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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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의 삽화 *



시작노트

" 겨울비의 삽화 " 詩作 note

겨울비 내리는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다 문득 되살아나는 삶의 욕구에 은근 소름이 돋는다. 이 쯤 살아왔으면 삶이란 것에 대해서 조금은 여유롭게 대처하는 방도도 어느 정도는 배워 익혔으리라 여겨지다가도, 언뜻 언뜻 흥분과 충동에 몸이 떨리는 걸 경험하면서는,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는 젊음의 기운에 스스로 감동하게도 된다. 영락없는 주책이다. 아무리 자기만족으로 세상 사는 기준을 설정하는 게 사람의 습성이라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이미 한 갑자 이상 살아온 처지에 젊음이 뭔 말이며, 청춘은 또 무슨 가당치않은 지칭인가?

아무려나 세간에 휘몰아치는 ‘백세 인생’의 열풍이 영 남의 일 같지만은 않으니 그리 나쁜 조짐은 아니리라. 이제부터 다시금 시작될 제 2의 인생 설계에 요즘은 심사가 퍽도 분주타. 가능하다면 전반부에 자행했던 실수나 실패는 더 이상 저지르지 말고, 비교적 순탄하고 안정된 일상으로 이어지는 평온한 삶이 필자의 후반부에 펼쳐진다면 더없이 좋겠다.

빈 가지를 바람으로 감싸며 추적이는 겨울비에도 감상이 우러나고, 두터운 외투를 차려입곤 목적지도 없이 길을 떠나는 해거름의 겨울방황도 제법 정겹게 여겨지는 건, 아마도 이제까지 스러지지 않고 주위에 남아있는 낭만과 열정이 물경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혼자만의 여정이 아닌, 더불어 길 가는 동행인을 피나게 그리워하는, 필자의 바람이 그 누군가에게 닿아지기를 막연하게 그리면서 오늘도 주섬주섬 길 나선다.

지금은 겨울이다. 아직은 확실히 겨울이다. 그러나 우수절기를 지난 지금은 봄으로 가는 길목이다. 봄을 준비하고 있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면 들뜨는 게 당연하다. 지금은 누구에게 보일 것도 없이, 혼자의 가슴 설렘만으로도 충분히 피가 뛰어야 한다. 그래야 봄을 맞이하는 예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봄에 대한 배려다. 봄이여, 오라.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한다. 모든 잠자던 것들이 깨어난다. 생동하는 자연은 우리에게 활력과 더불어 사랑을 준다. 따뜻한 기운에 영혼이 데워진다. 그렇게 따뜻해진 영혼은 자꾸 더 많은 사랑을 피워낸다. 그리고는 모두가 행복한 꿈을 꾸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목하 사랑이, 영혼이 춤추는 계절, 봄이 멀지 않았다. 힘껏 밖으로 뛰어나갈 준비를 서둘러야겠다. 사랑을 하러, 영혼을 불태우러.

‘스토리텔링으로 힐링하라’의 작가 ‘안하림’은 “사랑과 영혼은 동의어이다”라고 말한다. 심리학자들은, 우리 몸의 3대 영양소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듯 행복한 삶을 위한 영혼의 3대 영양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영양소는 ‘자유, 유능, 관계’라고 말한다. 그런데, 인문적 사유의 측면으로 보면 그건 영혼의 영양소가 아니라 육체(physical)의 영양소이다.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의 속성은 지극히 육체적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어떠한 물리적 행위로도 구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구속하면 할수록 영혼은 자유롭다. 만일 자유가 영혼의 영양소 중의 하나라면, 그래서 자유를 갈망한다면, 영혼이라는 본질은 지극히 제한받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는 영혼을 자유라는 틀에 끼워 넣는 순간, 그건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게 되고, 심리적 자극에 영향을 받는 마음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 된다.

또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유능감에 대한 욕구나 인간관계를 영혼의 3대 영양소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심리학적인 발상이다.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심리를 영혼의 영양소로 비유하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없는, 그럴듯 한 언어적 유희이다. 그건 인간의 영혼을 형이하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하는 오인이다. 인간의 영혼은 오직 형이상학의 관점에서만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을 다른 말로하면 사랑이다. 인간의 영혼은 사랑을 통해서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그래서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들은 사랑 안에서 저절로 충족되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또한 인생에 있어 관계, 그것도 인간관계 (Relationships)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영혼의 영양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혼이란 추상적인 단어 이전에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랑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에 어떠한 추가적인 단어 인식이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영혼에다가 다른 수식어를 붙일 경우 자칫 귀신이나 유령처럼 혼령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과 영혼이 동의어이고, 인간의 삶의 목적은 오직 사랑의 활동, 즉 영혼의 발견에 있다. 영혼의 발견이란, 우리가 왜 사랑하는가이다. 그것은 시작이 하나였으며, 끝이 다시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이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영혼의 순수로 거듭나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의 영혼으로 머물지 않는 삶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영혼은 사랑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사랑과 영혼이 온전한 하나일 때만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영혼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지 궁금해 하고, 보고 싶어할 지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있는 건 의외로 쉽다. 조용히 눈을 감고 사랑을 깊이 느끼면 된다. 어떤 대상이 떠오르든지 개의치 말고 계속 사랑 안으로 몰입하게 되면 어떤 형체가 보이게 되는데, 엄마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으며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처럼 자신의 영혼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거나, 언젠가 과거의 본인으로 보인다. 그 모습이 보이는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고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게 된다. 비로소 그 때 영혼이 선명하게 자기 자신이라는 인식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막연하고 추상적인 견해라서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은 지론이다. 그러나 확실한 건 우리에게 영혼이 있고 또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이다.

그걸 구태여 부인하려 하지 말고 진리로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사랑을 시작하는 기본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아주 사소한 시작점에서 기인하기도 하고,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시도에서 싹트기도 한다. 사랑은 자신을 위한 마음의 조화이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첩경이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적이다. 그래서 사랑은 변화무쌍하다. 그리고 공존이다.

‘아프리카의 옥수수추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아름다운 꽃으로 수놓아져 있는 ‘아프리카’의 아름답고 넓은 들판, 그곳에 첫 발을 디딘 ‘김순권 박사’는 감탄이 아닌 근심으로 가득했다.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꽃은 곡식 재배에 치명적 피해를 주는 ‘스트라이가(일명 악마의 풀)’였기 때문이었다. 스트라이가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 전 지역은 물론 ‘인도, 태국, 호주, 미국’의 일부 농산물에 까지 침범하여 큰 피해를 끼쳐왔다.

지금까지 선진국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가 막대한 연구비를 들여가며 스트라이가를 막을 방제법 개발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했다. 김순권 박사 또한 거듭된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없앨 수 없다면 이겨보자” 스트라이가를 없애는 방법이 아닌, 스트라이가를 이길 수 있는 강한 옥수수 품종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그의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몇 년 동안의 거듭된 연구 끝에 드디어 스트라이가를 이길 수 있는 강한 옥수수 품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해마다 백만 톤의 옥수수를 수입하던 ‘나이지리아’는 오히려 수출하는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됐다. 김순권 박사의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나이지리아에서는 ‘자군몰루(위대한 뜻을 이룬 사람)’와 ‘마이에군(가난한 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사람)’이라는 명예 추장의 자리를 주었다고 한다.

이는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영예의 칭호라고 한다. 김순권 박사는 이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누어, 굶주리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 지금도 아낌없이 헌신하고 있다. 자신이 갖춘 좋은 능력을 타인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보다 보람된 삶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혼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실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특정된 어디론가 가서, 특별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속해있는 작은 누리에서라도 자신이 가진 능력과 성의를 다해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실현되는 결과는 기적처럼 드러나서 결국 위대한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혹시 능력이 작거나 부족한 것 같다고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필요 이상의 저평가로 단정을 짓고 있지는 않는가? 작은 능력이라 할지라도 나눔을 거듭하다 보면 기분 좋은 결실이 되어 누군가의 삶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다. “내 안에 빛이 있다면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위대한 선교사 ‘알버트 슈바이처’ 의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혼자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는 건, 뜻밖에도 결국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빈 털털이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심혈을 기울여 모아들인 부나 축적된 명예는 아무리 강한 의욕과 방비를 가지고 있어도, 결과적으로는 어떤 소유도 영원히 유지시켜주지는 못하며, 오히려 마음을 열어 베풀고자 하는 측은지심이 자신의 것을 지키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세상에 과연 진정한 ‘내 것은 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세상의 모든 문화 콘텐츠는 최초의 누군가가 만들어 내는 가치 기준의 결과물이다. 그 중에서도, 이야기를 처음 만들어 낸 사람이 반드시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습득되어진 뇌로, 그 이야기가 마치 내 것인 듯 착각하는 것이 지식과 다양한 예술적 혹은 문화 콘텐츠들이다. 유명한 감독은 누군가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며, 작곡가 역시 다른 음악가의 연주곡을 들으면서 자신만의 곡들이 태어난다.

또 글을 쓰는 사람들도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은 것이 먼저이면서, 어느날 마침내 당대의 유명한 작가가 된다. 누군가의 강의를 들은 사람이 훗날 명강사가 되어 청중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멋진 강의를 할 수 있다. 좀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책을 읽거나 이렇게 매일매일 올라오는 메인 글을 읽는 이유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글을 쓰지 않을 사람이 뭐하려고 책을 읽고, 메인 글을 읽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강의를 듣는 것은 강의를 하기 위해서이고, 공부를 하는 것도 결국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식 없이 산다는 것은, 내 것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배우고 보고 들었다면 가르치고 쓰고 말해야 하는 것이 ‘나’라는 주체로 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단, 전문가나 직업인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내가 나를 지각하고 인식하면서 내 것을 만들지 않으면 평생 내 것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메인 글을 읽고 댓글, 그러니까 단 한 줄이라도 내 글을 쓰는 것은 인문적 사유의 첫 걸음이고, 몇 개월만 하면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발전한다. 누구나 꼭 책을 쓸 이유는 없지만, 그러한 상황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슈퍼컴퓨터 보다도 뛰어난 뇌를 가진 존재들이 다른 사람들이 생산해낸 것만 먹고 산다면, 스스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길들여지고 사육당하고 세뇌와 착각으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내 것은 어디 있는가?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돈을 지불하고 산 것들만 눈에 보일 것이다. 그게 어디 진정한 내 것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들도 가진 똑같은 물건들은 그것을 최초로 상상하고 현실화 시킨 사람들의 것이다.

나는 단지 그들이 창조한 것을, 돈을 내고 빌려 잠시 사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댓글 한 줄을 우리의 낯선 생각에서 찾아낸다면, 그 순간 우리는 작가로 데뷔한 것이며, 주체적인 존재로 비로소 첫 걸음을 뗀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는 없는, 인간은 비교의 대상이 아닌 절대적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확실하고 명확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달아, 스스로의 노력과 시도로 진정한 자신의 소유를 마련하는 삶의 태도가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길을 걸어가는 주체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막연한 추측이나 단정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하고 평가해서는 안 되듯이,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함부로 휘둘리지 않는 절대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삶의 본질은 결국 자신이 만들어가는 바탕이다.

어느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칡넝쿨을 거두려고 붙들었는데, 그것이 하필 그늘에서 자고 있던 호랑이 꼬리였다. 잠자는 호랑이를 건드린 나무꾼은 깜짝 놀라 나무 위로 올라갔다. 화가 난 호랑이는 나무를 마구 흔들었다. 나무꾼은 놀라서 그만 손을 놓아 나무에서 추락했는데, 떨어진 곳이 호랑이 등이었다. 이번에는 호랑이가 놀라 몸을 흔들었고, 나무꾼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호랑이는 나무꾼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꾼은 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호랑이 등을 더 꽉 껴안고 있었다. 그런데 한 농부가 무더운 여름에 밭에서 일하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불평을 한다. “나는 평생 땀 흘려 일하면서 사는데, 어떤 놈은 팔자가 좋아서, 빈둥빈둥 놀면서 호랑이 등만 타고 다니는가?” 농부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호랑이 등을 붙들고 있는 나무꾼을 부러워했다.

때로 남들을 보면 다 행복해 보이고, 자신만 고생하는 것 같다. 자신은 뜨거운 뙤약볕에서 일을 하고, 남들은 호랑이 등을 타고 신선 놀음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면 사람 사는 것이 거의 비슷하다. 자신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자신과 똑같은 외로움 속에 몸부림친다. 남과 비교하면 다 본인의 것이 작아 보인다. 그런데 자신에게만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들어가 보면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다. 비교해서 불행하지 말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하루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쓸 데 없이 마음 속에 우상을 만들어놓고, 채워지지 않는 욕심으로 인해 스스로 불행을 앞으로 당겨놓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까 생각해봐야 한다. 우상이라는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본질이 있어야 할 곳에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누군가는 현대인의 우상은 출세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자아를 말한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고, 자식이 우상이 되어 중심을 차지하기도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돈이 마음의 우상이 되어 소중하고 꼭 있어야 하는 다른 가치들을 버리게 만든다. 물론 돈과 재물은 사람과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며, 자본주의란 돈이 모든 사회 질서의 기초를 이루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의 오류는 사람이 돈을 소유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돈이 사람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돈을 쫓다가 어느 샌가 돈에 쫓기게 되고, 이윽고 돈에 포로가 된다.

세상 어느 누구도 돈으로 만족한 사람은 없고, 차라리 돈이 없었으면 겪지 않을 일을 돈이 있어서 겪는 고통도 있다. 재물이란 ‘맘몬’이라는 거짓 신이다. 이처럼 돈의 속성, 즉 재물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되고자 한다. 따라서 돈이라는 맘몬 신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부모형제도 보이지 않는다. 탐욕에 눈먼 자들의 인간관계를 보면 재물이 인간에게 제 스스로를 숭배받길 원하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돈은 필요하지만 이것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는 순간 내가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오히려 나를 소유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으려는 기본적 속성을 가진다. 더 나아가 아첨과 아부를 하며 가진 자들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거짓된 자기 우상이 숨어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친절한 말은 언어의 자기 배신이다.

인간의 자기 중심성,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자기 중심성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사람 만이 자기 안의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우상들을 걷어내게 되면 비로소 다른 존재들이 보이게 되고, 그들에게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는, 행동하는 신념이 생겨난다. 내 안에 우상을 가진 사람이 이타적인 사랑을 알 리 없고, 자기 중심성에 갇힌 사람이 고통받는 이들 곁에 다가갈 수는 없다. 내 안에 어떤 우상들이 있는지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바라기에는 긴 겨울의 질곡을 달려오면서 혹시 알게 모르게 쌓여진 아집이나 독선이 있다면 툭툭 털어버리고, 다가오는 새 봄에는 지금 보다는 더 나은 삶의 삽화를 그려나가는 보람이 새 순처럼 싹터 오르기를 기대한다. 그런 간절함으로 겨울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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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창살 쳐진 창으로 흘러드는 빗방울과
쇠창살에 동강난 음영 그림자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해독할 순 없지만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시간의 무늬 무심히 바라보다

부드러운 묵인이 의아하다

가등불빛 겨울비에 부서져내리고
코끝 내려앉는 미세한 안개방울
두 눈동자 한데 모은 채 망연히 쳐다보다가
어찔어찔해서 이내 그만두다

겨울비 나리는 날의 삽화,
세상은 내게 참 많은 걸 주었으나
나는 세상에게 아무것도 주질 못했구나

그것이 나를 꽤 슬프게 하다

세상에는 낡은 가면 벗지 못하고도
사랑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데
감춤에의 욕구와 노출에의 욕망,
내 사랑의 기나 긴 그림자 찾아
거리로 나서고 싶다

겨울비 나리는 시끄러운 거리,
익명의 그 거리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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