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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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끝 이 시작 *



시작노트

" 저 끝 이 시작 " 詩作 note

자! 이제 시작이다. 새 해의 태양이 솟아올랐다. 묵은 해는 과거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광명이 미래를 향하는 길목을 밝혀주기 시작했다. 목하 출발점이다. 후회와 미련 따위는 지난 세월에 다 묻어보내자. 이제부터는 희망과 환희가 우리를 기다리는 거다. 우리 모두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올 해의 주인공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찬란한 보람을 예비하고 서서히 열리게 될 것이다. 벅찬 감동과 소망의 서막으로 오늘이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열리고 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자. 저 빛나는 햇살을 가슴 가득 끌어안자.

바야흐로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었으니, 오늘은 덕담 겸 해서 우화 하나를 소개하는 걸로 시작노트를 적는다. 어느날 포수가 새 한 마리를 잡았는데 신기하게도 이 새는 일흔 가지나 되는 말을 자유롭게 지껄일 줄 알았다. 새는 포수에게 애원했다. “포수님, 저를 놓아주십시오. 그러면 아주 쓸모 있는 교훈 세 가지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교훈? 좋아, 그럼 말해 보아라. 듣고 널 놓아주지.”

“하지만 그러기 전에 저를 놓아주시겠다고 맹세해 주십시오.” “그러지, 맹세하지.” 포수의 맹세를 듣자 새는 말을 시작했다. “첫 번째 교훈은, 이미 지나버린 일은 후회하지 말라. 두 번째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는 자를 결코 믿지 말라. 마지막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새는 포르르 날아갔다. 자유의 몸이 된 새는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아서 나무 밑에 있는 포수를 놀려댔다.

“내 꾀에 넘어갔지요? 당신은 내 말에 넘어가 나를 놓치고 말았어요. 내 몸엔 멋진 진주가 달려 있어서 그것이 나를 현명하게 해준단 말이야, 이 바보 같은 포수 양반아.” 포수는 새를 놓아준 것을 곧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가 앉아 있는 나무로 올라가 새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나무가 워낙 높은지라 중간에 나무에서 미끄러져 그만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포수를 보고 새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어쩔 수 없는 멍청이야. 내가 말해준 교훈이 무슨 의미인지 잠깐 동안이라도 곰곰히 생각해봐요.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후회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놓친 것을 후회하고 마는군요.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은 결코 믿지 말라고 했죠? 그런데도 당신은 내가 방금 한 말을 정말인 줄 알고, 내가 정말 값진 진주를 달고 다니는 줄 착각하는군요. 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한 마리 새에 불과해요.

마지막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라고 내가 가르쳤는데도 당신은 나를 다시 잡으려고 하다가 결국 다리를 다치고 말았단 말이야. 현명한 자에게 한 마디 하는 것이 우둔한 자에게 백 마디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하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네요. 인간들이란 왜 전부 당신같이 밥통들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쏘아붙이고 새는 먹이를 찾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이다.

무릇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한낱 미물인 새에게 조롱을 받는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웬지 낯이 설지 않다. 마치 흔하게 들어온 이야기 같다. 허기사 구태여 인간의 존엄성이나 권위를 드러내면서, 날짐승 따위에게 훈계를 듣거나 놀림을 당한다는 모욕적인 이야기라고 기분 상할 일은 없다. 그냥 교훈을 들려주는 대상으로 우리 삶속의 한 이웃이나 구성원으로 등장시키는데 작은 새면 어떻고, 그보다도 더 하찮은 벌레라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어떤 생명체나 소중하고, 존중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비단 인간과 상통할 수 없는 만물일지라도 그들의 세계가 있고, 그들의 삶이 있는데, 광활한 우주의 미세한 한 구석에서 작은 부스러기도 못되는 존재인 우리들 주제에, 그들을 무시하고 깔본다는 자체가 실은 언어도단이다. 어차피 이렇게 모든 생명 있는 개체들끼리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며, 그런 삶을 귀히 여기라고 새로운 태양이 오늘 저렇게 솟는 것일 게다.

필자가 살아오면서 마음으로 존경하는 분들이 여럿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잊지 못할 분이 계시다. 1,200여편의 동시를 세상의 어린이들에게 선물로 남겨주시고 십여년 전 세상을 떠나신 ‘윤석중’ 선생님이시다. 동요의 노랫말이 된 동시가 무려 800여편이다. 선생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아 그 많은 동요를 만나지 못했다면, 필자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또한 현재의 필자는 어떤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지도 무척 궁금하다.

선생님 덕분에 깊은 산속 옹달샘을 토끼와 노루가 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 토끼는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고, 노루는 달밤에 숨바꼭질하다가 목마르면 달려와 얼른 먹고 간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선생님은 옹달샘에서 우리 친구들을 소개하신다. 그런데 옹달샘을 찾는 친구는 그들 말고 또 있다. 선생님께서 옹달샘을 지켜보고 있을 때에는 이 친구들이 다른 곳에서 놀고 있어 눈에 띄지 않았나 보다.

지금은 추운 겨울이라서 그리 많은 방문객이 줄을 잇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철 끊임 없이 쉬지 않고, 겨울엔 얼음을 깨면서까지 옹달샘을 찾는 친구들이 있다. 바로 새들이다. 필자가 지난 여름에 찾았던 치악산 자락의 깊은 숲속에 옹달샘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 한동안 머물면서 친구들을 많이 만났던 기억이 있다. 두 손을 모아 퍼내면 몇 번 지나지 않아 바로 바닥이 드러날 작은 옹달샘이건만, 수많은 새들이 차례로 모여들어 목을 축이고, 목욕도 하다 가곤 했었다.

그날의 첫 손님 ‘검은머리 방울새’는 “쭈잉, 쭈잉” 소리를 내며 와서는 아주 급하게 물을 마시고 떠났다. 이어 ‘박새, 진박새, 쇠박새, 곤줄박이’의 순서로 박새과의 새들이 총출동하여 물을 마시러 왔다. 다음 손님 ‘동박새’는 원래 남해안 섬지방에서 동백꽃 꿀을 즐겨 먹는 텃새이지만 근래에는 중부지방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번엔 몸이 조금 큰 친구 ‘흰배 지빠귀’가 나타났다. 계곡이 있는 곳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으로부터 땅으로 내려와 깡충깡충 뛰듯 이동하여 물로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치칫, 치칫” 소리를 내며 ‘노랑턱 멧새’가 온 뒤 마침내 귀한 몸 ‘유리딱새’도 모습을 드러냈다. 숲의 노래꾼 ‘직박구리’ 역시 갈증이 나지 않을 리 없다. 마지막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님 ‘새매’가 찾아왔다. 새매는 슬며시 나타나 소나무 죽은 가지에 숨어 있더니 ‘검은머리 방울새’ 한 마리를 공중에서 그대로 낚아채 갔다.

새들이 옹달샘에 모여드는 과정을 찬찬히 지켜보는 것으로도 저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우선 숲의 고요함 너머로 귀를 손으로 감싸야 알아차릴 수 있는 아주 작은 크기의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귀에서 손을 떼어도 좋을 만큼 소리가 커질 즈음이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준다. 아주 멀리서부터 분명 옹달샘을 향해 모여드는 것은 틀림없지만 단숨에 날아오지 않는다. 앞서는 친구가 한곳에 있다 이동하면 다음 친구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는 식으로 접근한다. 옹달샘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나뭇가지까지 와서도 한참을 또 망설인다. 마침내 한 친구가 옹달샘으로 내려와 물을 마시고 떠나면, 뒤를 이어 몇 마리씩 내려온다.

어떠한 경우든 귀한 물을 두고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이 신통하다. 옹달샘 주변에 모여 있는 새들이 많으면 순서를 기다렸다가 내려앉을 때가 대부분이며, 목욕을 하더라도 홀로 차지한 채 오래 버티지 않는다. 숲속의 새들과 친구가 되는 것,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옹달샘 하나를 마련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이 귀한 계절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숲에서 너무 먼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가슴에 작은 옹달샘 하나를 지니고 사는 길도 있다.

도심의 산에도 개울은 있지만 메말라 있기 십상이고, 비가 내리면 잠시 물이 흐르다가 곧 말라 버린다. 지난 가을에는 가까스로 물기가 남아 있는 한 야산 개울가를 지나가다가 새들이 물을 먹고, 목욕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얼른 내려가서 개울 한 곳에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해 주었다. 새들의 다리 높이를 고려해 바닥에 작은 돌멩이를 깔아 물 깊이를 10~15㎝로 유지하게 했다. 목욕하기에 적당한 깊이다.

이 인공 옹달샘 가장자리에는 근처에 있던 통나무와 가지를 주워 횃대를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해 주면 늘 편안하게 목욕도 하고 물을 마실 뿐 아니라 목욕 후 물기를 털어내는 곳으로 쓸 수도 있다. 횃대는 또 옹달샘을 오갈 때 징검다리 구실을 하고 천적이나 위험을 경계하는 장소도 된다. 샘으로 새가 쏜살같이 날아오는 건 목이 타 매우 다급한 상황임을 보여준다. 보통 산새들은 여유 있게 쉬엄쉬엄 이곳저곳의 나뭇가지를 이용해 물가로 접근한다.

조용히 지켜보았더니 금방 새들이 모여든다. ‘직박구리’가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 뒤 ‘호랑지빠귀’가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며 슬금슬금 다가온다. 갓 태어난 ‘곤줄박이, 쇠딱따구리, 청딱따구리’가 주변을 서성대고 있고, ‘물까치’는 옹달샘을 아예 제 집 목욕탕인 양 터줏대감 노릇을 하려 든다. 도대체 어디에들 숨어있다가 그리도 쉽사리 옹달샘을 눈치채고 모여드는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잡식성인 물까치를 위해 식빵 조각을 잘게 뜯어 횃대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한두 마리가 날아들더니 숲속에 소문이 퍼졌는지 물까치 십여 마리가 몰려왔다. 옹달샘에서 목욕은 여러 종류의 새들이 사이좋게 하지만 먹이 경쟁에선 집단행동을 하는 물까치를 누구도 맞서지 못한다. 인간이 자연을 조금만 배려하면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다. 작은 인공 옹달샘과 횃대가 그런 예다. 새들이 안심하고 목욕을 하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을 우리 주변의 야산이나 공원에 만들어 주면 놀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새들과 만날 수 있다.

사실은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열고 손을 벌려주면 자연의 친구들은 어렵지 않게 우리의 곁으로 다가선다. 그들은 언제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데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오히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환경을 파괴하며, 오로지 인간들의 삶만 위해서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규칙과 방법에 의존하여 이기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그렇게 자연과 담을 쌓고 그들의 세계에 벽을 친다.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새’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설정을 통해서 거장의 명성을 재확인시켜준 공포 스릴러물이다. 이미 히치콕 감독의 영화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공포를 예리하게 건드린다”는 영화 매니아들의 평론을이끌어내는 바가 있기에, 누구나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를 접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렇지만 하필이면 어째서 새를 공포의 대상으로 선정하여 영화를 만들었는지, 사실 필자는 이 영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갑자기 이유도 없이 새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것인가? 원래 새의 이미지가 인간에게 공포나 포악함은 아니지 않았는가? 오히려 평화로움, 창공을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족속, 하늘 높이 “새처럼” 날고 싶다는 인용구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희망의 이미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람들의 인식을 뒤집어 놓는다. 사람을 공격하여 상처를 내고, 급기야 한 동네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넣는, 그런 위력을 가진 대단한 존재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점이 히치콕 영화의 매력이라고 구태여 칭송해야 하는 걸까? 글쎄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설정은 “인간에 대한 경고”를 뜻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도대체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 것일까?

언뜻 떠올려보면, 주인공 ‘멜라니’와 ‘미치’는 참 콧대 높은 인물들이다. 처음 미치를 만났을 때도 멜라니는 거침없이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그 사람의 신원을 알아낸다. 미치 역시 잘 나가는 변호사로, 도도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부족할 것 없이 살고 있는 그들도 새의 공격에는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새를 그토록 좋아했던 그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둔갑할 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두 사람의 모습이 인간 전체를 대변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져서,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 다 해 낼 수 있고, 다 이루어낼 수 있다고 자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어느새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 자신들의 힘으로 주물러댈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두 사람처럼, 인간은 도도하다. 급기야 인간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새장에 가두고, 날아다닐 수 없도록 숨통을 막아 놓았다.

그러나 연약한 줄로만 알았던 새들의 힘은 인간의 힘을 압도했고, 초월하였다. 더 이상 인간이 마음대로 가두고,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게 된 것이다. 새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이제 상황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새들의 공격을 피해 꽁꽁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들어 앉아 있는 인간들이, 새장 속에 갇힌 새의 모습이 되었다.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인가? 자동차를 타고, 새들의 무리로 가득한 동네를 빠져나가는 모습은 협력을 통한 극복 보다는 차라리 도피다. 동네를 가득 메운 새들은 아직도 세상을 비웃고 있을 것 같다. “이래도 너희들이 강하냐?”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히치콕은 영화를 통해 한껏 농익은 자신의 영화적 테크닉을 유감없이 펼쳐 보이고 있다.

일단 ‘오리지널 스코어’ 없이 새들의 음산한 날개짓과 울음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음향은 굉장히 뛰어나다. 어디서 들리는지 모를, 영화 내내 어디선가 조그맣게 들려오는 이 ‘담지자 없는 목소리’는 영화가 만들어내는 공포를 극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영화의 초현실적인 이야기에 현실의 질감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트래킹 쇼트’나 ‘팬 쇼트’ 등의 온갖 촬영 기법을 총동원해가며 만들어내는 영상 역시도 감독의 작가적 의도를 완벽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

이 영화에서 고정 시점이 아닌 이동하는 카메라 중에 아무 이유없이 사용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의 높아진 눈으로 보면 가솔린 폭발 장면이나 공중전화 박스 씬의 특수효과가 조악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히치콕이 당시의 기술력으로 가능한 최대한의 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요즘 영화들에서 남발되는 CG보다 이런 아날로그적인 영상 기법이 더 창의적이고, 영화의 초현실적인 분위기와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영화 전반의 자체에는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지만, 장면 장면에서 보여지는 평점의 합은 비교적 높을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감독의 저력일 게다.

가을이 깊어져서 추위가 오면 겨울이 왔음을 알고 맞추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왜 겨울이 오냐고 항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한 진리이며 뻔한 사실이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 호감도 갖지만, 그러나 알지 못하는 것이 오면 보통의 사람들은 저항을 한다.

농부는 누에고치가 고운 실을 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애벌레가 오히려 좋게 보이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싫어하는 벌레로 보이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곁으로 오면 아마도 바로 죽일 것이다. 벌레로 보면 죽이는 것이고, 그 벌레에서 고치를 보면 벌레도 사랑스러운 것이다.

사람이 안다는 것은 어쩌면 이와 같을 것이다. 지금 내가 싫어하고 반대하는 그것이, 아름다운 고치는 보이지 않고 벌레만 보이는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보자. 벌레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벌레가 아무리 고운 실을 내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우린 혹시 일의 진정한 가치보다는 전시적인 효과에 매달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우수성과 잠재력보다는 그럴 듯한 외양에만 매료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이라는 것이 중독성이 있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생각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때론 그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와 적당한 거리에 서서 그 생각을 객관화 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 내면에 지니고 있는 비젼을 바라볼 줄 아는 안목도 생각을 객관화 하는 훈련의 거듭으로 얻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한 해의 나날들, 과연 어떤 감추어진 진실을 바라보고, 어떤 숨겨진 진리를 찾는 노력과 정진으로 하루하루들을 채워갈지, 심사숙고하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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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아야 할 해묵은 근심따위
쌓였다 녹는 눈냄새 섞여
짙은 체취 풍기는 저 끝 어딘가,

이유없는 활기와 비애로 떠도는 스산함
삶의 수심 재는 수표인 양
이마끝에서 물 차는 것 느끼는 저 끝 어딘가,

무의식속으로 세월의 초탈
성급하게 삼투되어 보여지누나

잠못들어 하냥 기다리던
그 시간으로 돌아갔을 때 부터
날 숨 조금씩 할근거리는 이 시작 어딘가,

종종걸음치는 석별의 념
무언가를 깨달은 그때의 시발점
이슥하게 울울함 고이는 이 시작 어딘가,

저 끝 온통 끝나고
이 시작 온전 시작되는 새해에는

되는대로,

물처럼 흐른다 생각하고
파도처럼 솟는다 생각하고
호수처럼 머문다 생각하고
진짜 내 뜻대로 생각하며 살자

난 그렇게 해도 된다
나 이젠 그렇게 살아도 된다

-201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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