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잊혀진 시절들의 꿈  


  "* 잊혀진 시절들의 꿈"
詩集으로 출판되지 않은
未發表詩들을 모아놓은 코너입니다.
그러므로 향후 출판을 계획하고 있는 거라면
첫번째 묶음집의 가상 제목인 셈입니다.

시기적으로는 1998년부터 2008년 중반까지
약 10여년 동안에 씌여진 詩가 대부분입니다.

가장 치열하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처절한 경제활동을 하던 시기인지라
詩作활동은 상대적으로 약간은 침체되어 있던 기간입니다.

일상에 쫓기다보니 多作을 할 여건이 안되어
기간에 비해 詩의 數는 많지 않은 대신,

이 코너에는 특별히
마지막 남은 로맨티스트를 표방하는 스토리텔러
林森 본인에게 애착이 가는
詩들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 ]

위로 이동

* 라라라 노래 소리 *



시작노트

" 라라라 노래 소리 " 詩作 note

그냥 이유 없이 노래부르고 싶은 날이 있다.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밝고 맑게 미소지으며, 만남 자체만으로 인사 건네고 싶은 날이 있다. 세상의 호흡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어떤 어려움도 웃으면서 감내할 마음가짐이 저절로 솔솔 생겨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내가 최고로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선물받은 것 같은 환희에 몸과 마음이 하늘로 오를 듯 하다.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펴고 훨훨 날면서, 황홀한 내일을 꿈꾸는 생각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마냥 하냥 좋기만 한 그런 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맹목적으로 좋은, 그런 날이 과연 우리네 삶에서 얼마나 될까? 지금이 봄이니까 당연히 겨울잠에 깨어나야 할테고, 새 싹 돋는 자연을 따라서 덩달아 춤추라고? 만물이 생동하고 새 소망이 솟는 봄이라 할지라도, 겨우내 찌들은 질곡의 고난이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데 말이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봄이 되면서, 또 다른 하나의 근심과 부담이 추가로 싹트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기다리던 봄이니 만큼 무언가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때로는, 우리에게 심한 스트레스와 책임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 웃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있는 건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웃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남보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 다만 허무하게 지나간 과거가, 안타까운 현실이, 암담한 미래가, 족쇄가 되고 멍에로 되어져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벗어나기 힘든 당면한 실상이다.

그런데 어찌 실없이 웃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 허기사 맞는 말이다. 세상에는 웃을 일 보다는 웃지 못할 일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길고 장황한 이유는 필요가 없다. 아주 간단한 예가 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진다”는 ‘하버드대학교’ 심리학박사인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실감이 안나서 남의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감정 보다도 웃음 만큼은 개인의 심리상태에 의한 자연적인 표출이 아니고, 겉으로 보여지는 인위적인 표정의 연관이다. 우리가 웃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항상 웃기 위해서, 웃으면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 말에 ‘일소일소(一笑一少)’라는 말이 있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진다’는 뜻임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대의학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여성이 남성 보다 오래 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여성들이 잘 웃기 때문이라고 하며, 하루에 한 번만 웃으면 수명이 이틀 동안 연장이 된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동물에게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웃음보’라고 한다. 동물은 웃음보가 없기 때문에 웃을 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동물이 있지만 웃는 동물은 하나도 없다. 조물주가 인간에게만 웃음보를 주신 것은, 많이 많이 웃으면서 건강하라고 한 뜻이라고 생각한다.

영어 단어 중에 가장 긴 단어가 무엇인가? 그 길이가 1.6km나 된다고 하는 이 단어는 바로 ‘smiles’이다. 처음 철자인 s와 끝 철자인 s 사이가 무려 1마일(mile), 즉 1.6km의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적게 되었을까? 아마도 길게 길게 오래 오래 웃으면서 건강하라고, 애초에 철자를 그렇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혹시 주위에 아예 웃음을 잃은 사람이 있는가? 다른 사람은 다 웃는데 혼자 고상한 척 하고 웃음을 참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며 다 싫어하고 피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왕따’라고 한다.

오늘부터라도 우리는 당장 웃어야 한다. 웃어야 행복해지고, 웃어야 건강해지고, 웃어야 왕따를 당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라면 일부러라도 더 웃어야 한다. 억지로 웃어도, 일부러 웃어도, 웃을 일이 없이 웃어도, 진짜 웃는 것의 90% 효과가 있다고 한다. 웃는 연습에 불과하더라도 무조건 웃어야 한다.

한가지 예로, 혼자서 거울을 보고 웃으면서 자기 모습을 보면, 그 꼴이 같지 않아서라도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는 웃어야 한다. 웃음은 마음의 치료제요, 몸의 미용제라고 한다. 아름답기를 원한다면, 잘 나가기를 바란다면, 다른 어떤 것을 신경 쓰지 말고 지금 이 시간부터 활짝 웃어야 한다.

나이 30세 이전의 얼굴은 부모가 정해주는 얼굴이지만, 30세 이후의 얼굴은 자기 스스로가 만든다고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주변을 살펴보아도, 인물이 좀 떨어져도 항상 밝은 마음을 갖고 겸손한 태도로 잘 웃는 사람은 점차 그 얼굴이 돋보이게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현대의학에서는 ‘웃음치료’라는 치료술이 있는데, 환자에게 약만 처방하여 치료하기 보다 여기에 웃음치료를 추가하게 되니 회복이 훨씬 빨라진다는 임상 결과가 입증되었다고 한다. 한 번 폭소로 웃고나면 에어로빅을 5분 동안 한 효과가 있고, 막혔던 혈관이 뚫린다고 한다. 혈관이 열리면 피가 잘 통하게 되고, 피가 잘 통해야 쾌차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 피가 잘 통하면 심장마비나 뇌졸중도 예방할 수 있고, 심지어 암도 예방할 수 있다. 암을 연구해보니 피가 잘 통하지 않은 곳에서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웃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온 국민들에게 웃음 바이러스를 전파하면서 ‘스마일 박사’ ‘웃음 전도사’로 불리다 연전에 작고한 고 ‘황수관’박사의 고백이 생각난다. 그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웃을 얼굴은 아니었다. 한 마디로 호랑이상이다. 예전에 교수들이 단체로 관광버스를 타고 동해안으로 여행을 가는 중에, 검문소에서 경찰이 올라오더니 다른 교수들은 다 그냥 지나치고 그에게만 와서 신분증을 제시하라고 하였다 한다.

다른 교수들은 “범죄형 얼굴이 다르긴 다르구나.” 하면서 킥킥댔다. 그것은 비웃음이다. 그런데 다른 웃음은 모두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비웃음은 절대 도움이 안된다. 그런 그가 ‘항상 기뻐하자’는 생활 철학을 좌우명으로 삼으면서,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얼굴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달라진 삶을 살게 되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기쁠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슬플 때나, 아플 때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도, 모든 역경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을 때도, 온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고 병에 걸렸을 때도, 가리지 않고 무조건 기뻐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가 세상의 유명한 웃음 전도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생활 태도가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세상사는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다고도 평화롭지만, 스스로의 속마음이 분노와 폭력으로 얼룩져있다면 세상에 보여지는 모든 것들이 다 그렇게 찌그러지고 우울해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마치 끝닿은 데 없이 펼쳐진 고향의 너른 들판처럼, 한없이 푸근한 어머니의 품처럼, 넓고 넓은 수평선에 이어진 바다의 노래처럼, 우리가 더 넓고 더 높고 더 무한한 마음을 갖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우리에게 웃음과 행복은 망설임 없이 다가와 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웃음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는 생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장수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더 많이 웃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아름답고자 하는 마음은 곧 웃음과도 직결된다. 찡그리고 인상을 쓰는 사람은 어차피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여성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까? 잘 생각해보면 많은 이유 중에서도 가장 먼저, 어쩌면 볼록한 젖가슴으로 만들어진 앞가슴선 때문은 아닐까 한다. 여성의 유방이 적당한 볼륨으로 옷을 밀고 솟아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특히 남성들은, 아름답고 신비롭다고 말한다. 유방이라는 표현의 소재를 생각해내고 나니 예순의 나이를 넘긴 지금에도 왠지 부끄럽고 못할 말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쑥스럽기는 하다.

마치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거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것 같다. 그러나 같은 부위라도 ‘젖’이라고 말하면 느낌이 어떤가? 금방 동심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품을 생각하게 된다. 편안하고, 포근하고, 정겹고, 그리고 그 품에서 풍겨나는 싫지 않은 냄새까지 맡아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물론 유방과 젖은 다르다. 그러나 통상 젖이라 하면 ‘액체’만을 뜻한다기 보다, 그게 담긴 통(?)과 함께 지칭되어 왔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렇기에 필자에게도 여성의 유방은 성적인 의미 보다는 모성적 의미로 다가온다. 여성의 유방은 수유기관으로서 외성기(外性器)의 하나인데 경산부(産婦)에서는 길어지고, 노인이 되면 선체(腺體)의 위축과 함께 축소되며 주름도 많아진다.

유방의 형태는 개인 및 인종에 따라 다르지만 ‘R.마르틴’이라는 사람은 접시 모양, 반구 모양, 원뿔 모양, 염소젖 모양으로 구분을 했다는데, 그 모양이 자신과 보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줄 지는 잘 모르겠으나, ‘호텐토트족’ 여성의 유방은 어깨에 걸칠 수 있을 정도로 길다고 하니 편리한 점도 있겠지만 불편할 것도 많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여하간 모양이야 어떻든 유방은 아이를 키우는 젖에서 미의 상징, 섹시함의 대명사로 변화해버렸지만, 그래도 필자에게는 여전히 유방이라 하면 어색하고, 젖이라고 표현하면 자연스러우면서도 정겨워지는 것을 어쩌랴. 아마도 어머니의 품, 어머니의 젖은 영원한 마음 속 고향으로서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기야 유방은 젊었을 때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결혼을 하면 아기를 키우는 사랑의 먹이로, 나이 들어서는 자식들에게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삶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는 안식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정말 여성만이 지니고 있는 천고의 마술이다. 조물주의 섭리가 놀라울 따름이다.

요즘에는 어디 가서 가슴에 아기를 품고 젖을 물리는 모습을 보기가 퍽이나 힘들어졌지만, 실은 엄마와 아기는 그렇게 젖물림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 길면 길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문득 며칠 전 그림전시회에 들렀다가 한참동안 발을 멈췄던 것이 생각난다. 아기를 엄마가 품에 안고 뒤돌아 앉아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평화, 행복, 아름다움이 거기 한꺼번에 다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잊고 있었던 마음의 고향도 함께 있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필자의 가슴 속에는 흐뭇함과 더불어 무한한 기쁨이,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또한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곳을 돌아나올 수 있었다.

누구라도 아름다움 앞에서는 저절로 웃음짓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노래하고 싶은 흥겨운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그것이 평안하고 온화한 인간 본연의 심성이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고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상황으로 변모해간다 할지라도 동서고금의 진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필자는 강력한 ‘성선설’의 신봉자이다. 결코 사람은 악하지 않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착한 마음을 모두어 함께 노래하자고 제언한다.

영원한 아름다움을 심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인류의 역사에 면면히 흐르고 있음에,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동서양이나 계절을 불구하고, 우리의 노래 제목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언제까지라도 변함없는 화두이며 결론이다.

-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먼 곳에 가보고 싶어, 서장이라는 곳에 꼭 가보고 싶어.” 서장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비행기를 탈 돈도 없고 자동차도 없는 아들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칠순의 아들은 세 발 자전거에 수레를 매달고, 어머니가 편히 앉아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도록 사방에 창문을 냈습니다. 평생 자신을 위해 희생해 온 어머니를 위해서,아들은 힘껏 페달을 밟았습니다.

길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냇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한 900일 간의 소풍....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원하던 서장까지는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03번째 생일을 앞두고 눈을 감기 직전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세상 구경하는 동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였어.” 남겨진 아들은 어머니의 유골을 수레에 싣고 7개월간 더 자전거 페달을 밟았습니다. 어머니의 유해를 서장에 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서장.... 참았던 눈물을 이제야 쏟은 아들은 어머니가 시원한 바람이 되어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왕일민’의 ‘어머니와 함께 한 900일간의 소풍’ 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고, 한 소절의 시를 감상하는 기분도 들지만, 잔잔한 사랑의 노래를 듣는 듯한 푸근한 마음, 그래서 더 눈물겨운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내용이다. 은은한 감동은 물 흐르듯이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우리의 내심으로 찾아든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과 노래는 하나다. 어머니의 사랑은 노래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사랑으로 답해준다면, 우리의 사랑을 읽은 그 모든 사람들은 필경 더욱 행복해할 거다. ‘어머니는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의지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분이다.’라고 말한 ‘도로시 피셔’를 기억하며 이 상큼하고 눈부신 봄에 딱 안성맞춤인 봄노래를 불러본다.

- ‘누군가 등 뒤에 와 살짝이 껴안아주어 돌아보니 봄 햇살 한 줄기, 그윽한 당신의 눈빛처럼 다가와 있네. 포근한 빛살에 안기어 사르르 눈감으니, 봄빛 날개가 돋아나고 있나 봐. 새 생명 돋아나오는 찬란한 곳으로 날아가고 싶어. 꿈틀거리는 날개에 환희가 물결치고 있어.

당신의 사랑은 그렇게 푸근히 다가와 날개를 달아주고, 꽃 노래 들려오는 곳으로 날아오라 하네. 아름다움으로 터져 나온 저 부활의 천지로, 잎들의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귀한 선물을 받으러 날아가리. 당신께서 주시는 창조의 신비가 눈부신 새 누리로. 봄이 피어나는 찬란한 신세계로....’


" 라라라 노래 소리 " 詩作 note 닫기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하이얀 치아 드러내어
작약도 피우고 함박도 머금어
너 라라라 노래부르면
난 더 하얀 달되어 네게 비추어주리라

잠자리 날개옷 입고
요정춤 나풀 신선한 걸음걸이
너 라라라 노래부르면
난 파르란 풀잎되어 네게 밟히우리라

복사꽃 손톱 가지런히
흩날리는 머리카락 쓸어올리며
너 라라라 노래부르면
난 하늬바람되어 네게 불어오리라

고운색 꿈 빛깔로
수줍은 사랑에 촉촉하니 젖어들어
너 라라라 노래부르면
난 사랑의 비되어 네게 스며들리라

햇살도 되고, 안개도 되고,
무지개도 되고, 은하수도 되고,
너의 누리에 머무를
그 무엇이 되어져
난 소리 높여 라라라 노래부르리라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