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 감사의 계절에 눈물 내리고... 토해낸넋두리後"
예상하고 있는 출판 계획 상으로 보자면
세번째 詩集이 될 詩들의 묶음입니다.

2010년 후반기부터 2012년 봄까지의 詩를 모았습니다.

역시 힘든 세상살이의 단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고달프고 버거운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거듭나는 미래의 또 다른 삶과
행복의 추구에 관한
보헤미안 林森의 깨달음의 속내가
절절하게 배어나고 있습니다.

비단 詩人 만의 이야기가 아닌
세상 모두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누구나가 스스로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기면서
차례 차례 감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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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그림자 *



시작노트

" 나, 그림자 " 詩作 note

오늘은 작심하고 영화 이야기로 문을 열어보려고 한다. 지난 2007년에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봄에 개봉되었던 프랑스 영화다. 이미 많은 삶들에게 회자되었던 ‘잠수종과 나비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라는 제목이다. 아마도 내용을 아는 독자들도 많을 거다.

먼저 영화를 짧게 표현해본다. “패션잡지 ‘엘’의 편집장이자 두 아이의 아빠인 ’장 도미니크 보비‘는 출세 가도를 달리던 중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으로 교통사고를 일으키면서 온몸이 마비된다. 한 쪽 눈꺼풀을 깜박여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배우는 보비. 기억과 상상으로 자유를 향해 날아가는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수작”이라는 막연한 감상평 정도로 요약하면서 ’시작노트‘를 열어가보자.

영화가 주는 멧세지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고 훨씬 더 집요하며 심오하다. ‘침묵에 빠진 육체,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 비록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쪽 눈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과 소통하기엔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 막연한 주제를 풀어가자면 어디서부터 생각을 정리해야 할까? 처음부터 갈피를 잡기가 수월치 않은, 난해한 속 뜻이 많이 내포되어 있는, 이른바 잔잔하게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영화다.

‘칸 감독상’ 수상, ‘골든 글러브’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 ‘아카데미’ 감독
상, 촬영상, 각색상, 편집상 노미네이트, 이렇듯 알짜배기의 화려한 수상 이력은, 필자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확실히 좋은 홍보문구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절에, 충분한 여건과 상황을 구비하면서 개봉의 준비를 끝마쳤었다. 그리고 당시에 필자는 운 좋게 이 영화의 시사회에 초청받아, 개봉보다 다만 몇 일이라도 빨리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었다.

고백컨대 애초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는 와중에는, 조금은 의혹과 실망감을 앞당겨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또 늘상 보아왔던, 그렇고 그런 로맨스나 드라마를 포장한 이야기에 불과한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신체불구자에 대한 억지 감동을 주입하는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이래저래 여러 갈래로 수도 없이 나왔던 영화 소재다. 당장 TV 다큐멘터리만 틀어도 어렵지 않게 접해볼 수 있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신파가 맞다. 그러나 이 영화의 중요한 점은 단순히 신파로서 머무르지 않고, 그 전에 우리에게 신체불구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이전의 그 어떠한 영화보다 설득력 있고 밀접하게) 그려 넣었다. 우리가 신체불구자를 바라보며 가져왔던, 그저 ‘불쌍하다.’ ‘안됐다.’ 라는 주관적 타자의 입장을 깨끗이 지우고, 주인공인 장 보비의 행동과 고통을 철저하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내용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면, 중국의 유명한 베스트셀러인 ‘사망 일기’와 ‘알레한드로 아메나브르’의 영화 ‘씨 인사이드’를 반반 쯤 닮아있다. 죽기 전에 자신의 상태를 담담한 어조로 기술한 ‘잠수종과 나비’의 원작을 쓰는 지난한 과정과,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고, 흐르는 침조차 삼킬 수 없는 주인공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를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평범한 현실도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필자가 감히, 원작의 내용을 뻔한 신파라고 격하시켜서 단적으로 표현하는 건 아니다. 이런 소재를 클리셔로 범벅된, 뻔하디 뻔한 이야기로 만들어낸 영화 제작자와 감독에 대한 필자의 원망이 담겨있음을 먼저 밝힌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 보비의 실제 이야기에 대한 모략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기적과도 같은 인생 역정기에 박수와 눈물을 헌사할 수 밖에 없다는 건 필자 역시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감동을 포함한 부분까지 말이다.

그렇기에 의혹에 앞서서 갖게 되는 궁금증에서 더욱 큰 문제의 촛점은 이 영화가 “원작의 위대함을, 기존에 많이 존재해 왔던 같은 류의 영화와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는가?”와 “자칫 잘못하면 감정적인 신파성으로 빠질 수 있는 주인공 이야기를 얼마나 리얼하게 그려낼 수 있는가?” 이 두 개의 상반된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각색과 연출의 문제였다.

그것에 대한 ‘쥴리앙 슈나벨’ 감독의 해답은 대단히 충격적인 ‘1인칭 시점 촬영기법’이었다.사실 1인칭 시점의 촬영이 그 전에 없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기존의 1인칭 시점이 ‘핸드 헬드’로 여러 풍경과 장면을 거칠게 훑어 나가는 반면, 이 영화는 주인공 상황으로 인하여 핸드 헬드는 커녕 잔인하게 꿰매어진 한 쪽 눈으로 인하여 좁디좁은 시야각의 고정된 프레임이며, 이로 인하여 관객 역시 장 보비가 보는 만큼만 볼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강제적인 상태의 요구에 있다.

이 영화에서 이러한 시점이 더욱 놀라운 것은 혀를 내두를만한 디테일한 표현력이다. 프레임 위아래로 눈꺼풀이 비추어지고, 귀를 막으면 들려오는 작은 심장 고동 소리와 입과 코로 내쉬어지는 숨소리마저 놓치지 않고 아주 자세하게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으로 인하여 관객들은 생살을 꿰매는 고통을 함께 하고,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던 TV를 꺼버리는 간호사에게 “제발 끄지말아!” 라는 간절한 외침을 영화관에서 대신 외칠 정도로, 주인공 장 보비와 강하게 동질화 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계속 1인칭 시점을 유지하지 않고, 정확히 반으로 나뉜 후반부에 서는 3인칭 시점으로 도약한다는 점이다. 그 답답했던 시야각을 벗어나 만난 장 보비의 모 습을 대면한 관객은 이상하리 만치 냉철한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전반부 잔인하리 만 큼 고통스러운 1인칭 시점을 참고 관람한 덕분이다. 이 영화는 장장 40여분 동안 상상이 아닌 실제의 고통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실제 주인공이 겪은 일을 단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일 뿐인데, 영화 중간 중간에 실제로 몇 번의 몸서리를 칠 정도로 그 간접 경험의 강도는 강했다. 하지만 이 정도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실제 주인공 장 보비에 대한 모독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고 필자도 꾹 참고 보았다. 필자는 40여분 동안 장 보비가 되어 그가 겪은 불편을 그대로 겪기로 결심했었다.

그 후에 그는 그의 육체를 벗어났지만, 정신과 감정은 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후반부에도,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에게 벌어진 지금의 일에 대해서 값싼 동정과 뭣 모를 연민 대신에, 그의 인간관계와 심리 변화에 깊은 이해와 동감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이 부분에서 비로소 더욱 위대해 진다.

우리는 값싼 동정과 어줍쟎은 연민이 차가운 비웃음보다 때론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가끔 잊는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수십만 번 해본 이골이 난 손쉬운 수술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걸 당하는 당사자에게는 평생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극도의 공포의 순간이 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차이로 관객들에게 사전에 어필한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노래를 부르는 의사와, 속으로 신음을 지르는 장 보비의 상대적인 차이의 간극을 관객들은 장 보비의 입장으로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치료사에게 가장 하고 싶은 건, 죽음이라는 말을 듣고 도리어 자신이 화를 내는 언어치료사보다 전화기를 설치하러 온 그들의 비아냥에 더 호의로운 장 보비의 심리 상태도 어느덧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는 이러한 시점 변화로, 어느 정도 환자 입장에서의 고통과 아픔을 관객들에게 전도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아픔을 전도하여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장 보비의 위대한 기록과 그걸 이루기 위해 얻는 고통, 그리고 마침내 그걸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고인의 승화되고 위대한 전언이 아닐까?

다시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필자는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장애인에 대한 어떤 편견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을 다루는 영화나 책들이 오히려 편견 내지는 장애에 대한 식상한 인식을 재구성 혹은 확고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예를 무수히 봐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국에는 장애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쪽으로 흐르지를 못하고, 되레 장애인에 대한 세상의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을 동조하며 오히려 합리화하는,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인들의 아픔을 더 헤집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악화시키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간접적으로는 필자가, 복지나 구호에 관련된 단체와 조직에 포함되어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있는 현실적인 연관도, 이러한 문제를 묵과하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필자가 전체적인 장애인의 의견을 전달하거나 대변할 위치와 입장은 아니고, 또한 그럴 능력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의 문제에서 가장 윗 자리를 차지하는, 장애인에 관한 관심과 대책이 어떤 현황보다도 시급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필자는 유독 영화나 소설 등의 주제나 소재가 장애 문제로 치우치면 굉장히도 민감해지고 신경이 곤두선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행스럽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은 오히려 장애가 그의 개성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을 정도다. 철저히 그의 빈약한 시야를 대변하는 카메라 앵글은 엄청나게도 생경하면서도 낯설고, 그지없이 불편했다. 끝까지 편안해지지 않는 그 답답한 시야로 그는 남은 인생을 담담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절망해도 부족할텐데,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상황을 이른 시간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의아해 하게 되는 이 요인이 감독의 시선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지극히 그에게 온화하고 풍요로운 것으로 비춰진다. 그를 인정해주는 아버지, 사랑스러운 세 자녀, 헌신적인 전 부인 ‘셀린느’, 그의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언어치료사 ‘앙리에뜨’ 등등의 등장인물들은 헌신적이며 다정다감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전반적인 분위기와 흐름을 이끈다.

실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혹은 그렇게 생각했기에 힘을 내서 책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영화는 그의 장애를 어둡기만 하고 참담한 비극으로 몰고 가거나, 일방적이고 거대한 휴먼드라마로 만들지 않았다. 그가 사고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 감사하는 박애형 인간으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잠수종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임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 이 영화의 미덕이 존재한다.

그는 장애로 인해 좀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인간적인 욕망을 내버리는 것과는 분명 달랐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가 가진 것은 왼쪽 눈 말고도 두 가지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한한 상상력이고 다른 하나는 남겨진 기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가진 것에 ‘자신이 가진 욕망에 대한 솔직함’도 추가하고 싶다.

그랬기 때문에 영화 후반부에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에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 인물들이 흘리는 눈물이, 장애가 있는 남자에 대한 싸구려 동정과 연민으로 뭉쳐진 것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사랑과 애정에서 나오는 안타까움의 눈물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작위적인 내용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개인을 이해하고 그 내면에 살짝이나마 닿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던 역작이 바로 이 영화 ‘잠수종과 나비’였다.

필자가 영화 한 편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이즈음에 갑자기 ‘육체와 영혼의 자유’라는 화두에 빠져 해결책과 방향을 찾지 못하면서,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평생 추구해오는 진정한 자유라는 건 대관절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만상 중에 무엇에 속해 있으며, 일상에서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는 걸까?

자유로운 지속성과 연결성은 과연 어디로 닿아지게 될까? 아니, 도대체 ‘자유’라는 것의 실체는 뭔가?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는 “과연 나는 자유로운가?” 하는 물음이다. 그렇게 접근하면 도무지 답이 없다.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는 건데 감겨진 마음의 눈으로는 못찾는 건지 모르지만, 그 자유가 아무튼 지금은 없다. 없음이 분명하다.

한 편, 필자가 자유롭지 못한 근거는 확실하게 찾았다. 찾은 이상 분명히 필자는 현재 부자유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필자는 감시를 당하고 있었던 거다. 한 시라도 떨어지지 않고 필자를 따라다니는 정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체포했다. 혼줄이 난 놈은 지금 바로 옆에서 벌을 서면서 반성하고 있다. 바로 그림자라는 놈이다. 어떻게 처리할까? 이 놈을 어떻게 단죄하고, 다시는 필자를 함부로 여기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줄까? 고민한다. 계속 고민해본다.

그러다가 문득 오래 전에 보았던 이 영화가 떠올랐고, 급기야 자유의 본질을 어렴풋이나마 알려주었던 감상의 흔적을 좇아 헤맨 끝에, 놀랍게도 깊이 숨어있는 자유를 찾아내게 되었다. 구석에 쌓여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원작인 회고록을 다시 한 번 접하면서, 지금은 충격적으로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만 이 작품의 실제 주인공과 더욱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되어졌다. 어떻게 이제껏 진정한 자유의 본질을 내팽개치고 살아낼 수 있었던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심할 노릇이다.

그렇게 이 작품을 통해서 필자는 상실되었던 자유의 끝을 본다. 희미하게라도 다가서는 진솔한 자유의 손짓을 읽는다. 그림자에게 뺏겼던 자유의 밭에 희망을 씨뿌림한다. 그리고 이제는 눈 들어 감히 모든 사람들에게 제언한다. “삶에게 진실하고프면 이 영화를 만나보세요. 자신에게 솔직하고프면 이 책을 접하세요.” 이미 마음만 먹으면 주위에서 영화(DVD)나 책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찾아보자.

사실은 원작의 제목은 ‘잠수복과 나비’다. 물론 잠수종이냐 잠수복이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장 보비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방법은 책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 밖에는 없었기에 방법은 고통스러울 만큼 지루하고도 간단했다.출판사 직원이 알파벳을 외기 시작하면 자신이 원하는 단어에서 왼 쪽 눈을 깜박이는 것이다.

유일한 의사 소통 수단인 왼 쪽 눈꺼풀을 깜박거려 써내려 간 글이 하루에 반 쪽 분량, 15개월 동안 20만 번 이상 깜박거려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렇게 130페이지의 수기를 1997년 3월에 출간해냈고¸ 책이 출간된 바로 그 주에 그는 ‘정말로’ 죽었다. 마치 마지막까지 숨을 쉰 의미가 책의 완성이었던 듯 하여 소름이 돋는다.

애초 영화로 만들어지기 이전, 책만 출간되었을 때는 실화의 내용이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도, 멧세지를 어필하기도 쉽지는 않았었다. 게다가 아이러니하지만 영화라 할지라도, 아마도 ‘잠수종과 나비’가 관객을 동원하기 위한 전형적인 할리우드영화였다면, 장 보비의 삶은 예컨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밑반죽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양념을 살짝 끼얹은 평범한 멜로드라마로 탄생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흥미 위주의 단편적인 컨셉으로 전락하여 관객 동원의 숫자적 통계에 더 비중을 두는 데 그쳤을테고, 무의미한 단기간의 생명력으로 수준을 평가받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앙 슈나벨 감독은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의 관습을 피해가며 아예 관객을 장 보비의 머릿속으로 던져버리는 길을 택했고, 결국 그의 시도는 성공했다. 영화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세계인들의 가슴을 헤집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장 보비가 마지막 생명력을 쏟아부어 쓴 이 책은, 길지 않은 그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화들을 풍자와 유머로써 진솔하게 묘사하여 우리를 먹먹하게 만들었는데, 책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말한다.“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요? 다른 곳에서 구해보아야겠습니다.나는 그곳으로 갑니다.” 결국 인간 장 보비는 잠수종인 현실의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그러나 영화를 제작한 감독 줄리앙 슈나벨이 만든 장 보비가 날아올랐는지는 알 길이 없다.오히려 슈나벨은 자신이 날아오르는 길을 택했다.이카로스의 날개 같은 예술적 허영에 대한 대답은, 결국 자유를 갈망하는 독자나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유난히도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은 필자 같은 부류에게 장 보비라는 멋진 친구를 남겨주고 말이다. 그렇다면 기왕지사 선물로 받은 멋진 새 친구의 보금자리를 곁에 마련해주지 않는다는 건 웬지 배신이며 무례한 삶의 공식일 것 같다.

지금까지 필자를 옭죄었던 그림자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새로 사귄 친구가 또아리를 틀고 들어앉게 만들려고 한다. 이제부터 사악한 짓거리를 일삼다가 퇴출된 그림자의 역할은 장 보비가 할 것이다. 필자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봐주는 것도 그의 몫이며, 필자의 흔적과 상실을 전부 책임지는 것도 물론 장 보비일 것이다. 또한 기왕지사 친구가 되었으니, 필자도 장 보비의 숨겨진 슬픔과 난감한 현실을 필자의 업보로 받아들이고, 그냥 그 속에서만 허락된 자유를 찾으리라. 함께 숨쉬며 한껏 자유로 자유로 날아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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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마다엔 형형색색 물감범벅
울긋불긋 홍엽의 세상
단풍나무 기대선 손바닥 하늘,

두런두런 바람소리 아련하고
풋풋한 가을햇살에
기름 자르르 흐르는 창밖 단풍나무 아래
허공 어디쯤 나, 그림자,

옆동네 마실가듯 느릿느릿 하늘길 걷는 시간,
쉬엄쉬엄 정지된 초침속으론
가을 노릇노릇 맛있게 익어가는 시월중순,
가만가만 숨쉬는 한우주

저녁나절 성큼 배꼽시계
멀리 보이는 반쪽 산잔등엔 어느새
계란노른자처럼 해 아름다이 걸렸다

시월이 꺾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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