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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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별에 깃드는 가을울음 *



시작노트

" 가을별에 깃드는 가을울음 " 詩作 note

‘시작노트’라는 제목의 코너에 글을 기고한지도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2013년 9월 27일자 지금의 ‘해피 우먼’의 전신이랄 수 있는 ‘브레이크 뉴스’에 ‘동경’이라는 제목의 시를 올리면서 덧붙여서 쓰기 시작한 세미칼럼 형식의 ‘신변잡기’가 그 시작이었으니 만 6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려온 셈이다. 한 해에 약 53주가 들어있는 걸 감안해서 계산해보니 그럭저럭 320회 이상 장기집필을 했다. 그러고보니 필자의 기억으로, 아무리 바쁘고 버거워도 이 코너 만큼은 결코 쉬지 않았던 듯 하다.

편집인인 ‘소정현’ 기자님과의 인연이 처음에는 특별한 의미 없이 싱겁게 맺어졌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리도 각별하고 친근한 피붙이 같은 사이가 될 줄도 애초에는 짐작조차 못했었고, 그저 적당히 다른 지면에서처럼 한동안 기고하다가 중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시작했던 이 코너가, 이토록 끈끈하게 이어져 필자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질 줄은 미처 몰랐었다. ‘시작노트’는 ‘해피 우먼’을 비롯하여 ‘모닝 선데이’나 ‘투데이 리뷰’에도 간간이 게재가 되고 있고, 각을 달리 하여 ‘투데이 전남’이나, 내용을 다소 수정하여 ‘서울일보’와 ‘일요주간’ 등에도 실리고 있다.

그동안 ‘월드 경제신문’이나 ‘자랑스런 한국인’, 정보신문 ‘가로수’ 등을 비롯하여 잡다하게 여러 지면을 통해서 필자의 다른 시나 칼럼을 기고하기도 하였지만, 유독 이 매체를 통한 코너인 ‘시작노트’와 ‘일요주간’의 오피니언 전담 코너인 ‘림삼의 살며 사랑하며’ 시리즈가 가장 애착이 가는 공간이었던 것 같다. 당초에는 이 코너의 칼럼 내용이 이렇게 긴 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지다보니, 조금씩 길어지다가 지금에 와서는 이다지 장황하고 두서없는 잡기의 형태가 되어지고 말았다.

친인이 필자에게 한 말이다. “도대체가 당신 글은 너무 길어서 다 읽으려면 지나치게 시간이 오래 걸려. 좋은 말이기는 한데 그렇게 지루하면 아무도 안 읽어.” 필자가 대답한다. “읽는 데 오래 걸리는 게 문제라면 쓰는 데는 얼마나 걸렸을까? 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짧아도 안 읽어.” 필자의 ‘시작노트’는 이 매체 이외에 개인적인 블로그나 카페, 개인 홈페이지 등을 통해서 인터넷에 소개되거나, 카톡과 문자 메시지를 이용해서 지인들에게 전달된다.

아주 드물게, 꼼꼼하게 글을 다 읽어주는 사람도 있고, 그네들의 지인들에게 다시 옮겨서 전달을 해주는 성의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고 단 한 줄의 글도 읽지를 않는다. 아니면 앞 부분에 소개되는 필자의 시를 몇 구절 읽다가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는 시가 너무 어렵다거나 글이 너무 길다고 타박을 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그저 생색내기 식으로, 읽은 척 하면서 넘어가곤 한다. 필자도 다 안다. 이미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 우매하고 우직한 위인은 오늘도 쉬지 않고 이 긴 글을 쓰고 있다. 꼭 한 사람 뿐일지라도 기다리는 독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아니면, 정말 아무도 한 줄도 읽어주지 않는다 해도, 필자라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터무니 없는 위로를 하면서 오늘도 필자는 ‘시작노트’를 작성한다.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이 코너를 이어갈지는 모른다. 실상 이런 저런 여건으로 그동안도 몇 차례 중단할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필자 스스로와의 약속이라 여기며 꾸준히 이어온 것이다.

이 기회에 자그마한 매듭을 하나 지어야겠다. 예전 이 코너를 처음 시작했을 때처럼 이제부터는 다시금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말고 조금은 절제하는 형태로, 좀 짧게 코너를 매조지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물론 단숨에 읽어내릴 정도로 아주 간략한 내용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필자의 소회를 모두 담아내려는 노력은 대충 속으로 갈무리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생각은 조금씩만 선을 보일 작정이다. 오늘 소개하는 시에서, 가을별에 스미는 가을울음이 어째서 서글픈가는 은근히 감추고 말 듯이...

사람들은 작은 상처를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 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상처는 상처로밖에 위로할 수 없다.

세상의 숨겨진 비밀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몹시 불행한 일이 되어진다. 그것은 마치 평생 동안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인생은 짧다.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 소소한 불행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는 거대한 불행 앞에서 차라리 무릎을 꿇어 버리는 것이 훨씬 견디기 쉬운 법이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가을이면, 흐드러지게 익은 대추를 따서 대추차를 끓이고, 잘 익은 석류로 술을 담가, 그동안 알고 지내던 소중한 인연들을 초대해서 마음을 나누고, 겨울이면, 황토 흙으로 만든 벽난로에 고구마를 구워가며 세월의 책장을 넘기면서 이런저런 대화의 꽃을 피우노라면, 향기 잃어 가는 삶의 밭에 한 송이 풀꽃이 피어나는 것이 인생의 참 맛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대지 위에 쉬어 가는 바람처럼 흘러가는 게 삶이고, 머물지 않는 게 오늘임을 알기에, 사는 날까지 기쁨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웃음으로, 희망으로, 오늘도 내일도 바람처럼 머물며, 이 땅 위에서 쉬어가리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랍비가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매우 못 생긴 편이었다. 랍비는 어느 날 이웃나라의 공주를 만났다. 공주가 그를 보자마자 말했다. “총명한 지혜가 못생긴 그릇에 담겨 있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했다. “공주님, 이 궁궐에 술이 있나요?” “네.” “그 술은 어떤 그릇에 들어 있는지요?” “평범한 항아리나 주전자 같은 그릇에 담겨 있죠.” “금 그릇이나 은 그릇도 많을텐데 훌륭한 공주께서 어찌 그런 항아리 같은 보잘것 없는 그릇을 쓰시나요?”

그러자 공주는 평범한 그릇에 담겨 있던 술을 전부 금 그릇과 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 그러자 술맛은 곧 변해버렸고 마실 수가 없게 되었다. 왕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누가 이런 그릇에 술을 담았느냐?” “그렇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제가 옮겨 담았습니다. 용서하소서.” 공주는 왕에게 사과를 한 뒤 랍비에게 돌아와 따져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내게 그런 일을 하라고 시키신 거죠?” “저는 단지 공주님에게 가르쳐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매우 귀중한 것도 때로는 싸구려 그릇에 넣어 두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는 사실을요.” 진정한 가치는 겉으로 봐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 이 가을의 한 가운데에 서서 이렇게 제언한다. 우리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바둥거리면서 살아간들 무엇이 남겠으며, 불만과 비판으로 살아간들 무엇을 더 하겠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남을 얼마나 비판하며 살아왔고, 남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판을 받았을지 생각은 해 보았는가? 왜 ‘우리’라는 표현을 하며, 왜 ‘친구’라는 단어를 쓰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스치는 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아니던가?

편견과 오해와 시기와 질투가 왜 만들어지고 생겨나는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친분을 내세우면서도 내 입장만을 먼저 고집하지는 않았는지, 우정을 거론하면서도 본의 아니게 내 이익을 먼저 생각한 건 아닌지, 가깝다는 친구가 왠지 서운한 모습을 보였다 하여 이해하기보다는 고집을 먼저 앞 세워 친구를 원망하고 탓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감싸주는 것이 무엇인지, 위로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용기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 실수와 잘못을 구분할 줄 알며 용서와 배려가 무엇인지, 바로 우리가 살아오면서 깨닫고 얻게 된 지식이 아니겠는가?

이젠 그 지식을 우리가 활용할 때가 아니겠는가? 이젠 우리도 한 번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용서 못할 일도 용서해가며, 이해 못할 일도 이해하려 하며, 배려하지 못할 오기가 생겨도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우리가 되어 보지 않겠는가? 언젠가 우리 지금보다 더 늙어서 오늘의 그날을 돌아 봤을 때 “정말 그 사람을 잊을 수 없어서 꼭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라며 가물대는 추억과 기억을 살려가며 서로를 그려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어느 누구를 만나든지, 좋아하게 되든지, 친구가 되어도 진정 아름다운 우정으로 남고 싶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냥 나의 친구가 되었으므로, 그 사실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 어쩌다 나를 모질게 떠나간다 해도 그를 원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친구가 내 곁에 머무는 동안 내게 준 우정으로, 내게 준 기쁨으로, 내게 준 즐거움으로, 내게 준 든든한 마음으로, 그냥 기뻐하면 될 것이다.

진정한 우정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아름다워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까이 느껴져야 한다.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되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지만 서로 서로 마음을 맡기며, 서로에게 마음의 의지가 되는 참 좋은 친구, 아픈 때나, 외로운 때나, 가난한 때나, 어려운 때나, 정말 좋지 않은 때나, 진실로 몹쓸 환경에 처할수록 우정이 더 돈독해지는 우리들의 만남이 많아졌으면 참 좋겠다. 문득 가을이 흐르고 있는 이 시점에서 친구들이 새삼 그리워지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마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넉넉한 집은 당신 마음 속에 들어앉은 생각의 집이다. 대문도, 울타리도, 문패도 없는 한 점 허공 같은, 강물 같은 그런 집이다. 불안도, 조바심도, 짜증도, 억새밭 가을 햇살처럼 저들끼리 사이좋게 뒹굴 줄 안다. 월세 단칸방에서 거실 달린 독채집으로 이사를 가도 마음이 늘 하얀 서리 베고 누운 겨울들판처럼 허전하다면 그 집은 의미가 없다. 그런 마음이라면 마침내 32평 아파트 열쇠 꾸러미를 움켜쥐어도, 그 마음은 아파트 뒤 켠 두어 평 남새밭 만큼도 넉넉지 못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양받기 힘든 집은 마음 편안한 무욕의 집이다. 그런 집에서 영원한 안식과 더불어 함께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때 묻고 구김살 많은 잡념들은 손빨래로 헹구어내고, 누군가가 수시로 찌르고 간 아픈 상처들도 너와 나의 업으로 보듬고 살면 되는 것이다. 어쩌랴? 단순한 마음 대로는 되지 않는 삶인 것을. 나의 안에 하루 하루 평수를 늘려가는 고독의 무게를. 지워도 지워도 우리 삶의 인터넷 속에 무시로 뜨는 저 허망의 푸른 그늘을.

이젠 고독밖에 더 남지 않은 쓸쓸한 비밀구좌는 모두 모두 열고, 좋은 생각으로 버무린 희디 흰 채나물에, 고집스런 된장찌개가 끓는 밥상 앞에 안식과 마주앉아 따스한 얘기를 젓가락질 하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의 평생 숙원임을 알아야 한다. 엄청난 성공과 무시무시한 부귀영화만이 성공이고 행복이라는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안과 안락한 삶의 피안을 바라는 소박한 마음이 정작 세상을 잘 살아가는 삶의 으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다.

“오늘이 섣달 그믐이니, 약속한 대로 자네들은 내일부터 자유의 몸일세.” 주인이 하인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네. 오늘 밤 이 짚으로 새끼를 좀 꼬아주어야겠네. 아마 이 일이 우리 집에서 하는 마지막 일이 될 걸세. 될 수 있으면 가늘고 질기고 길게 꼬아주면 좋겠네. 꼭!” 주인이 들어가자 한 하인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참, 악질이구만. 마지막까지 부려먹으려드니. 섣달 그믐 날에 일 시키는 주인이 어디에 있담.”

그러나 또 다른 하인은 부지런히 새끼를 꼬면서 그를 나무랬다. “여보게, 불평은 그만 하게. 세상에 우리 주인 같은 분이 또 어디 있나? 게다가 내일부터는 우리를 자유의 몸이 되도록 해주시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시키는 일이니 잘 해 드리세.” 그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아주 가늘고 질기고 길게 새끼를 꼬았다. 그러나 불평을 하던 하인은 새끼를 대충 굵게 꼬고는 잠을 자버렸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두 하인을 불러놓고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여러 해 동안 내 집에서 고생이 많았네. 자네들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우리 집 살림은 많이 늘어났네. 이제 자네들을 그냥 보내기가 섭섭해 선물을 좀 주려고 하네. 어제 밤에 꼰 새끼들을 가져오게. 그리고 광 문을 열고 항아리 속에 있는 엽전을 새끼에 꿰어 가져가게. 그 돈으로 잘들 살기 바라네.” 밤 새 착실하게 새끼를 꼰 하인은 많은 엽전을 기쁘고 즐겁게 새끼에 꿸 수 있었지만, 불평불만만 늘어놓은 하인은 자신이 꼬았던 새끼가 굵고 짧아서 엽전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제사 후회하며 억지로 엽전을 집어넣어 보았지만, 그나마도 새끼가 엽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꾸 끊어지고 말았다.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예전,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이 있었다. 도무지 사람의 발이라고는 인정하기 어려운 볼썽사나운 발 사진이었다. 틀어지고 꼬여진 발가락의 모양은 한 마디로 기괴하고 요상하여 눈 뜨고는 차마 바라보기도 거북하였다.

그러기에 그 발이 바로 누구의 발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발이 아니었다. 사람의 발을 닮은 나무 뿌리도 아니고, 사람들 놀래켜 주자고 조작한 엽기 사진 따위도 아니었다. 예수의 고행을 좇아 나선 순례자의 발도 이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발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명실 공히 세계 발레계의 탑이라는 데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을, 발레리나 ‘강수진’이 그 주인공이다.

그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한 때 세계 각국의 내로라 하는 남성 발레리나들이 그녀의 파트너가 되기를 열망하던, 프리마돈나 강수진 말이다. 처음 그 사진을 보았을 때 심장이 어찌나 격렬히 뛰는지, 한동안 두 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하마터면 또 감동의 눈물을 툭툭 떨굴 뻔 하였다. “감동이란... 정녕 이런 것이로구나...” 예수가 어느 창녀의 발에 입 맞추었듯, 필자도 그녀의 발 등에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치 신을 마주한 듯, 경이로운 감격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녀의 발은, 그녀의 성공이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하루 열 아홉 시간 씩,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 말짱하던 발이 저 지경이 되도록,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 해 노력한 만큼 얻어낸, 지극히 마땅한 결과일 뿐이다. 그녀의 발을 한참 들여다 보고 나서, 그리곤 필자를 들여다 본다.

“너는 무엇을... 대체 얼마나 했느냐? 도대체 왜 벌써 엄살부터 부리는 건지... 원!” 그녀의 발이 필자를 나무란다. 인정한다. 필자는 그동안 엄살만 심했다. 필자는 욕심만 많았다. 그래서 필자는 반성하고 있다. 지금 반성하고 있는 중이다. 가을 내내, 이 가을이 다 가도록 필자의 반성은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거듭날 것이다. 새롭게, 다시금 태어날 것이다. 애꿎은 가을별을 원망하는 일일랑은, 구슬프게 가울울음에 매달리는 일일랑은, 그리고 가는 가을이 안타까워 엉절거리는 엄살일랑은 이 쯤에서 멈추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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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별이다, 가을별
손에 잡힐 듯
저 위에서 흔들거린다, 수 천 수 만의 별이다

출렁대는 별이 눈물방울같다
생각이 그렇다
별이 우나보다,
풀벌레소리 귀를 울린다
진즉 울리고 있었거늘 지금에사 들려난다

무엇이 그리도 조급한 사연있어
어째서 그리도 수이 지는 겐지,
하도 짧은 가을이 섧은가보다

그렇다, 시간은 정지되는 게 낫다
님 기둘리는 순간의 설렘만
고이 간직한 채 멈추거라

님이 결국은 오지 않을 서러움이나
만나선 다시 헤어질지 모를 두려움이라면
싫다, 그건 싫다
기왕지사 아주 갈 요량이라면
차라리 이 쯤에서 움직임 거두거라

가을울음이라도 실컷 울어보게끔

새가 운다
흐느끼는 것처럼 서러워 우는 걸 보니
필경 고향새다
가을밤 고향을 울던 그 새다

고향언덕에서 가을별 보며
밤마다 밤마다 많이도 울어대던
바로 그 새소리다,
가을이 운다
울어 그 별에 깃드는 가을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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