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동인지 형식이 아니고 단독 출판한 詩集으로는
林森의 첫번째 공식詩集으로서
92년3월20일 '도서출판 명보'에서 인쇄하였습니다.

처음 詩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의 作品을 총 망라하여
그 중에서 61편만을 선정한 詩集이며
序詩의 제목은 '정',
내용은 총 5개의 章으로 분류하여 엮었는데 순서대로
'序曲의 章' '發端의 章' '矛盾의 章' '追求의 章' '反省의 章'입니다.

고인이 되신 작사가 '박건호님'의 권두시가 처음에 있고
'박일송님, 이외수님, 정화석님, 최성현님, 박재우님'의 추천사가
'사색의 창을 열면서'라는 프롤로그에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林森,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가호성님'이 적어주셨습니다.

林森의 초기 詩風을 짐작할 수 있는 詩集입니다.
[ 도서출판 명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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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우리는 *



시작노트

" 너는, 우리는 " 詩作 note

참 오래 전에 지은 시이다. 물경 40년은 됨직하다. 우연히 옛 시들을 정리도 할 겸 두런두런 꺼내보다가 우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투박하고 퍽이나 덜 세련된 시어들이 마치 경쟁하듯 죽 늘어선 듯 하여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런 시어들로 시를 지었었구나. 당시에는 시랍시고 깜냥껏 썼겠지만 지금 돌이키니 얼굴이 슬금 붉어지누나.

그렇게 건성으로 뒷부분까지 훑어보다가, 그냥 부담없이 그러다가 이 구절에서 깜짝 놀랐다. ‘행복하고 즐거운 날 / 많이 많이 웃어 두었다가 / 괴로울 때, / 외로울 때, / 살기가 차마 서러워질 때 / 조금씩 그 미소를 꺼내어 / 되새김하며....’

아! 이거였다. 평생 찾아 헤맨 화두가 바로 그 속에 있었다. 진즉에 이렇게 살면 되었던 거다. 이미 어린 그 시절에 필자는 대견하게도 자그마한 해답을 하나 쯤은 장만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왜 잊고 살아왔을까? 어째서 이 진리를 머리 속에 떠올렸으면서도 마음으로 외면하면서, 하물며 평생을 헤매며 살아온 것인가?

세상 탓을 하며, 남의 탓을 하며, 시절 탓을 하며, 엉뚱한 밖의 여건이나 환경을 억지춘향식으로 끄집어내어 그럴듯한 이유나 핑계를 대면서, 이토록 멍청하게 살아온 한 평생이거늘, 해답은 커녕 그 비슷한 공식조차 발견치 못하여 안달하던 긴 삶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회전하면서 새삼 서글퍼진다.

결코 돌이킬 수도, 다시 살아볼 수도 없는 야속한 일생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짐짓 한숨짓게 한다. 그렇다 한들 뉘라 하여 필자의 애석함에 위로나 권면을 얹어줄 수 있겠는가? 어차피 그네들도 각자 나름의 버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세상 살아진 것이거늘.

그런즉 이제부터라도 혹여 행복한 날 있거들랑 후회 없이 많은 웃음 웃으리라. 그리곤 정녕 살기가 버거워 넘어지고 싶을 적엔 그 미소를 꺼내어 되새김하리라. 그렇게 스스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남은 삶을 살아가리라.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탓하지 않고, 그냥 순리대로 고른 숨 쉬리라. 남은 삶의 페이지는 허우적대지 않고 그리 메꾸리라. 주먹 옹송그려 다짐하는 아침이다.

실상 쇠털같이 많은 날일지라도 나 살기 바빠 남의 일 따위는 별로 신경쓰지 못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무관심과 이기적인 삶의 행태를 뭉뚱그려 인지상정이라고, 체념어린 단어로 결론짓고 말았을까? 조금이라도 남의 일에 신경을 쓰다보면 그만큼 나의 일에 소홀해질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흔히들 진리라 여기며, 아등바등 살고 있는 각박한 오늘을 마치 자연스러운 삶의 진리로 여길까?

대충 그렇고 그러다보니, 남에게 격려와 칭찬의 말 한 마디 하기가 너무나도 인색한 것이 요즘의 실상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는 간혹 격려의 말 한 마디가 금보다 귀할 때가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는 게 힘이 들 때는 누구를 막론하고 격려의 말이 필요하다.

서울역 앞을 한 상인이 걷고 있었다. 마침 거리 한 켠에서 연필을 내놓고 구걸하는 거지를 보고는 동전을 던져주고 지나갔다. 그런데 길을 가다 갑자기 연필을 받지 않은 게 생각나 거지에게 가 연필을 받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당신과 같은 상인이라 한 말씀 드립니다. 어떤 물건이든 팔려면 적당한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몇 년이 지난 후 파티 석상에서 점잖은 신사 한 명이 그 상인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선생님은 아마 저를 몰라보실 테지만 저는 선생님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최후의 자신감을 심어주신 분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는 줄곧 연필을 옆에 두고는 일방적으로 남에게 구걸하는 거지였습니다. 적어도 선생님께서 저를 ‘상인’이라 불러주셨던 순간까지 말입니다.”

질책과 꾸지람보다는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힘이 들 때에 사랑이 담긴 칭찬과 격려의 말이 절실히 필요한 오늘의 현실이다. 비단 한정된 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세파를 견디면서, 간간이 우리는 힘없이 무너지는 이웃들을 대한다. 무기력한 현실을 자인하면서 우리가 처절하도록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죄수 신창원이 말했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 번만 쓸어주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엘 와. 빨리 꺼져.’ 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 속에 악마가 생겼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그렇게 말한 선생님도 생각을 좀 해야 한다. 아이의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아이의 자존감을 반 아이들 앞에서 헤집어 상처를 주는 선생님 또한 선생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필자의 초등학교 때 한 선생님은 남자건 여자건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앞으로 불러서 벌거벗겨 모든 아이들에게 창피를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걸렸던 여자아이가 지금은 그 때 받은 상처를 회복하고 잘 살아가고 있을까? 중학교 때도 비슷한 선생님을 만났다. 삽자루나 혁대, 슬리퍼 등으로 사정없이 아이들을 때리는 선생님이었다.

필자가 공부를 좀 하니까 신설고등학교 장학생으로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필자가 가지 않겠다고 하니 다른 아이들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 “너희 집 가정형편이나 수준이 완전 바닥이던데, 고등학교 갈 돈이나 있어?” 아마도 필자는 그때부터 그 선생님 뿐 아니라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별로 존경하지 않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선생님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아이들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며, 20년 후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 지도 교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선생님도 존경할 수가 없었다. 과연 스승은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넣어주는 사람이어야 할까?

가르침의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무겁고 힘겨운 규칙과 규범만을 가르치고, 자신들의 변화나 발전을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우를 범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즉, 무거운 도리를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그것들을 잘 지키고 있다는, 실체가 불분명한 자부심을 갖는 선생님들이 의외로 많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학생들의 머리를 떨어뜨리게 하고, 자신들의 머리는 쳐드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왕왕 선생님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경우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스승이라면 과연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걸까? 지식의 전달이나 가르침에 앞서 먼저 자신이 학생들을 위해, 사랑이 무엇인가를 솔선수범과 희생으로 보여주고, 그것을 따라 하라고 하는 선도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럼 솔선수범과 희생으로 학생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나도 선생님처럼 세상을 밝히는 사람이 된다면, 선생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구나!’라는 ‘자존감’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훗날 범죄자가 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이미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즉 자아 존중감을 상실하게 되어, 성장하여 살인이나 다른 강력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처럼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자아존중감이 어렸을 때부터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역시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동시에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금 다른 차원이지만 종교와 범죄의 상관관계도 범죄 발생의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걸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통계적으로도 드러나고 있는데, 종교별 형사범죄 현황 조사에서 보면 종교가 없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기타종교가 15명당 1명이 범죄인이고, 원불교가 30명당 1명, 불교가 31명당 1명, 개신교가 39명당 1명, 천주교가 105명당 1명꼴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 통계일까? 바로 천주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아존중감이 월등히 다른 종교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물론 직접적으로 천주교인이라고 하여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자아존중에 관한 좋은 가르침이 교리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자주 접하게 되고, 더불어서 자신의 행동을 한 번이라도 더 돌아보게 되므로, 반성과 절제가 수반되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라는 범죄 분석학자의 설명이다.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삶에서 스스로 좋은 스승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배움의 자리가 아니라 가르침의 자리에서, 진리와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 내 이웃들의 자존감을 살려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며 진정으로 그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어지럽고 혼탁한 어둠에 물든 이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스승들이다.
내가 인정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고 잘 태어났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되자. 자존감을 세워주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머리를 들어 하늘로 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변에는 각종 애완동물이나 반려견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마치 가족의 한 구성원처럼 그 자격이나 신분도 급속도로 상승되어졌다. 거기에 파생된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각 가정의 계정에 자리매김 되어졌다. 마치 사람을 대하듯 정겹고 다감하게 그들을 선뜻 가까운 옆자리로 들여놓았다. 그렇게 세상이 완전히 변했다.

자연스럽게 그에 따른 각종 보도나 기사거리도 넘쳐난다. 때론 기쁘고, 혹은 슬프게, 많은 사연과 이야깃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그들의 영역을 점차로 확고하게 굳혀가고 있는 모양이 이제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울러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옛말이 사실이 되어지는 세상이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고가인 애완견부터, 그들의 먹거리나 환경, 의료, 미용, 여행 할 것 없이 모든 분야에서 특별 대접을 받는 부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무릇 아주 고급스러운 ‘개판’이다.

필자도 세 마리의 ‘미니 말티즈’와 실내에서 동거하다보니 녀석들이 마치 사람들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관련 기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게도 되고, 이따금 금수만도 못한 사람들의 패륜적 행동이 보도될 때면 마음껏 분개하기도 한다. 또한 연관된 미담이나 신기한 관련 기사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젊었을 적에 멀리서라도 개가 보이면 잔돌을 집어던지면서 쫓아 보내던 기억을 회상하면, 어쩔 수 없는 격세지감에 실소를 머금기도 한다. 나이를 먹기는 먹었는가 보다. 그저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신에게 정을 주는 게 반갑고 기꺼운 걸 보면 말이다.

전남 순천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자식 없이 한 마리의 개를 자식 삼아 키우며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질 않았다. 이 두 할아버지 할머니는 자식이 없으므로 그 개를 정성껏 키웠는데, 키운지 3년 째 되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그 집의 형편을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뤄주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음 날, 그 집의 개가 마을의 한 집으로 자기 밥그릇을 물고선 들어섰는데, 그 개가 밥그릇을 마당 한 가운데 놓더니 멀찌감치 뒤로 떨어져, 엎드려서 가만히 밥그릇만 쳐다보고 있더란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가 보다 하고 그 아주머니가 밥을 퍼주었는데, 그 개가 밥이 담긴 밥그릇을 물고선 자기 집으로 가더란다.

아주머니는 자기 집으로 갖고 가서 밥을 먹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혼자되신 맹인 할머니 생각이 나자 걱정이 되어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할머니의 집안을 계속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할머니가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데, 개가 아침에 자기가 준 밥이 담긴 밥그릇을, 안 먹은 채로 마루에 올려놓고선, 눈이 안 보이는 할머니의 소맷자락을 물고 손을 밥에 다가가게 해서, 밥을 먹으라는 시늉을 계속하고 있는 거였다.

결국 할머니는 개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밥그릇에 손을 가져가 그 밥의 절반을 먹고선, 나머진 개에게 밀어줬는데 그때서야 개가 자기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마침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이 광경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소문이 마을 전체에 퍼졌다.

사람들은 그 개를 아는지라 깨끗한 새 그릇을 준비해서 밥과 반찬을 고루 넣어서 주었는데,
역시 그 개는 그것을 물고 자기 집으로 가서 할머니에게 주고, 할머니가 남은 것을 밀어주면 그때서야 자기가 먹었다. 이 일이 계속되니까 마을 사람들이 ‘사람보다 나은 개’ 라며, 군청에 건의해서 ‘효자상’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군청에선 당황하며, 사람이 아니어서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개만도 못한 사람’이 많이 사는 이 세상에 ‘사람보다 나은 개’가 있다는 게 새삼 마음이 찡하게 다가온다. 최근에는 죽어가는 노인이 외롭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호스피스 개의 영상이 화제다. 미국 ‘USA투데이’ 등 외신들은 호스피스 개 ‘제이제이’가 죽음을 앞둔 노인을 위로하는 영상과 사연을 소개했다. 영상 속에서 제이제이는 노인이 평소 좋아했다던 시를 함께 들으면서 노인의 손을 다정하게 핥아준다.

호스피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평소 그 노인을 찾아오는 방문객은 거의 없었으며, 영상 속 노인은 촬영 다음날 사망했다. 현재 제이제이는 ‘오레곤 주 알바니’에 위치한 ‘사마리탄 에버그린 호스피스 하우스(Samaritan Evergreen Hospice House)’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정식 직원으로 근무한다.

현재 페이스북에 5만 7000명이 넘는 팬들을 가진 제이제이는 업무가 끝나면, 같은 호스피스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트레이시 칼혼’의 사랑스러운 반려견으로 돌아간다. 제이제이의 영상을 본 이들은 “정말 좋은 개다”, “거의 인간에 가까운 개인 것 같다”, “영상을 보고 눈물이 났다”, “제이제이는 사랑스러운 개다” 등의 댓글을 남기며 노인들의 친구인 제이제이를 응원했다.

그런데 실은 마냥 부러워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우리는 모름지기 사람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스럽게 살다가 사람답게 죽어야 하는 사람이다. 반려견이나 애완견의 이야기에 감동이나 받고, 게다가 흉내도 못낸다면, 그게 어찌 사람의 삶일 수가 있겠는가? 소위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제 가일층 다짐을 해야 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자 우리는 애써야 한다. 그렇기에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솔직함과, 아는 것을 애써 난 척 하지 않고도 자신의 지식을 나눌 수 있는 겸손함과 지혜가 있다면 좋겠다. 돋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비치는 거울이라면 좋겠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남에게 있는 소중한 것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선한 눈을 가지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화를 내거나 과장해 보이지 않는 온유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영특함으로 자신의 유익을 헤아려 손해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마음보다,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남의 행복을 기뻐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라면 좋겠다.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잔 꾀를 부리지 않으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깊은 배려가 있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잠깐 동안의 억울함과 쓰라림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좋겠다. 꾸며진 미소와 외모보다는 진실된 마음과 생각으로 자신을 정갈하게 다듬을 줄 아는 지혜를 쌓으며, 가진 것이 적어도 나눠주는 기쁨을 맛보면서 행복해 할 줄 아는 소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좋겠다.

그렇게 정녕 사람에 어울리는, 사람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겠다. 여름의 막바지에서, 가고 오는 계절의 양 끝을 움켜쥐고 바르작거리는 우리의 일상이 더욱 더 대범하고 웅장하며,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진솔하며 사랑겨운 향기로 넘쳐나는 일상이 되어진다면 참 좋겠다.

필자에게 남겨진 삶의 두께가 얼만큼일지 모르지만, 살아온 날들보다는 더욱 두꺼운 진실의 분량을 만들어가는 앞으로의 날들이 되어진다면 더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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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등 불빛 아래 꿈을 먹으며 우리
슬픈 사연을 잊어버리자

저 도도한 강물에 반사되는
거리의 네온,
우리의 슬픈 노래가 사랑을
날려 보낼지라도 -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아픈 눈물에
찬 밤바람 무심히
부딪쳐 내리고

부푼 내일의 이야기가
어두운 골목마다에
쓰레기로 지체될지언정,

우린
새로이 쌓아 올리는
자그마한 미소의 연습으로
슬픈 마음을 다림질 해야 한다

행복하고 즐거운 날
많이 많이 웃어 두었다가
괴로울 때,
외로울 때,
살기가 차마 서러워질 때

조금씩 그 미소를 꺼내어
되새김 하며 우린
아름답게 인생 살아가는
맛깔스런 너의 꿈이야기로
긴 철도를 놓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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