 있다면 어떻게 보일까?” 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궁금증이었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위의 질문들이 ‘지동설’, ‘만유인력’과 ‘상대성이론’의 기초가 되어 우주의 신비를 하나씩 밝히게 되었다. “하늘은 왜 푸른색인가?” “시냇물이 왜 차가울까?” “토끼는 왜 그렇게 귀가 길까?” 어린 아이들이 끊임없이 하는 질문들. 끈질긴 질문세례에 귀찮아하며 무시하기도 하는 이 질문들은 위대한 역사의 흐름을 바꾼 다른 질문들의 작은 시작점이다.

새로운 혁신을 일으킨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을 개발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왜 이 제품을 만드는가?” 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왜?” 우리는 이 한 글자의 질문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과거에도 현재도 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세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에 어제로부터 배우고, 오늘을 위해서 살아가자.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이 내일로 연결되는 접점마다 의미가 부여되면서 인류의 역사는 앞으로도 지속되어진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태양 주위를 떠도는 여러 행성 중 초록 식물이 자라고 여러 생명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행성은 오직 지구뿐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누리고 있는 이 엄청난 행운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 지켜지는 하나의 동맹처럼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지구는 오랜 시간 동안 아무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었지만 인류가 탄생하게 되었고,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그동안 지구와의 약속된 동맹을 잘 지키면서 번성해 왔다.

하지만 문명과 함께 인류의 욕심이 점차로 커지면서 생명의 동맹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했다. 인류의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환경이 파괴되었고, 넘쳐나는 쓰레기로 인해 토양과 바다가 서서히 오염되어 버렸다. 그렇게 지구는 온난화가 심해지고, 사막화가 되어가고, 오존층이 얇아지고, 미세 먼지가 날아다닌다. 이것은 지구가 인류에게 생명의 동맹을 지키라는 경고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자연에서 받은 만큼 자연으로 돌려주는 것은 지구와 인간이 지켜온 생명의 규칙이자 하나의 동맹이다.

그동안 지속하였던 지구와의 동맹이 무너진다면 지금의 어떤 것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지금 우리가 멋대로 다루는 지구의 모든 것들은 결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지구와의 동맹을 지키는 약속의 조건으로 잠시 누리는 선물일 뿐이다. 우리의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언제까지 모든 인류의 아집과 독선, 그리고 엄살이나 어리석음을 받아줄 만큼 지구는 관대하지도 너그럽지도 않다. 분명하고 엄격한 목소리로 지구가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와 충언에 심각하게 귀 기울이고 정신을 차려야 할 때다.

무서울 것이 없는 해변의 포식자 갈매기. 그 갈매기와 마주친 바닷게들은 어찌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추운 겨울을 대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개미들. 아무리 성실한 그들이라도 개미핥기의 콧김 한 방에 추풍낙엽이다. 남극의 귀염둥이 펭귄. 이들 앞에 무시무시한 범고래가 나타나 위협한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해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고, 종족의 계승을 이어갈 수 있는 건 그들만의 노하우와 함께 뭉쳐서 대처할 수 있는 지략이 있기 때문이다.

솜뭉치 1kg과 쇳덩어리 1kg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 사실은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당연히 둘의 무게는 같다. 입으로 후 불기만 해도 날아가 버리는 솜도 뭉치고 뭉치면 쇳덩이와 같은 묵직한 무게를 가질 수 있다. ‘힘들다, 어렵다, 포기하고 싶다.’ 지금 우리 나라는 어려워진 경제 사정으로 힘겨워하는 이웃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그동안 지금보다 더 힘든 역사와 고통의 시간을 함께 함으로 잘 극복해 왔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개인의 힘만 발휘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함께 한다면 우리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 단언컨대 어떤 역경이나 고난도 뭉치고 함께 하는 힘 앞에서는 그 무서운 저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부터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모아 우리의 내일, 우리의 행복, 나아가서 모든 인류의 약속된 미래를 향해 매진한다면 제아무리 드센 파고가 밀려와도 너끈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과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내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맛깔스럽게 요리를 했더니 가족들은 그냥 아무 말 없이 먹더란다. 그런데 식구들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었더니 최고로 맛있다고 하나같이 더 달라고 하더란다. 우리네 모든 삶이, 내 기준에 맞춰 어떤 일을 해 놓고, 자신은 좋은 일 하였으니 아무 잘못이 없고, 다른 이들도 기뻐하며 환한 미소를 머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 자신의 감정, 욕구 만족, 행복도 중요하지만 조금만 뒤돌아서서 남의 눈높이에 맞춰 남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한다면 아름다운 사회,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며, 주고 받는 이 모두에게 행복과 기쁨은 배로 넘쳐서 모두가 한 마음 한 가족이 되어 넘치는 사랑의 보금자리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배려하는 마음은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그리고 한 번 더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을 조금 더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갖게 한다. 굳이 다른 사람의 기준에 까지 다다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치우침의 기울기를 낮출 수는 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사실은 바닥이라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운동경기도 사실 바닥권이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왜냐 하면 그때부터는 올라가는 일만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뭐든지 바닥권으로 뚝 떨어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제대로 된다. 그렇게 안 되려고 미봉책으로 자꾸 땜질을 하니까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오히려 부작용이 난다. 유능한 사람이라면 한 번 그렇게 떨어져 볼 필요도 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모든 면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다음에, 그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면 되는 일이다. 사람들은 바닥에 떨어지는 걸 죽기보다도 싫어한다. 안 떨어지려고 대롱대롱 매달리는데, 한 번 과감하게 떨어져 보자.

그것처럼 후련하고 시원한 게 없다. 그 때는 위만 보면 되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 오르고 나서 그 상태를 지키는 것은 참 어렵다. 수성(守成)이라고 하는 것,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 올라갈 데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한 것이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편안히 떨어져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고 서로에게 미소가 되어보자. 어제보다 조금 더 아래에서, 떨어진 자리에서, 좀 더 겸손해져서, 서로서로 대할 때 얼굴에 가득한 미소가 되고, 그 미소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그 이상이 되어 행복한 마음으로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아침에 우리는 부드러움으로 하루를 열어보자. 목소리를 조금 더 부드럽게 하여 듣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화평해지고, 그 화평한 마음들이 동료가 되고 이웃이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가 맞이하는 매일의 아침이 어느 한 날 소중하지 않은 날은 없겠지만 내가 좀 더 겸손하고 부드러움으로 아침을 맞이하여, 만나는 이에게 미소가 되고 화평함이 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행복할까?

고통은 나눌수록 가벼워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하던가? 만나는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고 그 행복을 되돌려 받는 매일 매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혹시 주위에 정직하고, 양심적이며, 친절하지만 불행하게 사는 사람, 반면에 뻔뻔스럽고 못된 사람인데도 더 잘 사는 사람이 있지는 않는가? 굳이 힘들여 찾지 않아도,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지만 불행하게 살다 가신 분이 너무 많다.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행복하게 사는 법칙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런 분들은 머릿속으로 ‘빌린 돈을 어떻게 갚을까?’ 라든가 의리나 도덕성을 잃을 때의 부끄러운 모습 등 어두운 이미지만 그리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개인적인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과는 반대로,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지만 윤택하게 잘 사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단지 자신의 미래를 밝고 풍요롭게 그릴 뿐이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복과 성공을 원한다면 도덕적인 것 위에 덧붙여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밝게 그릴 줄 아는 일이다. 모든 일은 자신이 그린 이미지대로 실현된다. 잠재의식은 옳고 그름의 판단력 없이 의식이 그리고, 그린 이미지대로 실현한다. 잠재의식은 선한 것과 이기심을 따지지 않고 무엇이든 그린 것을 실현시켜주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어찌 보면 약간은 거부감이 들고, 기분 나쁜 내용의 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필자가 자주 거론을 하고 있지만, 말은 씨가 된다 라든지,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일이라든지, 웃으면 복이 온다든지, 실은 단지 말이라 생각할지 모를 그 말들이 갖고 있는 무한의 능력을 필자는 믿는다. 그래서 늘 필자의 앞날에 대한 밝은 청사진을 그리곤 한다. 가능하면 멋지고 기쁘고도 즐거운 상상으로 말이다.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똑같은 상황임에도 사람들의 갖고 있는 성향에 따라 대처 방법이 다 다르다. 그 대처 방법에 따라 결과 또한 다르다. 좋은 확신을 갖고 문제에 맞서는 이들에게 문제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지만, 자신과 일에 대한 불신으로 맞서는 이들에게는 문제 그 자체로 불행이라 생각하기에,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나락으로 빠져들 확률이 대단히 크다. 좋은 확신,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좋은 확신이 삶의 커다란 무기요 방패가 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멋진 그림은 밑그림에서 판가름이 난다. 인생의 멋진 그림도 상상해온 삶의 밑그림에서 시작된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마음 속 상상의 세계,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자신 있게 가노라면 예상치 못한 성공이 분명 있을 것이다. 상상해온 삶은 어느덧 현실이 되고, 또 다른 미래의 상상의 세계가 다시금 새롭게 그려질 것이다. 어릴 적 밑그림 위에 습자지를 올려 놓고, 그림을 똑같이 그리기 위해 연필심에 힘을 주어, 밑그림 선을 맞추어 그대로 따라 그리던 생각이 난다. 참으로 정성스럽게 따라 그렸었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첫 작업, 스케치로부터 시작을 한다. 수를 놓을 때도 무작정 수를 놓는 것이 아니라 일단 종이에 본을 뜬다. 건물을 올릴 때의 기초공사 또한 어느 만큼 높이의 건물을 올리느냐에 따라 기초공사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진다. 밑그림이란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하는 과정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꿈을 크게 갖고, 그 꿈에 합일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 밑그림을 따라 열심히 덧그림을 그리다 보면, 아마도 그 꿈에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근사치에는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갖는 꿈, 그 선한 꿈을 위해 파이팅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단 한 번의 만남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 대화가 통하는 사람, 미래의 꿈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행복하다. 아무 말 없이 찻잔을 사이에 두고 같이 마주보고 있어도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한 사람을 만나면 행복하다. 힘겨운 삶의 넋두리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도 이렇다 저렇다 말 없이 가만히 고개 끄덕여주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하다. 호수처럼 맑고 촉촉한 물기로 젖어 있는 눈빛만 보아도 마음과 마음이 교류되어 가슴 벌렁이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하다.

언제 만나자는 약속 없이 늦은 밤이든 바쁜 시간이든 아무 때나 만나면 행복해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 괜찮은 사람을 만나려 애쓰기보다는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된다면, 그도 내게로 다가와 좋은 사람이 되어줄 것이다. 만남이란 참으로 소중하다. 누구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으니까 말이다. 그러한 인연은 지혜롭게 그 만남을 잘 이어가야 할 것이다. 혼자서만이 아닌 서로가 행복할 수 있고, 진정 좋은 사람으로 늘 기억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추스려 그와의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한다.

몸이 너무 편하거나 생활이 호사스러우면 마음은 만족하기보다 오히려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몸과 마음이 호사스러움과 쾌락을 즐기다 보면 정신과 영혼은 서서히 병들게 된다. 몸과 마음이 시련을 겪게 되면 그 시련 동안에는 괴로울 것이나, 시련이 끝나고 보면 정신과 영혼은 겪은 시련만큼 성숙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시련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빠른 길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에 의하는 것이며, 인생에 대한 깊은 자유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자성을 발견함으로서 일 것이다.

시련에 의하든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하든, 깨달음이 있으면 정신과 영혼은 건강하게 성숙할 것이고, 쾌락 속의 방종이라면 정신과 영혼은 병들고 황폐하게 될 것이다. 항상 명심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그 인연 안에서 함께 생사고락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때로는 내게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미워지고 보기 싫어지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시기하고 좋지 않은 평가를 하게 될 때가 있다.

‘해불양수(海不讓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바다는 강물을 물리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은 깨끗한 물이라고 해서 환영하고, 더러운 물이라고 해서 물리치지 않는다. 물은 그 어떤 환경을 구분하지 않고, 자기에게 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정화를 시켜나간다. 만약 우리들의 삶이 물과 같은 삶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 성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보기 싫던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져서, 그 사람을 위해 울어주고 기도 해주며 사랑을 나눠주는 나 자신의 삶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누구보다 복된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다.

벌써 1월도 하순에 접어들었다. 이제 절기상으로는 겨울의 막바지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서리, 눈, 얼음, 삭풍... 겨울을 대변하는 계절의 이름들이 머지 않아서 또 지나간 일들의 제목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새싹, 잎새, 봄바람, 들판... 우리를 들뜨게 만들 신선하고 파릇한 초록의 물결이 우리를 반기게 될 것이다. 돌고 도는 세상, 우리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언제나 변하고 움직이면서 우리를 자극한다. 그 커다란 손길로 우리를 쓰다듬는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 속에 있다. 우리는 그렇게 내일 속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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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
귀뚜리 얼어죽은 날
소복 산발 곡소리로 문상객 불러 모다
귀곡새가 울고
부엉이가 울고
먼저 간 친구가 다시 찾아주어
어줍쟎은 위로로 볼 토닥거리다

횃불잔치도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그 자리,
온통 둘러보아도 혼자 뿐이라
꺼이 꺼이 잠긴 울음으로
답답스런 목젖
밤서리 다 받아 삼키다

포기하지 못할 겨울 여행 뒤 켠으로
다시 봄이 돌아와
멋적은 악수일랑 나눌라 치면
그게 얼마나 짧은 노래였다고
우린 그의 세월 위에다
두툼한 겹솜이라도 덮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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