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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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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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떠난 뒤 *



시작노트

" 다 떠난 뒤 " 詩作 note

매일같이 이어지는 오늘이라는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시작되는 오늘이라는 날, 좋고 싫고를 따지지 못하게 그냥 열리는 오늘이라는 이 하루, 그 오늘이 오늘도 또 밝아왔다. 불과 내일이 되면 어제로 흘러가버리고 말 처지에, 구태여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안달하는 모양새가 참 험상궂다.

그렇다면 오늘은 그저 오늘로 인정해주자. 까짓 뭐 대순가? 어차피 하룻밤 자고나면 이름 잃어버리고, 그 잃어버린 자체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바로 다른 하루를 오늘이라고 우길 주제인 걸. 다 떠난 뒤에 조용히 남아서 읊조려보자. ‘오늘’은 정말 소중한 날이었다고.

배롱나무는 흔히 ‘백일홍(百日紅)나무’라고 불린다. 순간적으로 만개하는 복숭아꽃이나 살구꽃과는 달리 분홍색 꽃망울을 100일 동안 터뜨린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품종으로 ‘자미화(紫薇花)’로도 일컬어진다. 배롱나무 개화는 보통 7월에 시작해 9월까지 이어진다. 이 기간에 수많은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그중 절정은 8월 중순 전후로, 이 시기에는 나무가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화려한 색의 향연을 펼친다.

지난 주말에 찾은 ‘치악산 황골 입석대’언저리는 ‘배롱나무꽃’으로 유명한 능선이다. 올라가는 초입에 느티나무와 소나무도 듬성 있지만, 정자와 진입로 주위에 배롱나무가 유독 많다. 그래서 이 시기에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하고 싶은 등산객들의 발걸음이 유난스레 분주하게 이어지는 곳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필자도 언제나 이맘 때면 찾아가서, 변치 않고 피어주는 꽃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오롯이 다지곤 한다. 사실 꽃들이야 우리네에게 감사 인사 따위 받으려고 피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착한 마음, 순수한 심상을 늘상 새롭게 북돋아주는 꽃들의 매력을 다른 어떤 만물에서 대신 찾아낼 수 있겠는가?

‘고맙다’는 말, 또는 ‘감사하다’는 말. 우리가 살면서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보니 어렵지 않은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주는 입에 올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우리의 이웃들이, 자연이, 삶 자체가 모두 고맙고 감사한 인연의 연장선 상에 위치하는 신의 섭리인 것을, 우리는 애써서 외면하려고 한다.

‘고맙다’라는 말은 ‘남의 은혜나 신세를 입어 마음이 즐겁고 흐뭇하다’ 또는 ‘남이 베풀어 준 신세나 은혜에 대해 즐겁고 흐뭇하다’ 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다. ‘고마움’이라는 명사형을 만들어 쓸 수는 있으나, 이런 마음을 나타내는 명사는 없다. ‘고맙다’의 어근 ‘고마’는 원래 ‘신(神), 존경(尊敬)’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고맙다’는 ‘존귀하다, 존경하다’ 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신과 같이 거룩하고 존귀하다, 신을 대하듯 존경하다’ 라는 뜻을 지닌 말이 ‘고맙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은혜를 베푼 상대방을 참으로 “신과 같이 거룩하고 존귀하게 생각합니다.” 라는 뜻이 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칭송의 말이 아닌가? “고맙습니다.”를 애용한다면,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 서로 거룩한 신처럼 예우하는 사회가 금방이라도 도래할 것 같은 기분좋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감사’는 일본식 한자어다. 사전을 옮겨 보겠다. ‘かんしゃ 感謝’ ‘かん-しゃ[感謝] 감사, 복합어, ~さい[∼祭] 추수 감사절’ 이렇게 나와있다. 일본 발음으로는 ‘간샤’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여와 우리말처럼 쓰이고 있는 말이 ‘감사’인 것이다. ‘감사’는 명사이고, ‘감사하다’는 동사이다. 물론 ‘감사’, ‘감사합니다’는 일본어에서 파생되었지만, 하도 익숙한 단어라서 이 말과 이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요즈음 ‘감사’와의 결별론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감사합니다.”를 “고맙습니다.”로 대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만, ‘감사’를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감사’는 ‘고마움’으로 바꾸어 쓸 수는 있지만, ‘감사장, 감사패, 감사절’ 등등의 단어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안이 아직은 없다.

‘감사의 마음’이라는 뜻을 가진 ‘사의 謝意しゃい’도 일본에서 쓰이는 한자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상당수가 일본식 단어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된 ‘우리말 사랑’ 운동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기존의 단어를 버리는 일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단어를 발굴하거나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거나 하는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될 수 있으면 서로 신처럼 떠받드는 말인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쓰도록 노력해 보아야겠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또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참으로(대단히)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을 좀더 자주, 스스럼 없이 사용하는 우리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찌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는 데에 꼭 필요한 도움과 상호관계를 형성하는, 소중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다. 단지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만 삶에 있어서 중요한 영역이나 포지션을 차지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목소리 크고 말이 많은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쉽사리 형상이 들어나기 마련이다.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성이나 특성은 무시한 채로, 우선은 남들보다 먼저 본인의 입장이나 처지를 강변하려 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쟎게 발견하곤 한다. 때로는 그로 인하여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필요 이상의 오해나 편견에 사로잡히게도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참된 미덕은 오히려 침묵에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강렬하고 진정한 의사 표현의 방법도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길고 장황한 사설이 설득력이 있는 게 아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진심을 담은 눈짓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충분한 생각을 전달할 수 있고, 아주 좋은 결과를 도출해낼 수도 있다. “침묵이 금이다.” 라는 옛말은 틀리지 않는다.

장황하게 떠벌리지 않는 침묵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고사가 있다. 중국 ‘위(魏)나라’의 왕 ‘문후(文侯)’가 전설적인 명의 ‘편작(扁鵲)’에게 물었다. “그대 형제들은 모두 의술에 정통하다 들었는데 누구의 의술이 가장 뛰어난가?” 편작이 솔직하게 답했다. “맏형이 으뜸이고, 둘째형이 그 다음이며, 제가 가장 부족합니다.”

그러자 문왕이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네의 명성이 가장 높은 것인가?”
편작이 말했다. “맏형은 모든 병을 미리 예방하며, 발병의 근원을 제거해 버립니다. 환자가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표정과 음색으로 이미 그 환자에게 닥쳐올 큰 병을 알고 미리 치료합니다. 그러므로 환자는 맏형이 자신의 큰 병을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최고의 진단과 처방으로 고통도 없이 가장 수월하게 환자의 목숨을 구해주지만, 명의로 세상에 이름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 둘째 형은 병이 나타나는 초기에 치료합니다. 아직 병이 깊지 않은 단계에서 치료하므로, 그대로 두었으면 목숨을 앗아갈 큰 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다들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둘째 형이 대수롭지 않은 병을 다스렸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둘째 형도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 저는 병세가 아주 위중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병을 치료합니다. 병세가 심각하므로 맥을 짚어 보고 침을 놓고 독한 약을 쓰고 피를 뽑아내며, 큰 수술을 하는 것을 다들 지켜보게 됩니다. 환자들은 치료 행위를 직접 보았으므로 제가 자신들의 큰 병을 고쳐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심각한 병을 자주 고치다 보니 저의 의술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은 자기 PR시대라고 할 정도로 모두 다 시끄럽게 큰 소리 내기를 좋아 하는 세상이지만 진실로 속이 꽉 찬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하지 않는다. 짖는 개는 물지 않고 물려는 개는 짖지 않듯 대인은 허세를 부리지 않고, 시비를 걸어 이기거나 다투어 싸우고자 하지 않는다.

시끄럽게 떠들고 이기고자 함은 속이 좁은 탓에 빚어지는 허세일 뿐이다. 마음이 넓고 깊은 사람은 알아도 모른 척하며, 재주를 과시해 자기를 돋보이려 하지 않는다. 큰 소리를 내기 보다는 조용한 침묵의 진리를 따른다. 침묵 속에 오히려 참된 가치와 위대함이 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듯 (정수유심, 심수무성 - 靜水流深, 深水無聲)’ 고요함 속에 참 진리가 있는 것이다. 침묵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 후에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농부의 기다림과 같다. 긴 인내와 희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정작 필요한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는 60년이 걸린다고도 한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상처 받지 않고, 또 자신을 알리지 못해 안달하지도 않는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예컨대 침묵의 위대함이다.

요즈음 TV를 보면 심심찮게 나오는 광고 중에, 그림자 아버지의 애환에 관한 영상이 있다. 자녀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면서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는 현대판 아버지의, 유령을 닮은 비참함이 잘 묘사되고 있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이 짠하게 만드는 광고영상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만 찾는 자녀들과 대화를 좀 해보려고, 전문가가 추천한 ‘대화의 기술’이라는 책까지 읽어가면서 준비를 하지만 도무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요즘 흔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부탁을 할 처지도 아니고, 오직 자녀들의 눈치만 보면서 짧은 대화라도 나누어보기를 기대하는 아버지의 자화상이, 마치 각색되지 않은 필자의 이야기인 듯도 해서 서글프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꺼번에 어울러 표현하는 ‘부모(父母)’라는 한문이 있지만, 어버이를 따로 지칭할 때는 ‘부친(父親), 모친(母親)’이라 한다. 여기의 ‘親(어버이 친)’ 자는 어버이의 마음이 담긴 ‘뜻 글자’이다. 이 한자가 생성되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는 고사가 있다.

시골에는 닷새 만에 장이 서게 된다. 장이 서면 아들은 그 동안 모은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장터에 팔러 간다. 집에 계시는 어머니는 뜰 안의 여러 농사일들과 집안일을 하신다. 그러나 생각은 온통 장에 간 아들에게 가 있다. “오늘 갖고 간 물건을 팔았는지, 올해는 넘기지 말고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등등, 마침내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저녁을 다 지어놓고 기다리다 못해 동구 밖까지 나가본다. 언덕에 올라보니 장터에 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도 아들은 보일 듯 말 듯 하다. 마침 언덕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 나무에 올라가서 멀리 장터를 향해 바라본다. 이 애틋한 마음을 한자에서는 ‘어버이 친(親)’이라 한다. ‘어버이 친’ 자는 나무 위에 올라서서 보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버금가는 한자가 ‘효도 효(孝)’이다. 아들은 갖고 간 것을 늦게까지 다 팔고서, 고등어 몇 마리와 어머니께 드릴 몇 가지 물건을 사들고 오다가 동구 밖의 어머니를 만난다. “어머니! 다리 아프실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제가 업어드리겠습니다. 저의 지게 위에 타십시오.” 그래서 지게 위에 태워오는 모습이, 한자로는 효도할 때의 ‘효(孝)’ 자이다. 즉, 노인을 업고 오는 아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한자의 모습, ‘親’ 자와 ‘孝’ 자가 가정에 있을 때 그 가정은 복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좋은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주체여야 하는 우리는 어떤 부모인가? 부모라면 누구나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정작은 어떻게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부모이다.

특히 아버지라는 입장이 가정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과거와 비교할 때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져 있는 오늘날, 아버지의 올바른 처세는 가정의 화두이다.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되고 있는 아버지의 유형이 있다. 첫째는 ‘엄마형 아버지(Mr. Mom)’가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어머니가 해온 집안일들을 아버지가 떠맡는 것을 아버지의 역할로 인식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돈지갑형 아버지(Mr. Money Bags)’가 있다. 이는 자신들의 아버지 됨을 우선적으로 재정적인 면에서 인식하는 경우이다. 셋째는 방관자형 아버지가 있다. 이는 아버지의 권위는 있지만 허세를 부리면서 자녀에 관해 실질적으로는 무관심한 경우이다.

넷째는 건축가형 아버지가 있다. 이는 아이를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같은 아이가 되도록 키우는 일을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로 믿는 경우이다. 다섯째는 농부형 아버지가 있다. 자녀들이 잘 자라도록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고 잘 보살피면서 잡초를 제거해 주는 사명을 수행하는 경우이다.

말할 것도 없이 농부형 아버지가 훌륭한 자식을 양육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농부형 아버지가 좋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는 좋은 농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아버지들의 약점이라는 것이다.

옛날 조선시대에 임금님이 민정을 살피기 위해 대궐을 나섰다. 마침 그 때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나이 많은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아들아! 죽기 전에 임금님의 용안을 멀리서라도 좀 뵙고, 그리고나서 죽었으면 좋겠구나.” 그래서 이 아들은 왕이 오시는 날을 기다렸다가 어머니를 업고 길가에 나가서, 임금님이 지나갈 때에 잘 보이도록 계속 업고 서 있었다.

마침내 임금님은 멀리서 이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듣고는 자식의 효성에 감동하여 금 백 냥과, 쌀 한 섬을 상으로 주었다. 이 이야기가 온 장안에 퍼지게 되었는데, 역시 그 마을의 불효자 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머니가 원치도 않는 걸 억지로, 강제로 업고 나가서, 또 그 길가에서 왕을 뵈었다.

이윽고 왕이 또 불러서 상으로 금 백 냥을 주라고 하자, 신하들은 이미 불효자의 소문을 알고 임금에게 고했다. “그놈은 불효자로 소문난 놈입니다. 효도가 아니고 지난 번 효자처럼 돈 받기 위해 억지로 어머니를 업고 나왔습니다. 그런즉 벌을 줘야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임금님은 이렇게 말했다. “효도는 흉내만 내도 좋은 거야! 그런고로 상을 주어라!” 이 불효자는 후에 뉘우치고 진짜 효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좋은 일은 흉내만 내어도 결국 그렇게 좋은 일을 하게 된다는 교훈이다. 나쁜 일 또한 흉내만 내어도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 도처에서 오래 살기 위해 가히 몸부림들을 한다. 운동을 하고 보약을 먹고, 별의별 희한한 음식들을 복용하고 야단이다. 그런데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은 아주 간단하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이 말을 믿고 실천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이 부모님부터 먼저 솔선수범하여 일상생활이 될 때, 그 자녀도 본을 받아 그대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명심보감’에서도 ‘효도하는 자식이 효도하는 자식을 낳고, 거역하는 자식이 거역하는 자식을 낳는데, 그것은 처마 끝에 물 떨어지는 것과 이치가 같다’고 교훈하고 있다.

오늘은 가정과 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첩경으로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겸양의 마음과 ‘침묵’을 지향하는 온순의 마음, 그리고 ‘효도’를 전제로 한 부모와 자녀의 도리가 오늘 깨우쳐야 할 진리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오늘이라는 이 날, 우리는 최선을 다한 삶의 자세로 오늘을 장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삶의 의미이며 영원한 존재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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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하게 맑은 날,

날씨라도 흐리면 사랑 어기차게 나무라며
다 떠난 뒤 혼자 남은 오늘
견디기 한결 쉬우련만

빛날 아래서
꾀바르게 거드는 삶 이미
논리성 상실상태

넉장거리하고 누워서
마음 하나에 마음 또 하나
투영시키며,
환치시키며,

현실 아무리 막막해도 삶의 터 긍정하여
자욱한 구름먼지속
이명으로 캐스터네츠 울리는
박명의 시간 열린다

사랑하는 이유 줄줄 많으면
그건 사랑 아니다
진짜 사랑은
이유를 댈 수 없는 거

그래서 사랑은 욕망의 순수한 증여,
누구에게나 내재되어있지만
여전히 매우 예외적이고 특별한 이야기,

오늘은 그게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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