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5집. 비 내리는 날 오후  


  "5집. 비 내리는 날 오후"
수록된 序詩의 제목은 '사랑의 서시'이며
목차에서는 '봄 ! 초록빛 생명이 움트는 새 날'에 11편,
'여름 ! 푸른 바다 파도위 갈매기의 사연'에 11편,
'가을 ! 낙엽쌓인 포도의 회색 하늘 정취'에 11편,
'겨울 ! 백설의 광야에 홀로 선 소나무'에 11편,
그리고 '뒷풀이 한마당 -
멍석깔고, 재주넘고, 행복찾는 짓거리'에 16편,
합계 61편의 詩와 後記로 편집된 詩集입니다.

1995년 11월6일 인쇄되었으며
이 詩集에는 비교적 서사적인 내용과 형식을 지닌 詩가
다른 詩集에 비해서
더 많이 실려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초롱불 출판사 ]

위로 이동

* 정치가와 예술가 *



시작노트

" 정치가와 예술가 " 詩作 note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제국주의 정책으로 아시아를 넘보고 있을 때 조선에는 ‘대원군’이 있었고, 일본에는 ‘사까모토 료오마’가 있었다. 조선은 쇄국을 근간으로 하는 바람에 근대화로 나아가는 데 실패하였고, 일본은 개화를 주제로 하였기에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쇄국과 개화가 근대화의 성패를 좌우했다기 보다는, 역사 변혁의 주체가 누구였느냐에 따라 근대화의 성패가 결정되지 않았나 본다.

대원군은 임금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백성들과 함께 하려고 하였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잘 몰랐다. 이에 반해 사까모토 료오마는 상인의 자식으로서, 하급 사무라이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안동 김씨’ 세력과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고 서원을 철폐하였지만 권력을 왕에게 주지는 못했다. 사까모토 료오마는 오히려 조선의 유교를 이용하여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의 권력을 일본의 왕에게 돌려준 사람이었다.

대원군은 집권 내내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 냈지만, 사까모토 료오마는 오히려 막부세력과 천황제를 옹호하는 혁명세력과 화해와 일치를 만들어 냈다. 막부세력과 혁명세력의 싸움이 내전의 위기까지 치닫자 사까모토 료오마는 막부세력의 대표를 찾아가 담판을 짓는다. “우리 모두 새로운 일본을 위해서 뭉치자. 막부파도 일본 사람이고 혁명파도 일본 사람이다. 우리가 여기서 피를 흘리며 전쟁을 하면 서양의 제국주의가 일본을 식민지화할 것이다. 그러니 하나 되어 뭉치자.” 하면서 설득을 한다.

대원군은 79세의 나이로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난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경술년 일본의 강압 아래 대한제국의 통치권은 일본으로 넘어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1868년에 일본 ‘명치유신’은 성공을 거둔다. 혁명에 성공한 뒤에 대표자들이 모여 혁명 정부를 세웠다. 서로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때에 사까모토 료오마가 다락방에 올라갔다. 2시간 동안 고민한 후에 내려와서는 명분 있게 각료를 세웠다.

그런데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각료의 명단에 올라가 있는데, 당연히 총리가 되어야 할 사까모토 료오마의 이름만은 빠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본의 전함들을 다 모아서 상선을 만들어 미국으로, 유럽으로, 세계 무역 선단을 만들어 무역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계에서 과감하게 은퇴할 뜻을 표명했다. 결국 며칠 후에 사까모토 료오마는 의견을 달리 하는 반대파의 자객에 의해 암살을 당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사까모토 료오마 때문이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사람이었다. 신념대로 살았고, 신념대로 죽은 사람이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헌신과 결단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변혁시키며 역사의 주체로 살아간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선택으로 누구를 골라야 할까? 누구에게 오늘의 이 무거운 짐을 지게 해야 할까? 지금 전국이 선거열풍으로 들끓고 있다. 목하 뜨거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어차피 일반 국민들은 특별한 관심도, 결과에 대한 궁금증도 아예 없다. 정치라고 하는 병에 걸린 일부 계층의 사람들만이 서로 뒤섞여 치고 받고 하면서 분탕질을 할 따름이다. 소위 국민을 위한 행보라는 거창한 거짓말에 스스로도 속아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다. 보기에 영 마뜩챦다.

도대체 그들의 정의는 무엇이며,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하다. 누가 되고, 누가 떨어지고 하는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그냥 시끄러울 따름이다. 속이 답답하고, 짜증만 치밀어오른다. 빨리 시절이 지나가서 이 신파극의 막이 내리기를 바랄 뿐이다. 국민을 볼모로 잡고, 자리를 빙자하여 파렴치한 행위를 하면서도 정당방위로 호도하며, 마치 자신만이 국민을 구원할 절대자요, 지도자라고 착각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얼른 종료되기를 학수고대할 뿐이다.

국내외의 정치, 경제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은 이 비상시국에 언제까지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물고 늘어지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여야 하며, 저만 잘났다고 눈 감고 아옹하면서 드잡이질을 하고 있어야 하는 노릇일까? 이러다가 그동안 힘겹게 쌓아올린 우리나라의 국가적 위상이 한 순간에 와르르 허물어지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선열들이 목숨을 바쳐 이룩한 기적들이 몇몇 극소수의 이기주의자들에 의해서 망가져야 한다면, 그건 정말 너무도 비극적인 참사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지금 어드메쯤 /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 그분을 위하여 /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 지금 어드메쯤 / 아침을 몰고 오는 /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 그분을 위하여 /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 먼 옛날 어느 분이 / 내게 물려주듯이 / 지금 어드메쯤 /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 그분을 위하여 /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조병화’ 시인의 ‘의자’가 생각난다. 유난히 봄이면 이 시가 새벽 안개 속에 가득 안개꽃으로 피어 다가온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처럼 말이다. 그렇다. 필자도 지난 날 필자의 부모님이 삶의 의자를 마련해 주셨고, 또 필자의 스승님께서 학문의 의자를 넘겨주셨으며, 또 고마운 분들이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해주셨다. 그래서 보다시피 오늘 여기에 이르렀던 거다.

새삼 삶이라는 강의 하구에 가까워오니 그렇게 의자를 물려주고 떠나가신 그 어른들이 그리워지고, 또 그만큼 다가오는 후배들에게 낡은 의자지만 깨끗하게 손질해서 넘겨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절실한 그리움 속에서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한 구절씩 힘주어 읊어본다. 초탈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런 미련이나 집착이 없다. 과감하게 자신을 던지는 무욕의 상념만 존재할 뿐이다.

이 시는 평이한 시어와 경어체의 어투로 화자의 겸허한 심경을 담담히 표현하고 있다. 특히 1연, 2연, 3연이 거의 비슷한 구조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문장의 마지막 부분만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로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이는 반복과 미묘한 차이를 통해 의자를 비워주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아침을 몰고 오는 사람을 위해 확실하게 의자를 내어주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의자는 일상적 의미의 의자가 아니라, 새로운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삶의 자리이자 위치로서의 의자다. 1연은 어디쯤엔가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을 위해 오랫동안 지녀온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내용이다. 2연에서는 새로 올 대상이 좀 더 구체화되어 ‘어린 분’이라는 정보가 첨가된다. 그리고 3연에서는 자신도 역시 ‘먼 옛날 어느 분’에게 물려받은 의자에 앉아온 것임을 밝힌다.

후반부의 4연에서는 다시 앞서 1, 2연과 비슷한 시행이 반복되면서 ‘비워드리겠습니다’라는 강력한 의지가 피력되고 있다. 이 시의 주제는 다가올 새 역사의 인식과 세대 교체에 대한 의지다. 자신이 물러날 시간을 알고 새 세대의 자리를 예비하는 화자는 인과관계상 더 나이든 세대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분’ 등의 존칭을 사용하여 겸허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인간적인,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 본연의 속내가 은근하게 손짓을 한다.

모두의 마음이 이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대중 앞에서 목청껏 소리 지르는 저들의 속마음이 하나같이 이처럼 깨끗하고 담백하다면 얼마나 이 세상은 살기 좋을까?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며 이해와 사랑으로 뭉쳐, 똑같은 행복을 꿈꾸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인다면, 우리들의 이 오늘은 얼마나 살 만 해질까? 그들이 온전히 물려줄 때를 알고, 기꺼이 물러날 때를 아는 아주 기본적인 덕목을 가슴으로 받아, 깊이 깨달아준다면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에게 정치도 맡기고, 경제도 맡기고, 우리들의 오늘과 내일의 삶 자체를 온전하게 다 맡겨도 불안하거나 떨리지는 않을텐데, 참으로 아쉽다. 그리고 아깝다. 또한 안타깝다. 그렇게 현실을 투영하면서 다시 한 번 읽어보니, 영락없이 최근의 세태인 ‘자리 다툼’은 수준이 한 차원 아래로 보일 밖에 없다. 그냥 고마고마한 하수들의 눈에 보이는 뻔한 꼼수이며, 도토리 키재기 식의 잣다른 놀이터다.

하나 밖에 없는 의자에 서로 앉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의자를 비워 드리겠다’는 겸양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거고, 그에 따라 당연히 밀려나는 ‘패자’도 생겨나게 될 이 상황이야말로, 아이러니하지만 사회집단이 강요하는 어쩔 수 없는 ‘권력의 숙명’인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듯, “권력자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 권력이 복수의 인간에게 분산되어 있는 것만큼 해로운 것은 없다”는 데 동의한다. 서로가 최고라고 우기니 정신없고 사회만 혼란스럽다.

그 극단에 조선의 ‘사도세자’가 있고, 로마의 ‘시저’가 있다. 권력은 그렇듯 ‘독점의 미약(媚藥)’인 것이다. 하물며 가치와 이념을 공유치 못한 처지에 한 의자에 둘이 앉으려 했으니 역사 속에서도 사단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권력무상’을 조금이라도 예감한다면, 그 뒤에 이어질 ‘보통의 자리’에도 각별한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며, 미리미리 평상심을 준비해두어야 하는 건데 말이다.

이른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공직에 자리를 두어 사회의 ‘갑’에 위치한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부터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도덕이나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고,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분류하는 인간관계의 기준도 다르다. 일과 자체가 다르니 의식과 취미, 기호 까지도 다 다르다. 어쩌면 먹고 마시는 음식의 수준이 다르니 소화기관의 생김새도 다를지 모른다. ‘오장육부’가 아니라 혹시 ‘오장 칠부’의 내장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충언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이나 처지를 고려하지도 않는다. 오직 본인이 생각하고 결정하는 대로 행동하고 처신할 뿐이다. 그것이 부정이든 부패든, 아니면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는 패륜이든 파렴치든, 모두 상관하지 않는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다. 간혹 청렴하고 희생적인 청백리도 있지만, 요는 애석하게도 그 숫자가 결코 많지를 않다는 거다.

과연 일반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상류층이라는 공직사회 부패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부패방지기구인 ‘국민권익위원회’가 내놓은 설문 결과에 주목할 만하다. 일반인 75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이들 중 40.1%가 ‘우리 사회가 부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이들 중 36%는 ‘공무원이 부패하다’고 인식했다. 이 설문은 10여년 째 조사해오고 있는 데 별반 나아진 게 없다.

부패 유발적 사회문화의 핵심은 우리 주변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온정주의’와 ‘연고주의’에 기인한다. 시쳇말로 “그놈의 정 때문에…”란 말은 온정주의를 대변하는 속어다. 또 정치판에 떠도는 “우리가 남이가?”란 말은 패거리 문화의 병폐를 보여 주는 의미다. 온정 연고주의는 지연, 학연, 혈연으로 얽힌 한국적 반칙과 새치기 생활에서도 잘 드러난다. 너나 할 것 없이 교통사고가 나면 잘잘못을 떠나 주변에 아는 경찰관을 찾느라고 동분서주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실상 아닌가?

또 주변에 누가 아프면 병원의 온갖 지인을 동원해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입원실 새치기를 일삼지 않는가? 이 모두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일상적인 부패 행위들이다. 혹자는 이 순간에도 나라를 뒤흔드는 온갖 대형 부패가 매스컴을 도배할 정도인데, 이같이 작은 부패를 갖고 야단법석을 떤다고 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렇지 않다. 큰 부패 행위든, 작은 부패 행위든 엄정히 처벌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주변의 작은 부패들이 큰 부패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 작은 부패로 볼지 모르는 ‘바늘 도둑’ 같은 사례를 보자. 한 고궁의 의장 행렬에서 의장대원 보초 아르바이트를 했던 어느 대학생은, 행사 운영재단 직원이 아르바이트생 채용인원과 근무 상황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이 신고로 재단 직원이 편취한 많은 돈이 환수됐고 신고 학생은 포상금을 받았다.

‘OO 걷기대회’의 주최단체는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대회 광고비를 교묘하게 중복해 받는 방법으로 정부 지원금을 횡령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대회 참가자가 신고해, 수년간 보조금 중단과 지원비 환수 조치가 떨어졌다. 심지어 어느 기초지자체 간부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아들이 운영하는 편의점의 상품을 소속 공무원들이 많이 팔아달라는 압력성 글을 sns에 노골적으로 게시해 상급기관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청렴 선진국들은 어떤가? 위와 같은 사례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세계적으로 청렴선진국으로 존경받는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과 ‘뉴질랜드,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패라면 대형사고로 엄청난 벌을 받는다. 편취 금액 환수는 당연하고 모두 형사처벌이다. 우리는 일반인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우리 사회가 부패하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고질적인 문화를 안고 있다. 오해 받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부패 행위도 우리 생활에서 배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차피 누군가는 지도층에 위치해야 한다. 국가를 경영하고, 국민의 삶을 위해서 봉사하고 이끄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 정치가든, 공무원이든, 기업인이든, 학자든, 예컨대 상위 몇 퍼센트의 사람들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질서이며 순리다. 그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전체적인 삶의 질이 결정되고, 미래의 유산이 장만된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소수의 숨결이지만 전체의 호흡을 대변하는 셈이다.

바라기에는 어차피 우리가 살아간다는 참 의미가, 모두 함께 ‘더불어 사는 마음’과 ‘더불어 가는 마음’이면 좋겠다. 입장이 어떻든, 자리가 어디든, 누구를 탓하기 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상처 주는 말로 다치게 하기보다는, 다정한 조언의 말로 다독이면서 힘을 복돋아주는 그런 마음이면 좋겠다.

상대를 헐뜯고 경멸하기 보다는 그의 자리에 빛을 주고 기도해주는 마음이 더 소중하며, 의심하기 보다는 믿어주고 상대의 상황을 이해해주는 그런 마음들이면 좋겠다. 전에도 기술한 적 있지만, 우리가 산다는 것은 변화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늘도 변화가 있고, 계절도 변화가 있듯이 우리 삶도 희망의 변화가 있기에, 변화의 아름다움을 품어내는 우리들의 마음들이면 좋겠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머무르기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아울러 지나치게 주관이 강하고 마음이 굳어 있으며, 닫혀 있는 사람 곁에서는 사람이 떠나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이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한다면 누구나 그 사람과 가까이 있고 싶어 할 것이다. 다른 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마음을 받아주는 행동은, 그 사람이 애써 낮아지고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힘들여 주려고 하지 않아도, 열린 마음으로 남의 말을 경청 하려 든다면 그 사람 곁에는 늘 사람들이 머물 것이다. 속으로 아무리 좋은 생각을 지니고 있고, 오랜 세월 동안 엄청난 지식과 인격을 쌓았더라도, 겉으로 표현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개인의 주장만을 펼치는 아집과 독선으로 흐른다면, 그 사람은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지녔다고 할 수 없다.

말과 생각은 남에게 끼치는 파장이라는 점에서 보면 서로가 아주 판이하다. 생각은 그냥 생각일 수 있다. 어떤 감정이나 의견이나 사상을 그냥 생각 속으로만 가지고 있는 다음에야 최소한 남에게 끼치는 파장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말은 그렇지 않다. 생각처럼 그렇게 지웠다 다시 복원하고 또 지워버리고, 그럴 수가 없다. 말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말이 생각과 구별되는 점은 한 번 입 밖에 떨어진 말은 되담을 수 없고, 취소할 수도 없으며, 크든 작든, 그리고 심각하든 사소하든, 파장을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만들어진 파장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변이를 부른다. 말에는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끝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아홉 가지를 제언해본다. 우선 ‘해야 할 말’을 보자. ‘인정해주는 말’ ‘체면을 세워주는 말’ ‘칭찬하는 말’ ‘이름을 불러주는 말’ ‘겸손한 말’ ‘미소지으며 하는 말’ ‘잘못을 시인하는 말’ ‘남을 배려하는 말’ ‘힘을 복돋아주는 말’의 아홉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다음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비판하는 말’ ‘명령조의 말’ ‘이기적인 말’ ‘논쟁의 말’ ‘상대를 무시하는 말’ ‘거짓말’ ‘남을 깔보는 말’ ‘불평하는 말’ ‘아첨하는 말’의 아홉 가지다. 평소에 이 아홉 가지의 말들을 잘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언제나 주변에 웃음꽃이 피어날테고, 나아가서 화기애애한 사회를 만드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부디 ‘윗 물이 맑아야 아랫 물이 맑다’는 속담처럼, 우리 사회를 선도하는 지도자들의 생각과 언행이 먼저 건전해지며 솔선수범하는 겸양의 마음으로 변화되어, 그 아름다운 기운이 일반 국민들의 얼어붙었던 마음에 스며들어 얼음을 녹이듯이 부드럽게 녹이고, 새 봄의 움트는 새싹처럼 곳곳에 푸르른 기운을 심으며, 방방곡곡으로 널리 퍼져나가면 참 좋겠다, 그래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미래지향적인 신화가 만들어지는 이 나라가 된다면 더없이 좋겠다.
그런 나라를 만들어가는 데 앞장서서 희생하는 정치가가 선택받는 이번 선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정치가와 예술가 " 詩作 note 닫기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나르시즘에 젖은 정치가와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가가 만났습니다

겉모습은 영화롭고 찬란하지만
속은 썩을대로 썩은 치부,
서로는 금방 알아봤습니다

정치가는 왜 항상 선거에서 낙선하는지,
예술가는 어째서 늘 국전에서 낙선되는지,
그래서 언제나 뒤쳐지기만 하는지

몇날 며칠 밤을 새면서
그들은 제법 심각하게 밀도 있는 의논을 했습니다

그리곤 둘이의 얼굴을 바꾸어 달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재창조된 두 사람은 아집을 버리고 헤어져
각각의 길로 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전해보리라는 각오를 다지며...

정치판에 난리가 났습니다
예술적으로 생겨먹은 한 사내가
어느날 불쑥 나타나서 정치계를 갖고 놉니다

예술 분야에 충격이 왔습니다
정치가 마냥 생겨먹은 한 사내가
갑자기 등장하더니 예술계를 주름잡습니다

정치같은 예술판,
예술같은 정치계,
생존경쟁-
약육강식-

오늘...
우리...
그네들에게 열광하고 있는 서글픈 자화상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