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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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의 겨울 *



시작노트

" 내 마음의 겨울 " 詩作 note

요 몇 주째, 도대체가 시작노트를 적자고 고르는 시라는 게 다 천편일률적으로 음습하고 어둑어둑하다. 그러니 자연 노트를 작성하기도 신이 안난다. 정작 필자가 골라놓고 누구를 탓하랴만, 아마도 사는 게 신이 나지 않으니 여간해선 시란 것도 게갈이 나질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냥 적당히 숨만 붙어서 가르릉거리는 길고양이마냥, 세상을 향해 모진 눈만 치켜뜨고 적당히 빈 칸을 이어갈 따름이다. 거울을 보니 참 한심스럽다.

이 겨울이 가면 정말 꽃 피고 새 우는 새 봄이 오려나? 엄동설한의 끝에선 진정으로 바라예는 따스한 계절이 줄을 이으려는가? 허나 지금 같아서는 어림도 없을 터다. 그럼에도 바라기에는, 필자도 이젠 진정으로 아름답고 고운 시 좀 한 번 써보고 싶다. 세상을 보면서, 자연을 느끼면서, 저절로 신이 나서 흥얼거리며 멋들어진 스케치로 시를 지어올리고 싶다. 평화와 번영과 안정의 터전 위에서 소망과 꿈과 행복의 노래를 목청껏 불러제끼고 싶다. 이게 정녕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이라는 건가? 정말 세월이 야속하다. 삶의 얼굴이 한탄스럽다.

막장드라마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것 같은 엉망진창의 느낌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즈막이다. 도대체가 끝을 알 길 없는 대립과 반목이 온 광장을 가득 메우고, 찬 겨울바람 보다도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다. 어제까지는 서로 손 맞잡고 함께 노래하며 이웃간의 정을 나누던 소중한 사이였는데, 오늘 우리가 어째서 이렇게 핏대 올려 아우성치며,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예컨대 명분 싸움이 극에 달했다. 자신이, 자신들의 조직이,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가 가지고 있는 생각만이 옳고, 무조건 정의여야 한다는 아집이 온 세상을 물들이고 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은, 두고 볼 것도 없이 모두가 적이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당들이라는 확고한 결론과 신념이 스스로를 좀먹고 있는데도 자신만 모르고 있다. 그 자신들이 쏟아져나와 광장을 가득 가득 메우고 있다. 대관절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가?

누가 우리를 서로 미워하고, 목청 높여 성토하도록 조장하고 있는가? 누가 이 나라의 분위기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메마른 광야에서 몸부림치며 과로워해야 하는 건가? 어차피 지나고 나면 희석되어질 명분 하나 차지하려고, 이토록 고생하면서 극렬한 투쟁의 역사를 새겨야만 하는 건가? 보이지 않는 피를 온 누리에 뿌리며 서로 상처 내고, 그 상처를 다시 헤집어 아픔을 강요해야 하는 건가?

진실로, 진실로 말하건대 우리는 죄가 없다. 우리 모두는 피해자다. 촛불을 들고 있는 저 시민들도, 태극기를 몸에 감은 저 시민들도, 아무 죄 없는 선량하고 착한 형제요, 이웃이요, 동료다. 뒤에 숨어서 싸움질을 부추기고 있는 무리들은 앞으로 나서라. 비겁하게 자신의 속내는 감춘 채 인기에 편승하려고,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올라타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쓰는 간신배들은, 매국노들은, 파렴치한들은 이제 모습을 드러내라.

광장에 엎드려 석고대죄하면서 분노한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라. 그리고 비록 많이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양심과 진실의 목소리에 귀를 열어라. 파괴와 퇴보를 조장하는 어둠의 세상에서 걸어나와 빛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라. 한 걸음씩 천천히 걷기 시작해라. 위대한 우리 국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막고 있던 그 길에서 비켜라. 얼른 물러서라. 마지막 경고다.

앞으로 필자는 시국을 한탄하는, 비판하는 글은 안쓰려고 한다. 힘 없고 모자란 필부 주제에 이 너른 세상을 향해 소리질러봤자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걸, 진즉에 모를 리 없었기에 웬만해서는 현실에 입각한 시사나 풍자조차도 금하고 살아온 세월이었는데, 어쩌다가 근래에는 글을 쓸 때 마다 한숨부터 나오고 눈물이 먼저 솟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머리가 시키는 대로, 시작노트나 다른 칼럼을 통해서도 필자의 작달막한 소견을 밝히곤 했었지만 이젠 정말 지쳤다.

그래서 이 노트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탓하는 글은 그만두려고 한다. 해서 오늘은 작심하고 제법 질석적으로 신랄한 꾸중을 하고 있는 참이다. 해당되는 사람들은 다 들으라고.... ‘사람을 열 명 죽이면 살인마지만,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다.’ 라는 말이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죽였느냐가 중요한 사안이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명분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위인 중의 한 분이신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에 절대 패하지 않는 전투를 지휘하면서 수많은 왜구들을 참살하신 분이다.

그렇게 엄청난 전과를 올리면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그러나 그 분이 수많은 왜구를 죽였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그 누구도 살인마나 미치광이라고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역사를 거슬러 통털어도 일본의 가장 큰 적이며 최대의 살인광이 이순신 장군이라고 한다. 바로 입장의 차이다. 관점의 차이다. 그리고 바로 명분의 차이다. 그래서 아마도 지금 그 명분의 한 자락이라도 확보하려고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는 것이 작금의 비참한 현실이다.

물론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순간적인 승리의 희열을 맛볼 사람들이나, 패배의 흔적에 몸서리 치게 될 사람들이나, 영원할 것 같은 결과의 형국이 모두들 또한 지나갈 것이라는 건 어차피 다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촌음의 의미를 애써 부정하며, 단지 이기고 지는 단편적인 승부에 온 열정과 심혈을 기울여 매진하고 있으니 이 어찌 어리석고 우매한 행동거지가 아닌가?

조금만 더 두고 보리라. 그리고 나서, 나타난 결과에 얼른 순응하면서 다시 일어서기 위해, 감추었던 저력을 끄집어내어, 우리에게 찾아올 봄을 붙잡으리라. 그리곤 광장에 불어올 새로운 바람을, 물결을, 환호성을 모두가 똑똑히 기억할 수 있도록, 모두가 몸으로 확실하게 겪을 수 있도록, 이제부터 필자는 준비하리라. 위대한 국민의 역사를 다시 적을 준비를. 다시 태어날 역사를 정확하게 표현할 채비를....

모든 것을 용서하고 감싸주는 아량과, 화목을 전제로 한 화합의 품을 벌려 상처입고 넘어진 모든 사람들을 일으켜세우리라.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음모와 욕심으로 인한 투쟁과 반목이 싹 트지 않도록 모두의 가슴 속에 사랑과 배려의 마음을 씨뿌림 하리라. 마치 우리의 영원한 고향처럼,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처럼, 우리가 세세토록 갈고 닦아야 할 자연의 숨결처럼, 넉넉하게, 푸근하게, 그리고 안락한 얼굴 바라며 이 자리에 서있으리라.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하는 수업 시간이 있었다. 글짓기가 끝난 후 그 학생의 글을 읽은 선생님은 뜻밖의 내용에 감동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내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지금까지 받은 고마움을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 보답하고 싶다. 지금의 나는 어머니의 고마움을 보답하며 사는 건 어렵기에, 내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서 그 무한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

학생은 장애로 인해 자신의 몸이 힘들고 불편함보다도, 자신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더욱 크게 느껴졌나 보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그렇다. 자녀의 아픈 것조차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며 당연하게 헌신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닮고 싶다. “사랑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한‘안톤 체홉’의 말처럼 깊은 사랑을 품고 말 없이 우뚝 선 어머니의 모습으로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주고 싶다. 그것이 현실을 바라보는 필자의 작은 소망이다.

비단 어렵고 험한 세상일지라도 감사할 건 너무나도 많다. 수많은 인연들 중에 고마워 할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하루 하루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감동하고 마음으로 감격할 일들은 수도 없이 많다. 요는 우리 모두가 이런 낌새를 채기만 하면, 그래서 자신도 감당치 못할 느낌에 소름이 돋기 시작하면, 감사의 물결이 세상을 뒤덮고, 감사하는 마음들이 세상을 사랑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리는, 어쩌면 머지 않은 미래에 전혀 예기치 못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필자가 예감하는 세상의 새 얼굴이다.

어느 군대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그 날은 저녁 식사 반찬으로 돈가스가 나오는 날이었다. 병사들이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알고 보니 돈가스를 1인당 2개씩 나누어 준다고 하여 신이 난 것이었다. 병사들은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곧 이어 소스가 없다는 이야기에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부식 담당 병사가 실수로 돈가스 한 상자와 소스 한 상자가 아닌, 돈가스 두 상자를 가져온 것이었다.

여기저기 병사들의 불평이 들렸다. “맛도 없게 소스도 없이 돈가스만 2개를 먹으란 말이야?”그 때 한 선임병이 말했다. “다들 그만 불평하자. 분명히 어떤 부대에서는 지금쯤 돈가스 없이 소스만 2인분 먹고 있을 거야. 그 친구들 얼마나 불쌍하냐? 크크크.” 비슷한 다른 상황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불평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감사를 택할 것인가?

항상 불평하는 사람은 감사할 일에도 작은 불평을 하고,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불평할 일도 감사한다. 결국, 불평하는 것도 습관이고, 감사하는 것도 습관이다. 그러니 감사를 습관으로 하루를 살 수 있다면 너무 멋진 인생이 되지 않을까?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감사와 배려의 마음을 공유하면서 가슴으로 맺어진 사이, 가족이라는 끈끈함을 공유하면서 사랑과 행복을 함께 느끼는 사이, 이웃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면서 인연을 맺어 변하지 않는 우정과 교류를 나누는 사이, 이런 사이들이 인간관계의 기본이며 가장 기준이 되는 요소다. 결혼 8년 차인 어느 부부가 이혼 위기에 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큰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아내 입에서 이혼하자는 얘기가 먼저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생활과 여러 집안일로 지쳐 있던 남편도 시큰둥하게 그러자고 했다. 부부는 순식간에 각방을 쓰고, 급기야 말도 안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화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커갔다. 사소한 일에도 서로가 밉게만 보이기 시작했고, 암묵적으로 이혼의 타이밍만 잡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달.... 남편은 퇴근길에 과일 파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오늘은 귤이 너무 달고 맛있다며 꼭 사서 가라는 부탁에 할 수 없이 사서 집으로 들어갔다.

귤을 주방 탁자에 올려놓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나왔는데, 아내가 가만히 귤을 까먹고 있었다. “귤이 참 맛있네.” 몇 개를 까먹더니 외면하면서 방으로 쓱 들어갔다. 남편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 전부터 아내가 귤을 참 좋아했는데.... 그러고보니 8년 동안 내 손으로 귤을 한 번도 사다 준 적이 없었네.’

남편은 그 순간 번쩍 하며 뭔가 깨달음이 있었다. 예전 연애할 때는, 길 가다가 아내는 귤 파는 곳이 보이면 꼭 몇천 원어치 사서 핸드백에 넣고 하나씩 사이좋게 까먹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남편은 마음이 울컥해져서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결혼 후에 아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이 문제와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말이다.

반면 아내는 남편을 위해 철마다 보약에, 때마다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늘 만들어주었다.며칠 후, 퇴근길에 과일가게 아주머니를 다시 찾았다. 남편은 제일 맛있어 보이는 귤 한 바구니를 샀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주방 탁자에 올려놓았다. “귤이 참 맛있네.” 몇 달 만에 아내가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거였다. 무관심과 무덤덤함이 바로 인내나 양보의 얼굴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걸 깨닫지 못하고, 단지 일상에 쫓기며 하루씩 살아내는 것이 삶이며 부부관계라고 여겼던 불찰은 생각 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해 말, 한 방송에서 배우 ‘차인표’ 씨가 인상적인 수상 소감을 말했다. 그는 50년을 살아오면서 알게 된 진리 3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 중 세 번째 진리에 주목해보자. “첫째,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둘째,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셋째, 남편은 아내를 이길 수 없다.” 작은 일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작은 일에 감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아내다. 어쩌면 누구나 쉽게 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소홀해지기 쉬운 것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배려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데에는 하나의 비결이 있다.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평범한 진리들이 모여서 삶의 울타리를 만든다. 그리고 이런 공식이 바로 형제와 이웃과 사회와 나라의 모든 대인관계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진실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수상소감은 모든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이다.

아내를 잃고 일곱 살 난 어린 딸과 단둘이 사는 아빠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아빠가 출근하려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예쁜 편지봉투를 쭈뼛쭈뼛 건넸다. “저기 아빠.... 이거.” 엄마가 하늘나라에 간 이후부터 말이 없어진 딸아이였다. 아빠는 반가운 마음에 “딸 고마워, 잘 읽을게.”하면서 딸의 볼에 입맞춤하고 출근을 하였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딸아이가 준 편지는 까맣게 잊었다. 월요일 아침이어서 회의준비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이다.

아빠는 퇴근 무렵에서야 생각이 나서 편지봉투를 꺼내 보았다. 봉투 안에는 작은 메모지와 함께 오천 원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딸의 메모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빠, 엄마가 없어 힘들지? 아빠 양말 구멍 난 거.... 내가 엄마처럼 꿰매주지 못해서 미안해. 대신 그동안 모아온 오천 원 줄 테니 양말 꼭 사 신어. 아빠 양말 구멍 나면 내가 창피해. 내가 엄마처럼 챙겨줄테니 힘들어도 울지 말고.... 내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하는지 알지?”

내면 깊숙이 자리한 상처를 공유하고 보듬으며, 치유하는 가장 가까운 공동체, 가족.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가족이 있기에 힘을 낼 수 있다. 삶의 보약이자 비타민인 가족과 함께 언제나 행복하자. 저녁 무렵 자연스럽게 가정을 생각하는 사람은 가정의 행복을 맛보고 인생의 햇볕을 쬐는 사람이다. 그는 그 빛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 꽃은 바로 그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렇게 가족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듯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이 세상은 금세 사랑과 행복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낙원이 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에서 겨울이 익어가고 있다. 찬 바람이 분다. 밤이 오려는지 어두워지는 누리로 더욱 세차게 추위가 엄습한다. 거리가 썰렁하다. 모두들 어디론가 찾아들어간다. 종종걸음이 무척이나 바쁘게 보인다. 저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가고 있을까? 따스함을 찾아, 포근함을 찾아, 안락함을 찾아 저들 나름대로 가꾸어온 보금자리로, 피난처로, 안식의 공간으로 발걸음 하고 있다. 그리고 찾아들어간 그곳에서 의미 있고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비로서 휴식을, 활력을, 재충전을 충분하게 무기로 갖추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윤회의 세월을 이어나갈 것이다. 미움이거나 또는 사랑의 이름으로.... 겨울이거나 혹은 봄의 어떤 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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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이 시련의 계절에는
어차피 궁합 맞지 않는 만고의 천적
검은 상복속으로 온 몸 응집시킨 새 한마리,
장엄한 부리의 먹빛 예술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어넘길 순 없기에
왜 묻냐고 되묻던
산등성이 수수밭

스탕달신드롬에 오그라드는 손발,
그 죽음과 상실의 겨울산에서 -
등골 파고드는 추위 가시면
어둠 잠겨 희끄무레한
숲속 별빛 부스러기

쓸쓸하여 희망도 절망도 없던
한겨울의 나목,
차라리 욕망이란 상실에 대한 향수이며
가족력 되어진 진득한 욕념의 냄새

신들린 무녀처럼
광기로 번득이는 눈 치켜뜨고
나약한 인정으로부터 탈출 시도하는
내 인생의 카타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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