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5집. 비 내리는 날 오후  


  "5집. 비 내리는 날 오후"
수록된 序詩의 제목은 '사랑의 서시'이며
목차에서는 '봄 ! 초록빛 생명이 움트는 새 날'에 11편,
'여름 ! 푸른 바다 파도위 갈매기의 사연'에 11편,
'가을 ! 낙엽쌓인 포도의 회색 하늘 정취'에 11편,
'겨울 ! 백설의 광야에 홀로 선 소나무'에 11편,
그리고 '뒷풀이 한마당 -
멍석깔고, 재주넘고, 행복찾는 짓거리'에 16편,
합계 61편의 詩와 後記로 편집된 詩集입니다.

1995년 11월6일 인쇄되었으며
이 詩集에는 비교적 서사적인 내용과 형식을 지닌 詩가
다른 詩集에 비해서
더 많이 실려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초롱불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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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가 (村家) *



시작노트

" 촌가 (村家) " 詩作 note

‘림삼 제 5시집’인 ‘비 내리는 날 오후’에 수록되어 있는 시다. 시의 제목이 ‘촌가(村家)’인데, 대관절 누가 살던 옛 집을 묘사한 건지 정작 기억조차 아슴푸레하다. 이 시도 아마 30년 쯤 전에 지은 시일테니, 30대 중반 무렵에 정신없이 싸돌아 다니며, 뭔가를 찾아 헤매던 시절 어떤 여행지에서의 회포이리라. 사납게 흘러가는 세월과 마주서서도 여유롭게 미소짓는 자연의 커다란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아 새삼 그리움에 잠겨본다.

지금 세상은 현대사의 한 획을 긋고 있다. 그 실상이 거룩하고 위대한 업적이라면 흐뭇하고 흡족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반대다. 인류의 뛰어남에 심취되어 세상 높은 줄 모르던 자존감과 긍지에 커다란 구멍이 나서는, 그 사이로 태풍같은 바람이 몰아쳐오는데 적절한 대응 방안조차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양새가 꼴사납기 그지없다. 그것도 소위 세계를 이끌어나간다는 거대한 두 공룡의 심장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단이 가장 크고 비참하다보니, 감히 입 벌려 소회를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예컨대 이제까지의 세계의 질서라고 불리우던 기존의 선진국 순서가 뒤죽박죽된 형편이니, 아예 이 마당에 세상을 이끄는 선진 대열입네 하고 줄 서기 하는 판을 새로 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 동안은 이런 저런 힘을 내세워 앞 줄에 자리매김되어 있던 나라들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허울 뿐이던 정부의 선진 정책들이 여과 없이 그 적나라한 치부를 보이고 있다. 애초에는 마치 후진국의 표본이라도 발견해낸 양 우리나라를 성토하고, 확진자의 통계를 꼬집으며 경원시하던 많은 나라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우리 정부의 대응책과 국민들의 성숙한 의식, 그리고 체계화된 의료 시스템을 배우고자 줄을 잇는다.

그렇게 훌륭한 대처와 성숙한 의식 등이 집약된 국회의원 선거까지도 이제는 세계의 귀감이 되어졌고, 정치의 롤모델이라며 칭송받는다. 소위 말해서, 모든 면에 뛰어난 대표적인 나라의 대명사가 되어지며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우리나라의 위상이 자못 놀라울 따름이다. 사연이 이럴진대 이제는 세상의 으뜸 가는 선진국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 아니라고, 감히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아예 이 참에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다 짓누르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도 이루며, 우리의 기상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새로운 풍속도가 펼쳐졌으면 좋겠다.

유치한 공상으로 헛웃음 짓다가 문득, 오늘날의 이 엄청난 시련을 씨뿌림한 근원이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오싹한 궁금증이 솟는다. 인류의 욕심과 야망에서 파생된 연구의 결과라느니, 또는 피폐해진 대자연의 경고라느니, 혹은 어차피 예정되어 있던 하늘의 게시라느니,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제각각 다른 관점으로 해석들이 분분하지만 어느 하나라도 확실한 답변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그저 공통된 의견 중의 하나는, 오만하고 건방진 인류의 경각심을 깨우치게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진솔한 반성과 자책의 목소리들이다.

과연 자연의 힘과 대척점에 선 인류의 경거망동을 견제하는 무소불위의 경고가 맞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은근히 소름이 돋는다. 바라기에는 이제부터라도 확실한 금기 사항과 규제를 스스로 정해놓고, 온 세계가 자발적으로 준수하는 깨우침이 확산되어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성에 스며들어, 다시는 이런 불행이 도래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깨끗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자랑스러운 선진들이 되어지기도 간절한 마음으로 바란다.

자연의 커다란 위엄과 기상을 떠올리다가, 불현듯 눈을 감고 그 가운데 깃들어있는 자연의 푸근하고 편안한 품을 추억해본다. 어릴 적 뛰놀던 고향의 자연과, 젊은 시절 헤매돌 때마다 늘 휴식으로 받아주던 이름 모를 시골의 자연이, 그리고 지금도 언제나 길 떠나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은은한 미소로 기다리는, 거처가 자리한 현실 속의 자연들이 모두 같은 이름으로 회자되며 각박한 세상사를 감싸 안는다.

이 자연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음이다. 이 자연이 우리를 활발하게 숨 쉬게 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샘 솟도록 배려해주며, 이웃에게 고운 향기를 전달할 수 있는 아름다운 힘을 북돋아준다. 자연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 인류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 어찌 감히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허투루 여기며, 자연에게 대적하는 망령된 행동을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자연의 이름 앞에 맹세해야 할 것이다. 영원한 자연과의 동행이, 숭고한 이 숙명이 인간에 의해 망가지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자연을 대하는 우리 각자의 얼굴들이 부끄럽지 않도록 서로를 경계하면서, 서로를 격려하면서, 미래로 향한 발걸음에 힘을 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얼굴’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새삼 생각난다. 우리말인 얼굴의 의미를 보면 ‘얼’은 ‘영혼’이라는 뜻이고, ‘굴’은 ‘통로’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멍한 사람들을 보면 ‘얼 빠졌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얼굴과 산 사람의 얼굴은 다르다. 기분이 좋은 사람의 얼굴과 기분이 나쁜 사람의 얼굴은 다르다.

사람의 얼굴은 우리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러니 사람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것처럼 바뀐다. 그러기에 변화 무쌍한 것이 얼굴이다. 얼굴은 정직하다. 첫 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6초가 걸린다고 한다. 첫 인상이 결정하는 요소는 외모, 표정, 제스쳐가 89%, 목소리톤, 말하는 방법이 13%, 그리고 나머지 7%가 인격이라고 한다. 그리고 표정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한다. 표정과 감정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다.

사람의 얼굴은 근육 80개로 되어있는데, 그 80개의 근육으로 7,000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신체 가운데 근육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가장 오묘한 것이 바로 얼굴이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서로 잘 통하는 얼굴, 영혼이 잘 통하는 얼굴, 생명이 잘 통하는 얼굴, 기쁨이 잘 통하는 얼굴, 감사가 잘 통하는 얼굴, 희망이 잘 통하는 얼굴, 항상 이런 얼굴 모습으로 하루하루 새롭게 열어가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원하는 일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바라는 바가 성취되지 않는다고 해서,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얼굴 찡그리며 세월을 탓하고 있으면 안 된다. 꽃은 저마다 피는 계절이 다르다. 개나리는 개나리대로, 동백은 동백대로, 자기가 피어야 하는 계절이 따로 있다. 꽃들도 저렇게 만개의 시기를 잘 알고 있는데, 왜 우리는 하나같이 초봄에 피어나지 못해 안달인가?

잊지 말자. 우리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혹시 바라고 있는데도 피어나지 않는 거라면 분명 아직 그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 언젠가는 꽃을 피울 것이다. 다소 늦더라도 우리의 계절이 오면 여느 꽃 못지 않은 화려한 기개를 뽐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개를 들고 우리의 계절을 준비하자. 혹시 지금 당신은 좌절했는가? 친구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혼자만 잉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잊지 말자. 포기가 항상 비겁한 것은 아니다. 실낱같이 부여잡은 목표가 너무 벅차거든 자신 있게 줄을 놓아보자. 대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날개를 펼치자. 그리고 때를 기다리면 되는 거다.

누군가에게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 격려의 손길을 한 번 건네고, 칭찬하는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은 자신의 양동이에서 국물 한 국자를 떠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즉, 남의 양동이를 채워주는 일이다. 희한한 것은 이렇게 퍼내주고도 제 양동이는 조금도 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공학 대가 ‘지그 지글러’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타인을 도와주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친절, 사랑, 감사, 칭찬은 퍼줄수록 넘쳐나는 성공의 묘약이다. 까짓것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친절, 사랑, 감사, 칭찬을 마음껏 베풀어보는 호기 한 번 부려보면 어떨까?

아름다운 우정에 관한 일화가 있다. 어쩌면 이미 누구나 아는 이야기일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의 ‘피시아스’라는 젊은이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효자였던 그는 집에 돌아가 연로하신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피시아스에게 작별 인사를 허락할 경우 다른 사형수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해줘야 한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형수들도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가 멀리 도망간다면 국법과 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왕이 고심하고 있을 때 피시아스의 친구 ‘다몬’이 보증을 서겠다면서 나섰다. “폐하, 제가 그의 귀환을 보증합니다. 그를 보내주십시오.” “다몬아, 만일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제가 대신 교수형을 받겠습니다.”

“너는 피시아스를 믿느냐?” “폐하, 그는 제 친구입니다.”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피시아스는 돌아오면 죽을 운명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돌아올 것 같은가? 만약 돌아오려 해도 그의 부모가 보내주지 않겠지. 너는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다.” “저는 피시아스의 친구가 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부탁드리오니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폐하!” 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다몬은 기쁜 마음으로 피시아스를 대신해 감옥에 갇혔다.

교수형을 집행하는 날이 밝았다. 그러나 피시아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바보같은 다몬이 죽게 됐다며 비웃었다. 정오가 가까워졌다. 다몬이 교수대로 끌려 나왔다.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자 다몬의 친척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정을 저버린 피시아스를 욕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자 목에 밧줄을 건 다몬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다. “나의 친구 피시아스를 욕하지 마라. 당신들이 내 친구를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앞둔 다몬이 의연하게 말하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집행관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집행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때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재촉하여 달려오며 고함을 쳤다. 피시아스였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말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몬을 풀어주십시오. 사형수는 접니다. 도중에 피치 못할 사유가 있어서 늦어졌습니다만 제가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어서 퍽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작별을 고했다.

피시아스가 말했다. “다몬, 나의 소중한 친구여, 저 세상에 가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피시아스, 자네가 조금 먼저 가는 것 뿐일세.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도 우리는 틀림없이 친구가 될 거야.” 두 사람의 우정을 비웃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몬과 피시아스는 영원한 작별을 눈 앞에 두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서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를 외쳤다.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해 주노라!” 왕은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뒤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다. 바로 곁에 서 있던 시종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번 사귀어보고 싶구나.” 몇 번을 듣고 보아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늘 감동을 준다. 우리의 주변에는 작은 일이면서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미담들도 많이 있지만,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나쁜 사연들도 많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보는가, 그리고 어떤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집중하는가 하는 문제는 자신의 인격과 인성을 쌓아가는 첩경이 되어진다.

언젠가 한 번쯤 이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들 평탄하게 잘들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늘 어려울까? 저 사람은 아우토반 고속도로처럼 잘 나가는데 내 길은 왜 맨날 울퉁불퉁 가시밭 길일까? 그렇게 우리들은 남의 손에 쥔 떡을 크게 보고, 내 손에 쥔 액을 더 크게 본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질투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급기야 험담까지 한다. ‘위대한 캐츠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 사람을 욕하기 전에 그 사람이 지금 지고 있는 짐을 헤아려 보라.”

그 어떤 사람도 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의 등에도 내가 모르는 그만의 짐이 얹혀 있다. 그 짐은 내 짐 보다 더 무거울지도 모른다. 또,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금언에는 이런 게 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그 사람의 신을 신고 세 달만 걸어보아라.” 그렇게 그는 나 보다 더 불편한 신발을 신고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걷는 길 보다 훨씬 험난한 사막을 그가 걷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헌 신짝같은 자존심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누군가에게 민폐일 거란 생각 때문일 수도 있고, 어쨌든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 같다.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일종의 자기 포장인 셈이다. 어쩌면 열등감이 심한 사람일수록 그 포장은 더욱 화려할지도 모른다. 때론 자기의 치부를 더욱 크게 부각시킴으로 열등감을 만회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지향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 말이다.

그 포장으로 우린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몫의 복이 있고, 그 복이란 내가 얼마만큼 받아들여 누리느냐에 따라 내 것이 되기도, 혹은 영영 사막의 신기루처럼 환영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잊지 말자. 내 분량의 복은 내 안에서, 거두어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자. 그것이 때로는 나의 복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나의 업보로 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나의 복은 내가 짓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을 믿고 먼저 베풀다가 큰 코 다친 적이 있다고 말들 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사실이 창피한가? 그 전에 당신이 먼저 그 도끼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살펴볼 일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고, 서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위험천만한 착각이요, 교만이다. 한 편으로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실망과 상처를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언제나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된다. 타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관이 인간관계의 벽을 만든다.

당신의 무심한 한 마디로 상대방이 귀를 닫아버렸을 수도 있고, 당신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후벼 파 상대가 당신을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봤을 수도 있다. 당신은 모르고 있다. 당신이 슬프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눈물을 삼켰고, 당신이 배반감으로 치를 떨기 전에 당신이 먼저 상대방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렸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 편이라는 이유로 내 마음을 모두 이해할 것이라는 오만한 태도부터 고치자.

‘인생에 사람처럼 값진 것이 없으니 무조건 당신 편을 믿어라.’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먼저 상대방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주고 있는지부터 살피는 게 순서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입장을 이해하며, 네 편 내 편을 정확히 가를 수 있어야 그 믿음이 견고해진다. 그렇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잘 살피면서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장만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것이 자기를 갈고 닦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필자는 평소에 1%를 마법의 숫자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비전을 실행에 옮길 때 가장 큰 문제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였다. 돌이켜보면 필자는 늘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곧 지쳐버렸고, 앞에 놓인 일들이 너무 많아 꼼짝하지 않고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바로 ‘1% 법칙’이 필자에게 가르쳐주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1%씩 개선해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난 그렇게 했다. 1%를 개선하고, 그 다음 주에 또 1%를 개선해나가고, 그런 식으로 비전을 개선해나가다 보니 결국 그 해 말에는 50% 이상을 개선할 수 있게 되었다.

1%만 개선하고 변화시켜나가도 우리의 삶은 커다란 성과를 이룰 수 있고, 거의 모든 것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 한 번에 한 가지씩만 잘 해 나간다면 어떤 것이든 나아질 수 밖에 없다. 1%는 두 가지 커다란 이점을 가지고 있다. 지속적인 1% 개선은 처음 출발점에서 멀리 나가게도 하지만, 무턱대고 코스를 정해 그것을 따르는 오류도 막아주는 것이다. 또, 1%는 단순히 변화만 의미하지 않고 개선을 보장하는 마법과 같은 것이다.

벌써 4월도 거의 다 보내고 있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한다. 시작할 때는 계획도 많고 포부도 크지만, 쏜 화살처럼 빠른 시간 앞에 때론 무력함을 느끼게 되곤 한다. 이즈음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볼 필요가 있을 듯도 싶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 속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고향과 자연의 추억을 소중히 보듬으면서, 내일을 향한 꿈과 소망을 소중하게 키워나갈 지금은 4월 하순, 아직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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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외톨 초가 지붕마루 용마름
말똥가리 이름 세운 맹금류 한 마리
사납게 쏘아보며 터 닦고 있는 우로
기지개 편 아침햇살 조소 설풋 머금고

별강에 달배 띄운 밤 깊도록 황톳불
구름 나그네 짓거리로 소란떨던 대처객
세상 모르게 늦잠든 토방댓돌 장짓문 틈
장항아리 숨어 살던 묏바람 스미는데

솔가지향 조반 연기 굴뚝아가리 제쳐두고
토담 새로 모락모락 머리 풀어 헤치면
허기져 게걸스런 싸립문울 얼룩강생이
컥컥대며 두 다리로 푼수떨어 삼매경

쪽마루 걸터앉아 눈물 콧물 쥐어짜며
햇고추 다듬느니 쭈그렁박 촌 노친네
해닳은 치마폭엔 가는 세월 오는 세월
연자방아 공이되어 무심히도 흐르누나

해질 참에 객 떠나면 촌가 홀로 남을테고
고즈녁한 침묵 깨려 첩첩산중 풀여치 날아
방사 치른 한우 한 쌍 가쁜 숨 몰아쉴 제
발정난 둠벙에도 꼬리 붙인 말잠자리

사랑타령 금전타령 세상 인심 변절에도
장승인듯 버티어 서 색천 두른 대추나무
멍석 깔아 삿가닥질 고매한 정 예 있거늘
냅둬라, 나 이대로 세월마냥 살다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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