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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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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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리 (別離) *



시작노트

" 별리 (別離) " 詩作 note

정신없이 여름에 쫓겨다니다 보니 어언 9월이다. 기록적인 폭염의 기세가 며칠 전, 단 하룻밤 사이에 꺾여버렸다. 열대야의 연속에 한 밤중에도 무더위와 씨름하다가 새벽녘에 잠깨어 일어나면 온 몸이, 배추에 소금 절이듯 땀에 푹 젖곤 했었는데, 이제는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하다 못해 썰렁하기까지 하다. 목하 가을의 바람이다. 폭염, 폭염, 하지만 올 여름은 정말 더워도 더워도 너무 더웠다.

오죽하면 ‘말레이시아’나 ‘대만’, ‘싱가폴’같은 아열대지역에서 온 사람들까지도 우리 나라가 자기네 나라보다 더 덥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마도 습도와 열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기후 때문일 거다. 그런 가운데 지난 주간에 필자는 두 번의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갑자기 부고를 자주 접하게 되자, 연세가 높으시거나 평소에 허약하신 어르신들이 혹독한 더위를 이겨내지 못하신 후유증 때문인 건 아닌가? 이렇게 여겨지기도 했다. 사실 이런 폭염의 상황이 계속되니까 곳곳에서, “가을은 도대체 언제나 오느냐?” “아예 가을은 실종된 게 아니냐?” 그런 푸념 섞인 이야기들이 무성했었다.

어디 사람 뿐이었겠는가? 더위에 죽어나가는 닭이나 돼지는 말할 것도 없고, 녹조로 뒤덮인 강과 바다, 가뭄에 신음하는 산천초목이 시원한 바람을 기다리는, 대책 없는 기다림으로 녹초가 되어있는 것 같이 보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등장한 가을 하늘을 보니까 이제는 살았구나싶은 마음이 들을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질식할 것만 같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사실은 무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달 하순 ‘시리아’의 ‘알레포’라고 하는 도시에서 보내온 한 장의 사진이 온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도시에 쏟아진 공습으로 인해서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깔렸다가 구조된 한 어린이의 사진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다섯 살 짜리 어린이 ‘옴란 다크니시’다. 구조대원이 그 아이를 의자에 앉혀 놓았는데 아이가 넋이 나갔는지 울지도 못하고, 더러워진 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자기 얼굴의 피를 닦아 의자에 묻히고 있었다.

필자는 그 아이의 겁에 질린 눈망울에서 깊은 심연을 보았다. 그 깊은 심연은 이 시대의 절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시리아의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작년 이맘 때 9월 2일, ‘터키’ 해안가에 떠내려온 시체로 발견된 세 살 짜리 어린이 ‘아일란 크루디’를 우리가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그 땅에 남으면 다크니쉬가 되고, 떠나면 크루디가 된다.”고 하는 만평까지 돌아다니게 되었다.

이 정신 나간 내전으로 지난 5년 동안 무려 25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1,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그 난민 가운데 절반이 넘는 600만 명이 어린이들이다. 비극은 시리아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보코하람’이 일으킨 격렬한 폭동으로 인한 비인간적인 폭력 행위가 그치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유엔 난민기구’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까지 발생된 난민 숫자만 해도 140만 명에 달한다.

게다가 단순한 숫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옥같은 일들이 그 땅에서 벌어지고 있고, 특히 그 대상은 힘 없고 나약한 여인들과 어린이들임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은 저 멀리 남의 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며칠 전 눈길을 끄는 신문기사 제목을 보게 되었다. 이런 내용이다. “여름이면 어김 없이 극장가에 등장하던 공포영화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 제목 밑에 실린 기사내용은 한 마디로 이런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전체가 일상적인 공포에 떨고 있어서, 구태여 극장까지 가서 돈 내고 공포영화를 볼 필요가 없게 된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잔인한데 무슨 공포영화까지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고용불안이 심화된 사회에서 느끼는 실직의 공포, 여성들이 날마다 느끼는 흉악범죄에 관한 공포는, “어쩌면 귀신보다도 사람이 훨씬 더 무섭다,” 하는 말이 돌게 만들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 또한 남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가? 50대 남성의 26,6%가 그런 공포를 일상적으로 느끼며 산다고 어떤 기관의 설문에 대답했다. 물론 50대 남성들이야 그렇다고 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데 10대 남성들의 25%, 20대 여성들의 23.5%, 심지어 40대 남성들의 20.4%가 그런 공포를 느낀다는 대답을 했다. 한 마디로 10대부터 50대까지 거의 편차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어디 50대 까지에만 국한된 수치이겠는가?

그래서 요즘은 차마 뉴스 보기가 두렵다. 친족살해, 그것도 자식이 부모를 죽이거나, 부모가 제 자식을 죽이고 학대하는 어린이 학대와 폭력이나 살인, 묻지마 살인 같은 끔찍한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는 세대간 성별간의 대화는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진보와 보수같은 생각의 차이는 아예 인정이 되지 않는다. 토론이 아니라 미움과 비난의 전쟁이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누구에게라도 짜증과 허무함을 안겨주게 된다. 결과적으로 병적으로 이 분노가조절이 안되는 분노사회가 되어버렸다. 2014년 사법연감에 의하면 재작년 한 해 전국의 법원에 접수된 고소, 고발사건은 약 650만 건, 그러니까 국민 1인당 0.12건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웃나라 일본과 인구대비로 살펴보니까 무려 일본보다 약 60배에 달하는 비율이다.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서 저질러지는 범죄도 폭발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보복운전같은 것이 사회문제가 되어가고 있는 그런 상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신이 바로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답답하고 참담하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상황이 이 지경인데 우리 모두는, 아니 누구누구를 말하기 전에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은 어떻게 하루하루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이는 사람들 마다 속으로야 어떤지 모르겠는데,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담담한 얼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뭘까? 싶었다.

지난 주, 한 장례식장에서 경험한 일이다. 장례의식을 마치고 운구를 하기 위하여 도열했다. 그렇게 도열한 사람들 앞으로 그 장례식장에서 청소하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이 쪽에서는 슬픔에 잠겨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들에게는 그 아침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런 아침인 것이다.

그렇기에 별 것 아닌 일들로도 밝게 웃을 수 있고, 기뻐하거나 속상할 수 있는 그런 아침인 셈이다. 평소에는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었는데 그 아침에는 그 장면이 유난히 생경스러운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필자가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갔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갔던 ‘골고다’ 언덕길 ‘비아 돌로로사’를, 함께 갔던 일행과 올라가던 때 들었던 생각이다. 워낙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길이라 경험과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배려로, 그들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대형십자가가 거기 있었다.

일행 중 몇 사람이 십자가를 교대로 짊어지고, 함께 간 나머지 일행들은 그 뒤를 따라 길지 않은 언덕길을 같이 올라갔다. 예루살렘에 과거의 길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당시는 건물들이 밀집해 있고, 아주 길이 좁은 골목길로 되어버렸다. 그리고 길 주변에는 순례객들을 상대로 잡다한 기념품을 파는 그런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실상 어떻게 참가한 성지순례였던가? 대부분이 어렵게 경비를 모아 벼르고 별러 순례의 길에 참가한 사람들이니까, 예수가 올라간 언덕길을 회상하며 올라가는 마음이 과연 어떠했었겠는가?

모두들 말도 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감동의 순간을 만끽하며 그 길을 올라가는 그 길 주변의 상인들에게는 그 장면이 너무나 평범하고 권태로운 일상이었다. 오로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아야겠다는 욕심만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치며 호객행위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처해진 입장에서 느끼는 진리의 얼굴이다. 참으로 씁쓸한 경험의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습이 무조건 다 음습하고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진실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비록 현실이 힘겹고 비참할지언정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기대와 기다림은 꿈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꿈의 크기가 실로 크기에 우리는 척박한 고통이나 버거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기다림이 있는 한 우리의 내일은 아름다운 소망의 꿈으로 빛난다. 기다림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체념하면서 기다리는 기다림, 즉 수동적인 기다림이다. 끔찍한 현재의 상황을 그저 견디고 기다리다보면, 어떻게든 지나가겠지 하는 막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을 말한다. 차라리 기다림이라고 말하기에도 어색한 막막함이 들어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기다림이 있다. 이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기다림이다. 공항에 나가서 얼마 후면 도착할 사랑하는 사람의 도착을 기다리는 기다림 같은 것, 설렘과 기대로 곧 이루어질 일을 확신하기 때문에 그 기다림은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찬 기다림을 말한다. 이런 기다림은 히랍어로 ‘콰와’라고 부른다. 비록 타는 목마름이 있더라도 곧 시원한 갈증의 해소가 있으리라는 믿음 속에 기대와 갈망이 곁들여져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이 마음에는 곧바로 꿈으로 연결되는 평온이 기다림에 깃들어 있음이다.

필자는 오늘 시작노트에서 모든 독자들에게 감히 제언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다림의 절정인 ‘콰와’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와 세상인심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기다림의 의미로 바꾸어보자는 필자의 생각에 동참해주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온 누리에 ‘콰와’의 아름다운 소망이, 감사와 사랑이, 골고루 누릴 수 있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어지는 데 앞장서겠다는 마음을 가져주시기를 기대한다.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리하여 정작 꽃 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람의 심성이 활짝 피어나기를 학수고대한다.

‘공자’가 젊을 때 길을 가다가 좀 이상해 보이는 한 노인을 만났다. 이 노인은 계속 싱글벙글 웃고 심지어 춤을 추며 기뻐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떤 노인이기에 저리도 예의를 다해 인사를 하는 거지?’
공자는 속으로, ‘중국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또 다들 나를 존경하는데, 나를 보고는 인사를 안 하고 언뜻 보기에 정신 빠진 저 노인에게 왜 다들 인사를 하는 것일까?’ 하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공자는 노인에게 공손히 절을 한 다음 물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는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즐거워하시며, 또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는지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젊은 양반이 무던히도 배우고 싶어 하는구먼. 내가 생을 감사하는 이유는 첫째, 뱀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돼지나 개로도 태어날 수 있는데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생각하니 그저 감사하다네. 둘째는 내가 90세가 넘었는데 건강하게 지내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셋째는 이렇게 나이가 많아도 즐겁게 일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해서 일하다가 쉴 때는 즐거워서 춤도 추는 것이라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먼저 남을 배려하고, 자신의 것을 기분 좋게 이웃과 나눌 수 있으며, 독선과 오만이 아닌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살며, 늘 감사의 말이 노래처럼 새어 나올 것이다. 모름지기 감사의 마음 속에는 내일을 기다리는 고운 희망이 살아 숨쉰다. 구태여 힘겹게 노력을 하여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자 애를 쓰지 않아도, 위대한 세상의 위인들은 일상에 자연스레 깃들어서 우리와 더불어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느 젊은 남자가 위대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하게 되었다. 몇 년을 돌아다녔지만, 위대한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남자가 지칠 대로 지쳐 어느 작은 숲에 앉아 있는데 흰 수염과 맑은 눈동자를 지닌 노인이 눈 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그 노인이 자신이 찾는 사람을 알 것 같았다. “혹시 위대한 사람이 계신 곳을 알고 계시나요?” “그럼, 알다마다. 지금 곧장 집으로 가 보시게. 그러면 마침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으니, 필시 당신 집에서 신발도 신지 않고 한 사람이 뛰어나올 것이네. 그 분이 당신이 찾는 위대한 사람일 것이네.”

남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집을 향해 마구 달렸다. 숨이 턱에 찼지만 쉬지 않고 달렸다. 며칠 만에 자기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위대한 사람이여. 어서 나오세요!” 그러자 정말로 안에서 한 사람이 맨발로 뛰어나왔다. 그 위대한 사람은 바로 남자의 어머니였다.세상에 언제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많은 사람이, 세상에 그런 사랑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알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그런 사랑을 이미 받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어머니란 위대한 존재로부터 말이다.

특별히 어머니의 사랑을 위대함으로 빗대어 강조하며 표현하자는 건 아니다. 너무 큰 것을 바라지 말고, 너무 먼 곳을 바라보지 말고, 너무 높은 것만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다림에 부합하는 위대한 사랑의 얼굴을 우리는 쉽사리 만나게 될 수도 있다는 진리를 잊지 말자는 이야기다. ‘독일’의 역사학자였던 ‘랑케’가 산책하던 중 동네 골목에서 한 소년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유배달을 하는 소년이었는데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우유병을 통째로 깨뜨린 것이었다. 소년은 깨진 우유를 배상해야 한다는 걱정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랑케는 울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지금은 내가 돈을 안 가져와서 줄 수 없다만 내일 이 시간에 여기 나오면 내가 대신 배상해주마.” 집으로 돌아온 랑케는 한 자선사업가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편지 내용은 역사학 연구비로 거액을 후원하고 싶으니 내일 당장 만나자는 것이었다. 랑케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지만, 순간 소년과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 자선사업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먼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소년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랑케는 망설임 없이 자선사업가에게 다른 중요한 약속이 있어 만날 수 없다며 편지를 써서 보냈다. 랑케는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 소년과의 약속을 지켰다. 랑케의 편지를 받은 자선사업가는 순간 상당히 불쾌했지만, 전후 사정을 알게 된 후에는 더욱 랑케를 신뢰하게 되었고, 그에게 처음 제안했던 후원금 액수보다 몇 배나 더 많은 후원금을 보냈다. 랑케에게는 역사학 연구보다 한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어느 것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눈앞의 커다란 이익을 저버리면서까지 약속을 소중히 지켰기에 소년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선사업가는 랑케의 더욱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작은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따뜻한 세상이었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지금까지 만연한 불신과 투쟁, 이기주의의 오욕으로 점철된 역사와 이별하고, 보다 밝고 맑은 산소가 가득한 세상이 되어졌으면 참 좋겠다.

서로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려고 애쓰며, 감사와 양보에 더욱 힘을 기울이는 곱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넘쳐나는 그런 내일이 열려진다면 정말 좋겠다. 필자는 이제 과거에게 별리를 통보하련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단장한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련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 번 약속한 일은 상대방이 감탄할 정도로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신용과 체면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그만큼 서로의 믿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앤드루 카네기’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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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위해 온 몸 내주는 물고기처럼
때론 나도
누군가를 위해 온 몸 내주고프다

새끼꼬듯 친친 감아올린
세월 무게 때문

아름다운 삶으로 마감키엔
퍽도 힘겨운 명줄
설레임보다도 먼저 찾아온 별리의 아쉬움

그래도....
그리움 하나는
구곡간장 고이 품어안고

염통에 울혈맺혀 쾌연치 못할지라도
소중한 꽃씨 가슴밭 파종하려니
표정없이 흐르고있는
삶의 오후

가을 오지 않는 가을날
너도 한번 그리움 앓아봐라
나 없이,
너 없이,
너 없는 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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