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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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백번째 한숨 *



시작노트

" 이백번째 한숨 " 詩作 note

보통 사람은 직업을 갖고 있다. 어차피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작업의 연속이며, 그 작업에 소요되는 먹거리를 취하기 위한 일련의 몸부림이 직업이다. 많던 적던 몸과 마음을 바쳐서 하는 행위에 대한 댓가로 일정한 반대급부를 제공받는 것이 직업의 의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업이라는 녀석은 만만치 않다. 마땅히 주어져야 할 의무임에도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아 경우에 따라서는 권리로 변질되어버린다. 그래서 마치 직업이라고 부르는, 보여지는 모습으로 그 사람의 본질이 평가되어지기도 한다.

직업을 얻기 위한 투쟁은 나날이 심화되어져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 직업이라는 명제 때문에 완전 희비가 엇갈리며, 인간 본연의 인격보다도 우선하는 직업의 차등인식으로 목하 세상은 요지경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들은 마땅히 고행과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게 기본이고, 직업을 잃거나 은퇴한 부류들은 갈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숙명에 처해진다. 때로는 적응에 실패하여 거리로 내몰리거나 가정파탄의 참사도 주위에 비일비재하게 되며, 심지어는 고귀한 삶의 종지부를 스스로 찍는 경우도 생겨난다.

삶이 고해라고는 하지만 이건 살아내는 게 아니고 그냥 어쩔 수 없이 살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숨겨져 있는 삶의 아름답고 우아한 얼굴을 찾아내 삶을 누린다는 것은 애저녁에 존재하지 못할 사건이며, 그걸 찾아가는 것이 삶의 여정이라고 소리하는 건 어불성설이며 언어도단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직업의 노예가 되어버린 지 한참이다. 그것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굴레를 스스로 멍에처럼 걸머지고 희희낙락하느라고, 그것이 불행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바보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생각할수록 한심하고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되돌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도 인간은 당초부터 노역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 지 모를 일이다. 어차피 태어난 생명이니 목숨줄 다할 때까지 죽어라고 일만 하다가, 소원처럼 일에 파묻혀 죽어가야 할 팔자인가 보다. 하루하루 한숨만 늘어가다가, 한숨으로 도배된 일상을 삶의 진리인 양 착각하며, 누구 한숨이 더 그럴 듯 한가, 하고 내기를 하는 꼴불견에 심취하면서, 그리 차례차례 줄 서서 죽어가기로 하자. 이것이 오늘 필자가 지적하는 화두다.

필자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아마도 족히 이백 번은 되는 양 싶다. 그 중에는 정식으로 명함을 파서 “나 이런 사람이오.” 하며 자기소개를 대신했던 자타공인의 직업도 있었고,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직접 드러내지는 못하고 남의 일인 양, 다른 사람의 부탁인 양 너스레를 떨면서 역할을 수행했던 숨겨진 직업들도 엄청 많았었다. 자신조차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직업을 갖게 된 이유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삶의 의미를 수직적인 목표 달성에 두지 않고, 기왕지사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다 해봐야겠다고 작심했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필자는 확실히 소년시절부터 남달랐다. 유난히 뛰어났다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별난 종자였다. 마치 세상의 업보를 다 짊어진 양 무언가에 심취해 고뇌하고 번민하기 시작한 것도 유년기였으며, 해답을 찾기 위해 떠돌이처럼 찾아 헤매기 시작한 것도 소년기였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배움의 도상에 있어야 할 학창시절부터 필자의 기행은 시작되었다. 학교의 수업시간까지 빼먹으며, 소위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의 직업을 전전하기 시작한 것도 역시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듯 하다. 거리를 돌아치며 낮으로는 아이스크림을 팔고, 밤에는 숙박시설을 기웃거리며 음료수나 과일을 팔러 다녔다. 손수 그린 성탄절 그림카드를 늘어놓고 영화관 앞에서 추위와 싸우기도 했으며, 새벽으로는 신문배달과 우유배달도 마다하지 않고, 주객이 전도된 듯 아예 공부보다는 다른 쪽 일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시작한 직업은 중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좀더 다양해졌다. 수업시간에 뒷자리에 앉아 친구들의 편지를 대필해주면서 용돈벌이를 했고, 방과 후에는 가발을 쓰고 음악다방의 디제이며, 내공이 유난스레 깊은 악기연주의 재주를 발휘하여 유흥주점의 보조연주자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도저히 일반적인 학생의 행동이라고 여기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음은 분명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조금 더 전문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니, 학생 과외교습과 입주 가정교사도 곁들여 다양한 직종을 동시에 소화하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사실 필설로 다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필자의 비상식적인 행적은 다채롭고도 기이하다. 학군장교로 임관하여 그 도시를 떠나기까지 예컨대 강원도 어느 구석에서는 이름 석자 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였으니, 긴 세월이 흐른 이제 와서 생각해봐도 어지럽고 정신 없다. 예컨대 범인들은,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많은 직업을 전전한 필자의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음을 인정해야 할 거다.

그렇게 필자의 한숨은 알게 모르게 세월의 흐름을 따라 깊어졌고, 얼추 이백 번째 한숨으로 또 하나의 직업을 받아들이면서, 이것이 이 삶에서의 마지막 직업이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삶의 파노라마에 또 하나의 레시피를 가하면서, 아직은 불완전한 필모그래피의 완성도를 기하기 위한 행보에 하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게 정녕 필자의 긴 만행의 마지막 단원일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비록 젊은 날의 끓는 피는 조금 식었겠지만, 필자의 삶이라는 무대의 마지막 장에 선 주인공으로서 감칠 맛 나는 연기가 다시 이어질지 모른다. 기대하시라!

확실한 건 필자의 이 도전이 필자만의 오만이나 허상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주홍글씨, 행복해야 하고 윤택해야 하며, 남보다 훨씬 성공을 하고, 남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감추고 겸손한 척, 너그러운 척 하는 위선의 가면을 한 층 갈고 닦으면서 아침 출근 길에 나서는 모든 직업인들에게 고한다.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어야 할 인성과 본연의 인격을 스스로 폄훼하지 말고 늘 갈고 닦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나이가, 여건이, 상황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만 전진할 뿐이다. 나오는 한숨은 속으로 쉬면서. 조용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면서.

물을 얻기 위해 샘에 가면 샘물을 길어올린다. 그 때 샘물만 길어올리지 말고 지혜도 같이 길어올리도록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갈 곳을 가기 위해 길을 걷는다. 그 때 길의 목적지만 생각하지 말고 내 인생의 목적지도 함께 생각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열매를 얻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다. 그 때 나무의 열매만 따지 말고 내 이름의 열매도 많이 얻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산을 오른다. 그 때 산을 오르는 고통만 참지 말고 내 생활의 어려움도 함께 극복하도록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찻집에서 기다린다. 그 때 친구만 기다리지 말고 내 마음이 참으로 만나고 싶은 것도 같이 기다리게 하소서 하고 기다린다. 차를 운전하기 위해 도로 표시판을 본다. 그 때 도로의 표시판만 보지 말고 내 생각의 표시판도 같이 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반짝이는 별을 보기 위해 어두운 밤하늘을 본다. 그 때 별만 찾지 말고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내 희망도 찾도록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비가 올 것인가를 알기 위해 하늘을 바라본다. 그 때 구름만 보지 말고 내 삶에도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릴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하고 필자는 기도한다.

누군가 그러더라. 인생을 살면서, 돌이켜보니 행복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서운했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면 슬픈 날, 고통스러운 날들도 잠시였다고 말이다. 그런데 정작 행복한 시간을 즐기고 느끼고 할 때를 망각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도리어 슬프고 힘든 기억들이 더 오래 가슴에 간직되는가 보다. 우리는 언제나 행복 속에, 축복된 삶 속에 지낸다는 것을 절대 잃어버리지 않고 지낸다면 좀더 멋진 삶을 보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삶의 보람을 이끌어갈 사공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행복만 간직된 길을 선사하고픈 마음이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억지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 빛, 나를 내어주려고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하는 말은 언제나 부담 없는 청청한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부끄러워 스러지는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내가 작아지는 빛... ‘이해인’님의 시다. 우리는 우리의 곁에 있는 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사용하고 있을까?

늘상 하는 일이라 당연시 여겨 감사함의 표현에 인색하지는 않은지. 혹여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시시비비를 논하며, 자신을 방어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지는 않은지. 아름다운 표현은 하면 할수록 잘 연마되어진 보석처럼 빛에 빛을 발한다. 반사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만남과 헤어짐은 인생을 이어주는 고리, 인생의 사슬이다. 부모와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역시 하나의 만남, 피할 수가 없는 만남이었다.

세상과 사람을 믿지 못해서 미움으로만 살았던 고단하고 낭비된 삶도 역시 흐르는 시간의 한토막이었다. 제대로 흐르지 못하던 흐름이었어도 그것은 흐르는 시간이었다. 가는 듯 가지 않고,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인간의 삶, 그래도 세월이 시간처럼 흐르고 나면 과거가 아름다워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돌아가고 싶지 않는 어린 시절조차 소나기가 한줄기 뿌리고 난 다음의 여름 하늘처럼 맑게만 기억되는 까닭은? 그것은 인생이 ‘십우도(十牛圖)’에서 처럼 때를 벗는 과정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름의 길목에 도달해 있는 요즘은 하늘의 태양이 유난히 빛나게 내리비추며 하루를 찬란하게 빛내주는 것을 느낀다. 마음과 마음으로 고마운 이웃들을 그리워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루 해가 빠르게 지나가듯이, 어제 일이 오늘처럼 또 하루의 시작 속에 아침 태양을 맞이한다. 비록 똑같은 일상, 변함없는 일과에 지치고 버거운 기분 들어, 늘어가는 한숨이 새삼스러울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있어서 내일을 기다리는 거다.

옛날 한 작은 외딴 마을에 천 개의 거울이 있는 집이 있었다. 늘 행복한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그 집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한 번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곳에 다다른 녀석은 즐거운 마음으로 집 앞 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섰다.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를 흔들면서 문 사이로 집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안에는 천 마리의 다른 강아지들이 녀석을 쳐다보면서 귀를 세우고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녀석은 너무나 즐거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천 마리의 강아지도 따뜻하고 친근한 웃음을 지었다. 강아지는 그 집을 떠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멋진 곳이야. 자주 놀러와야겠다.” 같은 마을에 또 다른 강아지가 한 마리가 더 있었다. 이 녀석은 앞의 녀석과는 달리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녀석도 그 집에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천천히 그 집 계단을 올라가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천 마리 강아지들이 불쾌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녀석이 으르렁거리자, 천 마리의 강아지들도 녀석에게 으르렁거렸다. 그 집을 나오면서 녀석은 툴툴거렸다. “이렇게 무서운 곳이 다 있담. 다시는 오지 않을 테다.” 세상의 모든 얼굴들은
당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 당신은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어떤 모습을 보는가? 참 재미있지 않은가? 이 글을 쓰면서 왜 그리 가슴이 뜨끔 따끔 하는지 모르겠다. 언젠가도 거론한 적이 있는데, 실은 필자가 전형적인 OX형 인간이다.

매일 매일 천 개의 거울을 바라보면서 하루는 기뻤다가 하루는 툴툴거렸다가, 그걸 반복한다.잠시 호흡 한 번 고르면 될 일을, 자주 후회를 하면서도, 도를 닦아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를 않다. 참으로 얄궂다. 스스로에게가 먼저지만 이 쯤에서 제언한다. 오늘은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도록 해보자. 그 표정이 바로 자신의 표정임을 잊지 말자. 당신의 당신이 지금 웃고 있는가? 아~~ 그럼 당신도 지금 웃고 있는 거다. 그렇게 매일의 아침이 기분 좋았으면 좋겠다. 시작이 좋으면 당연히 하루 종일 즐겁기 때문이다.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28년을 살아온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의 5분은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고민 끝에 결정을 했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 최후의 순간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나버렸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 앞이 캄캄해졌다. 지나가 버린 28년이란 세월을 금쪽처럼 아껴 쓰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었다. “아~! 다시 한 번 인생을 더 살 수만 있다면...”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한다.

구사일생으로 풀려 난 그는 그 후, 사형집행 직전에 주어졌던 그 5분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 순간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그 결과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 등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하여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 문호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그 사형수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였다.

신을 신고 길을 걷는데 불현듯 뭉-클 감사해졌다. 만일 두 발이 없으면 이 험한 세상 어떻게 다닐 수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문득 감사했다. 어젯 밤 그리도 피곤하여 죽은 듯이 잠자던 이 내 몸이 이렇게 눈을 뜨고 선연히 살아 있다니... 밥상을 앞에 놓고 눈물이 흘렀다. 너무나 감사해서... 손이 있고 입이 있어 밥을 먹을 수 있다니...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보고 퍽이나 감사했다. 주위에 할 일 없어 헤매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있는데 내겐 이런 직업이 있음을.

상사의 심한 야단을 맞고도 오늘 따라 왜 이리 감사가 넘치는지, 나에게 아직도 쓸만 한 재능이 있기에 야단을 쳐서라도 다시 하라는 것 아닌가! 지친 퇴근 길, 석양에 감사가 절로 나왔다. 반갑게 뛰어 나와 반겨주는 아내와 자식이 있기에 말이다. 잠 자리에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감사했다. 아직도 나에게 건강이 있어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어디 세상에 감사할 것이 이것 뿐이겠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주고 받으며, 나누며, 사는 순간 순간들. 보이는 모든 것에 감사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께 감사하고, 심지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거나 탐스러운 과일이 달린 나무 밑에는 어김없이 길이 나 있다.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 이치로 아름답고 향기나는 사람에게 사람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상대를 위해 아량을 베푸는 너그러운 사람. 그래서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 함께 있고 싶어진다.

그 향기에 온전히 내 몸과 마음이 적시어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나 또한 그 향기를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스치듯 찾아와서 떠나지 않고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고, 소란 피우며 요란하게 다가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쩍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 소리 없이, 조용히, 믿음직스럽게, 그러나 가끔 입에 쓴 약처럼 듣기는 거북해도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해주는 친구들이 있고, 귓가에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다가 중요한 순간에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친구들도 있다.

우리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머물러 있는가? 있을 땐 잘 몰라도 없으면 표가 나는 사람들. 순간 아찔하게 사람을 매혹 시키거나 하지는 않지만 늘 언제 봐도 좋은 얼굴 넉넉한 웃음을 가진 친구들, 그렇게 편안하고 믿을 만한 친구들을 몇이나 곁에 두고 있을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가깝고 편안한 존재인지, 그러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싶다. 두드러지는 존재, 으뜸인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 오래 보아도 물리지 않는 느낌, 늘 친근하고 스스럼 없는 상대, 그런 친구들을 곁에 둘 수 있었으면, 그리고 나 또한 남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어느새 여름이 익어가고 있다. 올 여름은 또 얼마나 더워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려는지, 벌써부터 폭염 특보가 발령되기도 하고, 메마른 하늘에서는 불볕 더위만 쏟아지고 있다. 이래저래 지치게 만드는 현실이 무겁기만 하다. 직업에 얽매여 쫓기듯이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비애와 한숨이 한 데로 뭉뚱그려지면서, 살아가는 건지 죽어가는 건지 경계마저 애매한 일상이 주저리 열리면서 긴 행렬을 만들고 있다.

어제처럼 밝아온 오늘, 그리고 또 습관처럼 떠오를 내일의 태양,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 무엇을 찾고 있는가? 어떤 것을 갈구하며, 어디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 긴 한숨으로 도배된 삶의 면면이 정녕 피곤하고 버겁기만 한가? 아니다. 그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삶을 누리고 있는 이 땅은, 오늘은 바로 당신을 위해 마련된 축제의 날이다. 그럼 우리는 지금 무슨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걸까? 그게 뭐 그리 어려운가? 그냥 잘 살아가면 되는 거다. 열심히, 정성껏, 최선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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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숲 맨발로 걷고 있구나
차갑고, 축축하고, 발가락사이 흙 파고든다

달빛, 길 타고 흐른다
석양인 양 불그름한 빛

오래된 동화책속 삽화로 보여지는 누리,
더하여 고요하구나

밤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부엉이 울음도,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향수의 운율까지도....

비현실적이고도, 그리고도 완벽한 고요
고요로운 싯구절

대기엔 아무 냄새도 섞여있지 않다
검은 머리칼 늘어뜨리고,
가슴에 손 얹은 채
달의 불길속 누워있구나

죽은자들의 세상 지나는 느낌이다
나는 아마도
죽은 모양이다
잠시 침묵 흐르고,
꿈에서 깬 나
한숨 또 쉰다

이제 빼앗기지 마
네 시간은 네 거야

불빛은 아주 잠깐 거기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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