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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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속 여자 *



시작노트

" 꿈 속 여자 " 詩作 note

예컨대 ‘꿈’은 사람이 간직할 수 있는 영원한 로망이며, 역사적으로 끝없이 이어질 화두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다. 아니 사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꿈을 삶의 하나로 인정하면서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죽는 순간까지도 마지막 꿈을 꾸면서 죽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꿈에 관한 한 우리는 절대적으로 관대하다. 꿈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며 다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언제나 자유로우며 항상 화려하다. 찬란하고 행복하며, 그렇기에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천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꿈을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삼아, 각종 문학과 예술의 장르가 엄청나게 많은 발전과 진화를 이룩해왔다.

꿈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가장 은밀하고 가장 조용하다. 그래서 최고로 소중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의 시작과 끝을 일으키고 마무리지어주는 우상이다. 그렇게 꿈은 신에게까지 닿아있다. 불멸과 영속의 상징인 꿈은 그런즉, 오늘도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모름지기 꿈을 잃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실은 그래서 필자도 꿈이라는 주제로 참 많은 시를 지었던 것 같다. 꿈을 잊지 않고 늘 보듬고 싶은 작은 소망에서였다.

때로는 과거의 어떤 기억이나 흔적이 꿈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오늘의 버거운 삶의 그늘이나 그림자가 어우러져 꿈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혹은 막연한 내일의 바람과,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모두어져 꿈을 빚어내기도 하며, 그런 염원과 집착이 밤에 잠 속에서도 현실처럼 보여지는 형상으로 귀결되어져, 비록 허망할지언정 달콤한 꿈을 꾸게도 한다.

아무튼 우리의 꿈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리가 숨을 쉬는 한 우리의 일부이다. 아니 전부라고 표현해도 어폐가 있다고 하지는 못할 듯 하다. 그만큼 중요한 삶의 요소이다. 물론 꿈이 생각대로 모두 이루어지거나, 꿈에 의해서 삶의 질이 달라지기는 힘들다. 어디까지나 꿈은 꿈에서 끝난다. 아주 가끔씩 꿈이 기적처럼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역시 꿈은 꿈으로 종결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꿈은 꿈이다.

필자도 간혹 황당하고 막연한, 그리고 실현 불가능한 꿈을 꿀 때가 있다. 아주 간절한 바람과 희망을 조심스럽게 담아서 꿈을 꾸지만, 결과는 공허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지치지는 않는다. 그 꿈을 꾸는 동안에 갖게 되는 기쁨과 행복이 무척이나 소중하고 귀해서, 비록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쉬지 않고 계속 꿈을 꾼다.

지나간 추억을 곱씹으면서 꿈으로 연결시키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을 눈앞으로 당겨서 생각과 육신을 넌지시 실어보기도 한다. 때론 거기서 느껴지는 짜릿함과 성취감에 문득 새로운 힘과 활력이 샘솟기도 한다. 또한 현실에서는 좀처럼 맛보지 못할 무한한 자유와 비상을 가슴 벅차도록 느낄 수 있음도 꿈의 매력이다. 꿈은 바로 자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꿈을 꾸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성취가 정 안되면 그 때는 또 다른 꿈으로 위로를 삼으면서, 꿈의 파노라마를 삶의 한 자락에 일기처럼 펼쳐본다. 필자의 우매한 꿈은 아마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래서 많은 줄거리를 잉태하고, 많은 사연을 쏟아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낳는가보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이 시는 너무도 힘들고 참으로 괴로웠던 지난 어느 한 시절에, 애간장을 토하듯이 뱉어낸 시이다. 어쩌면 살기가 죽는 것보다도 벅차다고 여기던 세월이었을 것이다. 한 자락 끈으로 애절하게 붙잡고 있던 인연과 진실의 단초를 야속하게 내팽개쳐 던져버리고, 매몰차게 뒤를 보이던 세상의 배신을 서러워하면서, 아예 어떠한 꿈조차 일절 꾸고 싶지 않았던 심사로 반죽을 빚어, 뒤틀린 시어들이 시의 도배를 하게 만들었다.

일부러 과장되고 어려운 시어를 고르려고 애쓴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독자들에게 다가서기는 무리가 있을, 이른바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시이다. 그러나 꿈 속에서 보여지던 이름 모를 여자가 현실에서는 시로 승화되면서 기대 밖으로, 잠재되어있던 필자의 마지막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라 여겨지기도 해서 내심 대견한 면도 있다. 그런 감상으로 오늘 다시 읽어보니 숨겨졌던 제법 미묘한 향기가 슬금 배어나기도 한다.

일전에 모처럼 반가운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오랜 동안 마음 속으로는 기억하면서도 정작 만날 엄두를 내기는 쉽지 않았던, 너무도 아픈 상처를 너무도 많이 공유한, 기억 저 편의 인연들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로 연락이 되자, 막상 별다른 의미나 기대는 없이 이루어진 해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순간 자연스럽게 서로를 얼싸안을 수 있었고, 결론적으로 정말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대화와 고백을 나누었는지 모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는 만남의 감격 자체에 빠져들었다. 반종일 동안 장소를 옮겨가면서, 지치지도 않고 서로의 상처와 주름을 보듬어주고 위로해주었다. 그러다보니 지난 세월 속에 있는 아픔도 꿈이 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완전히 잊고 살아온 세월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바로 그거였다. 시간은 우리에게 모든 기억마저도 꿈으로 빚어 조심스레 건네준다는 걸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아주 많이 아플수록 꿈의 결실은 더욱 소중해질 수 있다는 것도. 마치 기적처럼, 개벽이 이루어지듯이, 진정 자유로운 꿈에서 진실된 행복이 묻어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싶어 한다. 육신의 자유는 물론이고, 사회가 쳐놓은 인습의 그물을 뚫고 창공 높이로 날고 싶은 정신의 비상까지도 갈구하는 꿈으로 산다. 그러나 그런 내적 갈망과는 달리 우리는 오직 길들여진, 형체도 없는 고정된 의식 속에서 정신의 자유를 결박당한 채 살아가야 할 때가 비일비재하다.

공동생활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자연히 그렇게 굳어진 고착관념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타당하여 사회적 질서가 되기도 하고 어떤 규칙이 되기도 하지만, 그 고착된 의식은 때때로 우리들의 자유로워야 할 정신 영역을 화석처럼 박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집 바로 뒤에 ‘봉화산’이라는 이름의 야산을 끼고 있는 이유로 필자는 자주 산행을 한다. 거의 매일 오른다고 보면 된다. 산행이라야 약수통을 들고 느릿느릿 걸어서 야트막한 정상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약수를 길어오는 불과 두어 시간 남짓의 거리 정도이지만, 어떨 때는 인적 없는 적막한 초저녁 산내음이 그리워 무작정 내닫기도 한다.

어둠이 내리는 초저녁의 봉화산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린 멀미를 달래며 원래의 청정한 모습을 위한 묵상의 기도를 울리고 서있다. 때때로 삶의 무게가 무거워 천 근 물 먹인 솜을 진 듯 피곤해질 제면, 필자는 해질 녘의 봉화산을 찾아가 함께 묵상을 하곤 한다. 요즘처럼 일상에 깔린 권태와 번민에 힘겨워 시름 깊어지면, 오솔길 걸어 오르며 느끼는 봉화산의 어둠은 많은 추스림과 위로가 되어준다.

그래서일까? 가을의 눈부신 햇빛 속에서 불길처럼 타는 절정의 단풍이나 낙엽의 소복함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필자가 산을 찾는 시간은 화려한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적이 드문 어스름 저녁이거나 먼 동이 트기 전인 꼭두새벽, 그리고 가을비 추적이는 별스런 시간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늘 그렇게 낮은 산만을 오르는 건 아니다.

사는 곳에서 멀지도 않고, 쉽게 접하다보니 친근하기까지 하여 필자는 비교적 자주, 코스를 달리 하면서 지역의 명소인 ‘치악산’을 오르곤 한다. 원행을 할 때도 날씨를 민감하게 고르지는 않는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새가 비바람에 뒤채다 떨어지던, 산자락의 초입부터 처연한 산새 소리가 비에 젖은 영혼까지 울리게 하던 지난 주말이었다.

뜻이 잘 맞는 친구와 사전에 약속을 하고는 단단히 우장차비를 갖춰, 추적이는 가을비를 몸으로 맞으며 치악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 중턱에 위치한 ‘상원사’ 앞뜰에 소담스레 조성한 화단에서, 유난히 고운 꽃을 피우던 접시꽃 씨앗이 영근 것을 발견하곤, 친구가 조심조심 그 씨앗들을 손수건에 털어서 거두었다.

접시꽃에 유달리 연연하는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필자는, 한동안 옆에 서서 지켜보다가, 조금 더 나이 들면 소위 은퇴라는 것을 하고 조그만 토담집이나 지어 텃밭을 가꾸면서, 접시꽃을 뜰에 가득 심고 함께 더불어 살자며 너스레를 떨면서, 오래된 추억의 꿈에 잠긴 심사를 어루만졌다.

그러나 접시꽃 씨앗을 받고 있는 친구는 이미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현실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먼 산을 말없이 한참을 올려다보던 친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이내, 달빛 교교한 시골 고향집 마당에 흰 조약돌처럼 흩어져있는 어머니의 결핵약을 정신없이 주워 모으며 울고 있는 어린 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만성결핵으로 어두운 세월을 보내야 했었고, 어머니의 고통과 외로움의 강 저 편에서 친구의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스스로의 갈등에 못 이겨 자주 폭음을 하시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주체할 수 없도록 술에 취해 귀가하는 날이면 친구네 집 마당은 어김없이 어머니의 약병이 던져지고, 흰 알약들은 마당 구석구석 흩어지곤 했단다.

물론 지금이야 대단치 않은 병이지만 그 당시에는 심각한 후유증과 전염성으로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질병이었고, 친구의 아버지도 환자와 함께 생활해야 하는 꺼림직함과 남편으로서의 갈등을 그렇게 밖에는 풀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날 밤이면 친구는 어머니의 흰 알약을 줍는 것이 아니라 희디 흰 진주를 줍고 있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혀, 깊은 슬픔을 오히려 승화시키며, 마치 꿈 속인 듯 몽롱한 감각에 취하곤 했었단다.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의 알약은 친구의 눈물과 달빛 속에서 가장 처절한 아픔으로 생성된 귀한 진주알이었을 것이다. 눈물에 어른거리는 수많은 진주알을 줍고 또 줍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울타리를 둘러싸고 달빛을 향해 가없이 피어오르던 흰 접시꽃이 그렇게 가슴저리도록 아름다웠었다고 친구는 회상했다.

어머니는 죽어서 새가 되고 싶다고 하셨지만 아마도 흰 접시꽃이 되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기에 접시꽃만 보면 야속하도록, 가슴이 이리도 떨리는가 싶다고 친구는 울먹이며 말했다. 그 날, 치악산 정상에 다달아 친구와 필자는 막걸리 한 잔을 나누었다. 안주는 물론 접시꽃이었고, 흰 손수건에 쌓인 씨앗이었다.

하산한 후에도 필자는 막걸리에 취한 것이 아니라, 가슴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던 접시꽃에 취한 채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속에서 필자는 친구가 건네준 자그마한 스티로폼 그릇을 가슴에 꼭 껴안고 서있었다. 손수건에 받아든 꽃씨의 일부를 나누어주면서 스티로폼에 옮겨놓았기에 만원버스 안에서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 때였다. 아까부터 필자를 의아하게 탐색하던 젊은 여인 하나가 머뭇머뭇 가방을 여는가 싶더니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저, 여기에 500원 짜리라도 넣으면 되겠지요?” 여인은 말과 동시에 동전 한 닢을, 필자의 귀한 꽃씨가 담긴 스티로폼 그릇에 던진다. 아마도 가슴에 소중하게 그릇을 품고 있는 모양이, 그 속에 동전이라도 제법 담긴 동냥 그릇으로라도 여겨진 모양이다.

그 순간 필자는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당황했으나 그런 경황 중에서도 어디서 그런 객기가 동했는지 얼른, “고마워요. ‘두만강 푸른 물에’ 그 노래라도 한 곡 부를까요?” 하고 응수했다. 한 쪽으로 비켜서있던 친구가, 그런 엉뚱한 태도에 한동안 당황하는 얼굴이 되더니 이윽고 평정을 되찾고, 그 그릇에는 꽃씨가 들었노라고 해명을 하자 만원버스 속의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바다를 이루었다.

동전을 떨군 여인은 무안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필자는 능청을 떨면서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의 나눔이 가지고 오는 행복과 꿈에 대해 더욱 소중한 감사의 뜻을 얹어주었다. 생각해보면 만원버스 속에서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준 고마운 여인이 아닌가? 그러고보니 그 여인은 어쩌면 그 옛날, 어렵던 시절에 막연한 그리움으로 꿈 속을 뒤져 만났던 그 꿈 속 여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필자는 우리들의 고정관념에 대하여 많은 생각과 자성의 시간을 가졌다. 바가지만 들면 동냥그릇이 되고 만다면, 그 속에 담겨진 보배로운 꽃씨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가 될 수 있을까? 가치 없이 치부되어버리고 말 소중한 꿈의 진실은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 것일까? 겉 모습은 속 마음의 표출이라고 하지만, 그 평이하고 획일적인 안목 위에 아름다운 정신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깊이 생각하며, 겉 모습만 보고 속단하고 판정한 그간의 필자의 잘못과 우둔함을 헤아려보았다. 어린 시절, 우리들의 고무신 속이 송사리떼의 놀이터가 될 수 있었듯이, 동냥그릇 속에 꽃씨가 들어있을 수도 있는 우리 의식의 트임, 그것이 바로 진솔한 꿈이며 순수한 얼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을 가져야겠다. 세상은 하루 밤을 자고 나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게 유혹하고 있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것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모으고 있다. 지식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사회적인 명성을, 그리고 후세에 남을 명예를 원하기도 하며, 의롭고 선하게 살기를 원해서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며 절개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자기 안에 사상이 있다. 마음에 생각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며 살아가지만 현실에서는 그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마음을 다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재물도, 명예도, 지식도, 그리고 선하고 의롭게 산 것도, 마음에서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을 가질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지면 될 것 같아서 인생을 걸면서, 그것을 가지려고 전쟁을 하듯이 싸우지만, 보이는 것은 가져도 가져도 부족하기만 한 것이다. 헛된 욕심일 뿐이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을 가져야겠다. 우리가 갖고자 수고하고 애쓰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영혼에 있다. 그것을 가지면, 배가 부르듯이 마음을 채워서 포만감이 넘칠 것이다.

물질은 육체의 영역, 정신은 영혼의 영역이다. 육체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무리 자신만을 위해 소유하고자 해도, 때로 그것이 되레 자신을 향하는 무기가 될 때가 많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이 지나치면 소유하기 위한 방법이 불합리하거나 정당하지 못해, 결국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들 뿐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조차도 불행으로 이끄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반면 정신을 위한 투자는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평안을 주며, 안색을 밝게 하여 그를 바라보는 이들에게까지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정신적인 투자의 궁극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우리가 꾸는 꿈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같이 자유롭고 싶어 한다. 우리의 영혼이 타인의 영혼을 향하여 활짝 열려있을 때 우리들의 정신도 인습과 타성의 그물을 뚫고 비로소 자유로운 꿈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더 늦기 전에 얼른 시간을 내서, 소중히 담아들고 온 접시꽃 씨를 비좁은 아파트 화단 한 켠일 망정 정성껏 뿌려야겠다.

그리고 계절 좇아 싹 자라고 잎이 돋아서 접시꽃이 피게 된다면, 그래서 거기 행복한 꿈이 따라 핀다면,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꽃이 전해주는 사랑의 인사를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싶다. 꿈으로 피어준 접시꽃의 사연을 가득 담아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 텃밭에 씨뿌림해서 아름다운 기억을 하냥 심어주고 싶다. 온 누리에 꿈의 색깔인 사랑빛 가득하도록, 온 세상이 한결로 사랑의 꿈을 꿀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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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나 멀리 있던 여자 어쩌자고
한 걸음 건너 편에서 굼적굼적 움직일까나 ?
신기하구나

만지고픈 욕구
손끝 자기장처럼 이니, 느낌 알싸하고
한 소끔 지날 때쯤 정적은
낮은 돌비알 위 안개 되어
호젓한 그림 속으로 빠져나가고 대신에
문실문실 흘러가는 강물소리와,
저분저분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밤새들 깃 치는 잗다란 소리
생뚱맞게 흘러들어오네

나는
주절주절 긴 이야기 했거늘
여자는
허공만 건너다볼 뿐
날 바라보지도 더 이상 채근도 않네, 그래서 나는
내 말 덜 끝났다는 걸 느낄 수 있고

벌거벗은 채 뻘쭘하게 마주선 두 사람 사이
두려움 섟삭고나면 어떤 상황 벌어지려나? 큼 ~

소리내어 자신의 평화 확인하고 나니
매욱하게 느껴질만큼
심사 솔직하고 세세하구만,
생청스레 따지고드는 서름한 손길로
고붓고붓 흔들리는 여자 머리카락 쓸어주면서
늑골과 늑골 사이 오련한 불빛
소슬한 기운 함께 묻혀
아주 조그맣게 살아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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