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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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절 일기 *



시작노트

" 개천절 일기 " 詩作 note

‘개천절(開天節)’은 말 그대로 하늘이 열린 날이다. 여기서 하늘은 곧 나라를 의미한다. 나라가 처음 시작된 날이라는 거다. 서기전 2333년(戊辰年), 즉 단군기원 원년 음력 10월 3일에 ‘국조 단군’이 최초의 민족국가인 ‘단군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개천절은 ‘개천(開天)’의 본래의 뜻을 엄밀히 따질 때 단군조선의 건국일을 뜻한다기보다, 이 보다 124년을 소급하여 천신(天神)인 ‘환인(桓因)’의 뜻을 받아 ‘환웅(桓雄)’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날인 상원갑자년(上元甲子年: 서기전 2457년) 음력 10월 3일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개천절은 민족 국가의 건국을 경축하는 국가적 경축일인 동시에, 문화민족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며 하늘에 감사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적 명절이라 할 수 있다. 허기사 지난 주에 민족 최대의 추석 명절을 지낸 우리로서는, 새삼스럽게 다시금 명절이라는 단어에는 별다른 감흥이 일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국경일이므로,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오늘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뿌듯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로는 덕담 삼아 오늘의 역사를 일컬어 칭송과 찬양일색으로 쉽사리 표현을 할 수 있지만, 웬지 속을 파헤쳐보면 그저 축복과 평안만 흐르는 오늘은 결코 아니다. 반목과 질시가 횡행하고, 이기주의와 극단주의가 팽배한 오늘의 사회적 현실에 혀를 차면서 이 날을 맞이하려니 조금은 민망하고 계면쩍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요즘 다방면에 걸쳐 별로 형편이 좋다고는 할 수 없으니, 그냥 답답하고 고적한 심사가 울혈로 뭉쳐져 치밀어 오르는 폼새라 심히 불만스럽다. 아무튼 분명한 건 작년 ‘개천절 일기’가 지어지던 당시 상황에서 한 발짝도 개선되지 못한 올 해의 현실이라서, 새롭게 좋은 속내로 심금을 울릴 또 다른 시를 지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허기에 못내 불편부당한 처지인지라 느껴져, 남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위는 해본다. 그래도 명색이 개천절인데, 가을의 한 가운데 들어서서 푸르른 하늘과 오곡백과 무르익은 대자연의 결실과 환생을 만끽하는 축복의 계절인데, 닫혀진 마음의 하늘인들 활짝 열지 못할 이유가 무에 있으리요? 작심하고 호흡 한 번 길게 이어본다. 필경 언제고 다시 좋은 날 올테지. 망가지고 부서진 우리네 삶에 새로운 광명과 소망이 의미가 성큼 다가서주겠지. 그리 기대하며 아침을 연다.

요즘 하늘이 참 맑다. 가을이니 당연지사다. 멀리 가지 않고 서울 시내에서도 가을 흥취를 흠뻑 맛볼 수 있는 곳 몇 군데를 소개한 기사를 보았다. 그 중에 ‘하늘공원’이라고 하는 곳이 눈길을 끌었다. ‘마포구 상암동’에 맞닿아 있는 예전의 ‘난지도’가 바로 그 하늘공원이라고 해서다. 여러해 전 까지 난지도는 서울 시민들이 배출한 온갖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다. 그 가까이 가기만 해도 악취로 코를 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 때 거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차가 쏟아놓는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가려내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식료품 이외의 생활필수품을 돈 주고 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쓰레기더미를 뒤지기만 하면 없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엄청난 폐품재활용이 이루어지던 곳이 바로 난지도다.

그랬던 그곳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가을 정취를 흠뻑 안겨주는, 서울에서도 이름난 대표적인 공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낭만적이고 신비롭기까지 한 폐품재활용이 아니겠나 싶다. 이번 가을에는 제아무리 바쁘더라도 필히 짬을 내어, 거기 한 번 꼭 올라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늘공원에서 높푸른 하늘을 올려다 봐야겠다.

폐품재활용을 생각하게 되니까 떠오르는 글이 있다. 1991년 옛 ‘소련’이 붕괴되었다. 그 여파로 인해 직접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된 나라가 ‘쿠바’였다. ‘미국’의 경제 봉쇄 속에서도 소련의 경제 지원으로 겨우겨우 버텨가던 나라인데, 국가를 지원하던 근원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경제 위기가 깊어지면서 가난이 사정없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이 지경에 처해지게 되니까 사람들마다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망가진 전화기 다이얼을 가지고 자동차 냉각팬을 만들었다. 또 어떤 사람은 빈 플라스틱 병을 가지고 택시 표지판을 만들었다. 또 어떤 사람은 쓸모없이 된 작은 플라스틱 곰인형을 가지고 자전거 핸들에 거꾸로 붙여서 경적 울리는 나팔로 사용하였다. 이 정도 쯤 되면 폐품재활용도 예술적인 경지에 도달했다고 봐야겠다.

그런데 사실은 진짜 폐품 가지고 굉장한 예술작품을 이룬 사람이 우리나라에 있다. 바로 천재화가 ‘이중섭’이다. 며칠 전에 어느 지인이 제주도에 갔는데, 거기서 ‘이중섭박물관’ 다녀온 소식을 전해왔다. 그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짠했다고 한다. 이중섭의 대표적인 작품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이 은지화로 알려진 은박지 그림이다.

그는 6.25 전쟁 와중에 작품 활동을 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으니까 그림 그릴 재료가 넉넉할 리 없었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은 물론 없었고, 물감이나 붓도 제대로 가질 수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유독 더 가난했던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정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붙잡아서 그림을 그렸다.

그 중에 하나가 담배 향을 보존하기 위해서 싸는 은박지에 그린 그림이다. 은박지를 잘 편 후에 연필이나 철필 끝으로 눌러서 밑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수채나 유채를 온 화면에 칠한 후에 이것이 다 마르기 전에 헝겁이나 손바닥으로 닦아낸다. 그러면 패인 선에 물감이 스며들어서 선과 각이 나타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친 후에 나타나는 그림은 연필이나 붓으로 그냥 그린 선과는 다르게 철선과 같은 독특한 효과를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해도 담배갑 속의 은박지야 한 번 사용하고 난 뒤에는 폐품이 될 수 밖에 없는 물건이다. 그는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이 폐품,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이 종이를 눈여겨 보았다. 그 종이 위에 자신의 예술혼을 쏟아부었다. 이 은지화는 일찍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중섭이 죽기 한 해 전에 미국 ‘뉴욕’의 근대 미술관에서 그의 은지화가 ‘영구 소장품’으로 결정된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필자는 가끔 천재화가 이중섭의 손에 붙잡힌 은박지를 떠올려본다. 은박지는 언제나 은박지일 뿐이다. 태어나기를 은박지로 태어났다. 담배갑 속에서 담배향을 유지하는 그가 태어난 목적이다. 그 짧은 사명 감당하고 나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폐품이 된 것이다. 그 정도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의 가치이고 그의 목적이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 은박지가 천재 화가의 눈에 띄어서 그의 손에 붙잡혔다. 그림 그리고 싶은 열망에 불타오르는 그의 손에서 이제는 폐품이 된 은박지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위대한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로또 당첨이 되어서 환호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인생 역전’이라고 외치는 광고를 볼 수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뜻 밖에 벌어지는 인생 역전을 꿈꾸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진정한 인생 역전이 되겠는가? 진정한 인생 역전은 이런 은박지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과연 현실세계에서 가능할까? 마치 기적과도 같은, 선택받은 사람만이 기대할 수 있는, 어찌 보면 로또 당첨보다도 어려운 확률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렇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인생 역전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깨우쳐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 자신은 모두가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 진실을 거론하지 않고는 다음의 이야기가 이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별 것 아닌 존재로 여기고, 자긍심이나 자존감을 팽개치는 언행을 일삼는 사람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참으로 안타깝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의 다 없는 사랑과 극진한 보살핌으로 인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 존재의 가치는 태어나는 순간에 이미 부모님에 의하여 빚어진 소중한 역사이며 신화다. 부모님이 전심전력을 다해서 궁리하고 계획하고 땀 흘리는 가운데 우리는 길러졌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임으로 해서, 오늘이 있게 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에게는 자식이 바로 세상 최고의 작품이다. 유일무이한 존재의 의미, 그것이 결론지어 우리 자신이다. 어떻게 이런 소중한 존재가 우리일진대, 힘들다 하여, 실패 좀 했다고 하여, 잠시 뒤쳐졌다고 하여, 별 것 아닌 시시한 존재일 수가 있겠는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부모님이 전심을 다하고 전력을 기울여서 지은 역작이다. 그러니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 수 없고, 남에게 아무렇게나 대접을 받아서도 안되는 존재다. 사람이 동물과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동물은 생존을 위해서 산다.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먹고, 본능적으로 자식을 나아서 기른다. 그리고 누구에겐가 먹히거나 수명을 다해서 죽는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고 윤회다.

그러나 사람은 다만 그런 생존만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사람은 실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 아니라 의미다. 사람도 동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물론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 본능적인 욕구와 함께, 무엇을 위해 먹느냐 하는 의미의 물음이 그에게 있어야 한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나아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벌이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동물의 죽음과 다르다. 동물은 생존적인 존재니까 생물학적인 죽음 밖에 없다. 그처럼 사람도 수명을 다하거나, 병들거나, 사고를 당해서 육체적으로 죽는다. 그러나 사람은 실존적인 존재다. 육체적인 죽음을 맞기 이전이라 할지라도 그는 죽을 수 있다.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살면, 살아있지만 죽은 거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모르고 다만 생존의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으로서는 죽은 거다.

시계가 갑자기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시계를 움직이고 있는 배터리가 수명이 다한 거다. 그걸 꺼내보니까 겉은 말짱하다. 그러나 배터리는 말짱한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안에서 전기를 일으켜서 시계를 움직이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배터리다. 그것이 배터리의 존재 이유다. 배터리의 쓸모다.

아직 겉은 말짱하다. 겉모습만 가지고는 새 것이나 헌 것이나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보기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그 배터리는 이미 수명이 다해 폐품이 된 거다. 그러면 죽은 거다. 우리가 명색이 사람이면서 단지 동물적인 차원에 머물러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출근을 한다.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나아 기른다. 그리고 늙어간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의 삶은 폐품과 다를 바 없다. 생물학적인 동물로서는 살아있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람으로서는 죽은 거다. 물론 사람들 중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자기 나름대로 부여한 도덕적인 의미일 수도 있고, 예술적인 가치일 수도 있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개혁을 외치면서 살아가는 삶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고 싶다고 하여 자기 스스로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라는 공동체 내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공익적이며 가치있는 의미라야, 그래서 구성원 모두가 인정하며 부여해주는 의미라야 진정한 의미이다. 그러면 그런 귀한 의미, 그렇기에 우리가 추구하면서 살아가야 할 의미는 무엇일까?

의미를 깨닫고 살지 못하면 그 삶은 곧 죽은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폐품이 되어져서 이내 버려지고 말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님은 어쩌다 폐품이 되어버리고 만 우리라 해도, 폐품인 그 상태로 버려지는 걸 절대 원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재활용 되어 다시 살아나가기를 원한다.

우리가 너나 할 것 없이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건 아니다. 누구나 무엇인가 비어있고,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산다. 그렇다고 해도 이 삶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삶을 향해서, 완전히 다른 삶을 향해서 나아간다?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때로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뜻하지 않은 재난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자기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마음을 먹게 된다. 심각한 질병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동안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던 정체를 발견하고 변화를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기왕이면 그런 절박하고 급한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이 바로 더 좋은 때임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기에는 지금 당장이 최적기다. 내버려두었다면 쓰레기와 같고, 다분히 폐품과 같았을 우리의 위태로운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재활용하여, 세상에 더없을 인생 역전이라는, 우리 삶에서의 반전의 계기로 삼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미국의 오래 된 시 가운데 ‘거장의 손길이 닿을 때’ 라는 시가 있다. 경매장에 오래 된 낡은 바이얼린이 하나 올라왔다. 3달러까지 부르는 사람이 있었고, 더 이상은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냥 가치없이 경매는 끝날 순간이었다. 이 때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 노인은 마치 보물을 다루듯 자기 손수건을 꺼내 바이얼린의 먼지를 털고 구석구석 정성껏 닦았다.

그리고 현들을 조여서 음정을 잡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 아름다움은 마치 천사의 음악같이 청중들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연주를 중단하고 그 노인은 감회 깊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 있었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아. 40년 만에 너를 만져보는구나.” 그리고는 다시 연주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경매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결국 그 바이얼린은 3000달러에 낙찰이 되었다.

이 시는 누더기가 된 인간, 볼품없어 보이는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향한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서 그 진정한 가치가 되살아난다는 것을 깨우쳐준다. 그 노인의 연주 실력이 아니라 그 노인이 보이는 정성에서 사람들은 바이얼린의 숨겨진 가치와 진정한 의미를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경매 금액의 가파른 상승과 연결되는 것이 당연지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다를 바 없으니, 스스로 귀하게 여길 때 남들도 같이 귀하게 대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람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일과 같다고 한다. 어떤 씨앗은 내가 심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쑥쑥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과연 지금 누군가의 마음에 멋지고 의미 있는 씨앗을 심어 놓았을까? 우리 마음엔 많은 씨앗들이 자라고 있는 것 같다. 누가 심어준 씨앗인지 그저 감사 할 따름이다. 늘 긍정의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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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곤
누군가의 나직한 흐느낌소리 듣습니다
아주 나직한 소리,
어둠속 깊숙한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흐느낌,
누군가가 나 때문에 울고있는 겁니다

세월의 박명속에
정처없이 우두커니 서버린 고아같은 생물,
시간의 익곡,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누가 나쁘달 수도 없는 노릇이며
누가 그걸 구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 첫째,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과오는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첫걸음부터 모든 게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첫단추가 잘못 채워져
그에 따라 모든 게 치명적으로 혼란스럽게 되어버린 겁니다

신경은 바늘끝인 양 예리해지고
절정의 직전처럼 온 몸
허공으로 살짝 떠오릅니다
우주 혼자 유영하는 듯 절대의 고립감 온 몸 조여옵니다

속도의 극점에는 고요의 눈이 있습니다
아득한 고요속 머무는 이순간,
누구나 살의를 품는 순간 있지만
시간속에선 꽃으로 낙화할 뿐입니다
하긴 마음속으로야 열두번을 죽여도
끝내 해소되지 않는 증오 있을 수도 있습니다

습기와 엉긴 늦더위가 진득하게 살에 들러붙습니다
그보다 더 질긴 잠의 흡반이
아득한 구멍속으로 자꾸만 빨아들입니다

개천절이라니 이제 좀 자봐야겠습니다
쪽잠이라도 한잠 자고나면
이 가슴 어느 정도 후련해질까요 ?
맺힌 멍울 조금은 풀려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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