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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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낮의 기도 *



시작노트

" 한낮의 기도 " 詩作 note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가 쏜살같이 내닫고 있다. 도무지 쉬어갈 줄을 모르는 시간이라는 놈. 야멸차고 인정머리는 눈꼽만큼도 없는 놈. 그래서 도무지 마주하기조차 싫은 놈. 나쁜 놈. 더러운 놈. 그 놈과 나는 전생부터 이어 온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이 하루도 끝나지 않은 처절한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그래서 애저녁에 승리라고 하는 달콤한 단어는 내 사전에서 사라져버린 지 하마 오래 된 기억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존재하는 자존심과 터럭만큼 남겨진 이 기력을 짜내어 나는 또 주섬주섬 시간에게 도전한다.

아마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아예 목숨줄 스러져 이 땅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게다. 비록 멋들어지고 찬란한 영광이나, 남에게 보여줄 승리의 신호는 마련되지 못할 망정, 최소한의 자위나 격려는 지금도 분명 여기 어딘가 존재하고 있을 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아예 없는 거라고 단정 짓기에는 그동안의 노력이, 이제껏 기울인 열정이 비참하고 안타깝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이 날도 아침 해를 바라보며 다짐한다. 정신 없이 세파에 시달리고, 긴 여정에 방황하다가 맞이할 저녁이면 버릇처럼 고개 숙이고 지친 날개 접으며, 자조적인 심사 되어져 다시 밝아 올 내일이나 다짐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 마땅히 시간을 향한 이 도전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시간아!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으련다. 그리고 끝까지, 결국 끝까지 너와의 싸움에 기꺼이 응하련다. 내 사전에 결단코 포기라는 말은 없으리라.”

이 시는 아주 어렵고 암울하던 시절에 고뇌와 절망으로 빚었던 고백시의 묶음 중에 하나이다. 하늘을 향한 기원에 따로이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정된 장소나 여건이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낮에는 치열하게 생존경쟁의 대열에서 미래를 향한 나름의 도전에 매진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며 본분이다. 물론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해진 사람들도 있고, 아예 그러한 대열에 남들과 함께 동참할 수 없는 여건으로 소외된 부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삶의 궤적이라면 한낮에 기도나 하면서 시간을 쓰는 일일랑은 성직자나 전문적인 계통의 사람들에게 맡겨놓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런 제반 조건을 다 알면서도 정말 할 일이 없을 때, 하고 싶어도 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때, 할 수 있는 게 헛된 생각밖에는 존재하지 않을 때, 실천이나 행동은 꿈에서나 그릴 사치라는 현실에 처해졌을 때, 그래서 나락에 떨어진 삶에 빛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을 때가 온다면 당신은 그 시간에 무얼 하고 있을 건가? 당신의 모든 미움과 절망과 체념을 한 데 묶어서, 오로지 그걸로만 하루의 일과를 늘어놓아야 할 그 때라면, 대관절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필자는 그런 시절을 살았었다. 필자는 분명 그런 암담하고 참담한 시간을 겪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살아나왔다. 죽지 않고, 아주 넘어지지 않고, 비틀거리며 시달린 그 시간의 고문을 견디고, 길고 긴 어제를 기억록에 담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맞이하는 날마다의 햇살에서 희망을 본다. 그렇게 이어진 고난의 역사 위에 비치는 서광을 겸허하게 받아먹으며 내일의 이야기를 쓴다.

어쩌면 주어진 지금이, 벅차게 호흡하는 오늘이라는 시간의 접점이, 필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의 배려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꿈의 날들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어쩔 수 없는 의무감으로, 촌음을 아끼며, 순간을 음미하며, 가장 소중한 현재의 기도를 올리게 된다. 그것이 한낮이든 한밤중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이 시간에, 지금 이 시간에도 필자는 당연히 기도를 할 수밖에 없음이다.

그래도 아직은 조금은 남아있는 삶의 매력, 그래도 아직은 아주 조금이지만 스러지지 않은 삶의 유혹,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너끈히 살아볼 가치가 있으니 여기서 무얼 더 바랄까? 오늘 필자에게 허락된 삶의 시간들을 아끼고 소중히 가꿔, 남겨진 삶의 기도 제목으로 설정하고는 작은 한숨으로 위기 탈출의 신호탄 쏘아본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진리, 이제껏 찾아내지 못했던 삶의 속내를 조심스레 탐험하며 오늘도 새롭게 배움의 탑 쌓는다.

한 여성이 봄이 되어 옷 정리를 했다.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옷을 모조리 꺼내 정리하다 보니 작년 한 해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이 있었다. 그 옷은 너무 예뻐서 큰 마음 먹고 거금을 주고 산 옷이었다. 하지만 그 여성은 “좋아하는 옷이니까 아껴서 특별한 날에만 입어야지.” 하며 미루고 미루다 여태껏 그 옷을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시간은 아끼는 걸 따로 떼어내 그 가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지금 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은 바로 지금 하자.

세상 모든 것들에는 시간표가 주어져 있다. 그 때를 놓치면 좋은 것들은 사라져버리기 일쑤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좋은 말이 그렇고, 좋은 생각이 그렇다. 좋은 말이 떠올랐다면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해 주고, 좋은 생각이 났다면 두 팔 걷어붙이고 지금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자. 당신의 인생 스토리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망설이고 주저하다 세상 많은 좋은 것들이 그냥 흘러가버리고 있다. 절대 시간은 망설이고 주저하는 이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요즘은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의식을 많이 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무턱대고 운동을 하거나, 조금 무리하게 과격한 운동을 해도 탈이 없었는데, 지금은 조금만 무리해도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씁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인 걸. ‘탈무드’를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늙는 것을 재촉하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은 두려움, 노여움, 아이, 악처이다.”

좀더 젊게 살려면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마음 속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순수를 잃어버리고, 고정관념에 휩싸여 남을 무시하려는 생각이 든다. 자신도 모르게 왠지 뻔뻔스러워지고, 우연한 행운이나 바라고, 누군가에게 기대려 한다. 오직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으로, 남을 섬기기보다는 기대려 한다. 도움을 얻어내려는 생각으로, 남을 위하기보다는 대우를 받으려는 생각만 하게 된다.

진정 우리가 이렇게 맥없이 나약해져가고 있는 건 아닌지, 누군가의 말에 쉽게 상처를 받고,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심통을 부리지는 않는지, 전철에서 누군가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며 훈계하려 하고, 어떤 사람이든 자리를 양보해주기만을 막연하게 바라고 있는 건 아닌지, 곱게 늙어가고 있는 자신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마음이 늙으면 몸도 더 빨리 늙기 마련이다.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라는 영국 속담이 있다. 우리는 이를 부정하거나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젊은 날을 아쉬워해서도 안 된다.

젊은이들이 누리고 있는 젊음을 우리는 이미 누렸으며, 그런 시절을 모두 겪었다는 사실에 만족해 하면서, 대견스러움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결국 혼자서 가는 길이므로 독립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그만큼 경륜이 쌓이므로 더 많이 이해하고 배려하고 너그러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아집만 늘어나고 속이 좁아지는 사람도 있다. 이루어놓은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삶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감사하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넓고 큰 마음을 갖는다.

반면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패배의식으로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람은 작고 닫힌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면 나보다 어린 약자인 사람에게 대우를 받으려 하고 편협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대우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들을 갖게 된다. 서로가 대우를 받으려고 하면 매사가 부대끼게 된다. 어떻게 살아왔든, 지금의 이 삶을 기왕이면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만족하며 살아야 자기 주변에 평안함이 흐른다.

나이가 든 만큼, 살아온 날들이 남보다 많은 사람일수록, 더 오랜 경륜을 쌓아왔으므로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배려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을, 아랫사람들을 포용함으로써 나이 듦이 얼마나 멋진지를 보여주며 살았으면 좋겠다. “주름살과 함께 품위가 갖추어지면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는 ‘위고’의 말처럼, 마음의 향기와 인품의 향기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시간이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 그런 향기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참 묘한 습관이 있다. 지금 자신에게 닥친 일이 제일 크고 힘겨운 것같이 느끼는 습관. 시간이 조금 흐르면 이내 ‘내가 왜 그깟 일로 힘겨워 했지?’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린 지금 우리 앞에 닥친 일의 어려움과 힘겨움들을 너무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알프레드 드 수지’의 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나에게는 진짜 인생이 곧 시작될 것같이 보였습니다. 언제나 내 앞에는 장애물이 놓여 있었고, 먼저 통과해야 할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미처 끝내지 못한 일, 갚아야 할 빚, 시련과 슬픔... 이 순간만 지나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련과 장애물들이 나의 인생이라는 것을...” 우린 언제나 시련과 어려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시련과 어려움은 늘 우리에게 삶의 지혜와 축복 같은 교훈을 안겨준다. 시련과 장애물이 없는 삶은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와 같다. 고요하지만 지극히 단조로운 삶. 어떤가? 그런 삶을 살아가기에는 당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크고 활기차지 않은가?

‘즐탁동기’라는 옛 말이 있다. 알 속의 병아리가 성숙하여 바야흐로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부리로 알벽을 쪼는 것을 일러 ‘즐(口+卒)’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 알을 내내 품던 어미닭이 자식의 출현을 짐작하고, 바깥에서 알벽을 쪼아 알 깨는 것을 돕는 행위를 ‘탁(啄)’이라고 한다. 즐탁의 ‘동기(同機)’란 바로 알 안의 병아리 부리와 알 밖의 어미닭 부리가 일치하는 순간, 그 알이 깨지는 찰나를 이르는 말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다. 살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또 헤어지기도 한다. 미운 정도 들고, 고운 정도 들고, 사랑으로 남기도 하고, 아픔으로 남기도 한다. 인연을 만난다는 의미가 즐탁의 동기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누군가에게 어미닭이 되고, 마찬가지로 병아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찾아 헤매는 병아리의 마음을 갖기도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어미닭의 마음을 갖기도 한다.

사랑을 이와 같이 생각해도 좋겠다. 안팎의 두 부리를 맞대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런 마음 씀씀이로, 헤아려주고 도와주며 손을 잡고 살았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과의 만남이나, 혹은 헤어짐일지라도 즐탁의 의미로 새기며 산다면 그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관계란 자신이 이끌어내는 것이지 결코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항상 남의 칭찬과 지원을 기다린다. 그리고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금방 절망에 빠진다.

그것은 그가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으로부터 찬사가 들려오지 않으면 실패감을 느낀다.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어떤 일도 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미친 듯이 열중한다. 그는 분명 나약한 존재다. 그는 지나치게 남의 이목을 중시하고 있다. 분명 그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바람결에 쉽게 흔들려 의지를 흐트릴 수는 없다. 만일 갈대처럼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면 우리들은 우정이든 사랑이든, 아니 그 외의 어떤 일에서도 꼭두각시처럼 조종을 받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가치관이란 남이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자신의 방법인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일까?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어찌도 그리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정말로 신기하다. 세상의 사람은 너무 많고, 내 자신의 재량은 너무나 작기에 그들 중 반을 만나기도 힘들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인연’, 혹은 ‘필연’이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어떤 경우에는, 스치는 것이 사람이기에 그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곤 한다.

그 사람과 자신이 만나게 됨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 사람이 곁에 없다면 하고 생각해 보자. 결코 쉽지 않은 만남이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 손수 만든 작은 선물을 그에게 주고 싶어지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나를 변화시키고도 싶어진다. 또한 그 사람을 위해서 나의 것을 포기하고도 싶어진다. 떨어져 있는 시간은 잠시라도 견디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어떤 이가 너무나 미워지면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 정도 혼자 지내보자. 자기 방에 콕 들어앉아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자. 사람이 큰 잘못을 하는 건 어렵지만, 그동안 아마도 알게 모르게 당신은 그 사람에게 작은 잘못들을 무수히 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자세히 알게 되면, 눈물을 흘리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때 건네받게 되는 자그마한 선물에도, 생각지도 못한 때 전화벨이 울리고 “네가 생각나서...” 그 한 마디에도, 그가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을 때도 눈물을 흘릴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 사람과의 만남을 감사히 여기게 되고, 하루하루 그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 때가 없을 것이며, 때론 그 사람을 미워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로 인해 눈물 흘릴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 그 사람과 나 자신의 마음이 같아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 보다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그리고 믿어보자. 사랑은 이뤄질 때보다 바랄 때가 더 행복하고 이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나중에 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된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당선자이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작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하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하다. 미운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한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연합군이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이미 하순에 접어들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빠른 게 시간이다. 이제 얼마 안 있어서 한낮에는 폭염과 열기로 온통 펄펄 끓는 대기에 시달리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우리가 바란다고 해서 쉬이 오고, 우리가 회피하고 싶다 해서 오지 않는 게 아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아무런 선전포고도 귀띔도 해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처들어 온다. 그리고는 마치 불한당처럼 우리 삶을 휘젓는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제아무리 시간의 흐름이 일방적이고 인정 사정 없다 해도, 우리가 진실과 사랑으로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소중히 가꾸어나간다면 우리의 삶이 필경 아름답고 찬연하게 꽃 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그런 믿음 있어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 숨 쉰다. 우리는 살아가는 사람이다. 귀하디 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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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중엔
16분음표 닮은 아지랑이
자글자글 피어오르고,
쪽창밖 빨랫줄철사엔
이슬 매달아 총총 맺힌 물방울
수정처럼 반짝 빛 반사한다

검은 게 유독
더 검게 보이는 한낮

삶의 궁극인 영원
지금 이곳에 명암 머금으며
모든 '나'가
동시에 모여든 일치의 순간 말해주고 있는데

삶에 있어 소통이란 것,
다 받아들일 때
만회의 기회도 찾아올테지

새삼 신뢰라는 말 사용하기는 쑥스럽지만
기도문은 적어보련다

사랑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단 한 번 얼굴 스친 사람들도,
내가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한 때 내게 무지 잘못했던 사람들도,
내가 무지 더 잘못했던 사람들도,

모두 모두 안녕하기를,
그래서
모두 스스로 평화롭기를-

한낮인데도
제각기 다른 산등성이색
계절 빛에 감싸여 우련하고
드리워진 햇살은 분명코 연둣빛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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