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 ]

위로 이동

* 케이 [K] *



시작노트

" 케이 [K] " 詩作 note

봄은 소리의 계절이다. 온갖 대자연의 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우리의 일상을 장식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사람이 살아가는 소리도 한껏 드높게 지축을 흔든다. 이른바 생명의 소리들이다. 겨우내 잠자던 초목들이 부스스 깨어나는 소리, 얼어붙었던 시냇물이 졸졸 달리는 소리, 새들이 조잘조잘 지저귀는 소리, 햇살 파르르 부서지는 소리, 뒤질세라 폴폴 산천을 두드리는 봄비소리 등 정신이 없다. 어지러운 귀가 더욱 바삐 하냥 호강하는 계절, 봄이다.

이 시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붙였던 후배의 글을 보고 감동 받아 적은 시다. 후배는 도무지 표현 못하는 생각이 없었다. 우매한 필자는 머리 속의 생각은 가득해도 그걸 막상 글이나 말로 표현하자면 한동안을 끙끙거려야 겨우 비슷한 걸 고를 뿐이었는데,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표현부터 하고나서 생각을 하는 것처럼, 아주 쉽게 모든 생각을 술술 풀어내곤 했다. 한 마디로 짜증나는 부류다. 필자를 자존심 상하게 만드는.

봄에는 유난스럽게도 소리가 크게 확대되어 들려난다. 도대체가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는 없다. 모두가 갖고 있는 목청을 최고조로 드높인다. 그러다보니 의사소통을 위해서라도 점점 더 목소리가 커진다. 그 소리들 속에서 사람들은 더 큰 소리를 질러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니 정 시끄러우면 봄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귀를 닫고, 세상과 단절한 어둠 속에서조차 소리가 되살아날 지경이거늘.

실상은 많은 소리들 중에서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세상 그 어떤 소리보다 시끄럽다. 물론 가장 중요하고 반드시 이어져야 할 소통과 대화의 수단이며 말의 원류인 목소리지만, 스스로가 내지르는 소리들이 모두 모여서 엄청난 소음과 공해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을 이제는 깨달았으면 좋겠다. 말 한 마디씩만 줄이고, 조금씩만 목소리의 크기를 조절한다면 이 지구는 퍽 조용한 초록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표현하는 말 중에는 필요치 않은 말이 무려 70퍼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생명체 중에서 인간은 유일하게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말하는 존재다. 언어학을 연구하거나 말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고등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말을 통해 소통한다는 것을 대단한 능력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언어가 정말 인간을 위대하게 하고, 소통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이며, 대상과 자신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대화가 서로에게 완전한 이해로 완성될 수 있을까? 그건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제 3의 언어인 ‘수화’로 주고 받으면 말로 주고 받는 것보다는 소통에 지장이 있거나 많은 차이가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수화가 어떤 상황을 전달하는 데는 훨씬 선명하다.

왜냐하면 단어의 약속이 분명하고, 순간적 자기 판단이나 생각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은 기술로써, 혹은 사용자의 의도가 개입되거나 상황적 단어 사용에 의해 달라질 수 있으며, 전달자와 수용자 또는 피 전달자의 사이에는 단어 인식 능력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말은 하면서도 이해의 측면에서는 각자의 생각, 즉 받아들이는 측면에 따라, 혹은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대화를 관찰해보면 자신을 말하기 보다는 제 3의 인물들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말하는 습관 속에서 단어 인식이 뚜렷해지고, 자신의 존재를 언어적으로 알아갈 때 상대가 하는 말도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말은 상대적 인식의 세계이며, 말이 곧 나이고, ‘나’라는 주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물론 여기서 나는 상대적 나이다. “내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은 상대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로를 인식하는 대화를 하게 되면 비로소 소통적 대화를 할 수 있고, 다양한 3인칭의 소재를 메타포로 끌어올 수 있다. 여기다가 사물 인식까지 동시성으로 일어나는 대화를 하게 되면 불통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란 어쩌면 다른 생명체들 입장에서 보면 가장 불편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가올 ‘텔레파시 커뮤니케이션((telepathy communication) 시대’를 예측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얼마나 불편한 진실인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말 없이도 통하는 사랑의 언어를 보면 태초의 인간이 사용했을 본래의 언어가 어땠을까 짐작이 간다. 우리가 고등한 능력이라고 믿고 있는 언어가, 다른 생명체들이 보면 실은 가장 하등한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한 진실 앞에서 저절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쓸 데 없이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훌륭한 소통의 수단이라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오해와 불신의 싹을 틔우는 데 일조를 담당할 수도 있는 것이 말이라면, 경솔한 판단에 의한 말은 독이 되어 자신을 해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보다는 신중하고 묵시적인 판단과 행동이 요구되는 이유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하고 명철한 목표의식과 자기반성의 의지다. 수시로 자신을 돌아보며 쉼 없이 갈고 닦는 절차탁마의 의지야 말로 자신을 발전시키는 근원이 된다.

얼마 전에 부처님 오신 날을 지나면서 마음 깊이 담아둔 이야기가 있다. 어느 큰 절 앞에 언제부턴가 항상 절에서 법회를 하는 날이면, 아침 일찍 절 입구에 초라한 거지 한 사람이 구걸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그 거지는 절을 찾아 들어가는 신도들을 향하여 한 푼만 보태 달라고 사정을 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거들떠보질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어느날 그 절에서는 관음전 낙성식이 있었는데 그 날에 맞춰 새로운 주지스님이 소임을 받고 그 절로 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주지스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낙성식 겸 주지 스님이 부임하는 날, 항상 절 앞에서 구걸을 하던 지저분한 거지가 슬그머니 법당 안으로 들어서자 신도들이나 절의 임직자들이 크게 당황을 했다.

그리고는 나가라고, 오늘은 큰 행사가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급히 내쫓는 것이었다. 그러자 거지는 관음전 앞 땅바닥에 털푸덕 주저앉더니, 특별한 날이니 만큼 특별하게 한 푼만 보태 달라고 계속 구걸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와주기는 커녕 자리를 슬금슬금 옮기기도 하고, 때론 화를 내며 계속 나가라고 채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윽고 본행사가 진행되는데 새로 오신다는 주지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많은 신도들이 술렁이기 시작을 했다.

그 때 거지 차림의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앞으로 나가더니 상단의 법석에 앉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누가 저 사람 좀 끌어내라.”고 하며 순식간에 장내가 아수라장이 되자, 거지가 법석에 앉은 채로 요지부동의 자세로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한 마디를 던진다. “가슴에 손을 얹어라. 이 중에 참 불자 누구인가? 이 중에 바른 눈을 가진 자 누구인가? 이 중에 보시 바리밀을 하는 자 누구인가? 이 중에 육바라밀을 배운 자 누구인가?”

그리고 말을 계속 잇는다. “내가 이 절에 소임을 맡은 새로운 주지올시다. 여러분들이 과연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는가? 여러분들은 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면서, 참 사람 보는 지혜의 눈도 못뜨는 주제인 걸, 무슨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면서 복을 구한다는 말인가? 부처님과 거래를 하러 오는 사람이지, 어떻게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부처님께 절하면서 뭐, 뭐 잘 되게나 해 달라고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께 거래를 하자는 행위다.

내가 오늘 찾아와 기도 했으니, 대신 내가 소원 하는 것을 들어 달라고 부처님과 거래를 하려는 자가 어찌 불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본 승은 거의 달 포 가까이 이 절 일주문 앞에서, 여러분들에게 거지 행색을 하고 구걸을 해 보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그리고 동전 한 푼 기꺼이 내 놓은 사람이 있었던가?

복 짓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부처님 전에 찾아와 잘 되게만 해 달라고 하니 그게 거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저 목소리 높여서 큰 소리로 부르짖는 것이 만사 대행의 수단이라 여긴다면, 더 이상 절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냥 아무데서나 소리 소리 지르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불제자가 되는 길이라고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부처님께서는 그런 조건부 거래를 하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살아오면서 전생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지은, 알게 모르게 쌓인 업보를 참회하라 하셨거늘 그 일은 내팽개치고, 무작정 그냥 잘 되게만 해 달라고 하는 자는 진정한 불자가 아니니라.”라고 일갈하자 어떤 이는 울고, 어떤 이는 가슴을 치고, 어떤 이는 법당을 살며시 빠져 나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다. 참으로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이야기다. 번드르르한 옷 차림새 하나로 사람의 인격을 나누고, 대궐 같은 절 집에 드나들면서 목소리 큰 순서대로 참 불자로 착각하는 불제자들은 없는지, 한 번쯤은 신중하게 뒤돌아보는 참회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불제자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 뿐 아니라,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여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는 겸양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 소음으로 얼룩진 이 사회를 정화시키는 첫 걸음이다.

자신의 주장만 강조하면서 남의 말은 듣지도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정저지와(井底之蛙)’라고 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말해줄 수 없다는 뜻으로, 중국 고사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이 보는 세상이 가장 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이 가장 위대하고, 자신이 뛰고 있는 세상이 가장 빠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우물 속에서 보는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짜 하늘을 설명할 수 없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하여 설명할 수가 없다. 그 개구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우물이라는 공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 여름만 살다 가는 여름 곤충에게는 찬 얼음에 대해 설명해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편협한 지식인에게는 진정한 도의 세계를 설명해 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 고사를 통해 세 가지의 집착과 한계를 파괴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하나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파괴하자는 것이다. 둘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을 파괴하자는 말이다. 셋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파괴하자는 말이다. 즉,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공간’에 구속되어 있고, 여름 벌레는 ‘시간’에 걸려 있으며, 지식인은 ‘지식’의 그물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도 이 세 가지 그물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 알량한 학벌과 지식으로 어느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지식의 그물! 좁은 회사와 연줄에 얽혀 있는 공간의 그물! 눈 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볼 줄 모르는 시간의 그물! 이런 그물들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진정한 승자로 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자신이 보는 하늘만 옳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보는 하늘도 인정해주는 여유가 필요하다.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득도다조(得道多助)’라는 사자성어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강한 사람은 힘이 센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엄청난 부를 소유하거나 학력이 높은 사람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도와주는(助) 사람이 많은(多) 사람’이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사람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 사람이 잘되기를,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며 응원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그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인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많게 되기 위해서는 인심을 얻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평소에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득도다조 즉, ‘도를 얻은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 라는 뜻이다.

평소에 남에게 베풀고 인간답게 살았기에 그가 잘되기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여기서 ‘도(道)’란 사람의 마음이다. ‘득도(道)’란 산에 가서 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지도자가 ‘도’를 얻었다는 것은 민심을 얻었다는 것이고, 기업가가 도를 얻었다면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평소에 주위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고 배려해 주었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평소에 사람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대인관계가 이어지는 세상이라면 큰 소리 칠 일이 없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화기애애하고 조용조용한 소리 만으로도 충분히 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고요한 세상이 되어질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는 어떤 모임이나 어떤 장소에 가든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사람이 있다. 특별히 잘생긴 외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키가 크거나 유머감각이 뛰어난 편도 아니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에서 필자는 그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의 특징 중에 하나는 말에 꿀을 발라서 한다는 점이다. 친절한 말투와 함께 그 말에 상세하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또 비유를 적절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 말은 딱딱하거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식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공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맛있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말은 인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된다. 만일 당신이 참 근사하고 괜찮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딱딱하고 권위적인 말투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그와 반대되는 사람으로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면 오해나 편견에 기인한 고성과 언쟁이 잔잔한 대화를 밀어내고 자리매김하려 들지도 모른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에 대한 이 명언을 가슴에 새기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드러운 설득은 강한 위협보다 더 강하다. 전자는 사람을 녹이고 후자는 부수어 버릴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소리는 바로 사람들의 말소리다. 말을 통해서 행복할 수 있고, 말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며, 말로 모든 삶의 의미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만남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 대화가 통하는 사람, 미래의 꿈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아무 말 없이 찻잔을 사이에 두고 같이 마주보고 있어도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한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힘겨운 삶의 넋두리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도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가만히 고개 끄덕여주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호수처럼 맑고 촉촉한 물기로 젖어 있는 눈빛만 보아도 마음과 마음이 교류되어 가슴 벌렁이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해진다. 언제 만나자는 약속 없이도, 늦은 밤이든 바쁜 시간이든 아무 때나 만나면 행복해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보자. 괜찮은 사람을 만나려 애쓰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된다면, 상대방도 이내 다가와 좋은 사람이 되어줄 것이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만남이란 참으로 소중하다. 누구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으니까 말이다. 그러한 인연은 지혜롭게 그 만남을 잘 이어가야 할 것이다. 혼자서 만이 아닌 서로가 행복할 수 있고, 진정 좋은 사람으로 늘 기억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추슬러,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세상은 많은 소리들로 분주하다. 행여 뒤질세라 저마다 목청 높여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어떤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범벅이 된 소리들이 한꺼번에 달팽이관을 습격한다. 이제 방법은 하나다. 듣고 싶은 소리, 들어서 좋은 소리만 골라 들으면 된다. 들어서 해가 될 소리까지 구태여 귀 기울여 들을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귀 열어 듣고 싶어 하는 소리이기를 바라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오늘도 필자는 듣고 소리 한다. 귀 열어 말하고, 입 열어 듣는다.


" 케이 [K] " 詩作 note 닫기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당최 나는 잘라낼 주변머리 없어
평생 속끓어도 속수무책이었거늘
K는 어찌 단칼에 한쪽 뇌 뭉텅 잘라들고
따로 보여주는 재주 부리는겐지

띠루띠루띠루루루 또르또르또르르르 -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능청스레 적어내다니,

산죽나무 이파리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는 또 어떻고,
샤르륵샤르륵사운사운 솨르르솨르르소소소 -

휴 !
긴긴 날밤들 꼬박 지샌 불면의 시절들이
세상 최고로 미약한 소리에까지
귀문 트이고파서, 빈 환청으로라도

속깊은 대지의 설움
부여잡아 흐느끼고파서, 헛 딸국질일지언정

이를테면 실핏줄 구석구석까지
흠씬 몸살 앓고난 식전 베갯머리
속 가르릉 끓어오르는 소리조차
하마 반가울 제

인연 허투루 돌려
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다 종국
내가 고안해낸 질박한 놀이, 별건 아니다

이름하여 K 따라잡기다
다만 간절히 연모하다 보면,
그냥 애절하게 사무치다 보면,
발뒤꿈치나마 구석조각쯤 만져질지도

목놓아 그 이름, K 부르다 보면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