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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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 가슴처럼 내리다 *



시작노트

" 봄비, 가슴처럼 내리다 " 詩作 note

모름지기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거늘, 그래야 하는 봄이거늘, 정녕 모든 질곡의 아픔들 다 묻고 새로 솟아나는 봄이어야 할진대, 가당키나 한가? 이 노릇, 이게 무슨 조화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날이 갈수록 그저 더더욱 복잡하고 참담한 일들만 자꾸 생겨난다. 무슨 봄이 이래? 온 마음으로 그냥 섧기만 하다.

국가적으로 언제나 힘겹고 어려운 상황들이었지만 다 극복하고 마침내 여기까지 다다른, 근면과 협력의 아이콘인 우리 국민성인데 지금은 그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푯대도 초점도 모두 상실한 채 막연한 풍파의 흔들림에 운명을 송두리째 맡기고, 일엽편주인 양 표류하고 있다. 이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꼭 1년 전의 대참사의 아픔이 미처 치유되지 못하고, 마무리되지 못하고, 아직도 전 국민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고 있는 이즈음인데 또 대형 악재가 사회를 강타했다.

사소한 정치권 일부의 부조리라고, 오래된 관행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라고,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과 도전의 좌절에 관한 스토리텔링이라고, 산 자들이 승리하는 약육강식의 공식이라고, 아니면 그냥 나와는 관계 없는 남의 일이라고 단순히 결론지어, 또 덧없는 세월 속에 묻어버려도 되는 사건인가?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잊혀질 거니까,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다시 잠잠해질 것이라는 술수와 계산법으로, 혹시 이번의 이 사건도 적당한 사기성 얹은 언론플레이 곁들여, 온 국민들을 상대로 호도할 것인가? 또 한 편에서는 완전한 호재를 얻었다며 정치적 이해득실의 가감법에 입각하여, 적절한 수위의 조절로 재야의 목소리는 모두 대변될 거라는, 간단한 결론을 만들어내면서 국민들을 기만하려 들 것인가?

어차피 먹고 살기 바쁜 서민들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힘도 없다. 그래서 아무 영향력도 없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냥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들끓는 분노가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라도 애써 삼키며 속으로 눈물지을 뿐이다. 때로는 목청 높여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지만, 하늘을 향해 종주먹 들이대며 따지고도 싶지만, 그래봤자 별무소용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끝까지 방관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앞에서 국가를 끌고 가는 훌륭한 지도층 인사들의 처신과 행보를 구경만 하다가, 발표되는 결과에 적당히 속아주고, 믿어주고, 따라주면서 박수를 쳐드리는 것,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그렇게 나와있다. 법전에도 나와있고, 도덕경에도 나와있고, 엄연한 역사적 사록에도 다 나와있다. 그래서 오직 그렇게 할 따름이다. 그네들이 즐겨 부르짖고, 연설이나 인터뷰에서 흔히들 애용하는 ‘민의’라는 제목은 송두리째, 개개인의 소중한 인권을 덤으로 얹어 그들에게 빌려주고.

그런데 웬지 서글프다. 알면서도 씁쓸하다. 그러자니 영 뒷맛이 개운챦다. 토할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더 그렇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더더욱 그리하다. 알 것 없으니 발표해주는 내용이 다라고 여기면서, 더 이상은 절대 문제 삼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에 굴복하면서도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자괴감이 모락모락 느껴진다. 이러한 현주소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사실이 너무나 애통하다. 오호, 통재라!

물론 ‘정의’라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 어느 한 편의 생각과 주장으로 결론지어지는 건 아니다. 억울한 쪽이 있으면 당연히 흡족한 쪽이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풍속도이며, 패자와 승자가 공존하는 것이 현실이요 인지상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컨대 누구나 할 말이 있고, 누구에게라도 속사연을 토로할 수는 있다. 어차피 판단은 당사자들의 몫은 아니다. 가부간에 평가도 당장 결정해야 하는 당면과제는 아니다. 그래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사람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 기본적인 미덕의 하나는 ‘양심’이다.

그 양심의 잣대로 재보면, 양심의 거울에 비추어보면, 답은 나오게 되어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늘이 사라질까? 아무리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라지만, 권력이나 금전으로 세상의 진리와 정의까지 살 수는 없다. 비록 수많은 대중들과 단기간의 역사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늘과 자기 자신만은 결코 기만할 수 없다.

이에 필자는 단호히 제언한다. 비록 가진 것 없는 일개 글쟁이에 불과한 처지라,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준엄하게 꾸짖고 싶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서 나오는 답이 있을 것이니 그걸 억지로 숨기려하지도, 겉포장으로 감추려하지도 말 것이다. 과오를 당당히 인정하고 국민 앞에 고백하여 용서를 구하라. 그 길이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길이다.”

나이가 들면 잔소리가 늘어난다고 한다. 이것 저것 참견을 하게 되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면서 생색을 내려고 한다. 아마도 삶이 조급하기 때문일 게다. 뭔지 모를 급박증에 사로잡혀, 빠르게 결론을 내고 싶어 하는, 나이먹은 증거라는 우스꽝스러운 징후가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닌 걸 깨닫는 요즘이다.

육체적으로 노쇠해지면 몸에서 칼슘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그래서 골다공증이 되기 전에 칼슘을 보충해주어야 한단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나이 들면 살이 빠지듯, 눈물도 웃음도, 꿈도 의심도, 갈등과 후회도, 마음에서 빠져나간다. 이런 것들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대신 무엇이 들어설까?

이제는 넓고 깊고 맑아진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혼란이 끝난 곳에 평화가, 욕심이 멈춘 곳에 안정이 들어서길 바란다. 갈등과 망설임이 확신과 단순함으로 변하고,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하기 보다 내 앞의 발길을 바라보고 싶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과 오늘을 사랑하면서, 물질이 아닌 시간을 좋아하고 싶다.

‘아브라함 헤셀’의 ‘안식’이란 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사물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미덕 중의 하나인 ‘용기’는 어떤 색깔의 모습일까?

1953년 5월 29일, 최초로 ‘힐러리’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세르파 ‘텐징’ 이래 수많은 세르파가 ‘히말라야’를 오르는 원정대의 짐꾼과 안내인으로 생사를 함께 했다. 2000년도의 어느날, 9명의 연합 원정대는 ‘아파’가 이끄는 30명의 세르파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있었다. 이번에 정상에 오른다면 아파는 11번째로 세계 기록을 깰 차례였다.

그런가 하면 가장 나이가 많은 ‘실밍’은 딱 한 번 에베레스트 등정팀에 끼었었지만 정상 정복에는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실밍에게는 자신의 희망을 이룰 마지막 기회나 다름 없었다. 나이가 너무 많아 이번에도 오르지 못하면 다시는 정상까지 오르는 팀에 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상에 가까워졌을 무렵 폭풍우가 몰아칠 기미가 보이자 원정대는 빠른 속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체력이 딸리는 실밍은 자꾸만 뒤쳐질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대원 셋과 아파가 정상을 정복한 뒤 하산할 때 마주쳤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지만 실밍은 혼자서라도 정상에 오르고 싶었다. 그때 아파가 대원들을 먼저 내려보낸 뒤 실밍을 부축해 걷기 시작했다. 아파는 실밍을 도와 다시 정상으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실밍은 말없이 자신을 부축해주는 아파와 함께 걸으며 평생 꿈꿔왔던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1분 뒤, 실밍은 아파에게 하산하자며 발길을 돌렸다. 그날 밤, 대원들이 정상 정복과 무사고를 기뻐하며 환호할 때 실밍은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파와 함께 정상을 향하던 1분 동안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떠올랐고, 삶에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부축해주던 아파의 진실한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용기는 혼자만의 목표 달성이나 욕심을 위해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 깊이 내재해 있는 인간 본연의 심성과, 남을 위한 배려의 마음이 혼합되어 아름다운 향기로 빚어지는 것이 바로 용기라는 행위이며, 삶의 참다운 의미인 것이다.

고백할 수 있는 용기도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레시피 중의 하나이다. 허심탄회하게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축복받을 일이다. 서울시에서는 마음 치유 프로젝트인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의 하나로 지난 해 3월31일부터 ‘속마음 버스’라고 하는 다소 생소한 버스 운행을 시작했다. 지난 1년여 간 대화를 통해 속마음을 털어 놓을 필요가 있는 시민 1,500여명이 속마음 버스를 이용했다고 한다.

‘영등포구 여의도역’에서 속마음 버스에 탑승하면 잔잔한 음악과 푹신한 촉감의 바닥 쿠션이 탑승객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한다. 좌석을 모두 뜯어내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놓인 테이블과,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설치된 아늑한 느낌의 조명, ‘자연주의 살림이야기’의 ‘이효재’씨가 꾸민 가림판 역시 탑승객들이 속마음을 꺼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게 속마음 버스에 탑승하면 1시간30분 가량 대화하며 오해를 풀고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 목적이다. 덕분에 오랜 친구였던 탑승객은 평상시에는 말하기 어려워 마음 속에 간직했던 서운함, 미안함들을 거론하며 서로의 속내를 내보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버스에 올라탄 엄마와 딸도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게 된다. 속마음 버스의 대화 규칙에 따라 엄마가 주로 말하던 평상시와 달리 딸이 이야기를 주도해가는 것이다.

속마음 버스에서는 한 사람이 3~5분 간 말할 수 있다. 모래시계를 이용해 시간을 지킬 수 있도록 했다. 이때 상대방은 말을 자르거나 개입하는 것은 물론 판단이나 평가를 해선 안 된다. 오랜 시간 자신을 키우느라 힘들었던 엄마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속마음 버스 탑승을 신청한 딸은 눈물을 많이 보이기도 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여의도 일대와 ‘마포대교’, ‘자유로’를 지나는 속마음 버스 안에서, 숨겨뒀던 속내를 내보였던 모녀는 손을 꼭 잡고 버스에서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어색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다.”며 “버스에서 내릴 때에는 모두들 한결 편안하고 환한 표정을 짓는다.”고 버스의 매니저는 말한다. 속마음 버스는 평일에는 오후 6시30분과 저녁 8시40분 두 차례, 토요일에는 오후 4시와 오후 6시10분, 저녁 8시20분 세 차례 운행한다.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2인 1조로 2팀이 동시에 속마음 버스에 탑승하며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에서 출발해서 마포대교와 자유로를 거쳐 다시 여의도로 돌아오는 코스로 운행된다.

이 버스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거명인사들을 탑승시키고 속내를 털어놓게 해보는 건 어떨까? 혹시 불편하고 평안하지 못한 심리상태가 조금이나마 안정되지는 않을까? 그렇게라도 해서 진솔하게 참과 거짓이 가려지고, 나아가서 거짓은 단죄하되, 참임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더 이상의 오해나 의심이나 억측이 난무하는 실상은 약간이라도 흐려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은 용기를 발휘함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결과와 보람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이런 습관을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것이 참된 삶의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잘못된 습관 하나로 인하여 결과를 그르치는 사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반대로 좋은 습관 때문에 예기치 않던 행운을 맞이하는 경우도 종종 보여진다.

한 젊은이가 백발노인에게 찾아가 물었다. “제게는 정말 큰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백발노인은 근처의 새하얀 백사장에 가서 ‘소원석’을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소원석은 중앙에 별 문양이 있으니 명심하게.”

젊은이는 그날부터 백사장에서 돌을 찾기 시작했다. 돌을 살펴봐서 찾던 돌이 아니라고 확인한 다음에는, 다시 확인하는 헛수고가 없도록 바다 멀리로 힘껏 던지는 일을 반복했다. ‘언제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하나?’ 젊은이는 한숨을 쉬면서도 돌을 찾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날, 젊은이는 백 한 번째의 돌을 살펴보다가 별 모양을 발견했다. “드디어 찾았구나!” 젊은이는 크게 기뻐하면서, 무의식중에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어깨에 힘을 주어 돌을 멀리 던지고 말았다. 젊은이가 겨우 찾아낸 소원석은 지금까지 그가 던졌던 돌들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습관을 조심하자. 잘못된 습관은 우리에게 찾아온 단 한 번의 행운을 날아가게 할 수도 있다. 정상에 오르고 싶은 사람은 습관의 힘을 바르게 평가하고, 실천이 습관을 만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자신을 망치는 습관을 버리고 성공을 돕는 새 습관을 빨리 익혀야 한다. 그리고 그 습관이 진정한 자신의 성공을 좌지우지 하는 열쇠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껏 겨울가뭄에 시달렸던 대지에 그런대로 봄비가 심심챦게 내려주고 있다. 길고 긴 갈증으로 갈라졌던 산야의 피부들이 치유되어가고 있다. 습관처럼 단비를 빨아들이며 대자연은 우리에게 봄의 신선함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그런데 몽매한 인간들이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열지 못하고 오늘도 아웅다웅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다.

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봄비가 울려주는 심금을 외면하지 말자. 이제부터라도 가슴처럼 내리는 봄비를 아프게 하지 말자. 더 이상은, 정말 더는 서운하게 하지 말자. 기쁘게 기쁘게 온 누리를 흠뻑 적시는 축복의 비가 되도록, 우리 모두 두 팔 벌려 반겨 맞자. 올 봄에 더 이상의 슬픔은 없다. 아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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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없이
온 밤 흠뻑 적시운
보고픔이라는 제목 달고 비,
강물처럼 밀려와, 밀려들어와
너 되어져 내리는 새벽가슴

고독의 자국마다
파르스름 물든 아픔 부여잡고
부르는 이름 족족 창 두드리는,
차라리 봄이 섧구나

너 가고 없는 내 삶이라는 거
무슨 의미가 있을라구,
너 떠나버려 내 고픈 마음인 걸
뭐 남은 게 있겠냐구,
널 기다리는 그거 말고는 -

촉촉하니 젖어드는
추억 챙겨 여미면서도
바람결 스쳐 먼 길 떠나는
보헤미안의 방랑기에
문득 비 내리면

밤새워 헤아리던
빗방울만큼이나 하많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또 하나의 긴 그리움 잉태하는 사연이 되어
새벽을 듣고 섰다

나풀거리며 저기,
너 다시 돌아와줄 오솔길 우으로
아른거리던 저기,
네 얼굴 또렷해질 여울목 가으로

봄비, 가슴처럼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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