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잊혀진 시절들의 꿈  


  "* 잊혀진 시절들의 꿈"
詩集으로 출판되지 않은
未發表詩들을 모아놓은 코너입니다.
그러므로 향후 출판을 계획하고 있는 거라면
첫번째 묶음집의 가상 제목인 셈입니다.

시기적으로는 1998년부터 2008년 중반까지
약 10여년 동안에 씌여진 詩가 대부분입니다.

가장 치열하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처절한 경제활동을 하던 시기인지라
詩作활동은 상대적으로 약간은 침체되어 있던 기간입니다.

일상에 쫓기다보니 多作을 할 여건이 안되어
기간에 비해 詩의 數는 많지 않은 대신,

이 코너에는 특별히
마지막 남은 로맨티스트를 표방하는 스토리텔러
林森 본인에게 애착이 가는
詩들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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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드발을 떠나야 할 때 *



시작노트

" 로드발을 떠나야 할 때 " 詩作 note

언제라서 조용하고 평온한 날들만 이어질 리 있으랴만, 우리나라의 작금의 현실이 참 만만치 않다. 자고 일어나보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국가적으로 정말 너무나도 많은 각종 사건 사고들이 시도 때도 없이 빈발하면서 골머리를 썩게 만든다. 그것이 역사를 거스를만한 엄청난 일이거나 국제적으로 비화되어도 한 줌 모자라지 않을 거대한 흐름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다. 그런데 언제나 어째서인지 많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늘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지니고 있는 신분이나 갖고 있는 권력들을 이용하여 일탈을 일삼고, 남들은 가지 않는 비리와 부정의 길을 마치 특권인 양 걸어가려 하다가 끝내는 사고를 치고 만다.

어쩌면 그렇기에 인간의 부족함이 자연스럽게 일상화되고, 세월 흐르면 잊혀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심도 불의를 사실화하는 작업에 한 몫 거드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그것도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거나 세상을 이끌고 가는 리더라는 위인들이 더 많은 문제거리를 안고 있으니 세상만사는 참으로 얄궂기 짝이 없다. 작금의 현실을 조망해보면 힘 없고 빽 없는, 소위 소시민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범죄나 일탈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그네들을 관리감독하거나 각종 범죄를 단속하고 계도해야 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부정과 부패가 훨씬 더 많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정의니 민심이니 하면서 목청 높여 서로 손가락질하고, 부르짖으며 몸부림친다. 법률이니 도덕이니를 입으로 주워섬기면서, 한 켠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시켜 남모르는 범죄를 일삼는다. 그리고는 흔적지우기나 꼬리자르기에 여념이 없다. 때로는 배신과 음모를 연구하면서 같은 편끼리도 서로 물고 뜯는다.

소위 최후에 살아 남는 자가 승리자라는 암흑가의 규율을 좌우명인 양 가슴에 담고 늘 절차탁마한다. 한 마디로 꼴값들을 한다. 그리고 살아 남은 사람들이 정의라는 제목을 명찰로 달고 세상을 향해 호령을 한다. 태양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다고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정치라고 논리를 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합리화 시킨다. 그런 삶을 살아야 성공과 승리가 보장되는 것이며 정의사회의 구현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니 어쩌랴? 거기 슬그머니 빌붙어서 꼬리를 흔들어야 떡고물이라도 조금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을. 그래서 필자는 오늘도,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다 보이지만 전혀 못 본 척, 그리고 반대 편이지만 동패인 척,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그들과 손 잡고 있다. 나 자신이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과감한 행보를 보일 자신이 있을 때, 걸음걸이에 힘을 주어 기꺼이 로드발을 떠나고자 할 때, 불의를 일컬어 불의라고 떳떳이 소리할 수 있을 그 때에 비로소 필자는 소름끼치는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지적하며, 새로운 역사의 불꽃에 힘 보탤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저 비루먹은 강아지 마냥 바짝 엎드려, 세상 살기 좋아졌다고, 확실히 과거 보다는 살 만 하다고, 지금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안정되었으며, 선진국으로서의 위상과 국가의 미래지향적인 행정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판에 박은 애국심을 피 튀겨 토로하면서 간당간당 숨이나 쉬고 있을 것이다. “하하하-” 이렇게 마른 웃음 웃으면서 말이다. 나는 판타지 속의 주인공이다. 과거 보다는 미래를 열심히 살아나갈, 육체적인 연령이나 활력은 무시하고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나이로 스스로를 판단하며, 자화자찬의 오늘을 평가하는 삶의 자세를 내내 견지할 것이다. 당분간은...

어느 마을에 성질이 포악하고 하루하루 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남자가 있었다. 항상 마을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는 남자는 ‘나처럼 쓸모없는 놈은 노력해 봐야 소용없어.’라고 말하며 그냥 자기 멋대로 살았다. 어느 날 남자가 마을 대로에 서서 술을 내놓으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거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남자를 피하는 가운데 한 노인이 남자에게 말했다. “그렇게 술을 원하거든 내 부탁을 잠시 들어주게. 그러면 자네가 원하는 술을 대접하지.”

술을 준다는 말에 남자는 노인을 따라갔다. 노인은 바닥이 조금 갈라져서 물이 새는 두레박을 남자에게 주며 우물물을 길어 달라고 했다. “아니, 어르신. 주신 두레박이 깨졌습니다. 이런 거로 물을 어떻게 담습니까?” 그러나 하지 않으면 술을 주지 않겠다는 말에 남자는 물을 뜨기 시작했다. 깨진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동안 두레박의 물은 반이 새어 나갔다. 그러나 남은 절반의 물이라도 계속 길어 올리자 어느새 물독이 가득 찼다.

드디어 가득 찬 물독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노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가 들고 있는 깨진 두레박이 쓸모없어 보여도 꾸준히 노력하면 물독을 가득 채울 수 있네. 자네도 조금은 흠이 있는 사람이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것이 있을 터이니 삶을 쉽게 포기하지 말게나.” 불가능은 없다고 말하지만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 있다. 할 수 없다고 포기해버린 일은 절대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로 영원히 남아 버린다.

제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모든 가능성은 시도에서 나온다. 시도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그 가능성이 0%다. 길이 가깝다고 해도 가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며, 일이 작다고 해도 하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는다. 하물며 당장 어떤 결과를 이루어야만 하는 당면과제조차 시도도 아니하고, 막연한 결과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삶을 이어가야 하는 본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정식으로 저항하는 직무유기이며 비겁한 배신행위다.

프랑스의 소설가 ‘뒤마’의 작품인 ‘삼총사’에는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라는 구호가 있다. 작은 몸의 포유동물로 집단생활을 하는 미어캣은 저 구호를 가장 잘 지키며 살아가는 무리 중 하나다. 먹이피라미드에서 아래층에 위치한 미어캣들은 천적인 맹금류를 경계하기 위해 순번을 정해서 감시한다. 그리고 자기 차례의 보초 순번이 오면 다른 미어캣이 식사할 때에는 꼼짝없이 서서 감시하고, 적이 공격해 오면 몸으로 동굴 입구를 막아 동료를 지키다 죽기도 하곤 한다.

우두머리 미어캣을 포함해서 그 어떤 미어캣도 자신에게 이 가혹한 보초의 순번이 돌아왔을 때 보초를 거부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한다. 또한 암컷 미어캣은 한 번에 2~5마리 정도씩 새끼를 낳는데, 한 마리가 새끼를 낳으면 다 자란 다른 암컷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젖을 만들어내어 새끼들에게 젖을 먹인다. 단 한 마리가 무리를 위해 죽어가기도 하고, 단 한 마리를 위해 모든 무리가 사랑을 베풀기도 한다. 바로 ‘올포원, 원포올(All for one, One for all)’이다.

사막의 작은 동물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개인주의로 가는 요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 지나친 이기주의나 개인적인 우월감은 전체의 성공을 해치거나, 지극히 작은 이익을 전달받으면서 크고 확실한 이익을 스스로 가리는 미련한 처사를 불러올 수 있다. 세상은 협동과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사회다. 유토피아는 자신을 낮추고 겸양과 양보의 미덕을 몸소 실천하고자 하는 솔선수범의 의지가 있을 때에 만들어질 수 있는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어느 날 미 해군 함대에 해군 제독이 참석하는 큰 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참석한 장성의 계급장이 실수로 훼손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대로 사열을 받을 것인지 아닐지 고민하는 가운데 참모들을 불러 대장 계급장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바다 한 가운데 대장 계급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마지막 기대를 하면서 선내 방송을 통해 공지했다. 하지만 대장 계급장이 나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이크로 알린 지 10분도 채 안 되었을 때 이제 막 임관한 소위 한 명이 숨을 헐떡거리며 대장 계급장을 들고 나타났다. 해군 제독은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일개 소위가 대장 계급장을 왜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제가 소위로 임관할 때 국가를 위해 헌신하여 꼭 대장의 지위까지 올라가라는 의미로 사랑하는 애인이 선물한 것입니다. 저는 이 계급장을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며 제 의지를 다잡곤 합니다. 그러니 오늘 행사에 사용하신 후에 꼭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소위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맹활약한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제독이다. 이후 제독의 이름을 딴 미 항공모함이 건조될 정도로 대단했던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는 원래 목표했던 4성 장군을 넘어, 미 해군 최초의 5성 원수가 되어 미국 해군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장군으로 기록되었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 성공한 사람은 예외 없이 자신의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다.

나의 가슴 속에 담긴 꿈은 무엇인가? 그 꿈이 크고 원대한 것이든, 작고 소박한 것이든 상관없이 이루고자 하고픈 일이 있다면, 작은 메모지라도 좋으니 당신의 꿈과 정확한 목표를 한 번 적어보자. 그것이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발자국이다. 꿈을 날짜와 함께 적어놓으면 그것은 목표가 되고, 목표를 잘게 나누면 그것은 계획이 되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꿈은 바로 실현되는 것이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사는 ‘셀리 카울리’는 임신 중인 딸 ‘릴런’이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딸 릴런이 태어난 날 엄마 셀리는 ‘출산 쇼크’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릴런은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식물인간이 된 엄마는 자신의 딸을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다. 셀리는 곧 끊어질 것 같은 미약한 숨소리와 느릿느릿 천천히 움직이는 심장박동만이 그녀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병원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말을 들은 남편은 태어난 딸과 엄마를 만나게 하려고 중환자실을 찾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누워있는 엄마 셀리의 품 안에 딸 릴런을 안기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셀리의 호흡과 심장박동이 치솟아 오르며 셀리의 몸이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7일 후, 마지막을 준비했던 셀리는 완전히 의식을 되찾아 자신의 손으로 딸을 안을 수 있었다.

놀라운 기적을 보여줬던 릴런은 현재 귀여운 5살 소녀가 되었고 셀리 역시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문명을 모두 총동원한다고 해도 사랑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다. 더욱 시간이 지나 과학이 더 발전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히 재볼 수 없는, 너무 아름다운 기적이 이러한 사랑에 소중히 담겨 있다. 모성애의 위엄, 숭고함, 상냥함, 영원함과 거룩한 의미를 무엇으로 표현하랴. 오로지 사랑이라는 제목 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크고 넓고 다양하다. 그래서 단순한 지식이나 학술로 설명할 수도 없고 과학이나 이론으로 정립할 수도 없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정들의 총체가, 그것이 구현되는 현실적인 언행의 모듬이 바로 사랑이라는 개념이다. 부모자식간의, 부부간의, 스승과 제자간의, 그리고 연인이나 형제나 친구나, 모든 인연들 사이의 감정의 교류가 사랑의 출구이며 문이다.

중국의 ‘춘추시대’에 살던 ‘관중’과 ‘포숙’이라는 두 사람은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이 젊은 시절 같이 장사를 할 때 항상 관중이 더 많은 이익금을 가져갔다. 하지만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더 어렵고 돌봐야 할 식구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제나라’의 관리가 되었지만 관중은 세 번이나 파면되었는데, 늙고 병든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관중은 전쟁이 벌어지면 어머니가 혼자 남게 되는 것이 걱정되어 전쟁터에서 달아났기 때문이다.

관중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포숙은 여러 사정 때문에 뜻을 펼치지 못하는 관중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자신이 모시던 군주 ‘소백’에게 관중을 천거했다. “전하께서 제나라에 만족하신다면 신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하신다면 관중 외에는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그를 등용하십시오.” 그렇게 관중은 소백의 재상이 되었고, 이후 명재상 관중의 보좌를 받은 소백은 제나라 ‘환공’에 올라 ‘춘추 5패’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관중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생아자부모(生我者父母), 지아자포숙아야(知我者鮑叔兒也)” 나의 약한 모습을 부끄럼 없이 편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친구. 내가 힘들고 괴로운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친구. 일평생 동안 이러한 친구를 단 한 명만 만들 수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 할 정도로 매우 어렵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다면 당신의 친구도 당신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좋은 친구를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었을 때 행복하다. 바로 사랑의 한 단면이다.

많은 장애인이 아직도 편견과 차별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오히려 장애인들을 위한 훌륭한 정책이 많았다고 한다. 장애인과 그 부양자에게는 각종 부역과 잡역을 면제했고 장애인에 대한 범죄는 가중 처벌되었다. 그렇다고 장애인들에게 무조건 편한 특혜만 준 것은 아니었다. 나라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복사’, 불경을 외워 읽어주는 ‘독경사’, 물건을 만드는 공방의 ‘공인’, 악기를 다루는 ‘악공’ 등으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을 했다.

‘태종’ 때는 ‘명통시(明通侍)’라는 시각장애인 단체를 조직하고 지원하여 가뭄 때 지내는 기우제 등 국가를 위한 행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관직 등용에도 차별이 없었다. 조선 초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허조’는 척추장애인,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권균’은 간질장애인,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심희수’는 지체장애인, ‘영조’ 때 대제학, 형조판서에 오른 ‘이덕수’는 청각장애인이었지만 모두 훌륭히 역사를 빛내준 사람들이었다.

수백 년 전 우리 조상님들 또한 지금 보다 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세종실록’에 전하는 ‘박연’의 상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시각장애인 악사는 앞을 볼 수 없어도 소리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오늘의 화두는 그래서 역시 ‘사랑’이다. 모든 조건이나 상황에 우선하는 마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마음가짐으로 오늘을 산다면 현실에 대한 불평불만이나 타박보다는 좀 더 따뜻하고 착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꿈이 구현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나면 다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한 이해와 동반자적 정서가 차츰 샘솟게 될 것이다. 서두에 필자가 맹목적으로 오늘의 일탈과 사건들을 비난하고, 이른바 권력자들의 소행을 고까워하는 시선으로 신랄한 비판을 한 것도 실상은 사랑과 포용의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거나 탐스러운 과일이 달린 나무 밑에는 어김없이 길이 나 있다.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 이치로 아름답고 향기나는 사람에게 사람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상대를 위해 아량을 베푸는 너그러운 사람, 그래서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풍겨져 나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 함께 있고 싶어진다. 그 향기에 온전히 내 몸과 마음이 적시어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나 또한 그 향기를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스치듯 찾아와서 떠나지 않고 늘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고, 소란 피우며 요란하게 다가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쩍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 소리 없이, 조용히, 믿음직스럽게, 그러나 가끔 입에 쓴 약처럼 듣기는 거북해도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해 주는 친구들이 있고, 귓가에 듣기 좋은 소리만 늘어놓다가 중요한 순간에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친구들도 있다. 우리 곁에는 어떤 사람들이 머물러 있을까?

있을 땐 잘 몰라도 없으면 표가 나는 사람들, 순간 아찔하게 사람을 매혹시키거나 하지는 않지만 늘 언제 봐도 좋은 얼굴 넉넉한 웃음을 가진 친구들, 그렇게 편안하고 믿을 만한 친구들을 몇이나 곁에 두고 있을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가깝고 편안한 존재인지, 그러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싶다. 두드러지는 존재, 으뜸인 존재가 될 필요는 없다. 오래 보아도 물리지 않는 느낌, 늘 친근하고 스스럼 없는 상대, 그런 친구들을 곁에 둘 수 있었으면, 그리고 나 또한 남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우리 모두의 꿈과 사랑을 위해서, 행복한 내일의 삶을 위해서 ‘로드발’을 떠나야 할 때다. 혼자만의 안락과 평화가 아니라 지구상의 숨 쉬는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손에 손 잡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로드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로드발은 성서에 나오는 명칭으로 ‘목초 또는 목장이 없다’는 뜻이다. 너무 메마르고 쓸모없는 불모지라 살기에 적당치 않은 곳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허무한 어떤 것’을 비유할 때 쓰이기도 한다.

추측컨대 ‘요단’ 동편 ‘길르앗’ 지방에 속한 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 남쪽 13㎞ 지점에 위치한 ‘므낫세 지파’의 성읍이다. ‘요나단’의 다리 저는 아들 ‘므비보셋’은 이곳에 있는 ‘마길’의 집에서 은신하였다고 하며, ‘압살롬의 난’ 때 ‘다윗’도 이곳까지 피난한 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로데발’로도 불리는데, ‘드빌’과는 동일 지역으로 보인다. 이상은 ‘라이프 성경사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로드발은 오늘도 존재한다. 잘 보면 우리 주위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 우리를 꽉 잡고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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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고백을 버무려
어느 여인에게 바치는 노래
내게 영원한 햇살 비추어지기를 염원하면서....)

감추인 내 속엔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한
사내아이가 하나
또아리를 틀고 있었네

하여 안즉도 철이 덜 들었음을
정직히 고백하는 오늘,
회한 많아 분노 살아 숨쉬던
여리어 어린 그 아이의 넋
벗어나지 못한 채
언뜻 공유하고 있는
차별에의 아픈 상채기,

항시 목마른 역사
문제는 문제가 아닌 걸,
문제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감은 눈만 있을 뿐인 걸,

얼마간의 긴 시간 흐르다가
그제사 난 깨달았네

부끄럼을 많이 타는 난
이윽히 두 눈알 빼들고
비인 들판 침묵의 땅에서
사랑으로 섰네

이젠 정작 나 자신이
로드발을 떠나야 할 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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