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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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강 일출 소회 *



시작노트

" 겨울강 일출 소회 " 詩作 note

2019년을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공명지조(共命之鳥)’가 선정됐다. ‘공명지조’는 한 몸에 두 머리를 가진 새가 어느 한 쪽 머리가 사라져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한 쪽이 사라지면 다른 한 쪽도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어, ‘목숨을 공유하는 새’라는 뜻이다. 전국의 1,046명의 교수 중 347명(33%)이 한국의 현재 상황은 정치적 편싸움으로 분열되어가고 있다며 해당 사자성어를 선정했다. 사실은 ‘공명조(共命鳥)’라고 하는 새는 ‘아미타경(阿彌陀經)’, ‘잡보장경(雜寶藏經)’ 등 여러 불교경전에 등장하는, 머리가 두 개인 상상 속의 새로, 한 머리가 시기와 질투로 다른 머리에게 독이 든 과일을 몰래 먹였다가 둘 다 죽고 만다는 설화 속에 등장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꼭 슬픈 운명을 지닌 ‘공명지조’와 같은 형국이다. 어떻게 한 번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사사건건 극과 극을 향해 치닫는 것일까? ‘공명지조’를 선택한 교수들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좌우 대립이며, 진정한 보수와 진보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정치가 좌우로 나뉜 것은 그렇다고 치고, 왜 국민들까지 이들과 함께 나뉘어서 편싸움에 동조하고 있는지 안타깝다.”는 의견을 내놨다.

인터넷 상의 ‘덕화만발 카페’라는 곳에는 ‘우리들의 운문 방’이라는 제목의 코너가 있는데, 거기에 ‘청니(靑泥) 김병래 시인’의 ‘공명지조’라는 제목의 시가 올려져 있다.

「예로부터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이웃집 호박이 잘되면/ 말뚝을 박는다 했다/ 어떤 심사에서/ 그랬을까?/ 진정 남이 망하기를/ 바라고 좋아하는 민족이련가?/ 네가 죽고 내가 산다고/ 내가 죽고 네가 산다고/ 이 세상 모든 게 네 것이 되고/ 내 것이 되겠는가?

아니다/ 아니다/ 절대 아니다/ 눈만 뜨면 네 편 내 편 갈라/ 죽자 살자 물어뜯는 풍토/ 언제쯤 사라지려는가/ 머리가 둘 달린 새가/ 서로 다투고 미워하다/ 함께 죽었다는 의미를/ 깊이깊이 생각해 보자.」

그렇다. 보수 진보를 넘어 사회정의를 실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는다. 건강한 보수, 건전한 진보, 그 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두 축(軸)이다. 보수는 진보의 급진적인 무리한 변혁을 저지방어하고, 진보는 보수의 기득권 횡포와 전횡을 억지 견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보 보수의 존립 의미이자, 또한 담당해야 할 역사적 책무이기도 한 것이다.

서로가 자기의 주의주장만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고집하며 양보와 승복을 않는 한 그 해결책은 있을 수가 없다. 더욱이 그들의 주의주장이 독선과 맹신에 바탕 한다면 그야말로 파멸 밖에는 있을 수 없다. 나라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보수나 진보가 치열한 자기 성찰과 일대 혁신이 있어야 한다.

그 방법이 ‘정산(鼎山 : 1900∼1962) 종사’의 ‘삼동윤리(三同倫理)’라고 그는 말한다. 풀어보면, 첫째, ‘동원도리(同源道理)’다. 모든 종교와 교회가 그 근본은 다 같은 한 근원의 도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다. 동원도리의 근본인 ‘일원대도(一圓大道)’의 정신을 체득하여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하나로 융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동기연계(同氣連契)’다. 모든 인종과 생령이 근본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서로 다른 종족에 대한 차별제도를 극복하고, 인류 중심적 사고방식을 전환하여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기운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셋째, ‘동척사업(同拓事業)’이다. 모든 사업과 주장이 다 같이 세상을 개척하는 데에 힘이 되는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 화합하자는 것이다. 동척사업의 윤리에서 인류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인류를 위한 사업을 하는 일임을 깨우쳐, 서로 다른 신앙과 사상과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상호간에 화합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삼동윤리에서 중요한 실천 덕목은 ‘중정(中正)의 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 것에도 편중되지 않으면서 중도를 실천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우리가 이 중도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공명지조’라는 슬픈 운명의 새를 면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며 주장이다. 물론 종교적인 색채가 다분하여 다소 거부감도 들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교리적 성격을 띠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국민들이 되새겨보아야 할 진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주장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올해의 사자성어 2위는 교수들 중 29%가 찬성하여 선정한 ‘어목혼주(魚目混珠)’다. 물고기의 눈(어목 魚目)이 진주와 섞여있을 때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들 때 사용한다. 해당 사자성어는 ‘조국 전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중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아직 알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선정했다고 한다.

2018년을 정리한 사자성어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었었다. 짐은 무겁고 가야할 길은 멀다는 뜻으로 작년 ‘문재인 정부’가 많은 기대를 받으며 출범한지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끊이지 않고, 사회경제 개혁에 관련한 성과를 내지 못해 선정됐었다. 아직까지 정부가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이 남아있으므로 책임이 막중하다는 의미를 담았던 것이다.

늘 선정되는 올해의 사자성어 주제가 정쟁 싸움의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나라도 국민도 비상식과 거짓, 그리고 분열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방과 서울, 좌파와 우파, 남자와 여자, 보수와 진보 등 첨예하게 나누어진 이편 저편의 대립은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이 강하게 찬성하고 있는 어떤 문제에 누군가 동의하지 않으면 그 반대자를 공격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버나드 쇼’의 말은 우리사회의 양분된 진영논리와 주장이 해를 넘기고, 사람이 바뀌어도 점점 더 격화되어가며 존재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다.

‘세상이 어지러워 도리가 어렵다’는 ‘혼용무도(昏庸無道)’는 2015년 올해의 단어였다. 되짚어 보이 이 단어 역시 2019년을 묘사하는 사자성어로도 손색이 없다. 도대체가 몇 년 동안 정치는 거의 발전이나 변화 없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간의 사자성어 대부분은 무능한 정치를 질타하고 있음을 정치인들은 과연 인식할까? 국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치를, 우리 살아생전 경험해보긴 할 수 있는 건지 당최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2001년부터 매년 전국 교수 1,000명 이상이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 선정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19년 동안 선정된 올해의 사자성어는 ‘김대중 정부’ 집권 시절부터 교수신문에서 선정됐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당대의 현안이나 화두가 역사적, 철학적, 사상사적, 현실로 승화시켜 반영되어 있고,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나아가야 할 길과 방향을 찾아내오고 있다.

사실은 세태를 가장 잘 반영하는 사자성어를 심사숙고하여 선정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서 그 결과를 궁금해 하고 있는 게 당연한 현실의 방증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안타깝고도 아쉬운 점이 있으니, 그냥 선정으로만 그치지, 그것의 여파나 효과가 사회 전반에, 또는 겨냥하고자 하는 정치가들의 심상에 얼마나 심도 있게 파고 드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시원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올해 선정된 사자성어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촌철살인의 의미를 담고는 있으나, 이 말이 누구를 위해서, 누구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과연 그 장본인들은 얼마나 가슴 깊이 새겨 듣고 있을까 하는 문제에 봉착하면 그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갑갑할 따름이다. 지난 주말, 목하 세모의 목전에 서서 조금이라도 막힌 심사를 달래보려고 찾은 겨울강에서, 필자는 자연의 이름으로 호령하는 큰 목소리의 준엄한 꾸지람을 들으면서, 심도 있는 반성의 페이지를 깊게 새기고 돌아왔다.

물론 다른 사람들 탓을 하고 원망을 하면서, 세상을 향해 삿대질만 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세상 모든 이치와 이해타산의 중심에 존재하는 건 자신이다. 마무리가 잘 되고 못 되고를 떠나서, 모든 결과의 원인을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나쁜 기운의 원흉은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남을 바라보며 눈에서 티를 발견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내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를 들어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그것이 필자가 겨울강에서 반성 끝에 건져온 결론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로스알데 힐’이라는 작은 마을에 ‘요한’이라는 집배원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마을 부근의 약 50마일의 거리를 매일 오가며 우편물을 배달해 왔다. 어느 날 요한은 마을로 이어진 거리에서 모래먼지가 뿌옇게 이는 것을 바라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 없이 이 길을 오갔는데, 앞으로도 나는 계속 이 아름답지 않은 황폐한 거리를 오가며 남은 인생을 보내겠구나.”

요한은 정해진 길을 왔다 갔다 하다가 그대로 인생이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황막감을 느낀 것이다. 풀,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은 황폐한 거리를 걸으며 요한은 깊은 시름에 잠겼다. 그러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그것이 매일 반복된다고 해서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그래, 아름다운 마음으로 내 일을 하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게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는 다음날부터 주머니에 들꽃 씨앗을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우편배달을 하는 짬짬이 그 꽃씨들을 거리에 뿌렸다. 그 일은 그가 50여마일의 거리를 오가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 요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우편물을 배달하게 되었다. 그가 걸어 다니는 길 양 쪽에는 노랑, 빨강, 초록의 꽃들과 싱싱한 잎들이 다투어 피어났고, 그 꽃들은 사시사철 지지 않았다.

해마다 이른 봄에는 봄꽃들이 활짝 피어났고, 여름에는 여름에 피는 꽃들이, 가을이면 가을꽃들이 쉬지 않고 피어났던 것이다. 그 꽃들을 바라보면서 요한은 더 이상 자기의 인생이 황막하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50여 마일의 거리에 이어진 울긋불긋한 꽃길에서 휘파람을 불며 우편배달을 하는 그의 뒷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이 아름다웠다. 그는 정말 아름다운 우체부였다. 눈이 내리는 12월 하순의 삶을 살아가면서, 이 황량한 세상에 아름다운 발자욱을 남겨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큰 백화점 입구에 거지 한 명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예순 살 정도의 노인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심지어는 지난 밤 길바닥에 누워서 잤는지 검불과 잡티가 붙어 있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두 손은 앞으로 펼치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그 자리에서 똑같은 모습을 하고 서 있었다. 어느 날, 여섯 살 정도의 한 어린 아이가 거지에게 다가와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거지가 내려다보니 예쁜 꼬마 아이가 조그마한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지가 허리를 굽혀 그것을 받아들었다. 거지의 손바닥에는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거지는 얼굴 가득히 주름을 만들어가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돌아서려는 아이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는 엄마에게 팔랑팔랑 뛰어갔다.

그런데 아이의 엄마는 깜짝 놀랐다. 딸의 손에는 100원짜리 동전 두 개가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거지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저, 우리 아이가 드린 것은 겨우 백 원짜리 동전 하나인데 그걸 도로 돌려주셨더군요. 오히려 당신이 하나를 더 보태서 말이에요.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다시 가져왔어요.” 아이의 엄마는 동전을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거지는 그 동전을 다시 아이 엄마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간단하게 생각해 주세요. 아이에게, 누군가를 도우면 자신이 준 것보다 더 많은 걸 돌려받는다는 걸... 가르쳐 주고 싶었거든요.”

다음에 들려줄 이야기는 먼 나라 이야기다. ‘칠레’의 늪지에는 ‘리노데르마르’라는 특이한 작은 개구리가 산다. 이 개구리는 몸집은 작지만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이 개구리의 암컷은 젤리 같은 물질에 싸인 알을 낳는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수컷이 알을 모두 삼켜버린다. 먹이처럼 완전히 삼키는 것이 아니라 식도 부근에 있는 자신의 소리주머니에 그 알들을 소중히 간직한다.

그리고는 그 알들이 성숙할 때까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다. 수컷 개구리는 알들이 완전히 성숙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입을 벌리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 이유이며 중요한 쾌락인 우는 것도 포기한다. 소리주머니에 있는 새끼들의 안전을 위해 먹는 것까지도 포기한다. 어느 날 알들이 완전히 성장했다고 판단되면 비로소 개구리는 자신의 입을 벌려 마치 긴 하품을 하듯 새끼 올챙이를 입에서 내보낸다.

그리고 수컷의 대부분은 탈진해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덕분에 리노데르마르가 한두 마리 늪에 들어오면 그곳은 머잖아 그들 세상으로 변한다. 한 사람의 헌신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요즈음 심심찮게 언론을 장식하는 주인공들은 이 개구리 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입맛이 자못 씁쓸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 손으로 뽑아서 세운 똑똑한 우리의 지도자들이라는 데에 더 큰 좌절감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이 두 마리 개에게는 이름이 있는데 하나는 ‘선입견’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편견’이라고 부른다. 그저 웃고 흘리기에는 그 숨은 뜻이 가슴을 찌른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도 가볍게 이야기해서 선입견과 편견이지, 사실 이것들은 ‘교만’의 또 다른 이름이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다.

이런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두 마리 개를 쫓아 버리는 한 마리의 특별한 개가 있다. 개 이름이 좀 긴데,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개다. “백 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지만 우스개 소리로 개 색깔이 온통 하얗다고 해서 ‘백무늬불여일견’이라는 일설도 있다. 이 개의 애칭은 ‘일견’이라 한다. 일견을 키우면 선입견과 편견을 억누르고 조절할 수가 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는 더 이상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해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많은 인연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되새기면서 그 의미를 신중하게 살펴보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어떻게 만나느냐는,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 하겠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만남은 참 중요하다.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글을 보면 다섯 종류의 만남에 대해 설명하는데, ‘생선과 같은 만남’ ‘꽃송이와 같은 만남’ ‘건전지와 같은 만남’ ‘지우개와 같은 만남’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고 악취가 나기 때문이고,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와 같은 만남으로,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기 때문이다.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인데,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기 때문이고,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와 같은 만남으로,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며,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인데,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어떤 유형의 만남을 갖고 있는가? 좋은 만남을 통해 인생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미국에 이민 간 교포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다. 이민 갈 때 공항에 어떤 사람이 마중 나오느냐에 따라 거의 직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탁소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거의 세탁소를 할 가능성이 많고, 그로서리(식료품점 Grocery) 하는 사람이 마중 나오면 거의 그로서리를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행복도 불행도 교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에 여러 가지 축복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바로 ‘만남의 축복’이다. 한 해를 갈무리하고자 하는 이즈음에 반드시 마음 속에 잘 새겨놓아야 할 제언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며칠 안 남았다. 이제 우리에게는 소망이라는 제목과 꿈이라는 명찰을 달고 새로운 한 해가 열려줄 준비를 하고 있다. 가슴 설레는 떨림으로 우리는 그 새 해와 만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자! 이제 카운트다운이다. 셋, 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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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여명의 순간,

유려한 물목 우으로
철새떼 퍼덕일 제
참 오래 기둘린 겨울 무구한 아침
싱그런 솔숲길로 물안개 흐르면
천연한 하루의 시작 새삼 그리워
스멀스멀 이어진 길 좇아
나란히 물길로 가다

세월 에두른 천년소나무
바람닮이 휘어진 양
모양새 날렵하기만 한데
비밀한 넋두리 고즈넉 덩그렇고
시간의 묵직함 차곡하게 내려앉았으니

큰 숨 들이켜
삶 생채기 시나브로 아무는 즈음
고요론 사위에 언뜻 발 들인 소감
홀로 먹먹하지 않을 손,
물풍경 비록 헛헛해도
삼삼한 기분에 햇살 편린 향그럽고나!

옛적 흥성거림 되살아나듯
뭉클뭉클 고상한 물벽상고대
덩달아 시린 마음 이다지 설레니
훗날 나 살다가
일상 퍽퍽타 싶을 제
게워내 곱씹으면 참위로 되리,
통한의 날들조차 뜨겁게 데워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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