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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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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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하 *



시작노트

" 축하 " 詩作 note

애매모호한 내용의 시다. 사전 설명이 없다면 도대체 언제 어디서 왜 이런 시를 적었는지 아리송할 게다. 그리고 읽는 이마다 각자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비평하고, 결론지을 게다. 혹자는 안타까워 혀를 끌끌 찰 테고, 다른 이들은 돌 하나 슬금 던질 지도 모른다. 제목은 단순하여 그럴싸 한데 웬지 줄거리가 걸죽하니 스산타. 인간사 요지경임은 분명한 진실이고, 이런 저런 일들로 굴비 엮듯이 꽁꽁 엮어져 냄새 풍기는 게 인생인 것을 진즉에 모르지는 않았지만, 과거 어느 한 시절 분명히 필자의 아픔이 지독히도 더했던, 냄새나던 시절의 이야기다.

맞다. 정신병동이라는 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원한다고 들어갈 수도 없거니와 마음대로 나올 수도 없는 심처가 그곳이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판단이 합치되어져야만 겨우 문 빼꼼 열어주는 지옥이 바로 정신병동이다. 한동안 필자는 본의 아니게 거기서 살았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흡사 이미 죽어진 이들처럼, 벌레마냥 꿈틀대며 숨만 쉬면서 세월을 죽였었다. 수년 동안 이어진 하루 하루의 날들을 피와 눈물로 주저리 엮어 쌓으며, 게서 그리 살았었다.

이러저러한 사연들 다 녹여버린 후 탈출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때론 한없이 부러워 한숨으로 탑 높이 세웠고, 세상을 향한 색 짙은 증오와 인간 본연의 본능적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어 어금니가 닳아 문드러질 때까지 소리내어 갈면서, 창살 부여잡고 목이 터져라 소리친 날도 부지기수였다. 미움과 배신감으로 인해 온 몸에 좁쌀같은 발진이 창궐하고, 이른바 욕창인지 습진인지 제목도 부정확한 피부병에 시달리며, 피폐해진 심신에 생기마저 희미해지는 위기에 맞닥뜨리기도 했었고, 일시적이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려 사시사철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사면초가 불통의 세상에서 홀로이 싸우면서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려 애를 썼었다.

그리고, 그 절망의 세월을 넘어 마침내 그립고 고대하던 바깥 세상에서의 또 다른 날들을 갖게 되었다. 새롭게 열리는 새벽을 경험하면서, 새로이 떠오르는 햇살을 마주하면서, 필자는 다짐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던 광명의 세월 위에, 다시는 느끼지 못하리라며 포기할 뻔 했던 꿈의 계절 위에, 필자가 다시금 자리매김하는 역사적 시간을 누리면서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이다지도 뼈 저리는 소중한 오늘들을, 이렇듯 몸서리치도록 행복한 아픔들을, 이토록 살 떨리는 아름다운 슬픔들을 다 사랑하리라고, 기꺼이 감내하리라고, 다시 열리는 하루들은 정녕 귀하게 여겨 낭비하지 않으리라고 말이다.

비단 그 결심들이 다소 퇴색되어 지금 조금은 나태해지고 비루해졌을망정, 설령 그 계획들이 어쩔 수 없는 여건과 환경 때문에 아직은 열매 맺지 못하고 그냥 넉장거리로 철푸덕 주저앉아 숙제로 남겨져 있다손 치더라도, 필자가 살아내고 있는 오늘은, 필자가 열어가고자 하는 내일은, 그토록 처절하고 그만큼 치열하다. 그래서 필자는 믿는다. 굳게 확신한다. 남은 목숨줄 굳건히 움켜쥐고, 온 힘을 다해 어제의 상처와 흔적을 덮어가는 삶으로 살아가리라고. 그리고 끝내 이루고야 말리라고.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세상을 여는 데 일조하리라고, 자그마한 힘이나마 모두 기울여 기꺼이 보태리라고, 그렇게, 그렇게 신앙한다.

허기사 나름 몸서리 쳐지는 기억이니 딴에는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상흔이기에 앞으로의 날들에 화인으로 새겨져, 뚜렷한 족적되어 필자를 이끌 것이라는 막연한 바램이지만 아마도 다른 이들에게는 실감할 수도, 동조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공감대가 형성되기란 영 쉽지 않을 성 싶기도 하다. 어쩌면 필자 스스로에게도 확언할 수는 없는 바, 행여 시일이 이만큼 흘러버려 다시금 예전의 각오나 다짐이 마치 남의 일인 양 여겨지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으니, 나남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모양새가 매양 흉하기 그지없음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러기에 또 확실히 안다. 예컨대 안개 속의 그림자일지라도 필자의 남아 있는 날들은 그 옛시절의 날들과는 결단코 구분지어질 거라는 사실을. 또한 다시 또 세상이, 이웃이, 그리고 현실이 필자를 떠밀어 세상 밖으로 격리시키려 든다면, 차라리 혀를 깨물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의 멱을 따고야 말리라는 것을... 어쩌다 보니 시작노트가 제법 으스스하고 엽기적으로 흐르는 것 같은지라, 지극히 영양가 떨어지는 개인 사연은 이 쯤에서 대충 얼버무리고, 과거와는 이만 총총을 고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 답게, 인간스럽게, 참된 인간으로 살아보는 게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며 한결같은 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배우고 익히며, 보다 향상된 삶을 위해 열심히 학습하고 있다.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하여, 보다 높은 삶의 수준을 원하면서,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쉬지 않고 전진한다. 설사 속도를 더하는 확인과 눈에 띠는 성과가 없을지라도 지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한 걸음 씩 뗀다. 그렇게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며 살아간다.

중세 이전,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를 표현한 조각상들을 보면 한 손에는 법의 힘을 상징하는 검을 들고, 한 손에는 법의 엄격함을 상징하는 천칭을 들고 있다. 그 상징이 중세 이후에는 하나 더 추가되었다. 바로 법의 공정함을 상징하는 눈가리개다. 오래전 미국의 한 지방법원의 ‘제인스 허킨스’ 판사는 재판 때마다 눈을 하얀 헝겊으로 가렸다.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판결을 내리고 재판이 끝나면 눈을 가린 헝겊을 풀고 멀쩡하게 걸어 법정을 나섰다. 그가 재판할 때 눈을 가린 이유는 유스타치아 여신상이 눈가리개를 하는 이유와 똑같았다. “내가 법정에 들어설 때 눈을 가리는 이유는 사람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원고나 피고 혹은 증인 중의 단 한 명이라도 내가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나 자신도 모르게 판결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고 한다. 심지어 잘 아는 사람의 잘못을 규정대로 처리하면 매정하다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법이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좌우된다면 사회질서의 뿌리가 흔들리는 일이다. 때로는 나 자신의 눈을 마음으로 가리는 일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방법이다. 법의 형태가 아닌 그 정신이 정의를 살아있게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일상들은 참되고자 하는, 진실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마음으로 규명되어져야 한다. 무릇 정의는 진리 속에서 살아난다.

영국 런던 거리에서 순찰 중인 경찰이, 한 고급 자동차가 신호위반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경찰은 당연히 그 차를 길가에 세우고 교통범칙금을 발부하려는 데,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운전자는 면허증을 요구하는 경찰의 요구보다 뒷좌석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는 것이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영국 총리인 ‘처칠’이었다. 처칠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경찰에게 말했다. “정말 미안하네. 나는 총리인 처칠이네. 내가 지금 바쁜 국정 회의가 있어서 운전 기사에게 신호를 무시하라고 지시하였어. 지금 정말로 급한 상황이니 신호위반은 한 번 봐주면 안 되겠나?”

하지만 경찰은 뒷좌석에 앉은 처칠을 보면서도 신호위반을 원칙대로 처벌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교통법규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영국의 총리일 리가 없습니다.” 처칠은 나중에 경찰청장에게 전화해 공정한 공무의 대가로 해당 경찰에게 1계급 특진을 하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청장은 처칠에게 말했다. “제대로 된 법을 당연히 집행한 사례에 대해서 그동안 승진시켜준 예가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많은 지도자들이 부끄러운 이름을 언론에 오르내리게 하는 요즘,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의 무게가 엄격하게 느껴진다. 불이익 앞에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소신을 위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거절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소신은 중대하고 갈 길은 멀다. 그것을 각오하고 사명감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창한 봄날 아이들이 공원에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나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눈에 공원 한 쪽 벽에 페인트를 열심히 칠하는 세 명의 어른들이 보였다. 아이들이 다가가 궁금해서 물었다. “아저씨. 지금 뭐하고 계세요?” 첫 번째 어른은 아이들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페인트칠 하고 있는데 지금 너무 힘드니까 조용히 해줄래?”

아이들이 두 번째 어른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피곤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대답했다. “뭐하긴?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지. 옷에 페인트 묻으니, 저리 가서 노는 게 좋겠구나.”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세 번째 어른에게 질문하자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대답했다. “아저씨는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그림을 이 벽에 그리고 있지.” 아이들은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다. “벽에 그냥 하얀색만 칠하고 있는데, 어디에 그림이 있어요?”

아저씨는 여기저기 페인트가 묻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여기 하얀 벽이 아저씨가 그리는 그림이고 작품이야. 아저씨는 항상 깨끗한 벽을 만들어 낸단다.” 흔한 이야기다. 그냥 웃어넘기기 쉬운 일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작은 이야기에서도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저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벽돌에 불과한 벽이라도, 진정한 자부심으로 페인트를 칠한다면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 할 수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어떤 자부심도 없다면 그 일은 그저 해야만 하는 의무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긍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면, 가치 있는 멋진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 자부심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 요즘처럼 혼탁하고 질서가 뒤죽박죽이 되어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개인적으로 설정한 지표나 푯대의 가치가 두드러지게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지기도 한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심도 있는 주의가 필요한 이유다.

어느 초등학교 교실. 아이들이 한 사람씩 일어서서 글짓기를 발표하고 있었다. 숙제의 제목은 ‘부모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직업이 많아서인지 아이 중 같은 직업을 가진 부모님은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각자 부모님의 직업을 재미나게 발표하였다. 그런데 다음에 발표할 아이를 보고 선생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그 아이는 부모님이 이혼하고 가정 형편도 어려워져서 오래전부터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 아이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초조하게 지켜봤다. “우리 엄마의 직업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빨래도 많이 하고, 청소도 많이 하고, 설거지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바쁘시지만, 우리가 자려고 불 끄고 누우면 ‘잘 자라, 사랑한다.’고 언제나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가 참 좋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은 평범한 발표라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도 집에서 저렇게 하시는데...’ ‘쟤네 집에 형제가 많나 봐.’ 하지만, 선생님은 알고 있었다. 그 엄마는 보육원의 수녀님일 터였다. 선생님은 발표를 마치고 내려온 아이를 사랑스럽게 안아주었다. 사랑받는 아이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사랑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실천하는 것이다.

아이를 그저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사랑을 가르치고 새로운 사랑을 만드는 일이 된다. 우리가 가진 두 손 중 한 손은 나 자신을 위한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 두 개의 손을 얼마나 적절하게, 용도에 맞게 사용하고 있는가 돌아봐야 한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하루살이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이고 지나고 나면 결론은 똑같은 걸, 무에 그리 유난스레 의미를 두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의 편린들은 하나 하나가 밝게 빛살 뿌리는 빛의 의미인 것이다.

“윤한아! 창수야! 병훈아!”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찾고 있었다. 1979년, 7월 7일. 가재를 잡으러 ‘남목산’ 계곡에 간다고 나간 아이들이 사라진 지 벌써 20일이 넘었다. 많은 사람은 아이들이 제발 살아서 돌아오길 간절히 소망했다. “여기요. 살려주세요.” 다른 편에서는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살고자 했다. 아무것도 없는 숲 속에서 빗물을 받아 마시고 겨우 구한 산딸기를 나눠 먹으며 살아있었다. 심지어 자신들을 찾는 소리를 듣고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굶주림으로 약해진 아이들의 목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실종되고 28일이 지난 8월 4일, 약초를 캐러 산에 오른 세 명의 할머니가, 오랜 굶주림으로 인해 뼈와 가죽만 남은 아이들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고작 7살이었던 아이들은 조그만 먹을 것도 셋이 나누고, 비가 오는 추운 밤에는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28일 동안이나 죽음과 싸워왔다. 아이들을 찾아주는 사람에게, 당시로써는 거금인 300만 원의 포상금을 주기로 했지만, 할머니들은 생명을 구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상금을 거절했다. 그렇게 구출된 세 명의 아이들은 매년 명절마다 자신들을 구해준 할머니들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이제 할머니들은 모두 노환으로 돌아가셨지만 그 은혜를 영원히 마음 속에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작은 아이들이 28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두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죽음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아이를 구한 어른들은 돈보다 그 아이들의 생명을 아끼고 더 소중히 여겨주었다. 생명의 무게와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가는 요즘, 세 아이와 세 할머니의 가치 있는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봐야 하겠다. 인간의 생명은 둘도 없이 귀중한 것인데도,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이 생명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진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우리 주변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형태들을 보면서 우리는 평온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가끔 보여지는 일탈과 분쟁의 현장에서 변화를 느낀다. 나와는 다른 어떤 상태를 경험하면서는 틀린 점을 찾으려 애쓰고, 기준이 뚜렷하지 않은 모순을 대할 때는 정립된 자아와 자존심을 먼저 챙기려 든다. 먼 길을 가는 기러기는 낙오하는 친구를 위해 동반 하강한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

대열을 유지하면서 각자의 기러기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공기의 구양력을 얻어 뒤따르는 동료의 힘을 덜어준다고 한다. V자 대열을 함으로써 공기의 저항을 줄여, 홀로 날 때보다 약 71퍼센트의 거리를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맨 앞의 기러기가 피로를 느끼게 되면 뒤로 빠지고, 다른 기러기가 그 자리를 맡아서 항해를 지속한다고 한다. 선두 기러기의 속도가 떨어지면 뒤 쪽의 성원들이 고함을 지르고, 한 기러기가 아프거나 다치거나 총에 맞았거나 하여 낙오하면 두 마리의 기러기가 같이 동반 하강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친 기러기가 죽거나 회복하면 그제서야 V자 대열을 다시 만들어 대열에 합류한다고 한다. 낙오한 친구를 위해 동반 하강을 한 경험이 있는가? 혹시 구경만 하거나 추락시키려 하지는 않았는가? 인간은 서로를 돕고 사랑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온다는 말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기러기들의 지혜를, 동지애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 한 마리가 동해에서 온 거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물 난간에서 뛰어 놀기도 하고, 우물 안에 들어가 벽에 기대어 쉬기도 합니다. 물에 들어가서는 두 손을 맞잡고, 그 위에 턱을 받치고 물 위를 떠다닙니다. 장구벌레나 게나 올챙이를 보아도 나만큼 재미있게 사는 것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물을 독점하고 우물 안에서 큰 소리치고 사는 재미란 최상의 것이지요. 당신도 때로는 이리로 놀러와 내가 사는 것을 구경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거북은 시험 삼아 우물에 들어가보려 했으나, 개구리가 사는 우물이 너무 좁아서 왼 발이 다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오른 쪽 무릎이 걸리고 말았다. 그러자 어정어정 뒷걸음질을 하면서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사는 바다는 천 리라는 숫자로도 크기나 깊이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옛날 우왕(禹王) 때에는 팔년 동안 아홉 번이나 장마가 졌지만 바닷물이 더 늘지 않았고, 탕왕(湯王) 때에는 팔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가뭄이 들었지만 바닷물은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엄청난 양의 물이 있으므로 시간에 따라 늘거나 줄지 않고, 비가 많이 오나 적게 오나
항상 물이 철철 넘치는 바다에 사는 것이 나의 큰 즐거움입니다.” 개구리는 이 소리를 듣자 깜짝 놀라 넋을 잃었다. “세상에! 그런 세상이 있다니.” 사과 한 알을 두고도 어린아이는 그것이 그냥 맛있겠다고 하고, 화가는 그 빛깔이 예쁘다고 하고, 시인은 그것의 생김새가 참 멋지다고 한다.

영화를 보아도 옷을 만드는 사람은 배우의 멋진 옷을 놓치지 않고,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배우의 멋진 구두를 놓치지 않고, 모자를 파는 사람은 배우의 멋진 모자를 놓치지 않고,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은 대화 중의 멋진 표현을 놓치지 않는다. 개구리처럼 사람도 자신이 살아온 만큼 사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은 내가 개구리처럼 살았고, 남들은 거북이처럼 산 것이 아닌가? 하고 겸손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제아무리 힘든 시절이라고 해도 지나가기 마련이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의 시간도 흘러가게 되어 있다. 정신병동에 사로잡혀 옴짝달싹도 못할 적에는 그것으로 모든 삶의 기쁨과 행복이 다 끝난 줄로 여겨져 소름 돋았었지만, 예정된 수순대로 조물주의 섭리대로 결국은 탈출할 수 있었으며, 지금은 그 사실을 추억으로 회고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삶은 그럭저럭 돌고 도는 역사인가 보다. 한 참 세월 흐른 뒤, 불현듯 멈추어 서서 뒤돌아보면 오늘 이 하루도, 지금 이 순간도, 자질구레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되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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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하나 퇴원한다
돌아가는 거다
그런데 왜 축하 보내다 말고
코끝 저려오는지 -

제기랄 !
벌써 이따위 상념에나 빠지다니,
아직도 여러낮 여러밤 참아내야 할 거면서
정작 고비도 넘기기 전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라니,

아무렴 !
정신병동에서 사색은 사치다
상념도 소모다

견딘다는 것,
단호하고 단순하며
왕성한 오직 그 하나의 목적
그 목적만이 갖는 시간의 끄나풀
기쓰고 매달려야 한다

그렇지 !
그게 싫다면 애초
병동에는 들어오지를 말았어야 한다
어둠,

밤 되면 다 어둡기 마련이지만
오늘밤 어둠은
침울한 구름덩이 휘말린 하늘 말해주듯
칠흑의 어둠 그 자체다

언뜻 귓가에 흩어지는 정적만 앵할 뿐
무저갱의 계곡에서
득달같이 무정한 바람 불어온다

꺾인 인생,
패배와 치욕과 복수의 윤회 거듭되어
목줄기 타서
견딜 수 없는 심정이지만
이미 혼백이 뜨게
한번 혼찌검난 인생,

옳거니 !
무조건 견뎌라
악착같이 견뎌내라
살 길 그것뿐이니라

퇴원하는 동료에게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동료에게는,
축하 보내라
진심으로 축하 보내라

그럼 되는 거다
그걸로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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