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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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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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무 *



시작노트

" 허무 " 詩作 note

‘허무’라고 하는 단어는 사람을 맥빠지게 한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른해지고, 입 속으로 되뇌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바보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힘이 있다. 허무는 그런 것이다. 애매모호한 실체, 허무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빔’ 또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함’이다.

이런 허무를 화두로 삼아 고민하고 몰두하는 철학을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니힐리즘(nihilism)’은 허무주의를 이르는 말로, 어원은 라틴어의 ‘무(無)’를 의미하는 ‘니힐(nihil)’이다. 니힐리즘의 원래 의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無(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그리스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니힐리스트’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서 니힐리즘이란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 그러한 입장에 따른 생활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일종의 니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회의 진보란 모든 사회적 제도를 해소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무정부주의’도 니힐리즘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철학에는 세 가지 큰 갈래가 있다고 보통 얘기된다.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이 그것이다.
윤리학의 영역에서 허무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아마 인식론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러나 존재론에서 허무주의는 상대주의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존재론에서의 허무주의는 아무 것도 없다는 입장이고, 상대주의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돌아와서 윤리학에서의 허무주의는 모든 게 무가치하다는 입장일 거다. 때문에 어느 시대에서건, 따라야 할 규범같은 건 있을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는 시대마다 따라야 할 규범을 긍정할 수 있는 측면이 생긴다. 항상 옳은 것은 없지만, 그때그때 옳은 것은 있다고 말할테니까 말이다. 즉, ‘법이나 도덕과 같은 것들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일종의 편의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이 될 수 없으며, 시대가 흐르면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허무주의적 사고보다는 상대주의적 사고에 가깝다고 본다.

다시 정리하자면 허무주의는 그 어떤 것도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입장이며, 상대주의는 항상 옳은 것은 없고, 우선시되는 가치도 바뀔 수 있지만, 긍정될 수 있는 가치는 있을 것이라는 입장인 것이다.

‘헤겔’을 중심으로 한 독일 ‘관념론’이 맹위를 떨치던 19세기 초반, 이에 맞서 의지의 철학을 주창하면서 생의 철학자로 유명한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독창적이었으며, ‘니체’를 거쳐 ‘생의 철학’, ‘실존철학’, ‘인간학’ 등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책인 ‘생존과 허무’는 생존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책이다.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인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과 ‘PARERGA UND PARALIPOMENA’에서 발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간추려 쉽게 설명한 에세이로, 삶의 괴로움, 생존과 허무, 사랑과 죽음, 교육, 처세, 명예 등에 대해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 만물은 생존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세계는 그 의지의 표상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관심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있지 않다. 그는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고통으로 점철된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고민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고통은 자아의 필연적 조건이다. 삶을 의지(意志)하는 한 고통은 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길을 향한 처절한 생존 여행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평안을 얻는 방법은 자아의 의지를 거부하는 데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형이상학자’라고 할 수 있다.

염세주의자이긴 하지만, 철저히 ‘칸트’적인 합리성에 충실한 쇼펜하우어는 자기 철학에 종교성을 부여하지 않은 채, 과학적 철학자로서 자신이 보는 생존에 대해 솔직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글은 수많은 고통에 대한 합리적 해결 방안들을 모색한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허무주의에 관련하여 의견을 피력한 다른 유명한 철학서적은 이 밖에도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국내의 책으로서, 신학박사인 ‘황명환’이 저술한 ‘허무’가 필자의 눈길을 끈다. ‘열정적으로 살아왔으나 고독한 당신께 드리는 선물’이라는 부제로 출간된 이 책은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책 ‘전도서’의 내용을 새롭게 풀어쓴 것이다.

전도서는 ‘지혜의 왕’이라고 하는 솔로몬이 늙어서 마지막으로 남긴 인생 고백서다. 권력을 가진 왕이었으며, 누구보다도 부유했고 지혜로웠던 솔로몬이었지만, 그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자 몸부림쳤고, 결국 인생은 헛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책은 솔로몬의 삶을 통해 허무를 극복하는 지혜, 즉 ‘허무의 지혜’를 성경의 예언을 통해 전하고 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처럼 부유하고 지혜롭고 권력을 갖고자 애를 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솔로몬의 고백에 동의한다. 그리고 ‘허무’라는 인생의 결론 앞에서 절망하고, 쉽게 무릎을 꿇는다.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고독해 한다. 정말로 허무가 인생의 끝이라면, 고독이 삶의 결과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책은 솔로몬의 입을 빌어 이 질문에 대답한다.

내친 김에 한 권만 더 소개해보자. 그냥 그런 허무의 이야기가 아니고 행복한 허무에 관한 고찰이다. 이른바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라는 제목의 책이다. 걷는 사회학자 ‘정수복’이 만난 둥지 철학자 ‘박이문’의 이야기다. ‘행복 허무주의자’ 박이문은 장래가 촉망되는 문학평론가이자 대학교수였던 서른한 살의 나이에 안정된 자리를 뿌리치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파리로 떠났다.

이 책은 그 지적 방랑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인생과 세상에 대한 총체적 앎을 추구한 원로 철학자와, 젊은 시절 그의 책을 읽고 성장한 다음 세대의 사회학자가 오랜 기간 만나 나눈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박이문의 둥지의 철학은 그가 평생 동안 동서양을 섭렵하고 또 문학과 사상과 예술을 넘나들며 모으고 가꿔온 다양한 언어의 재료들로 엮은, 편안하고 아름다운 둥지다. 둥지의 철학은 박이문 철학의 모든 것이 응축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혼란과 격동의 시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온 노철학자가 자신의 평생을 다 바쳐 빚어낸 위대한 ‘사유의 심포니’다.

그의 평생의 사고와 글쓰기 작업은 영혼이 거처할 ‘둥지’를 짓는 일이었으며, 지금도 그 둥지를 계속 더 아름답고 편안하고 견고하게 리모델링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렸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정신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 면면히 계승되고 전승되어야 할 고귀한 가치다.

굴곡이 많은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사회는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던 전 세대의 인물들을 넉넉히 만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삶을 기록하여 다음 세대로 전승하는 일이 중요하다.

모든 세대는 전 세대로부터 정신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물려받아 그것을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다음 세대로 넘겨줄 책임이 있다. 존경할 만한 삶, 닮고 싶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 세대의 이야기가 많이 있어야 젊은이들 또한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힘을 얻는다.

한 편, 동양철학인 ‘노장사상(老莊思想)’에서는 허무를, ‘천지 만물의 본체(本體)로 형상이 없어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이존오(李存吾)’의 ‘환조노상망삼각산(還朝路上望三角山)’이라는 한시를 보면, 허무를 빗대어 ‘三朶奇峯逈接天 虛無元氣積雲煙(삼타기봉형접천 허무원기적운연 ; 세 떨기 기묘한 봉우리가 멀리 하늘에 닿았으니, 허무의 정기가 구름과 이내에 쌓여 있구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 허무라고 하는 주제는 수많은 유권해석과 주관적인 시선을 유도하는 복잡한 과제이다. 단순하게 허무 그 자체로 성향을 결정지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허무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삶의 모습들이 허무의 차원을 넘어서서, 진실과 정의의 범주까지 넘나들기도 하고, 허무에서 파생된 많은 아류들, 이를테면 철학과 종교와 사회적 문제까지 그 지경을 넓히며 우리에게 심사숙고를 요구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허무의 세계’다. 마치 거미줄처럼 엮인 미로에 사람의 삶을, 한 평생의 여정을 밀어 넣은 형상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미증유의 거력이 숨어있는, 절대진리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그래서 허무는 어렵다. 복잡다단하다. 결코 책 몇 권으로는 대신할 수 없는 주제다.

시작노트에 필자의 또 다른 시를 한 편 통째로 인용하기는 처음이다. 답도 없는 허무에 끝없이 탐닉하던 어떤 시절의 시라서, 지루하더라도 그냥 원문을 이입한다. ‘너무 너무 아파서’라는 제목이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도 답은 찾지 못한 상태임을 고백한다.

‘추억 만들어지는 꿈의 세계 / 눈시울 뜨거워지면 / 슬픔과 비탄 너머에는 무엇 있을까요? / 그건 허무랍니다 / 그 허무, / 인연 굴레 따라 힘겹게 돌아가는 삶 / 순간이나마 조금씩 해방시켜주고 / 댓가로 받은 아픔, / 무한한 떨림과 눈물 홍수 하류로 범람하면 / 폭력 성찰하는 예술의 힘 환골탈태하여 / 지층 거슬러 올라가는 자성 현장도 / 더불어 휩쓸리겠죠

난 알아요 / 세상사람 누구든 / 가슴에 한 가지씩은 아픔 지고 산다는 것을 / 그리고 또 하나 더 알아요 / 강한 사람은 / 그 슬픔과 아픔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 피하거나 지우려하지 않는다는 걸 / 그러나 내게 아픔 기억 남기지 않으려거든 / 그대여! / 아니 온 듯만큼만 다녀가소서

호기심은 충동적이고 찰나적인 것이므로 / 이 한 번의 짧은 호기심 / 최대한 이용하여 / 잠의 고리로 빗장 잠겨져있던 / 입 조심스레 벌어지면 / 불가사의한 망각 앞 웃음 거두고서 / 어리둥절한 기분 되겠지만 /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것 보다 / 누군가를 미워하는 게 더 상처라 하니 / 정녕 이 이상은 아프고 싶지 않네요 / 난 지금 충분히 / 너무너무 아프거든요’

허무의 반대말을 제시하라면 어떤 단어가 가장 적절할까? 물론 딱히 이거다 하고 단정적으로 꺼내들을 카드는 없다. 그래서 곰곰 생각하다가 한 단어를 떠올린다. ‘행복’. 이건 어떨까? 물론 행복이라는 말도 그리 만만한 단어는 아니다. 몇 마디의 설명으로 본질을 다 매만질 수가 없는, 정말 벅찬 단어다.

성취주의자는 미래의 노예로 살고, 쾌락주의자는 순간의 노예로 살며, 허무주의자는 과거의 노예로 산다고 말한다. 행복은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고, 산 주위를 목적 없이 배회하는 것도 아니다.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이다. 행복이란 어떤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몰입의 즐거움과, 희망의 환상이 주는 기쁨이다.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오늘도 소중한 내 삶의 일부분이고 행복의 조건이며 열쇠다.

행복은 지표 없이 흔들리기 쉬운 허무한 삶의 이정표에, 한 줄기 청량한 생명의 물이 되어지는 전환점이다. 밤에도 쉼 없이 살아 숨쉬는 생명의 탑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는 밤하늘의 별들이 유성으로 스치는 곳을 따라, 무척이나 먼 길이라도 걸어 오르고 싶은 의욕을 싹틔우는 생명의 발걸음이다.

한 움큼의 별들이 자디잔 콩인 양 널린 하늘마당에 앉아, 행복한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밤에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노라면, 언제나 그리움으로 반짝이는 별을 닮아, 뒤꼍 울타리너머 담장 타고 오르는 생명의 그리움 있을테고, 한 올 실낱같은 마음 안고서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곳에서 오롯이 빛나는 사랑이라면, 비로소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생명의 줄인가?

슬픔처럼 속절없이 허무할 때도, 그리움 하나 별빛으로 스쳐 유혹의 손짓 보내면, 어디라도 끌려가고 싶은 가슴을 보듬으며, 이내 사랑하는 이가 밟고 올테고, 그러한즉 그 밤은 얼마나 행복하고 좋을까? 닿을 수 없어서 더욱 간절하여 은하강을 흐르는 물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천 년을 흘러도 변함없는 별빛, 그 별빛 속에 빈 가슴 적시면서 그리움 사이로 행복이 보일 듯 하니, 곧 타올라 뜨거워지는 것이 생명의 온도이리라.

돌아오기 위하여 떠나는 이들의 눈부신 배후 앞에서, 말려도 지지 않는 그리움 씻어주려고, 어깨에 별빛을 얹고 저만큼 걸어오는 행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허무의 그림자를 지우며 빛나는,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며 우리의 삶을 감싸는, 행복하고 따스한 빛무리를, 필자는 이제부터 이렇게 부를 거다. ‘행복한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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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의 끝엔 회상이 똬리틀고 앉아있지만
삶은 필사적으로 엄중해서
감상 허락치 않는다

감상은 사람을 허방에 빠뜨릴 뿐이라
운명이라는 전언에 허 찔려도
그냥 서서 웃더라

허무 보아버린 사람만의 고독과 태연함,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범상한 수긍 아직이겠지만

어쩔 것인가 ?
이제는 이미 넘어버린 것을
이미 넘어버린 걸, 지나와버린 걸,
돌이킬 수는 없다

덜커덩 !
애저녁에 말라비틀어져
영혼 밟고 넘는 소리 무지 섬뜩하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

"이리 와서 나하고 놀자, 난 참 쓸쓸하단다"
그렇다면 오늘 쯤
어린왕자 한 구절 독백을 듣자

가혹하고 파괴적인 것이 시간이라는데
인연에서 해방된 자 허무로 돌려보내는
슬프고도 무람없는 작별에 대해
어린 그가 무얼 알겠냐만은

누리고 있을 땐 모르는 게 일상의 소중함임
진즉 알았더라면
최소한 그 때 그 시절
더 행복해 하고 특히 더 감사했을 것을,

미소 새겨지는 내일
피나게 그리워하며
생각도 안나는 꿈 뒤져 허무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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