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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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내 어머니의 아들인가? *



시작노트

" 누가 내 어머니의 아들인가? " 詩作 note

뜬끔 없이 효도 이야기로 시작노트를 열자니 은근히 뒤가 켕긴다. 누구라서 효도라는 명제 앞에 떳떳할 수 있으랴만은, 유독 필자처럼 불효막심의 극을 달리는 인사라면 사실 쭈뼛거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아마도 불효에도 계급이 있다면 필자는 단연 지존급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효도를 화두로 삼는 까닭은 스스로에게 가하는 채찍질이다. 미상불 이제부터라도 생각을 좀 고쳐먹어보겠다는 바람이며 다짐이다. 이리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미안하지만 “아니올씨다”다. 천만의 말씀이다. 슬쩍 내심을 들여다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꼼수다. 고백컨대 단순하고 순진하게 진심어린 효성을 발휘하자는 게 아닌 것이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이니 이제부터는 조금 효도를 하고, 그래서 효도하는 자식이라는 이미지를 굳히고, 그 댓가로 나중에 더 큰 효도를 주야장천 받아야겠다는 치졸한 계산이며 전략이다. 그렇게 잔머리의 복안이 심어져있는, 흑막이 복선처럼 깔려있는 칙칙한 오늘이다.

옛날 두메산골에 마음씨 착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여 생활고가 말이 아니었지만 도덕만은 생명처럼 여기는 가운데 효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친이 병환이 들더니, 날로 위중하여 백약이 무효인지라 걱정은 태산 같았다. 하루는 지나는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했더니 간밤에 입은 은혜에 감사한다면서, 모친 병에는 ‘인고기’가 약이라고 알려주었다.

생사람을 약에 쓰라니 약방문 치고는 참으로 고약한 노릇이었다. 차라리 듣지 않은 것만 못했다. 그러나 부부는 밤새껏 궁리와 의논을 한 끝에 결국은 외동아들을 약에 쓰기로 결심을 하였다. 아내는 물을 끓이고, 남편은 산사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던 자식을 끌고 왔다.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부엌에서 기다리던 아내와 힘을 합쳐 가마솥의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

한참 후에 고음되기를 기다려 뼈는 건져내 산기슭에 갖다 묻고, 날이 밝자 약물을 떠서 어머니께 드렸다. 약은 정말 효험이 있어 어머니의 병은 씻은 듯 완쾌되었고, 세월은 흘러 1년이 지났다. 때로는 영문도 모르는 어머니께서 손자가 보고 싶다고 하실 적 마다 거짓 변명으로 일관하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핑계 저 핑계로 괴롭게 이어가던 어느 날, 죽은 아들이 난 데 없이 집을 찾아왔지 않은가? 이 어찌 된 일인가? 산사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다면서 절을 하는 아들을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다가 급히 산으로 올라갔다. 너무도 이상하여 떨리는 손으로 그 때 묻어둔 뼈를 파서 확인해보니, 거기에는 뼈가 아니고 커다란 산삼이 누워있더란 것이다.

이는 산신령이 도와서 산삼이 ‘인동환생(人動還生)’ 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효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 오늘날 효를 일깨우는 귀감으로 삼으라는, 신화처럼 존재하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터무니 없는 신화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감동받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도대체가 자기 자식을, 부모 위한 약으로 쓰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혹시 그 반대라면 또 모르겠다. 어차피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설령 부모인들 희생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사고방식이 이미 만연되어 있는 현 세태에, 생각해보며 한 번 쯤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사실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남의 일 보듯이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반성해야 할 절박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삼국유사’에는 ‘손순(孫順)’의 ‘매화설화(埋兒說話)’ 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손순은 가난했지만 효성이 지극하여 노모를 극진하게 모셨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매양 할머니 밥상 곁에 붙어 앉아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민망스러워, 아내에게 말하기를 “자식은 또 얻으면 될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저 애가 어머니의 음식을 뺏어 먹으므로 어머니의 굶주림이 심합니다. 그렇다면 달리 방도가 없으니 저 아이를 땅에 묻어 어머니의 배가 부르도록 해야겠소.”

이리하여 그들 내외는 아이를 업고 산 북쪽에 들어가서 땅을 팠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난 데 없는 석종이 하나 나왔다. 종을 두들겨보니 소리가 한없이 맑은 것이었다. 종을 얻은 것은 필시 이 아이의 복이니 묻지 말고 그만 돌아가자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대들보에 걸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두드리니 웅호한 종소리는 멀리 퍼져 마침내 대궐에 까지 들렸다.

당시 임금인 ‘흥덕왕’이 그 사연을 듣고 “옛날 ‘곽거’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이 금솥을 하사하였었는데 이번에는 땅에서 석종이 솟았으니 이는 전세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하늘이 함께 보심이로다.” 하면서 손순의 효심을 크게 숭상하고 많은 곡식과 집을 마련해주어 가난을 면케 하였다는 기록이다.

이와 같이 자식이나 스스로의 목숨을 위시하여, 부모를 위해서 손가락을 깨물고 다리살을 베는 행위 등은 자연스러울 정도로 많이 등장하니, 효성을 표방하는 옛 이야기들에는 사실 어느 정도는 상투성이 드러난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어떤 것이 효성스러운 행동인가 하는 패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효도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정해져버린 것 같고, 그만큼 효도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행동이라기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따르면 된다는 타성에 젖어버릴 우려가 있음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강릉’ 사람 전 중랑장 ‘이성무’는 얼음 위에서 잉어를 얻어 병든 어머니를 공양했다고 한다.아버지가 먼저 사망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효성을 다하여 봉양했는데, 어머니가 74세에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음식을 들지 못했다. 날씨가 아직도 추워서 얼음이 풀리지 않았는데, 그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내가 잉어회가 먹고 싶구나.” 하므로, 이성무 등 네 형제가 고기잡이를 잘하는 사람을 청해서 강변에 그물을 치고 얼음을 뚫어서 잡으려 했다. 그랬더니 얼음이 터진 곳에서 큰 잉어 한 마리가 위로 튀어나왔으므로, 아들들이 이를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를 공양했다는 내용, 이는 ‘태종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것도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우화를 보는 듯 하다. 효도를 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그에 응답을 한다고 우리 조상들은 생각해왔다. 이를 ‘효감(孝感)’이라 한다. 여기서도 잉어가 스스로 얼음을 뚫고 올라왔다고 하였는데,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그 당시에는 그러한 이적이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가 하면 ‘온성’ 사람 ‘박기만’이 산소에서 6년간 상을 치르면서 몹시 슬피 지내자 하늘이 감동하여 산불이 저절로 꺼졌고, 곁에 있던 호랑이가 멀리 피해갔다고 암행어사가 보고한 내용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벼슬보다 효도를 중히 여겼다. 영조시대 ‘나홍점’이란 사람은 과거에 합격한 지 25년이나 지났지만 어머니 봉양을 위해서 벼슬을 하지 않아 칭송을 받았다. 사람들이 벼슬을 권유하면 “어버이가 늙었는데 어찌 멀리 떠나겠는가?” 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청산현감’으로 특별히 임명했으나, 이마저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조금은 어이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비록 현실 감각과는 차이가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이를 한갓 전설이나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지 말고, 효심발로의 한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효도나 부모공양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도 차제에 어느 정도는 감화를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이는 남들의 이목이나 체면치레를 염두에 둔, 효성을 빙자한 자기만족 보다는 실질적으로 부모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하는 언행이 필요한 바와도 일맥상통한다.

‘정철’은 시를 읊어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닳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 고 했다. 정말 그렇다. 후회는 금물이다. 이제는 ‘불효부모(不孝父母) 사후회(死後悔)’라는 ‘주자’가 남긴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상기할 때다. 그래서 효도를 생활화하고 풍진 세상 비뚤어진 사고를 바로잡아 사회를 교화하는 데 앞장섬은 물론, 윤리와 도덕으로 일관한 가치관의 새로운 정립에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효에 대하여 신화같은 이야기들은 이곳 저곳에서 흔히 들었으나 가까운 곳에서 효자를 직접 보기란 그처럼 흔치는 않다. 효도로 가는 길이 가까우면서도 멀기만 하여 실천이 쉽지 않으니, 효자가 쉽사리 눈에 띨 리가 없다. 언뜻 보기에는 효자인 것 처럼 보이지만 다가가서 실상을 캐보면 이런 저런 사유로 효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일상적이며 보편적인 우리네 삶의 얼굴인 것이다.

오늘날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팽배해진 물질만능과 이기주의는 사람의 근본 도리인 효를 망각하고, 자기편의가 낳은 유산들은 사회를 극도로 어지럽히며, 급기야는 패륜까지 서슴치 않으니 진정으로 걱정스럽기만 하다. 얼마 전 ‘민속박물관’의 ‘효열비각’ 앞에서 효자와 열녀의 기림글을 읽고 있었는데, 50대로 보이는 사람이 옆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효자로다. 정말 장하구나.” 하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필자도 같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 서넛이 지나가면서 감동 어린 찬사는 커녕 “효자 좋아하네. 열녀가 뭐 밥 먹여주냐?” 하고 희희덕거리며 무엄한 말을 큰 소리로 질러대는 것이었다. 도대체 가치관의 차이가 이렇게도 크게 다를 수가 있을까? 괘씸하기 짝이 없어서 한참을 망연자실했다.

이를 철부지의 발상이라고 체념하자니 통탄스럽고 격세지감도 유만부동이었다. 누구나 나이 먹게 마련이고, 노인이 되어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거늘, 이것이 어찌 몇 사람만의 삶의 이야기이던가? 그러나 청소년들의 탈선과 잘못된 사고방식을 바로잡아 윤리관을 심어줄 책임이 우리 기성세대에 있음이 자명하니, 한탄이나 호통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원망하고 다잡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생각한다.

시골에 사는 어느 노인이 서울의 아들집에 들르러 왔다. 애써서 찾아간 그 날이 마침 며느리의 계모임이 있는 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없이 방법을 모색했다. 늙고 추한 어머니의 모습을 친구들이 보면 창피하니 골방에 들어가서 숨어있으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계꾼들이 모였고 시끌벅적하게 먹고 마시며 한바탕 놀이가 어우러지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노모는 문 가까이에 귀를 대고 무슨 소리가 날까 하며 기울였다. 마침 한 여성이 며느리에게 질문을 했다. “너희 집에서는 누가 서열 1위니?” 그랬더니 며느리가 대답했다. 1번은 남편이고, 2번은 맏아들, 3번은 둘째 아들, 그리고 4번은 딸, 자기는 5번이란다. 그리고 애완견이 6번, 그게 끝이란다. 그렇다면 시어머니는 개 보다도 못하고, 아예 7번 서열에도 끼지 못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럴 수가? 분기탱천한 노인은 그 길로 곧장 시골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들에게 남겨둔 쪽지의 내용이 의미심장했다. “1번아, 잘 있거라. 7번은 간다.” 비록 부모를 따뜻하게 모시지는 못할 망정 이런 취급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며느리의 작태가 드라마나 소설의 한 단면이 아니고 실화라고 하니 세상은 말세다.

‘공자’는 “오형지속(五刑之屬)이 삼천(三千)이로되 이죄막대어(而罪幕大於) 불효야(不孝也)”라 하였거늘 세상에 오형에 속하는 죄가 삼천 가지를 넘어도 그 중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근본 도리는 효가 지중하니, 효의 귀감을 스스로 찾아 익혀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의 진심에 깃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본향은 가정이다. 모름지기 부모로부터 살과 피를 받아서 태어난 목숨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과 근본을 터득하고 배운 곳이 바로 가정이다. 그래서 가정에서 받은 교육이 그 뒤 세상에서 습득하는 어떤 지식이나 학습보다 소중하고 요긴한 것이다. 자식이 잘못 되어지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자식이 잘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온갖 희생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부모다.

자식을 향한 그런 부모의 생각과 소망은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지속된다. 거래나 관계가 일시적으로 형성되었다가 갈라서게 되는 사회의 인연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기에 어떤 부모를 막론하고 자기 자식에게는 위대한 버팀목이 되고 싶어 하며, 화수분처럼 기운이 피어나는 후견인이 되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런 가시고기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사라지는 것이 부모의 운명이다.

이 숙명의 윤회는 인간의 역사를 이어온 힘이며, 수레의 바퀴처럼 굴러가는 자연현상이다. 우리의 부모는 부모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자식이었으며, 자식이었던 우리는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 그리고 우리를 부모라 부르던 우리의 자식들도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진다. 그 자식들도, 자식의 자식들도 결국은 부모가 된다. 그렇게 자식은 곧 부모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확실한 공식이나 제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이라는 것도 보는 각도와 처해진 여건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다. 모든 만물은 양면성이 있다. 삼라만상에 양면이 있듯이 사람의 희노애락은 언제나 행과 불행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다. 그것에 대처하고 순응하는 방법에 따라서 득실이나 성패도 좌우되기 마련이다. 어느 쪽을 내 것으로 삼느냐는 바로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살면서 ‘득록(得鹿)’ 보다는 ‘실마(失馬)’를 낫게 생각하는 정신을 가지는 것도 필요한 자세다. 그러니까 허황된 꿈 보다는 다소 실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를 밝은 측면에서 관용하고 자성한다면 오히려 덕이 된다는 말이다. 득록이라는 말은, ‘옛날 정나라 사람이 들에가서 사슴을 잡았는데, 남이 볼까 하여 혼자만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파초잎으로 덮어두고 집에 왔다가 다시 가보니 그 사슴을 찾지 못했다.’는 고사로서 바로 허황된 꿈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마는, ‘국경에 살던 한 노인이 말을 잃고도 이것이 오히려 복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였더니 얼마 후에 잃었던 말이 준마를 데리고 왔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들과 군대의 이야기로서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도 하는 이야기다. 이는 결론적으로 허황된 이익에만 집착하기 보다는 다소의 실이 있더라도 관용하면서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교훈이다.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가정한다. 길을 가던 내가 잘못이냐, 거기 있던 돌이 잘못이냐 따져본다. 넘어진 사실을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인생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길을 가면서 같은 방식으로 넘어지기를 반복한다면 분명히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가지고 싶은 건 한없이 많은데 주고 싶은 건 하나도 없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끝없이 먹기는 하는데 절대로 배설을 하지 않는 습성 때문에 뱃속에 똥만 가득 들어차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진실을 못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진실을 보고도 개인적인 이득에 눈이 멀어서 그것을 외면하거나 덮어버리는 것이 죄일 뿐이다.

왜 사람들은 ‘행복을 잡기 위해서’ 라고 말하면서 한사코 행복의 반대편으로만 손을 내미는 것일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망각의 늪 속으로 사라져버릴 사람이 있고,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강기슭에 남아있을 사람이 있다. 혹시 우리는 망각의 늪 속으로 사라질 사람을 환대하고, 기억의 강기슭에 남아있을 사람을 천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하찮은 욕망이 우리를 눈 멀게 하여, 하찮은 사람과 소중한 사람을 제대로 구분치 못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나니 훗날 깨달아 통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 모든 경우와 상황을 어우르게 하는 안목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며, 그 선생이 바로 부모다. 오늘 우리가 부모에게 행하는 효는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의 만 분의 일을 갚는, 아주 보잘 것 없고 작은 보은일 뿐이다.

그건 결코 생색 낼 일도 우쭐 댈 일도 아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랄 일도, 기꺼이 드러내 자화자찬 할 일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하라. 그냥 꾸준히 걸어라. 지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 걸어라. 돌에 걸려 넘어져도 또 일어나 앞으로 가라. 효도의 길은 끝이 없다. 막힘이 없다. 죽을 때 까지 걸을 길이다. 효도란 그런 것이다. 그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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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엇대인 인연으로
가없는 시절의 강,
그 강에 순종의 세월 흐르는데

깨알같은 그리움으로 쓰여진
당신의 육필일기를
나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내 코에 불어주신 당신의 입김으로
나 비로서 호흡을 하였고,
내 피에 흘려주신 당신의 생명으로
나 이윽고 심장이 뛰었고,
내 입에 물려주신 당신의 젖꼭지로
나 마침내 성장을 하였고,

그러면서 나 예 이르렀거늘 -

오늘 생일날
당신의 왼 가슴에 달랑
시든 꽃 한송이 달아드렸다 하여,
오늘 생일날
당신의 창자 속에 꾸역
돼지국밥 곱배기 채워드렸다 하여,
오늘 생일날
당신의 속곳주머니에 쭈뼛
신사임당 두어장 찔러넣었다 하여,

나날이, 다달이, 연년이....
그렇게 시절 좇아
착실하게 잊지 않고 오그라든
당신의 그 세상이
되살아날 거라 여기는,

당신의 진자리가 마를 줄로 아는,
당신의 가시밭이 무뎌질 줄로 아는,
당신의 긴세월이 보상될 줄로 아는,
그렇게 믿고 싶은 내가
과시
내 어머니의 아들인가?

아니면 대관절 오늘은
누가 내 어머니의 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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