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 ]

위로 이동

* 계절 넘기기가 이만큼이나 버거워라 *



시작노트

" 계절 넘기기가 이만큼이나 버거워라 " 詩作 note

목하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이다. 그냥 큰 명절도 아니고 최대란다. 정말 최대란다. 그러니까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성큼 다가선 온 국민의 명절인 설을 말함이다. 이렇게 설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게 뭐 어쩌란 말이냐? 설이면 뭐가 어떻게 다른 거냐 말이다. 명절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건대, 그리고 최대란 건 또 무슨 말일진대, 무조건 의무처럼 모두가 하나로 때 맞추어 즐거워해야 하고, 기뻐 웃음웃어야 하는 거냐 말이다. 예컨대 지금 이 시점에 대관절 “뭣이 중헌디?” 질문에 답하라면 난감할 따름이다. 아니올시다. 그저 그냥 “노 코멘트”다.

그렇구나.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행복해하고, 만족해하면서 설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어수선한 정국에, 비비 꼬인 일상에, 낭떨어지에 처박힌 경제에, 삭막해진 인심에, 그냥 그런 하루들의 모듬 가운데 끼인, 그저 그런 또 하나의 하루일 뿐인 설날이 온 거다. 그러니 딱히 좋아라 하고 환호성 지를 이유도 없고, 환희에 들떠 목소리 높일 일도 없음이다. 어쩌다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풍속도가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야속하기 그지 없다.

게다가 내내 날씨라도 적선해주는 것처럼 심한 추위 없이 잘 견뎌오더니, 갑자기 삼엄한 대한 추위가 몰아닥쳤다. 한 술 더 떠서 눈폭탄이 지역에 따라서 급습을 해, 선량한 시민들의 시름과 설움에 부채질을 해댄다. 도대체가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할지 영 대책이 안선다. 하늘이 원망스럽고, 계절이 야속하여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앞뒤 사정이 이러하니 이제부터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자세로 이 겨울의 남은 날들을 살아내야 할지 궁리를 해야 할 터수다.

이름 뿐인 명절이 대수고, 허울 좋은 민족 최대가 별 건가? 하루 하루를 넘기기조차 버거워 옷깃 세우고 추위에 떠는 우리의 수많은 이웃들이,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는 가난한 우리의 형제들이, 따스한 온정이 그리워 기린목을 하고 사회의 손길을 바라예는 소외된 우리의 친구들이 오늘도 애타게 목소리 높이고 있거늘, 우리의 올 명절은 절대 풍성해서도, 안락해서도, 그리고 여유로워서도 안된다. 함께 힘겨워 하고, 더불어 숨가빠 하며, 어울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견뎌내야 한다. 우리의 이 계절 겨울을. 우리의 버거운 이 시절을.

나름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대사를 숙제로 부여받고, 정신없이 안팎으로 뛰어다니던 필자도 모처럼 날개 접고 설연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참이다. 그동안 앞만 보고 내닫다보니 체력이나 정신적으로도 방전이 된 듯 하여, 요 며칠은 크게 작심하고 강원도 조용한 도시에서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주어진 휴식의 시간이 영 마땅치를 않다. 도무지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다. 생각은 여전히 치열한 삶의 현장에 가있고, 머리에는 부대끼던 이웃들의 숨소리로 가득 차 있다. 역시 아직은 쉴 때가 아닌가보다. 얼른 추스르고 다시 일어나 겨울 속으로 뛰어들어야겠다. 할 일이 저리도 산적해 있거늘.

물론 필자 하나가 분주하게 뛰어다닌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있을 리는 없다. 이 모자란 힘 좀 기울인다고 해도 도도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조금의 영향력조차 끼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힘겹게나마 변화와 혁신의 물결을 향하여 촛불을 땡기는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간다면, 곧 그런 작은 힘들이 모여 큰 물줄기를 만드는 원류가 될 수 있다는 믿음만은 창대하다. 그리 믿는다. 그 확신으로 스스로를 담금질한다.

고슴도치들은 날이 추워지면 추위를 막기 위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곧 서로의 가시에 찔려 화들짝 놀라며 서로 멀리 떨어진다. 그러면서도 또 추위를 느끼고 서로 가까이 다가가지만, 이내 가시에 찔려 아픔을 피하려 다시금 떨어진다. 그렇게 고슴도치는 추위와 아픔 사이를 왕복하다가 마침내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절묘한 거리를 찾아내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사회를 바라보는 처세의 팁이다. 고슴도치를 스승으로 배운 지혜다.

고사성어 중에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하라는 뜻이다. 어느 한 쪽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느슨해지고, 어느 한 쪽이 너무 멀리 달아나면 끊어지게 된다. 인간관계는 어느 정도 팽팽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 최적의 상태가 된다. 따라서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서로 간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관계는 난로처럼 대해야 합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바르게 살기를 늘 강조한 ‘혜민 스님’의 말이다.

때로는 지나친 관심도 부담스럽지만, 그보다는 무관심과 따돌림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독소가 되는지를 겪어보지 않고, 섣불리 관심의 척도를 재려 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모든 불화나 미움은 소통하지 않고 꽉 막힌 단절과 불통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이 사회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점이 바로 누구도 소외되거나 뒤쳐지지 않도록 알뜰살뜰하게 보살피고자 하는 관심의 마음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고를 만나 사막을 헤매고 있었다. 사막은 불같이 뜨거웠으며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목이 마르고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었으나 기댈 나무나 언덕조차 없었다. 아들은 절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죽음뿐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걸을 필요도 없이 그냥 이 자리에서 편하게 죽는 편이 낫겠어요.”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조용히 타일렀다. “틀림없이 시원한 물과 마을이 나타날 거야. 조금만 힘을 내렴.” 아버지의 말에 아들은 겨우 힘을 내어 걸었다. 그러나 곧 다시 절망하고 말았다. 이들 앞에 커다란 무덤이 보였던 것이다. 아들은 더욱 절망에 젖어 울부짖었다.“아버지, 이 사람도 우리처럼 사막을 헤매다 죽은 것이 분명해요. 더 이상은 희망이 없어요. 이젠 정말 절망뿐이에요.”

그러자 아버지가 힘을 주어 말했다. “아들아, 무덤은 희망의 징조란다. 무덤은 이 근처에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희망의 표시야.” 아버지의 말대로 잠시 후 두 사람은 마을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무덤을 보고 절망한 아들의 말을 듣고 아버지 역시 한탄했다면
이들은 사막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무덤을 희망의 징조로 본 아버지의 말에 따랐기에 이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절망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독제는 바로 믿음이다.

우리가 지금 믿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다가올 내일은 어떤 색깔일까? 우리가 희망을 갖고 바라보는 미래는 어떤 모양일까?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아직 가슴 설레며 무언가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희망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내일에 우리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아야 한다. 언 몸을 서로의 체온으로 녹여주기 위해, 힘을 내서 부둥켜 안고 이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야 한다. 이것이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는 우리의 숙제다.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20년 전, 가족들과 다툼으로 떨어져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와도 전혀 연락하지 않고 살아왔다. 남자에겐 형이 한 명, 여동생이 한 명 있었지만 그들과도 연락을 않고 살았던지라 최근까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는 것을. 우여곡절 끝에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는 망각이라는 완벽한 감옥에 갇혀 계셨다. 처음에 남자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지난 20년간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불효자에 대한 노여움이 지나쳐 연기하고 계시는가 보다 했다.

남자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시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활력이 넘치는 분이셨었다. 그런데 그 때 그 어머니의 모습은 이제 온 데 간 데 없고, 아들을 아저씨라 부르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 치매 노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어머니와 20년 만에 식사를 함께 했다. 저녁 메뉴는 어머님이 고집을 부려 준비한 카레였다. 어머니가 식사 중인 남자를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아저씨는 카레를 많이 좋아하시는가 봐요. 우리 아들도 카레를 좋아해서 이것만 하면 두 그릇씩 먹었었는데...” 어머니는 남자가 다 먹은 밥그릇에 다시 카레를 가득 담아주셨다. 남자는 어렸을 때 카레를 좋아해서 수시로 어머니께 졸라대곤 했었다. 어머니는 치매인데도 그걸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더 이상은 식사를 이어가지 못한 채 남자는 가슴 속으로 울며 부르짖었다.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해주세요.’

영원할 것 같은 시간도 돌이켜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효도해야지... 하지 말자. 부모님은 마냥 기다려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길지 않은 인생,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마음껏 사랑하며 살자. 작은 정성, 작은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구제와 이웃돕기에 주저하지도 말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결국 세상에 있는 것을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소유도 집착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나눔과 공유가 정답이다. 진리다.

두 돌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만성 가성 장폐색증’이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은 ‘가영이’. 음식을 씹어 삼킬 수 없고, 소화할 수 없기에 10년이 넘도록 영양주사만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안타까운 사연은 봉사단체인 ‘따뜻한 하루’를 통해서 소개되어, 많은 후원자분들의 따뜻한 도움으로 지금도 지속해서 후원되고 있다. 다행히도 가영이는 현재 병원이 아닌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집에서 두 번째 생일을 보내게 되었다.

병원에만 있다 보니 또래 친구와 함께하지 못하는 생일이지만 가족이 함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태어나서 병원 침대가 자기 집인 줄만 알았던 가영이는 이제 집에서 주사를 맞으며 생활하는 것이 익숙해진 듯 하다. 올해 14살이 되어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나이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현재는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다. 투병생활만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주사는 아프다. 언제 응급실로 달려갈지 모르고, 수술을 받아야 할지 모르기에 늘 불안해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대신 아파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에, 가영이는 아프다는 말보다 괜찮다며 미소를 보낸다. 어려서부터 늘 병원 침대에서 놀던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서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한다. 종이접기를 한다든가 그림 그리기를 즐겨한다. 특히 미니어처 만들기를 가장 좋아하는데, 제법 꼼꼼한 솜씨를 자랑한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세상을 다 가진 양 행복해한다.

가영이 엄마는 말한다.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하며 고맙습니다. 지금처럼만 가방 메고 학교 다닐 수 있는 건강이 허락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조금 더 바라자면 하루빨리 주삿바늘을 빼고, 남들처럼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도움 주셨던 많은 분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더욱 힘내겠습니다.”

가영이는 현재 아주 조금씩 죽이나 밥을 먹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다. 그리고 올해에도 또 한 번의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잘 이겨냈지만, 앞으로도 가영이의 미소가 영원할 수 있도록 함께 지켜주고 싶다. 우리 이웃의 이런 가슴 시린 사연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대하곤 한다. 그럴 때 마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어떤 것을 깨달아야 할까? 크고 많은 지원이나 구호가 필요한 건 아니다. 아주 작은 관심과 성의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모든 우리의 이웃들을 살리는, 그들이 스스로 소생하게 하는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관심을 끄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자신의 정당한 노력과 성실성에 따른 결과로 남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에는 어떠한 비난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이 오로지 남으로부터 받는 인정이나 관심, 나아가서는 세상의 갈채나 명성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사실 타인의 인정이나 관심은 주관적이며 매우 유동적인 것이다. 나아가서 세상의 명성이나 갈채 역시 어느 순간 찾아왔다가 밤안개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존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타인의 인정이나 관심을 순리에 따라 추구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바라고 매달린다면 자신의 인생은 상처로 가득하게 되고, 종국에 파멸에 도달할 수도 있다. 흔히들 남의 인정이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스스로 명상하면서 자신에게 가만히 물어보자.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자유로운 삶인가, 아니면 남의 인정이나 관심인가?’ 남의 인정이나 관심, 세상의 명성, 어느 것도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으며, 본래부터 나의 것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바라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명성이 아니라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삶이다. 우리가 진실한 삶을 산다면 우리는 자유롭다.

중요한 것은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쳐지는가를 의식하면서 끊임없이 나를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남에게 보여주는 자유로운 삶이다. 최근 젊은 사람들이 한 시도 SNS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나를 누군가와 연결시키는 끈이 떨어지면 자신이 남의 애정과 관심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오늘 인정받고 관심을 끌다가도 내일이면 인간은 다시 허기를 느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인정을 받지 못해 상처받는 경우가 많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나 관심에 초연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욱 존경받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이를 이루지 못하면 불안, 초조의 감정에 휩싸이고, 자신보다 인기가 있는 사람에게는 시기심과 분노를 느껴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최근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탄핵정국이 지루하게 이어지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 어떻게 급변하는가를 본다면 세상의 인기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느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권세를 가진 사람들과 얼마나 친밀한가를 과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는 다른 한 편으로는 상처의 텃밭임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이치에는 상극의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대통령과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국정을 농단하였다는 의혹을 받는 한 여인에 대하여, 그동안 권력의 단맛에 젖어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 여인을 알지 못한다고 증언하고 있음을 보자.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경귀(驚句)를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친밀함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 마음 속에 새긴다면 일부 파렴치한 사람들처럼, 권세를 가진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온갖 추태를 부리는 행태는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월남에서 부상당하여 돌아온 군인들을 위한 대대적인 위문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프로그램의 총 책임자인 감독은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인 ‘밥 호프 (Bob Hope)’를 이 공연에 초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밥 호프는 너무나 바쁜데다가 선약이 있어서 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밥 호프가 없는 위문 공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감독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위로해주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 라며 여러번 간곡히 부탁을 했다.

밥 호프도 끈질긴 감독의 부탁에 “그러면 제가 5분 정도만 얼굴을 보이고 내려와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주최측에서는 그렇게만 해줘도 고맙겠다고 했다. 드디어 공연 당일, 잠깐만 무대에 서서 인사를 하고 내려오기로 했던 밥 호프는 5분이 지나도 끝낼 생각을 안하고, 10분, 15분, 30분, 결국은 애초의 약속과는 달리 거의 40분 동안 공연을 하고 내려왔는데, 뜻밖에도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감독은 5분을 공연하기로 하고 40분을 하게 된 경위와 눈물을 흘리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의 물음에 밥 호프는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 앞줄에 있는 두 친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감독이 나가보니 앞줄에 상이 (傷痍)군인 두 사람이 열심히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오른팔을 잃어버렸고, 한 사람은 왼팔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왼팔을, 왼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오른팔을 사용해서 두 사람이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며 밥 호프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남겼다. “저 두 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 팔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함께 기뻐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된 기쁨을 배웠습니다.” 세상사가 그런 것이다. 이 세상 천지에 독불장군은 없다. 혼자 서서 유아독존의 허세를 부리며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자신이 부족한 것을 이웃들이 채워주고, 이웃의 모자란 부분을 자신의 힘으로 메꾸어주면서 협력과 상생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세상은 말한다. 진정한 사랑과 관심이야말로 자신의 행복을 충족시켜주는 삶의 지름길이라고. 세상은 부른다. 아주 작은 성의와 정성이 커다란 역사를 이루는 근본임을 믿고 시작해보라고.그리고 오늘 세상은 우리에게 경고한다. 제 아무리 이 버거운 계절을 넘기기가 어렵더라도, 반드시 넘겨야 새로운 소망과 사랑이 싹으로 돋는 새 계절, 봄을 맞이할 수 있는 거라고...


" 계절 넘기기가 이만큼이나 버거워라 " 詩作 note 닫기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무쇠벽돌 담장 구멍
을씨년스러운 자투리바람,
꽃샘추위 이름으로
도저한 허무와 쓸쓸함의 아우성,
세상구석 휴지처럼 구겨져 넘기는 계절,

우울한 망상과 허전한 백일몽 사이
오가는 삶속에서
불가해한 인연인 양 꽃피웠다가
구름으로 스러져간 이의 안부
문득 그리워지는 날,

이 가난한 외로움도
골똘하고 하염없거늘
울다울다 지쳐 귀막으니
언뜻 여기저기
꽃눈 틔우는 소리,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