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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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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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별 *



시작노트

" 먼 별 " 詩作 note

지축을 흔들어대며 시끌벅적하던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지 한 주간이 지났다. 많은 얘깃거리들을 만들어낸 이번 선거에서 가장 세간의 주목을 끌은 결과가 바로 집권여당의 몰락이다. 오랜만에 완벽하고도 처절한 여소야대의 역사가 재현되었다. 이 결과를 두고 혹자는 서민들의 반란이니, 민중의 승리니 하면서 말 지어내기에 바쁘다. 허기사 전혀 예기치 않던 결과라고 언론에서도 연일 떠들어대니 고조된 분위기가 여간해서는 시들지 않을 기색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자는 한 가지 의혹을 갖게 된다. 도대체 어떤 결과라야 본래부터 예상했던 시나리오란 말인가? 지금의 이 결과는 전혀 뜻 밖의, 예상 밖의, 놀랄만 한 결과라고 하는데, 대관절 그렇게 말하는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민심이란 것이, 여론이란 것이 각본에 나와있는 대로, 누구나가 예상하고 예정하는 대로, 그렇게 천편일률적으로 진행되어야 정상이라는 건가? 여당이 이기는 게임이라야 당연하다? 야당의 승리는 이상한 징조라도 된다는 건가? 가장 근본적인 정서를 오판한 데서, 그토록 많은 기회를 주면서 기다려준 국민의 민심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오만에서, 무능과 불통의 조합으로 이번의 결과는 스스로 만들었으니 이야 말로,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업자득이다.

그렇지만 그렇다 쳐도 단순하게 결정이 지어진 건 또 아니다. 요는, 이 결과도 고정적인 최종 판단은 아니라는 거다. 누구도 승자라고 손 들 수 없는 게 이번에 드러난 민심의 결론이다. 돌고 도는 것이 정치며 역사라는 지엄한 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다시 한 번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국민들을 섬겨주기를 정중하게 요청하는 바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떤 경우라도 선택에서 버림받지 않는 소양을 닦으며, 더욱 더 양심적인 선량들이 되어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동전의 양 면은 앞과 뒤가 교차되어 결정지어진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불변인 것이 없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절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도 더러는 변색되어지고 만다. 오로지 ‘세상의 모든 진실은 변한다’는 진실만 변하지 않을 뿐이다. 어제의 슬픔이 오늘은 기쁨으로 바뀌고, 승리자가 순식간에 패배자로 변모하며, 성공과 실패가, 거짓과 참됨이,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역사가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진실하게 대처할 뿐이어야 한다. 무릇 사람됨의 기본이 그것이다.

실존 분석의 거장 ‘롤로 메이 박사’가 지은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임상적인 경험을 통하여 현대인의 내면 세계를 깊이 관찰하고, 인간의 실존적 분석을 중심으로 인간의 창조적 양심의 문제, 죽음의 문제, 삶의 문제, 시간과 그 초월의 문제 등을 진지하게 다룸으로써,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아의 발견과 진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불안의 시대, 어지러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자아를 찾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인생의 가치와 목표를 찾기 위한 심층심리학적 분석을 제시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인간에 대한 지나친 분석적 접근을 지양하고 생의 존엄성, 윤리, 인생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저자는 인간의 심층심리에 대한 통찰을 비롯해 오랫동안 문학, 철학, 윤리학 등의 영역에서 탐구해왔던 과제 즉, 인간은 어떻게 불안과 위기에 대처하며, 이것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르트르’, ‘카뮈’, ‘카프카’ 등 실존주의 문학가는 물론,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과 그리스 신화를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인간의 삶의 방법과 방향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시도하고 있는 저자의 실존분석은 자신의 임상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정신분석학을 비롯하여 심리학, 철학, 종교학, 교회심리학, 사회학 등에 관심 있는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저자의 주장이나 생각을 칭송하거나 따라야 한다는 건 아니다. 책을 읽던 도중에 필자는 때로 저자의 의견에 부정하는 의견이 생기기도 했고, 그래서 간혹 책 읽기를 중단하고 머리맡으로 집어던지기도 했다. 고백컨대 필자는 독서 내내 시공을 격해 저자와의 다툼질에 열을 올렸음을 인정한다. 물론 감히 대석학의 근본적인 주장에 반기를 들자는 건 아니다. 다만 지업적인 어떤 부분들은 일방적인 결론에 동조할 수 없다는 필자의 고집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길 바라는 소망이다.

저자는 그의 예리한 분별력과 깊은 판단력으로 현대인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의 눈에 비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컨대 불행하기 짝이 없다. 그가 바라본 현대는 경쟁과 이성을 강조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그들의 자아를 쉽게 잃어버린다. 저자에게 자아는 역할의 총체가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을 아는 능력이며, 자신의 잠재력을 발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불행을 느낀다. 그 불행은 불안과 고독이라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현대인은 자신의 존재성과 같은 가치개념이 위협 받는다는 불안을 느끼며, 군중 속에서 보호받기를 바라는 고독을 느낀다. 이와 같은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건대, 어쩌면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표현은 옳지 못한 것 같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본래 자신이 갖고 있었던 것을 잃는다는 것인데, 자아의식이 단순히 ‘나’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관점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인간의 존재적 특성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한 개체로서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다른 개체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여기서 하나의 인간은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그들에게서 넘을 수 없는 벽을 인지한다. 그것은 타자성이다. 타자성은 ‘나’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의 인간은 타인이 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타인의 시선에서 온갖 불안을 겪는다. 마치 자신의 잠재성을 찾기도 전에 타인에 의해 지옥을 맛보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이것이 고독이다.

둘째, 인간은 현재를 살아간다.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과거를 살거나 미래에 사는 인간은 없다. 비록 현재의 삶에서 과거를 안고 살거나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꾸며 살 수도 있지만, 결국엔 인간들 모두 현재를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과거의 후회나 즐거움에 안주하거나, 미래의 헛된 환상 속에서 현재를 잊고 산다. 현재에 직면한 인간들은 미래의 불확실성과 과거의 회한에 본인도 모르는 불안을 느낀다. 이러한 지옥과 같은 고독과 불안에서 자기 자신이 근본적으로, 존재적으로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의 발견을 목표로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경우,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이 현대에 이르러서 문제가 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적 특성과 현재를 살아가는 특성은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존재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쟁과 이성을 강조하는 사회 풍조가 비단 현재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에서부터 경쟁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며, 인간은 모여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성을 강조하는 사회풍토 역시 과거부터 만연했다. 기원전 5세기 경의 ‘소크라테스’가 이성과 사유를 강조한 이후, 근대에 ‘데카르트의 코기토’, 현대의 ‘메이’가 말한 이성 중시 풍토에 이르기 까지 전시대적으로 이성을 강조하였다. 메이가 본인의 저서에서 “현대인이 자아를 잃었다” 라고 했던 것만큼, 과거에 많은 학자들도 본인들의 시대에 당시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잃었다고 말하였었다. ‘사르트르’의 ‘구토’, ‘카프카’의 작품들이 그 예가 되겠다. 물론 위에 제시된 것들이 현대에 와서 가열되어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다른 시대의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연인들 간의 속삭이는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이 일삼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믿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사랑은 무엇인가를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식을 무척 아끼는 부모는 자식이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학교에서 하교하기가 무섭게 학원에 보내며, 소위 뺑뺑이를 돌린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인들은 서로에게 “너는 내 꺼야.” 라는 말을 일삼으며 서로의 소유관계를 다시금 구두로 확인한다. 뿐만 아니라 명예, 돈, 권력 등의 수많은 물질, 비물질들이 현대인에 의해서 사랑받고 있다. 심지어 종교적 자세에서도 지나친 소유는 요구된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는 그들이, 주님은 내 안에 있다며 잠재적, 무의식적 신의 소유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는 결국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상실감만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운명적 전단계이다. 무언가를 소유할 수 있음은 비로소 무언가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직감적으로 느끼는 인간들은 그로부터 불안을 느낀다. 따라서 우리 현대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소유하는 사랑이 아닌 믿는 사랑이다. 믿는 사랑은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믿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믿음을 더 이상 전제하지 않을 시점에 사랑은 끝이 난다. 이로써, 사랑하는 것 자체에 우리는 더욱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누군가를 내가 소유함으로써 내 소유인 사람이 제 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속을 끓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사람 자체로서 그 행동 하나를 믿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비록 그가 믿음을 저버린다면, 그래서 그것이 사랑을 하지 못할 만큼이라면 그 때 그와 나의 사랑은 끝인 것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계속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돈, 명예, 권력 모두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믿지 못해, 그저 소유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 이러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곧 사랑으로 직결된다. 비단 현대인들이 현대를 살아가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 괴리감이나 박탈감이 아니다. 언제 어디를 막론하고 인간의 존재가치는 사랑의 실천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사랑은 다시 믿음에서 시작된다. 또한 믿음은 진실한 마음을 열어주는 사랑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가치관은 동일선 상에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네덜란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년이 헌신적인 자기 희생을 통해, 그것이 가져다주는 큰 보상에 대해 세상을 일깨운 사건이 있었다. 그 마을은 주민 모두가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잇고 있었기 때문에 긴급 상황에 대비한 자원 구조대가 필요했다.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구름이 밀려오더니 곧이어 사나운 폭풍이 고기잡이배 한 척을 에워쌌다.

위험에 처한 선원들은 급히 구조 신호를 타전했다. 구조대 대장이 경보 신호를 울리자 주민 모두가 바닷가 마을 광장에 모였다. 구조대가 노를 저어 거센 파도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주민들은 랜턴으로 바다를 비추며 해변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 시간 뒤, 안개를 헤치고 구조대원들의 배가 돌아왔다. 주민들은 환성을 지르며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지친 구조대원들은 모래사장에 쓰러지며 주민들에게 보고했다.

인원이 넘쳐 더 이상 구조선에 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남자를 뒤에 남겨 둬야 했다는 것이었다. 한 명을 더 태우면 구조선까지 파도에 휩쓸려 모두 생명을 잃고 말았으리라는 것이었다. 구조대 대장은 애가 타서 그 외로운 생존자를 구하기 위한 다른 자원 봉사자를 찾았다. 이 때 열여섯 살 먹은 ‘한스’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한스의 어머니는 한스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제발 가지 마라. 네 아버지도 10년 전에 배가 난파되어 죽었지 않니? 그리고 네 형 ‘파울’도 며칠 전에 바다에서 실종이 되어 지금 생사를 알지도 못하쟎니? 이제 내게 남은 것은 한스 너 뿐이다.” 한스가 말했다. “어머니, 전 가야만 해요. 모두가 ‘난 갈 수 없어. 다른 사람이 이 일을 해야만 해.’ 하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어머니, 이번에는 제가 나서야 해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는 부름이 왔을 때는 누구든지 그렇게 해야만 해요.”

한스는 어머니를 포옹하고 나서 구조대에 합류했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났다. 한스의 어머니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구조원들이 탄 배가 다시 안개를 뚫고 돌아왔다. 뱃머리에는 한스가 서 있었다.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소리쳐 물었다. “실종자를 구조했나?” 지친 몸을 가누면서 한스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구조했어요. 저희 엄마에게 말씀해 주세요. 실종자가 바로 우리 형 파울이었다구요!”

세상 일이 모두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중요할 것이 별로 없다. 돼도 그만 안돼도 그만인 남의 사정이니, 그 보다는 작은 일일 망정 내 일이 가장 소중하고 우선인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모두 나와 연관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정이 곧 나의 사정이고, 그들이 맞닥뜨린 일들이 모두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라면, 과연 내가 사건 사고의 앞에서 무덤덤하게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앞에 벌어진 일들이 내게 고통을 주는 시련이거나, 성공을 가로막는 난관이라고 해도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럴 때 세상천지에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외롭게 헤쳐나가야 한다면 얼마나 고독하고 쓸쓸할까? 이렇게 막막할 때 손을 잡아주는 이웃의 작은 도움이 얼마만큼 큰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지 경험해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라는 격언처럼 고통스러운 짐을 나누어 들면 어렵지 않게 들 수 있는 것이고, 기쁘고 행복한 일은 나누면 배로 불어난다는 평범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한다.

이제 국회의원 선거는 4년 뒤를 기약하고 그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어디 국회의원 선거 뿐이랴? 앞으로도 계속 수많은 선거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국민들의 부름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외면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성공과 실패의 가늠자는 아니다. 계속 구르고 이어지는 역사의 굴레일 뿐이다.

언제 어느 자리에 서있던지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고 믿음을 실행하는 한결같은 자세가 요구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기회에 이어서 다음의 선택에서도 다시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는 찬란한 지렛대이며, 이번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다음번에는 반드시 선택받는 승리자로 기회가 제공될 영광스러운 첩경이다. 명심하자. 돌고 도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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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 어딘가에서 마개 하나 뽑힌다

그곳으로
체온 쏴 - 빠져나가고
식어가는 가슴 밑바닥에서
새들 파닥댄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새다

허이연 벽지엔
좋았던 시절 기억 잔잔히 무늬져 흐르며
왠지
이름없는 고도에 홀로 남겨진 듯
외롬 몰려와

때론 남자도
아이처럼 엎드려 죽죽 울기도 한다

갈 곳 없는 자 절망앞에
영혼 깃든 현의 노래는
타시락거리는 폭풍되어
삶의 절벽 그 끝 누울 때
하늘 더욱 까맣다

이 밤
별들은 내게 너무나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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