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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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깟 사랑, 그깟 이별, 난 아무렇지도 않아 ? *



시작노트

" 그깟 사랑, 그깟 이별, 난 아무렇지도 않아 ? " 詩作 note

‘토마스 홉스’는 말했다. “사람들은 혼란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계속한다.” 필자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세상은 정글이다. 세상 사람들은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다. 그리고 어느날 필자가 그 정글에서 낙오했다. 그러자 그 때까지 살아남기 위해 쏟아붓던 뜨거운 열정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내 지쳐버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격하게, 강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를 않았다.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란 걸 몸으로 처절하게 체험을 하며,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세월을 죽이는 벌레가 되었다. 어쩌면 그토록 철저하게 계산된 결과가 줄을 댈 수 있었는지 정말 생각할수록 아이러니다. 신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필자의 흑역사는 그렇게 필자의 삶에 엄중한 장막을 드리웠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한다고 한다. 이 말만큼 필자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평생 글을 쓰고, 이곳 저곳에서 강연이나 교육을 하면서 살아온 일생이기는 하지만, 실상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고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지도 않던 필자의 숨겨진 능력을 알아봐 준 어떤 이를 위해서 매진하다보니, 자신조차도 미처 몰랐던 감추어진 실력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선택받고 중임을 맡게된 그런, 기적같은 사실에 부응하기 위해 하루, 아니 단 일분 일초도 헛되이 쓰고 싶질 않았다. 더욱 창대한 최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자기계발의 부단한 노력을 잠시도 중단하지 않았으며, 더욱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불철주야 잠 잘 시간조차 아끼니 그야말로 촌음도 낭비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은 필자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무궁무진한 이야기보따리에 더욱 열광하였고, 날이 갈수록 강의를 하러 가는 곳곳마다 우레와 같은 환호와 박수갈채가 뒤를 이었다.

아울러 모든 사람들은, 안팎으로 더욱 완벽한 인격체를 위하여 쉬지 않고 절차탁마하는 필자의 근면함과 일관성에도 놀라워하며 찬사를 더해갔다. 피나는 노력의 화신, 과연 그것 때문 만이었을까? 재능! 사실 필자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강의를 진행할수록 남들은 몰랐지만 점점 그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굳이 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사전에 연습을 하지 않아도, 필자는 본능적으로 분위기와 목적에 부합하는 소재를 찾아낼 수 있었고, 최적의 내용과 예화를 섞어 진행하는 환상적인 기승전결의 강의 시스템을 스스로 조합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재삼 확인하면서 장만한 필자의 컨텐츠를 더욱 확고하게 굳혀갔다. 남들은 여러 시간 준비하고 연습해야 비로소 단 몇 분이라도 만족할 만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일반적 원칙조차도 필자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으니, 단 한 번의 생각이나 결단으로 어렵지 않게 모든 강의의 내용들을 필자의 것으로 소화하고, 두뇌창고에도 충분한 양을 저장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몇 시간이고 휴식시간도 없이, 모두를 홀리듯이 너끈히 강의를 이어갈 수 있었다.

“겸손하자. 내 재능을 함부로 남에게 다 드러내지 말자.” 오히려 필자는 항상 스스로에게 겸손을 강조했다. 근본적인 겸양이라기 보다는 보여지는 모습 유지가 더 큰 틀이었지만, 자칫 주변에 시기하는 이들로 넘쳐날 것을 염려해서 언제나 표출되는 자신감을 억제하고, 표정관리에 신경 쓰며, 더욱 더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그 노력까지 더해지자 필자는 더욱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필자의 강의를 듣고나서 최종 선택을 하려고 작심했던 수많은 투자자들은 물론, 별 생각 없이 강의를 듣던 사람들까지, 초대형 강사의 탄생과 행보에 흥분하고 열광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냥 하면 되는데. 뭐든 맘만 먹으면 쉽게 되던데... 처음엔 조금 어리둥절하고, 행동거지에 일말의 망설임도 일부 없지 않았지만 금세 그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 열정의 도가니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 어디 더 열광해 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사람들은 이제 거의 필자를 ‘강의의 신’ 급으로 추앙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명 ‘언어의 마술사’ 라던가 ‘유통의 황제’라 칭하기까지 했다.

항간에서는, 만화도 이렇게 그리면 욕 먹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일부 언론에서도 연일 필자를 다루기 시작했다. 강의를 녹화하거나 녹음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필자의 강의가 진행된 장소에서는 어김없이 엄청난 투자와 매출이 불처럼 일어났다. 참 우스웠다. 정식으로 유통 관련 강의를 안 하던 시절에는 아무도 필자를 중히 여기거나 거들떠보지도 않더니만, 사람 팔자 시간문제로구나. 이제야 비로소 필자의 진면목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거고, 물 만난 고기마냥 싱싱한 소재와 주제가 이토록 주체 못할 지경으로 차고 넘치니, 대관절 이 대단한 노릇을 어쩐다? 그럴수록 필자는 더욱 무섭게 몰아쳤다. 그렇게 필자는 거의 혼자서 대한민국 유통업계의 교육 분야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전무후무(前無後無). 유통의 역사상 단 한 사람의 존재감이 이토록 절대적인 적이 없었으며, 단연코 앞으로도 이런 결과를 이만큼 단시간 내에 만들어내는 강의와 교육의 귀재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들 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 없는 세월이 흘렀다. 불과 2년 동안의 스토리였다. 정말로 짧은 기간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수 조원대의 투자매출을 기록했던 그 유통기업의 진두에 서서, 각종 교육의 시스템과 기획안을 펼쳐보이며 활약하던 필자는 신기루처럼 흐르던 강의의 장을 속절 없이 떠나야 했다.

어느날 몰아닥친 쓰나미는 가차 없이 필자가 쌓아올린 강의의 탑을 휩쓸어버렸다. 실정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무정한 세월에게 집단 린치를 당해, 모든 그 때까지의 성과와 업적이 완전히 부정되면서, 급기야 필자에게 강의의 절대자라는 제목을 얹어주었던 그 기업은, 헌정사상 초유의 거대한 불명예를 짊어지고, 온 국민의 뇌리에 충격을 각인시키면서 유통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아울러 그 무대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었던 필자는 무리들과 함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른바 모 사단의 ‘교육담당 부사장’.

그리곤 이내 육체의 파탄과 폐쇄, 그리고 절망이 모든 삶을 암흑으로 도배를 해버렸다. 그런데 그 때 망가진 것은 필자의 육체 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파멸한 후로 필자의 영혼은 더욱 엉망으로 망가져버렸다. 급기야 필자가 쓸모 없어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필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필자에게 잘 보이려고 알랑방귀를 뀌던 업계의 동료들, 그리고 살갑게 대해주던 투자자들, 강의의 기초를 배우고자 줄을 섰던 자칭 제자들, 필자에게 열광했던 수많은 팬들, 마지막으로 믿었던 이웃 친지들 까지.

찬양과 찬사가 조롱과 손가락질로 뒤바뀌는 건 한 순간이었다. 필자는 그 후 영락 없는 폐인이 됐다. 일정 기간의 체벌을 거치고 출소한 후에는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결국, 필자는 너무 높은 곳까지 올라가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이란 보통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어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필자는 죽었다. 아마도 영영 다시 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한동안은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이 겹쳐져 몹시 쇠약해지기도 했고, 가족들도 마음의 병을 얻어 집안 분위기는 이래저래 걷잡을 수 없는 나락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리고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어느덧 강산이 변한다는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계절이 마흔 번 바뀌어졌다. 이제 다시 필자는 필자를 바라본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시선을 들어 쳐다본다. 비교적 무덤덤하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욕의 눈길로 필자를 새로이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과연 필자의 시간은 다시 올 수 있을까? 비단 화려하고 찬란했던 그 옛날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냥 소박하고 단촐한 숨 쉬기 위한 공간이나 시간이 주는 최소한의 혜택이라도 조금 얻을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까?

더는 허접쓰레기에 불과한 명성은 필요 없다. 덧없이 스러지는 물거품 망상은 절대적으로 거절한다. 이미 다 맛도 보고, 누려도 봤다. 그저 이제까지 쌓아왔던 지식이나 경험 되살려 봉사하는 마음으로, 속죄하는 심정으로, 다시금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 만이라도 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다시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필자처럼 실패와 낙오로 뒤쳐진 사람들에게 작으나마 힘을 주는 유통의 기린아로 복귀할 여지가 어딘가 남아는 있을까? 궁금하다. 정말 궁금하다.

필자의 과거 한 자락, 그렇게 열심이었던 그깟 사랑, 그깟 이별, 그게 뭐라고? 그걸로 필자의 모든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렸었지만 그래서, 그것 때문에 어찌해야 하는 건데? 세월이 이만큼 흘렀으니 이제 필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건 아니다. 필자의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필자의 트라우마로, 아픈 상처로 깊이 남아 있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조심 조심 새로운 소망의 싹을 틔워내고 싶다. 그래서 지금부터 열리어질 내일의 날들에는 미소와 평안이 평화의 숨결처럼 싹자라준다면 참 좋겠다.

옛날 한 청년이 스승을 찾아가 지혜를 구했다. “저는 꼭 성공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성공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스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실패가 있단다.” 청년은 스승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스승님, 저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다시 제자에게 말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알아야 해. 성공은 실패의 변형일 뿐이거든.”

제자는 궁금한 마음에 스승에게 물었다. “그럼 세 가지 실패는 무엇인가요?” 스승은 차근차근 세 가지 실패에 대해서 말했다. “첫 번째 실패는 하기 싫은 일에서 성공하는 것이야. 성공의 대가는 얻겠지만, 삶의 의미나 즐거움을 얻기는 어렵지. 두 번째는 하고 싶은 일에서 실패하는 것이야. 계속하면 진정한 성공을 얻을 수 있지. 이 때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실험일 뿐이란다. 마지막 세 번째 실패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실패도 성공도 없지. 그러나 인생을 낭비한 책임을 져야 해. 가장 치명적인 실패지.”

세 가지 실패를 모두 말한 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너는 성공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제자는 깨달음을 얻은 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마지막으로 제자에게 말했다. “그렇다. 그 일을 찾아라. 그리고 신나게 해라. 그러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실패라고 여기는 것은 하고 싶은 일에서 실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때의 실패란 정금이 되기 위해 단련하는 과정이며, 성공으로 가는 길에서 지불하는 수업료일 뿐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자. “많은 인생의 실패자들은 포기할 때 자신이 성공에서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모른다.” 라고 말한 ‘토마스 A. 에디슨’의 충언은 오늘 필자에게 옥조같은 팁을 부여해준다. 필자의 실패는 비록 긴 세월의 상처를 증거로 남겼으나, 또 다시 이어질 성공을 향한 시도의 거울임을 회고한다.

이번에는 스승이 바구니 안에 꽃을 담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바구니인가?” 제자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꽃 바구니입니다.” 다음엔 꽃을 들어내고 쓰레기를 바구니에 담고 물었다. “그럼, 이것은 무슨 바구니인가?” 제자들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승님, 그건 쓰레기 바구니입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래, 너희들 말처럼 바구니에 어떤 것을 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너희들도 이 바구니처럼 내면에 향기로운 꽃을 담아 놓으면 향기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태어났을 때는 모두가 천사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세월이 갈수록 어떤 내면을 가지고 살아왔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자, 오늘 하루 거울 속 우리의 얼굴은 어떨까? 그리고 우리의 내면의 바구니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다.

필자의 상담자 중에 비교적 어린 학생이 있었다. 어느날 그가 말했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왔습니다. ‘넌 아들이니까 부모한테 이렇게 해야지.’ ‘넌 가장이니까 그렇게 해야지.’ 참 많은 압박감 속에서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제게 의지를 많이 하시는 어머니를 볼 때면,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서운한 감정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내가 애쓰지 않으면 그동안 이루어왔던 모든 게 무너질 것 같고, 가족에게조차 가치 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은 생각에 괴롭습니다. 어쩌면 지금 저는 가족들에게 그런 말이 더 듣고 싶습니다. 바로 ‘고맙다’, ‘잘해왔다’, ‘대견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저 한 번 안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듣고 싶었던 말이 있는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사실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그만하면 됐다, 충분하다, 잘하고 있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한 마디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함께 나눌 소중한 누군가가 필요하다.

‘애늙은이’라는 별명을 가진 굴뚝새가 오늘도 굴뚝 위에 앉아서 시름에 젖어 있었다. 어미 참새가 아기 참새를 데리고 굴뚝 위로 날아가면서 말했다. “걱정은 결코 위험을 제거한 적이 없단다. 그리고 걱정은 결코 먹이를 그냥 가져다 준 적이 없으며, 눈물을 그치게 한 적도 없단다.” 아기 참새가 말참견을 하였다. “엄마, 걱정을 그럼 어떻게 해결하여야 하나요?” “네 날개로, 네 발로 풀어야지. 어디 저렇게 한나절 내내 걱정할 틈이 있겠느냐?”

어미 참새가 창공으로 더 높이 날며 말했다. “걱정은 결코 두려움을 없애 준 적이 없어. 날고 있는 새는 걱정할 여가가 없지.” 이 때, 아래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굴뚝 위에 앉아서 걱정에 잠겼던 굴뚝새가 땅으로 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상의 진리는 그렇다. 걱정 근심에 빠져서 쓸 데 없는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려는 노력의 마음과 자세가 스스로에게 밝은 내일을 여는 열쇠가 되어줄 수 있는 법이다.

오늘은 문득 사랑하는 가족들의 신발을 신어보자. 가족의 신발을 신어 봄으로 남아 있는 체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온 질곡을 같이 느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끔 여자주인공이 남자의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장면을 본다. 남자의 크기에, 사랑의 크기를 같이 느껴볼 수 있다는 연출자의 표현일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의 큰 슬리퍼를 신고서 현관을 서성인다. 물론 골라 신었다고는 해도,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남편의 길을 이해한다는 표시일 것이다.

사랑은 길이가 없다. 사랑은 색깔이 없다. 사랑은 무게가 없다. 사랑에는 높이가 없다. 사랑에는 그림자가 없다. 사랑에는 냄새가 없다. 그 옛날 로마시대 때 사랑의 기법은 오늘도 변함 없이 동일할 뿐이다. 그저 조건 없는 사랑이 될 때 사랑은 효력이 상승한다. 신을 신어본다는 것, 그렇게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지 않은가? 모든 일들이 본인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하다 보면 이해득실을 따지게 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득실의 면을 떠나 더없이 순수해질 수도 있는 것이기에 더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은 가장 큰 선물이 사랑이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온전히 누려야 할 것이 사랑이요, 무엇보다 한결같이 변함 없는 것이 가족 간의 서로 사랑이 아닌가 한다. 주어진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생각한다. 필자가 어둡고 고독한 방황의 긴 터널을 빠져나올 때, 정녕 힘겹고 버거워 그대로 넘어지기 쉬웠지만,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준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기에 결국은 헤쳐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세월의 무게 만큼 무겁게 필자를 사로잡는다.

그렇구나. 결국 사람은, 사람이라는 생명체는 사랑의 틀에서, 사랑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 그럴 바에야 주어진 사랑의 가치를, 사랑의 의미를 얼른 깨달아 마음으로 감싸안는 것이 더 올바른 삶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오늘 가을하늘이 더없이 화창하다. 밝고 고운 마음으로 하루를 열고, 그 기분 그대로, 하루 종일이 스스로에게 선물이 되어지는 그런 날이 되기를 바라며 추억의 파노라마를 조심스레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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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나
하나의 눈 있어서
눈 감아도 눈에 사람 보이고
감은 그 눈에 사랑 보이고
눈에 사람의 사랑만 보여져
한껏 행복이라 믿은 어떤 한철 늘 푸르더니

시절 지나,
눈에 물처럼 사람 흐르는 때
눈에 안개처럼 사랑 흩어지는 때
눈에 물안개처럼 그렇게 사람의 사랑 스러지는 때에는

내 눈에 눈물 흘러
나 감은 눈에 눈물이 흘러
사람의 이별이라는 제목은 그토록 서러워라
하염없이 그침없이 속절도 없이
그저 눈물만 흘러, 철철
그냥 눈물만 흘러, 철철

하나의, 나
하나의 눈 있어서
줄줄 눈물은 흐르겠지만 그깟....
난 아무렇지도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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