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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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저기 *



시작노트

" 반구저기 " 詩作 note

오랜 역사를 두고 내려오는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충이나 효에 관련한 예절 관념이 머릿속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이다.
아울러 이미 돌아가신 조상님들에 대한 제례의식도 늘상 끊지 않고 이어가며 철따라 제목을 붙여 우리는 정성껏 모시고 있다.
예전에 외국의 친구를 제사 자리에 불렀던 적이 있는데 장황한 제사상 음식과 절차를 보더니 매우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다.
또한 제사의 주체가 4대 위의 고조할머니라는 소리를 듣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동안 손가락을 꼽아보며 “오 마이 갓!”을 연발했었다.
그리고 우리 문화와 전통 중에 장손가에서는 이보다 훨씬 윗대인 시조를 모시는 제례도 각 문중이나 집안마다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주면서 경이로운 반만년의 역사를 설파했던 경험이 생각난다.
어떻게 보면 우리 국민들에게 이미 살아있지 않은 조상님을 모시는 행위는 살아있는 어른을 공경하고 받드는 행위 못지않게 중요한 행사이며 삶의 일부라고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세대가 변하고 문화의 기준이나 척도가 많이 달라져서 편의발상적인 조상님 모시기의 백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기는 하다.
한 해에 여러분의 조상님을 따로 모시기가 번거롭고, 빈번한 제사 참석 때문에 분주한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니까 하루 날을 잡아서 한번에 그것도 편한 시간대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마도 이런 집안의 조상님들께서는 바뀐 일정표를 잘 체크하셔서 단체행사 때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혼선이 오지 않도록 미리 암기하셔야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일정한 장소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제사 장소를 변경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서 모이기 편리한 장소, 심지어는 휴일과 겹치는 경우에는 여행지의 콘도나 호텔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이 경우도 역시 조상님들께서는 교통편이나 지리 등을 미리 숙지해서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매는 낭패를 보시지 않도록 주의하실 것을 당부드려야 할듯 싶다.
게다가 제사 음식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구하기 편리한 제철 과일이나 포장 배달 음식을 시켜서 퓨전스타일로 이용하거나 요즘은 아예 피자나 햄버거, 치킨과 콜라, 커피 등을 곁들이기도 한다니 조상님들의 입맛도 현실에 맞게 바꾸셔야 할 판이다.
아무튼 우리는 좋든 싫든 버릇처럼 조상님들과 한데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조상님들과 밀접한 정신적인 교감을 이루며 살아가다보니 실생활에서 조상님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다는 것이다.
‘조상님의 음덕으로 자손이 크게 된다’
‘조상님의 묫자리가 좋아야 집안이 흥한다’
‘조상님의 보살핌으로 큰 사고에서 목숨을 건진다’
기타 수많은 조상님들의 역할을 일방적으로 추려서 맡겨드리다가 일이 잘 안 풀리면 갑자기 조상님들에 대한 원망과 탓을 하기 시작한다.
마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본인의 과오나 실수는 일절 돌아보지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조상님의 탄핵과 심판을 감행하는 것이다.
실로 소가 웃을 일이다.
실상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에 무언가에 의지하고 위로를 받고 싶은 심정이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은연중에라도 자신보다는 남을 탓하게 되는 것이야 인지상정이지만, 그래서 마치 신앙처럼 조상님의 보살핌을 기대하고 바라면서 간절한 심정으로 일의 해결이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겠지만 엄연히 조상님들은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시는 걸로 그 배역이 한정돼있고 정작 우리의 현실에는 등장인물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지나치게 ‘탓’이라는 심리 상태에 빠져있다보면 진정한 옳고 그름의 구분을 못하게 되고 점점 더 ‘남의 탓’만 하는 비정상적이고 폐쇄적인 인격과 품성으로 변모하게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카톨릭의 고백송에는 ‘네 탓’이 없고 오직 ‘내 탓’만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며 불가에서도 ‘모든 것이 오직 제 마음 탓’이라고 가르친다.
‘내 탓’과 ‘네 탓’은 글자로는 불과 한획의 차이밖에 없지만 그 품은 속뜻을 들여다보면 별자리들 사이만큼이나 멀다.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내 탓’과 ‘네 탓’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네 탓’은 물론이고 ‘내 탓’도 모두 ‘네 탓’으로 결론 짓는다.
내 책임은 항상 그럴듯한 핑계속에 숨어버리고 언제나 자가당착에 빠져서 결과적으로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길게 남는다.
사람이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신뢰와 존경을 받을만한 인격자이다.
‘정치인은 언론 탓, 언론은 정치 탓’
‘여는 야의 탓, 야는 여의 탓’
‘사장은 사원들 탓, 근로자는 사용자 탓’
‘어른들은 젊은이들 탓, 젊은 세대는 늙은 세대 탓’
‘잘못되면 다 조상 탓’이라더니 너도 나도 눈을 부라리며 ‘과거 탓’ ‘현재 탓’만을 하느라고 곳곳에서 앞다투어 온통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부인하지 못할 사회의 실정이다.
그러고보면 글자 한획이 무책임과 책임을, 거짓과 진실을, 비양심과 양심을 구분지어 나타내니 결국 글자만 다른 것이 아니라 인격이 다르고 삶의 질이 다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 탓’은 ‘내 탓’이며 ‘네 탓’은 ‘네 탓’이다.
‘네 탓’속에서도 ‘내 탓’을 발견할 줄 아는 인격, 아름다운 마음, 올곧은 양심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반구저기(反求諸己)’라는 표현이 있다.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라는 뜻으로, 어떤 일이 잘못 되었을 때 남의 탓을 하지 않고 그 일이 잘못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 고쳐 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옛날 중국의 ‘우임금’의 아들 ‘백계(伯啓)’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우임금’이 ‘하나라’를 다스릴 때, 제후인 ‘유호씨(有扈氏)’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우임금’은 아들 ‘백계(伯啓)’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우게 하였으나 참패하였다.
‘백계’의 부하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여 다시 한번 싸우자고 하였다.
그러나 ‘백계’는 “나는 ‘유호씨’에 비하여 병력이 적지 않고 근거지가 적지 않거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는 나의 덕행이 그보다 못하고, 부하를 가르치는 방법이 그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나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아 고쳐 나가도록 하겠다”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이후 ‘백계’는 더욱 분발하여 날마다 일찍 일어나 일을 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백성을 아끼고 품덕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였다.
이렇게 1년이 지나자 ‘유호씨’도 그 사정을 알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백계’에게 감복하여 귀순하였다.
이로부터 ‘반구저기’는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의미의 말로 주로 사용되어온다.
이 고사성어는 우리말의 ‘내 탓이오’와 의미가 통하며, ‘잘되면 제 덕,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과는 상반된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덕’과 ‘탓’은 가름이 뚜렷하다.
‘덕’은 도덕적 윤리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인격적 깜냥이고, ‘탓’은 구실이나 핑계로 삼아 원망하거나 나무라는 일이다.
‘덕분’이라는 낱말도 있다.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을 뜻하며 긍정적일 때 쓰는 말이다.
이에 반해 ‘탓’은 주로 부정적인 현상이 생겨난 ‘까닭이나 원인’을 뜻하는 말로 ‘덕분’과 ‘탓’은 쓰는 맥락이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때문’은 좀 다르다.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을 나타내는 때에 쓰이며, 부정적 맥락에서 좀 더 많이 나타나기는 하나, 특정 맥락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살면서 너 때문에 고생했다’ 보다는 ‘네 덕분에 일이 잘 풀렸다’는 말을 자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또한 ‘이게 다 네 탓이야’ 보다는 ‘이게 다 네 덕’이라는 말을 더 자주 쓰고 싶다.
누군가는 ‘덕분은 덕(德)을 나누어(分) 준다는 뜻’이라서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고 한다.
‘좋은 날씨 덕분에....’
‘아름다운 자연 덕분에....’ 라고 하면서 자연에 감사하며 살고,
‘네 덕분에....’ 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살며,
내가 ‘덕분에’라는 인사를 받았을 때는 내가 정말로 덕을 나누어주었는지 반성하고 되짚어 보면서 사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오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덕분에’라는 인사를 자주 건네야겠다.
“당신 덕분에 오늘은 무척이나 행복한 날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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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주간
오피니언 코너
'살며 사랑하며'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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