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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의 시집에 총 1,71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동인지 형식이 아니고 단독 출판한 詩集으로는
林森의 첫번째 공식詩集으로서
92년3월20일 '도서출판 명보'에서 인쇄하였습니다.

처음 詩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의 作品을 총 망라하여
그 중에서 61편만을 선정한 詩集이며
序詩의 제목은 '정',
내용은 총 5개의 章으로 분류하여 엮었는데 순서대로
'序曲의 章' '發端의 章' '矛盾의 章' '追求의 章' '反省의 章'입니다.

고인이 되신 작사가 '박건호님'의 권두시가 처음에 있고
'박일송님, 이외수님, 정화석님, 최성현님, 박재우님'의 추천사가
'사색의 창을 열면서'라는 프롤로그에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林森,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가호성님'이 적어주셨습니다.

林森의 초기 詩風을 짐작할 수 있는 詩集입니다.
[ 도서출판 명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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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에의 호소 *



시작노트

" 별에의 호소 " 詩作 note

오랫동안 가뭄이 절정을 이루면서 전 국민의 애간장을 바싹 태우더니, 이윽고 간절한 기다림 끝으로 충분치는 않더라도 봄비가 찾아와주었다. 물론 해갈의 수준은 아닐지라도 정겹게 방문한 하늘 손님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이름하여 ‘단비’가 전국에 촉촉이 내린 지난 주는 그야말로 축복받은 날들이었다.

봄비가 내리자마자, 목 말랐던 대지만큼이나 조급해 하던 봄꽃들이 한꺼번에 활짝 피어났다. ‘봄비 그치면 꽃비’라더니 언제 이렇듯 단단히 채비를 갖추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앞다투어 자태를 뽐내는 폼새들이 작정한 바 큰 양이다. 사실은 봄꽃은 첫사랑이다. 수줍게 다가와서는 설렘만 남기고 금세 떠나간다. 그렇지만 추억으로만 남는 첫사랑과 달리, 봄꽃은 이맘 때면 어김없이 또 찾아온다. 그렇다. 봄은 다시금 설렘이다.

봄꽃은 목하 봄바람을 타고 북상한다. 제주를 물들인 노란 유채꽃, 경남 진해를 하얗게 물들였던 벚꽃은 이미 절정을 지나 낙화로 달려가고 있다. 펑펑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꽃들은 4월 중순이면 서울까지 만개한다. 전국은 이제 꽃밭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 봄을 만끽한다. 자칫하다가는 봄을, 꽃을, 그리고 사랑을 놓쳐버릴지도 모르니까 서둘러야 하는 거다.

그런데 우쭐대는 이 봄이, 분분 화려한 봄꽃의 향연이, 귓전을 간질이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봄바람 타고 찾아온 사랑의 멧세지가, 이 모든 봄의 전령들이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아니, 반갑기는 커녕, 무정하게 흐르는 계절의 변화들이 오히려 바늘끝 되어 콕콕 가슴을 찌르는 아픔으로 쌓여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총총 다 잊고, 모조리 망각하고, 자신들의 일상에 맞춤하여 하루들을 살아가고 있느라고 까맣게 잊었던 참사, ‘세월호 침몰사건’이 일어난지 어느덧 1주기가 다가왔다. 그러고보니 아직도 바다밑에 가라앉아있는 배 안에 살붙이들을 버려둔 채, 망연자실 가슴 찢어지는 고통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 가족들이 여럿 있는 걸 우리는 벌써 깡그리 외면하고 살았나보다.

불과 1년 정도가 지났거늘, 마치 역사 속의 한 사건처럼 먼 기억 저 편으로 보내버리고, 그 대신 허겁지겁 우리가 추구한 것은 무엇인가? 온 나라가 함께 호흡하며 끝까지 같이 가줄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목소리 높이던 의기들은 모두 어디에 버려두고, 우리는 지금 무슨 낯으로 뻔뻔한 얼굴 들고 애국애족을 외치고 있는 건가?

세월호 참사 희생자·피해자 가족들이 최근 세월호 진실 규명과 선체 인양, 시행령 폐기, 희생자 배·보상 절차 중단 등을 촉구하며 삭발식을 진행했다. 이들은 “꽃이 피면 꽃을 지우고 싶고 봄비가 내리면 하늘을 잠그고 싶은 봄이 불쑥 찾아들더니 4월이 되고야 말았다.”면서 “이 4월은 두 배로 잔인하다.”고 말했다.

이어 “미진하나마 제정된 특별법이 이렇게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할 줄이야, 정부가 대놓고 돈을 들이댈 줄이야 설마 몰랐다.”며 “실종자를 가족 품에 안겨주겠다는 약속조차 이렇게 방치될 줄 몰랐다.”고도 했다. 이들은 “인양할 수 있다고 정부도 확인했고, 해야 한다고 국민들도 말하는데 왜 이제 와서는 새삼 인양한다고 약속을 하지 않나? 실종자를 가족 품에 돌려받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며, 인양의 시점을 최대한 앞당기는 것은 정부의 책무다.”라며 조속한 선체 인양을 촉구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상복을 입고 희생자들의 영정 사진을 든 채 안산 정부합동분양소에서 도보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은 서울 광화문 광장까지 이틀간 진행되었다. 이들은 “침몰하는 대한민국에서도 진심은 다 가라앉지 않았다.”며 “우리의 행진은 진심들이 모두 인양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라고 했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에서 바다로 뻗어나간 방파제의 길이는 237걸음이다. 그 끝에 ‘기다림의 등대’라고 불리는 붉은색 원통형 구조물이 솟아 있다.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304명 중 295번째 실종자가 10월 29일 수습됐고, 수색 작업은 11월 11일 중단됐다. 세월호가 있는 바다는 거기서 배를 타고 1시간 반을 가야 한다. 더는 걸어갈 수 없기에 이 방파제 끝자락은 지난 1년간 추모의 공간으로 역할을 했다.

다시 찾은 팽목항에는 고통과 좌절, 분노와 냉소를 숨기거나 때로는 드러낸 현수막이 폭 7m 방파제 좌우에 즐비했다. 난간 줄에는 노란 리본들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대부분 빛이 바랬지만 매단 지 얼마 안 된 것도 눈에 띈다. 같은 줄에 매달린 작은 쇠종들은 바람에 맞춰 뎅그렁소리를 냈다.

왼쪽 난간 중간 쯤에 어른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 타일들이 네 줄로 길게 붙어 있었다. 타일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기리는 글귀와 그림이 새겨졌다. 문인들과 희생자 가족 등이 ‘천 개의 타일로 만드는 세월호, 기억의 벽’이란 추모 작품을 제작 중이었다. 한가운데에는 희생자 이름을 모두 새긴 석조 작품이 16일에 맞춰 들어올 예정이란다.

팽목항에서 희생자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희생자의 어머니를 만났다. “대형 TV에서 쉴 새 없이 반복되어 흘러나오는 영상 속 아이들 눈을 쳐다보면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은데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버렸네요. 그래도 우리 아들은 놀러간 게 아니고 인생 수업, 연장 수업하러 간 거예요. 그냥 죽은 건 너무 불쌍하잖아요. 아이들로 인해서 나라가 바뀌고 동생들, 후손들이 더 편히 사는 세상이 되면 먼저 떠난 마음도 편하지 않을까요?”

팽목항의 하루는 하릴없이 간다. “6시에 일어나서 씻고 분향소에 앉아 단상을 꾸밀 노란 나비와 꽃 브로치를 만들어요. 금방 해가 저무는데 그때 시든 국화를 바다로 띄워보내는 게 일이지요.”라고 했다. “차라리 여기 애들 앞에 있는 게 마음이 제일 편해요. 영정사진까지 2m도 안 돼서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으니까. 안 오던 잠도 잘 오더라고요. 처음엔 아예 여기 분향소 영정 앞에서 며칠을 잤어요. 더없이 단 잠을요.”

이제 세 번 계절이 바뀌고 다시 봄이 왔다. 아이들은 지난 해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학교 벚꽃나무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어머니는 다시 피어나는 꽃을 보면 가슴이 저릿하다고 했다. 지난 1년은 시간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부분을 팽목항에서 지냈고, 이따금 부름이 있으면 서울에 올라갔다. 광화문 광장에도 가고, 국회 앞에도 갔지만 어디서나 ‘기다림’이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4월 그 봄에 마냥 갇혀 있는 부모들 곁을 시간이 스쳐지나간 흔적은 고스란히 몸에 남았다. 건강을 해쳐서 잠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몸이 달아서 그냥 누워있을 수만도 없어서 부랴부랴 돌아왔단다.

다시 아프면 안 된다는 결심이 숟가락을 드는 힘이다. 요즘은 쌀밥에 김치만 있으면 식사를 곧잘 한다. 어머니는 “팽목항을 오가는 가족들 건강이 하나같이 안 좋다.”며 “그래도 희생자의 가족은 차라리 낫다. 실종 상태에서 아직 못 돌아온 다윤이의 엄마는 쓰러지기를 반복하면서도 딸 나오기 전까진 병원에 못 간다고 버틴다.”고 전했다.

1년 사이 팽목항에는 희생자 가족들이 기거하면서 마을 아닌 마을이 생겼다. 어머니는 ‘살림살이’가 늘어날 때마다 문득 ‘언제까지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떤 교육감이 ‘진실 규명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사셔야 한다.’고 했는데 장수하면서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인지 몰랐다.”며 “나중에야 그게 얼마나 절망적인 위로였는지 알았다.”고 말했다. 어떤 말로도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는 없는 빈 울림소리일테고, 필자도 결국은 돌아와야 하는 발길, 떠나오는 뒷통수가 서늘하여 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방문이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부탁하고 건의를 해야 하는 건가? 어디를 바라보고 호소를 해야 하는 건가? 어떤 방법으로 저들의 상처입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메워줘야 하는 건가? 도무지 어떤 답도 공식도 찾을 길이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

하늘을 향해 종주먹을 들이대며 항의한다고 해서, 별을 보고 절규하며 호소를 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슬픔과 고통이 해소될 리는 없겠지만 막연하나마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위로가 된다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고 싶다. 어떤 길이 진실의 길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방법이 합리적이고 정당한 결론으로 이르는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사회적 반대급부가 생겨날지, 또 다른 어떤 희생이나 책임이 뒤따르게 될지, 금전적으로 부담이 가중되어 어떠한 정책의 혼선이 생겨나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만 기원할 뿐이다. 제발 우리에게,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더 이상의 아픔은 생겨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빌 뿐이다.

예컨대 다시는 세월호의 참사같이 개인의 욕심이나 실수에 기인한, 다분히 인재에 의한 대형사건이나 사고는 우리 주변에서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우리는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많은 상황들이 있다. 이 일련의 상황들이 이어져서 사건을 만들기도 하고 인연이나 관계형성의 밑받침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상황들의 연결이 결국 희노애락으로 빚어지는 삶의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은 때로는 단순하게 혼자만의 언행이나 생각으로 시작과 맺음이 귀결되도록 일목요연한 상태로 요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나 접촉 등을 통해 공동체의 생활에서 그 진위와 성패가 드러나기도 한다.

개인적인 성향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론으로 귀결되어 전체에게 보여지기도 하고, 자신의 속내와는 정 반대로 표출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게 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러한 제반 상황들은 때에 따라서, 또는 여건에 따라서 다르게 보여지기 때문에, 언제나 긴장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하는 원칙적인 생활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강제적인 법규나 도덕적인 제약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진심과 바람직한 실천이 결국 개인의 삶의 결과는 물론, 주위의 모든 이웃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인으로 커나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가 하원의원 시절의 일이다. 맥킨리는 어느 날 의회 사무실로 향하기 위해 전차에 올랐다. 몇 정거장이 지난 후 그는 병색이 짙은 한 여성이 전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았다. 여인은 한 좌석 앞에 걸어가 섰는데, 그 좌석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의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의원은 비틀거리는 여성이 자기 앞에 서 있는데도 자리를 양보하기는 커녕 신문을 보는 척하며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닌가? 결국 이를 보다 못한 맥킨리가 좀 떨어져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여성을 불러서 자리를 양보했다.

몇 년 후, 맥킨리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집무실에 앉아 있는데 신임 대사 후보 리스트를 비서가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그 리스트의 맨 위에는 예전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던 동료 의원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맥킨리는 단호하게 동료 의원을 리스트에서 빼버렸다. 하지만 동료 의원은 왜 자신이 신임 대사 자리에 오르지 못했는지 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평소의 삶의 태도가 큰 기회를 좌우할 수 있다.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내 인생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예절 바르고, 많은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적이 되지 않는다.”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생각해보면 삶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레시피이다. 요리를 할 때는 여러 재료를 한 번에 하나씩, 순서대로 넣어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한 가지씩 해나가야 한다. “아, 이번 일을 잘 처리해야 하는데...” “이거 했다가 망하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냥 자연스러운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하나, 둘 씩 새로운 경험을 더해 나아가면 된다.

때로는 내 의도와 관계 없이 삶이 펼쳐지기 마련인데 이럴 때일수록 믿음을 버려서는 안된다. 지금 당장은 다음 번에 넣을 재료 이상은 생각할 수 없다 하더라도, 여전히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가는 중이니까 중간에 손을 놓으면 안 된다. 간도 봐야 한다. 너무 싱거우면 소금도 더 넣어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필요한 것이 차례로 나타날 것이다. 내게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내게 꼭 맞는 재료를 구하게 되고, 그러다 훌륭한 레시피를 완성하게 되면서 깜짝 놀랄만한 요리가 탄생하게 된다. 이처럼 깜짝 놀랄만한 인생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하고 성공한 인생의 레시피에 가장 중요한 재료 중의 하나가 사랑이다. 우리에게 사랑은 햇빛처럼, 산소처럼, 결코 없어서는 안될 영원한 삶의 근본이며 원천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힘들고 버거울 때가 있게 마련인 것이 인지상정이다.

삶이 힘들어 지칠 때면 필자는 얼른 필자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러면 새 힘이 생기고 삶의 짐이 가벼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이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미움이 일어날 때면 필자는 얼른 필자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러면 미움이 사라지고 다시 사람을 신뢰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이다.

슬픔과 아픔이 필자를 휩쌀 때면 필자는 얼른 필자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러면 슬픔이 옅어지고 아픔이 치료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이다.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껴질 때면 필자는 얼른 필자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러면 외로움과 쓸쓸함이 썰물처럼 밀려가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정다운 모습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이다.

좌절하고 낙심될 때면 필자는 얼른 필자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러면 좌절의 늪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소망의 언덕에 서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가장 큰 힘이다. 일이 잘되지 않고 실수하여 야단 맞을 때면 필자는 얼른 필자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러면 필자의 부족함이 깨우쳐지고 겸손한 자세로 새로운 다짐과 노력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힘이다.

그 때, 팽목항에서 그 어머니는 필자에게 물었었다. “희망을 가지고 싶어도 희망의 꼬투리가 잡히지 않아요. 도대체 내가 왜 희망을 가져야 하나요? 아니 내가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나요?”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에서야 답을 드리려 한다. 당시에 바로 답을 줄 수 없었던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당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마침 독일의 대표 시인인 ‘실러’가 필자의 답답한 마음을 사진처럼 그려내고 있다. 나지막히 읊조려 본다.
“산다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다.
현명하다는 것은 아름답게 꿈을 꾸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것이요, 꿈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희망이 있다는 것은 이상을 갖는다는 것이요, 비전을 지닌다는 것이다.
비전을 지닌다는 것은 인생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꿈을 상실한 사람은 새가 두 날개를 잃은 것과 같다.

비록 힘없고 하찮은 존재라 하더라도 꿈을 가질 때 얼굴은 밝아지고 생동감이 흐르며,
눈에는 광채가 생기고 발걸음은 활기를 띠고 태도는 씩씩해지는 것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꿈꾸는 자가 인생을 멋있게 사는 사람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 참 인생을 알고,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다.
꿈이 있는 사람이 인생을 멋있게 살고, 아름다운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는 것이다.”

이제사 조심스레 그 어머니에게 되묻는다. “이젠 어렴풋이 아시겠나요? 우리가 희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라오. 별을 향한, 별에의 호소처럼 영원히 빛을 잃지 않는 희망이기 때문이라오. 영원한 사랑의 이름인 희망이기 때문이라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삶인 그 희망이기 때문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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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로부터 기어든 어둠
소리없이 깃 버려 밤을 켜다

별빛짙어 고요론 밤이면
그저 가셔지지 않는 사랑과 고독과 슬픔이
별들 사이에선 더욱 몸부림치다

별아 !
너는 밀궁의 공주를 애수함이더냐
무상을 참고 견딘 태양의 미망인이더냐
차라리 감방에 갇히운 종신죄인인 양
백천년이 지나도 오히려 너의 눈동자는
오늘도 여전스레 슬프고 차구나

말없이 그냥 영원히 저무는 미이라처럼
아주 빛도 꺼버리고
너의 밤을 지키려무나,
오 -
가엾은 한 울의 죄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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