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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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루 바닥 *



시작노트

" 마루 바닥 " 詩作 note

“일전에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그런데 그냥 한 편의 영화라고 하기에는 왠지 죄스럽다. 다시 이야기하자. “일전에 역사의 한 시절을 보았다.” 제목은 ‘동주’다. 영원한 우리민족의 감성지킴이 ‘윤동주시인’의 일생을 그린 흑백영화다. 은은한 추억의 색을 단순한 시선으로 처리함으로 더할 수 없는 감동과, 잊혀질 뻔 했던 서정을 되살리는 데 성공을 했고, 가슴 속 깊이 숨겨져 있던 세월의 비감까지 시심으로 들춰낸 역작이라고 평가받는 영화다.

물론 이 영화가 이른바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다른 오락영화들처럼 많은 관객몰이를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는다. 입소문을 타고 더 많은 입장객들을 불러모을 확실한 계기나 극적인 반전 장면이 없으니, 그냥 관심있는 사람들이 일시적인 관심을 표명하다가 말 거다. 필경 그렇게 또 다른 세월의 뒤안길로 묻혀져 갈 거다.

필자도 사실 그다지 흥분된 시선으로 끝까지 영화를 감상했던 건 아니다. 어차피 역동적인 사건이나 짜릿한 스토리가 담겨져 있지도 않은 채, 그냥 시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한 교도소에서 약물에 의해 사망하기 까지 일련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서술하듯이 그렸으니, 어찌보면 지루하고 답답한 구성과 전개가 반복되어 이어지다가 허무하게 끝이 나는, 그저 그런 내용을 그린 기록영화의 아류일지도 모른다.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면서도 윤동주 시인을 그린 영화는 왜 하나도 없을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준익 감독’의 후일담이다. 영화에는 ‘북간도’에서 태어나 보낸 10대 시절부터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할 때 까지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특이한 점은 윤동주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후쿠오카 교도소까지 함께한 친구 ‘송몽규’를 함께 등장시켜 윤동주의 삶의 현실감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영화는 독특하게도 흑백으로 진행된다. 엔딩크레딧의 자료사진 몇 장을 제외하면 정말 단 한 번도 컬러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윤동주 시인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학사모를 쓴 흑백사진이지 않나? 또한 5억원의 저예산 영화인지라 세트와 의상, 분장에 많은 돈을 쓸 수 없었다. 흑백으로 찍으면 옛날 분위기가 나오더라.” 라고 그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감독의 말대로 흑백의 화면은 상당히 효과적이다.

컷 하나하나가 그 시대의 재연 같아 보인다. 국어 교과서 속 사진의 윤동주 시인이 살아 숨 쉬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래서 이 영화는 비현실적이다. 당연하지만 이야기의 진행은 윤동주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후쿠오카 교도소에 수감되어 심문을 받는 현재와 과거가 교차 편집된 병렬구조의 서사다.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윤동주를 심문하는 일본경찰은 송몽규의 행적에 대해서 윤동주에게 묻는다.

송몽규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대부분의 삶을 함께 했기에 윤동주의 삶에서 송몽규가 차지하는 크기는 절대적이다.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진학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이유에는 송몽규가 있었다.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윤동주는 문예잡지를 만들고,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일본에서까지 학생운동을 이끄는 송몽규를 바라본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것은 송몽규에 대한 열등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중요한 점은 송몽규가, 과정은 치열하지만 결과가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문예잡지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임시정부로 떠나고 나선 환멸만을 느끼게 되었으며, 일본에서의 학생운동은 하나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로 제압당한다. 언제나 열정적이었지만 남은 결과물이 없었다. 아마 사람들이 송몽규라는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반대로 윤동주는 확실한 결과물이 남았다. 그가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죽고 난 뒤 1946년에 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시집이 그 결과물이다. 윤동주는 인생의 굴곡마다 시를 썼고 시로 족적을 남겼다. 송몽규는 윤동주를 보며, 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이름 뒤로 숨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는 결국 세상에 남았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되뇌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며 부끄러운 삶을 경계했던 윤동주 시인은 그 댓가로 일제에 의해 젊은 나이, 스물 여덟에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조국의 비참한 현실과 민족의 아픔 속에서도 사랑과 독립의 희망을 기록하며,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고자 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의 시절 속에서 가장 빛나는 청춘을 보냈다. 순국한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 이유다.

영화 중에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라는 구절과 함께 수갑 찬 양 손을 잡는 장면에서, 그럼에도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은 윤동주의 어떤 결의가 느껴진다. 사실상 전기영화라는 한계점이 명확한 영화였다. 몇몇 장면들은 지루하고, 국어 교과서와 역사 교과서를 함께 공부하는 듯한 피로감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의 시가 종종 관객들의 귀에 들려올 때, 흑백의 화면이 배우들의 호연과 어우러질 때, 영화 ‘동주’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비록 윤동주 시인의 시는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접해본 것이 전부지만, 영화는 그의 시를 가슴까지 전해 주었다. 은은한 감격과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울음으로 영화의 끝을 마주하고 나니, 한동안 아무 생각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곤 영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두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몇 번이고 흔들어야 했다.

영화를 감상하고 돌아선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점점 더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아직도 또렷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갇혀있던 감옥, 교도소 다다미방의 마루바닥이, 옹기종기 줄지어 뭉쳐있던 교도소의 창틀이, 휑하니 찬 바람 불던 조악한 나무 침상이, 그리고 그 속에서 약에 취해 혼절하며 머리 부대끼던 시인의 잠이, 자꾸 생각난다. 고통스러워 하던 그 잠 속으로 자꾸 빠져든다. 눈 감으면 보여지는 시인의 잠이, 지금 필자의 잠 속으로 자꾸 이입된다.

자유를 잃고 작아지는 육체 대신, 자유를 갈망하여 점점 더 커지는 영혼의 방황이 너무도 서러워, 그 잠속에서 필자는 시인의 손을 잡고 펑펑 운다. 시인의 무릎 앞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다가 잠이 깬다. 시인이 다녀간 잠 속에서 부대끼며 어울렸던 그리운 시인의 체취를 다시 맡으려 코를 벌름인다. 시인을 향한 신앙이, 시인을 그리는 염원이, 오늘을 사는 필자의 가슴에 한으로 맺힌다.

우리 민족의 기개와 의지를 전 세계에 표방하는 기미 독립만세의 함성소리가 울려 퍼진 ‘삼일절’ 기념일이 지났다. 해마다 이 맘 때면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며 호국영령을 향한 존경과 경배의 염원을 한 데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그 시절에 온 민족이 겪어야 했던 극심한 고통과 처절한 애환을 잊지 않으려고 다짐하지만,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아 까맣게 잊어버리곤, 앞다투어 망국과 배신의 입장으로, 버릇처럼 되돌아가곤 하는 게 모자란 우리들의 값싼 실정이다.

어쩌면 생각도 양심도 없는 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일부 지각없는 사람들의 습관이라 그리 간주하고 싶다. 잘못된 인식을 가진 극소수 사람들의 실수일 뿐이라 그리 치부하고 싶다. 예컨대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오히려 이 시대를 이끌고 가는 지도자들과 존경받는 위정자들이 뒤로는 더하다고 말하면 안되는 건데, 상류층과 지식인들의 의식구조가 더욱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하면 안되는 건데, 그래서 그들을 원망하고 손가락질하면 오히려 큰 벌을 받게 될 실수를 하는 건데, 그런데 왜 필자는 자꾸만 그들을 쳐다보게 되는 걸까?

영화 속에서 청년 윤동주와 대면한 ‘정지용’은 이렇게 말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지.” 영화를 대하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문해봐야 한다. “부끄러움을 아느냐?”고. 그리고 그 질문은 예리하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내용을 달리하여 물어오는 걸 깨달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아느냐?”고. “진정 부끄러운 게 뭔지 아느냐?”고 역사가 질문을 한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자. 남은 날들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지, 우리의 인연은 또 얼마나 귀한 의미인지, 그걸 알기 위해서 더욱 아름답고 고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하자. 우리가 살면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약속은 무엇일까? 친구와의 약속을 어기면 우정에 금이 간다. 자식과의 약속을 어기면 존경이 사라진다. 기업과의 약속을 어기면 거래가 끊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메모를 해가며 약속을 지킨다. 하지만 꼭 지키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약속도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의 약속이다. 약속을 어겼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기에, 그리고 그 때 그 때 쉽게 스스로를 용서해주기에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엔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나를 믿지 못한다면 세상에 나를 믿어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맨 먼저 지키자. 어쩌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약속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과의 약속에 순응한 뒤에, 다음에는 눈을 들어 이웃을 바라보자. 남들이 자신보다 못나고 부족한 점을 애써 발견하려 들지 말고, 자신이 남들보다 모자라고 뒤떨어지는 걸 먼저 발견하고 드러내며 기꺼이 인정하자. 그것이 대인 관계가 좋은 사람을 이웃으로 보유하는 첩경이다. 사람을 사랑하되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거든, 나의 사랑에 부족함이 없었는가를 살펴보자. 사람을 다스리되 그가 다스림을 받지 않거든, 나의 지도에 잘못이 없었는가를 살펴보자. 사람을 존경하되 보답이 없거든, 나의 존경에 부족함이 없었는가를 살펴보자.

행하되 얻음이 없거든, 모든 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자. 내가 올바르다면 천하는 모두 나에게 돌아온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데, 우리는 먼저 남을 탓할 때가 많다. 잘못은 내게 있는데, 내가 오해받을 일을 했는데, 남의 탓으로 우선 돌리면서 화를 낼 때가 많다. 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내 실수인 줄 알면서도, 알량한 자존심과 유치한 자기 체면 때문에 먼저 다가가 사과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은데, 나라는 존재가 한 번 숙인다고 버릴 명예도 없는데, 먼저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미안해” 그 한 마디면 다시 사랑할 수 있고, 다시 다정한 이웃이,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데, 왜 먼저 다가가 손 내밀어 화해를 청하는 큰 마음을 갖지 못할까? 내가 먼저 숙이고, 내가 먼저 이해하고, 내가 먼저 인사하면, 내가 먼저 사과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따뜻한 마음을 만날 수 있는데 왜 나는, 왜 우리는 성큼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할까?

지금은 그 사람의 잘못이 크다 해도, 내가 먼저 큰 사람이 되어 마음을 먼저 열기만 하면 그 사람은 오히려 낯이 붉어지며 미안해 할텐데, 그 멋진 일을 먼저 하고 싶은 욕심을, 그 아름다운 일을 왜 먼저 못할까? 내가 먼저 미안해 하고, 내가 먼저 고마워 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배려하면, 세상은 아늑하게 느껴지고, 정겨운 사람들만 보여지게 된다. 그러면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따뜻해지고, 콧등이 시큰해질 거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더 이상 마음을 열지 못할까? 내가 먼저 큰 사람, 내가 먼저 큰 마음이 되어, 긍정의 말들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 먼저 손을 잡아주는 진실어린 마음을 나누는 자세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를 먼저 앞세우지 말고 남을 먼저 생각해주는 사랑의 훈훈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물론 먼저는 어렵다. 무엇이건 먼저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나의 잘못과 부족함을 먼저 인정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자존심과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잘못을 모면한다거나 나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서 남의 탓을 하는 것 만큼 어리석고 비겁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일생에 거쳐 가장 큰 재산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을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가 느끼는 것만이 보이고, 또 보이는 것만이 존재한다. 우린 너무나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다. 느끼질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별이, 저녁놀이, 날이면 날마다 저리도 찬란히 열려 있는데도 우리는 그냥 지나쳐 버린다. 대신 우린 너무 슬픈 것들만 보고 살아가고 있다. 너무 언짢은 것들만 보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속이 상하다 못해 좌절하고 자포자기까지 한다.

희망도 없는 그저 캄캄한 날들만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원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어렵게 보기 때문에 어렵다. 그렇다고 물론 쉬운 것도 아니다. 인정한다.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반 컵의 물은 반이 빈 듯 보이기도 하고, 반이 찬 듯도 보인다. 비었다고 울든지, 찼다고 웃든지, 그건 자신의 자유요, 책임이다. 다만 세상은 내가 보는 것만이 존재하고, 또 보는 대로 있다는 사실만은 명심해야겠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존재하는 세상이 그래서 좋다. 비바람 치는 캄캄한 날에도, 저 시커먼 먹구름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여유의 눈이 있다면, 그 위의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평화스런 나라가 보일 것이다. 세상은 보는 대로 있다.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두 눈이 있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두 귀가 있어 감미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두 손이 있어 부드러움을 만질 수 있으며, 두 발이 있어 자유스럽게 가고픈 곳 어디든 갈 수 있고, 가슴이 있어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나에게 주어진 일이 있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있고,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하루하루의 삶의 여정에서 돌아오면 내 한 몸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을, 날 반겨주는 소중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자.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을 생각하자. 아침에 보는 햇살이 기분을 맑게 하며, 사랑의 인사로 하루를 시작하며,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에서 마음이 밝아질 수 있으니, 길을 걷다가도 향기로운 꽃들에 눈이 반짝이며, 한 줄의 글귀에 감명 받으며, 우연히 듣는 음악에 지난 추억을 회상할 수 있으며, 위로의 한 마디에 우울한 기분을 가벼이 할 수 있으며, 보여주는 마음에 자신의 마음도 설레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누리는 참 행복을 생각하자.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건강한 모습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이 아름다운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오늘도 감사하다는 믿음, 오늘이라는 좋은 날에 한 번 정도 자신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거울이 있다면 좋겠다. 부족했던 것들을 채워갈 수 있고, 아쉬웠던 것을 더 많이 후회하지 않도록, 그런 자신만이 간직하는 마음의 거울이 늘 곁에서 지켜주고, 함께 해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지치고 힘들어도 위안을 받을 수 있어 좋고, 슬프고 괴로워도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 속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어 행복하듯이, 우리들의 마음도 늘 이렇게 이어졌으면 참 좋겠다. 하루의 시간들이 변화 속에 요동을 치면서도, 저물어 가는 길엔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더하듯이, 앞으로 이어질 날들을 비록 미리 알지는 못하지만, 결국은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선물을 축복처럼 듬뿍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로 우리가 살아간다면, 모름지기 세상은 조금은 더 평화스러울 것이다.

이제 다시 아침이 밝아온다. 밝은 햇살이 온 누리에 퍼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정녕 이 세상이 온통 죄악으로 얼룩져, 폐쇄된 마루 바닥처럼 딱딱하고 음습한 교도소로 변해가지 않도록 해야겠다. 언제까지나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여 이룩한, 부드럽고 포근하며 영원한 쉼터가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그리고 그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존경하는 시인의 마음을 닮아가야겠다.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럼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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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가만히 잠겨 마루 바닥 내려다본다
뻥 뚫린 옹이구멍 가슴팍엔 아주 오래된 나무 냄새,
결이 거칠게 어떤 무늬 그린다

이 무늬위엔
얼마나 많은 한숨과 죄의 발자국이,
얼마나 오랜 시간들이 새겨져 있으려나
얼마나 섧은 아픔들 보이지 않게 남겨졌으려나

오늘 나 흘린 눈물도 속속들이 여기 스며들어
누군가에겐 흔적이 되고,
누군가의 기억도 되다가
새긴 얼룩으로 남겨져서는
뒤에 올 누군가의 발에 한숨으로 밟혀질테지

지나간 누군가의 눈물 내가 밟고있듯
여기 흘려질 또다른 누군가의 눈물
또한 그 밑 내리깔려
나무 바닥 썩히며 긴긴 시간으로 이어질테지

사연마다 피흘려
상처로 돌고 돌다가
눈물처럼 색바래고 한숨처럼 결 닳아지면
영원처럼 내일로 흘러갈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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