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동인지 형식이 아니고 단독 출판한 詩集으로는
林森의 첫번째 공식詩集으로서
92년3월20일 '도서출판 명보'에서 인쇄하였습니다.

처음 詩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의 作品을 총 망라하여
그 중에서 61편만을 선정한 詩集이며
序詩의 제목은 '정',
내용은 총 5개의 章으로 분류하여 엮었는데 순서대로
'序曲의 章' '發端의 章' '矛盾의 章' '追求의 章' '反省의 章'입니다.

고인이 되신 작사가 '박건호님'의 권두시가 처음에 있고
'박일송님, 이외수님, 정화석님, 최성현님, 박재우님'의 추천사가
'사색의 창을 열면서'라는 프롤로그에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林森,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가호성님'이 적어주셨습니다.

林森의 초기 詩風을 짐작할 수 있는 詩集입니다.
[ 도서출판 명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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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가 부쳐온 편지 *



시작노트

" 파도가 부쳐온 편지 " 詩作 note

서사시다. 바다와, 좌절과, 마지막 남은 희망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자 처절하게 염원하는 절규가 망라된 고백의 시다. 대저 바다의 너른 품을 보면서 희망 보다 절망을, 꿈 보다 한탄을, 그리고 내일 보다 어제를 떠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다만, 여하튼 당시의 필자는 마지막 삶의 끄트머리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었음직 하다.

그 시절의 그 감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뒤로도 필자는 삶이 힘겨울 때 마다, 살기가 벅찰 제 마다, 그 바다를 찾아 울분과 방황을 잠재우곤 한다. 이 시의 부제는 ‘86년 여름이 가는 충남 비인 앞바다의 가장자리’다. 미처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확실한 지명을 내세울 여건이 구비되지 못한 관계로 아마도 ‘비인 앞바다’라고 명명했던 것 같은데, 실은 충남 서천의 ‘춘장대 해수욕장’으로 지금은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바로 그 바닷가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어지면서 요즘은 수많은 피서객들과 방문객들로 여름 한 철에는 몸살을 앓고 있지만, 필자의 고독과 슬픔을 달래주던 그 시절에는 정말 호젓하고 인적이 흔치 않은 별세계였다. 교통편도 열악하여 비포장도로 이어진 길로, 서천에서 출발한 일반버스가 거의 1시간 남짓 가야 다다르던 한적한 곳, 그런데 근래에 가면서 시간을 재보니 서천 나들목으로 빠져서 불과 8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상에, 엄청난 격세지감이었다.

바로 그런 걸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예전에 필자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그리도 처절하게 고심을 하면서 선택을 강요받던 극적인 그 장소가, 아무도 찾지 않는 바닷가에서 홀로 묵상하다가 심사숙고 끝에 겨우 생로를 찾아 굽이길 걸어 어둠 뚫고 탈출한 그 소름 끼치던 누리가, 빗줄기를 막아주던 소나무 숲과 미친 듯 거세게 불어대는 바닷바람 앞에 서서 목이 터져라 울부짖던 역사의 현장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천천히 승용차에서 내려 바다생선으로 식사를 하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며 커피 한 잔으로 과거를 추억하다가 여유롭게 돌아나오는 필자의 늙어터진 몸뚱아리에, 이미 당시의 좌절이나 고통은 그림자도 없다. 젊음의 고뇌나 번민을 기억해내야 할 하등의 이유도, 그렇게 또 다른 사연을 이어가야 할 줄거리의 연결도 필요치는 않지만 왠지 모르게, 현실의 도피나 피안을 동경해 찾는 그 바닷가가 필자를 더욱 심란하게 만드는 적도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정녕 이렇게 나이만 먹어 가는 건가? 소중한 추억도, 뼈저린 상념도 없이 그저 밋밋하게, 감정의 격동 없이 늙어가는 게 진정 잘 사는 길인 건가? 답을 모르겠다.

아무려나, 시간이 되면 그래도 잊지 않고 발걸음은 그리로 향하곤 했는데, 올 해 여름은 무엇이 그리 번잡한지 도통 짬이 안 났다. 이미 여름이 다 가고 있는데, 가을은 하마 요만큼 앞에서 알짱거리기 시작했거늘, 남들 다 가는 피서도 못가고, 그저 막연한 일상과 부담에 쫓겨 도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단순한 업보라고 부르기에는 퍽도 야속하고 무심한 세월의 숙제가, 참 모질게도 들러붙어 필자의 나날들을 헤집는다.

조바심은 나지만, 혹여 그 새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안 되고, 얼추 갈무리 되는 시점 오면 영락없이 일탈을 감행하고야 말리라는 다짐으로 우선은 치밀어오르는 조급함을 억누르는 오늘이다. ‘내 아픔을 기억하고 있는 바다여! 은근한 위로와 격려의 멧세지를 가슴에 품고 필자를 기다리고 있어다오. 내 힘 떨어져 넘어지려 할 때 얼른 달려가 그대에게 몸 기대이리, 그리고 편히 쉬리. 그대가 쥐어주는 백사장 모래에 누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절실하게 부르리. 다시 시작할 필자의 날을 위해.’

1941년 어느 날, 신경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에게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빅터 프랭클씨, 이민 비자가 발급되었습니다. 찾으러 오세요.” 때는 많은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던 시기였기에 유대인이었던 그에게는 생명을 보장하는 전화였다. 그러나 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비자는 자신과 아내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결국 노부모를 남기고 떠나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숙고 끝에 그는 미국행을 포기하기로 했다.

얼마 후 그와 아내, 부모님은 수용소에 끌려가고 만다. 뿔뿔이 흩어져서 머리는 빡빡 깎이고 죄수복에, 목숨을 연명할 정도의 음식만 먹으며 매일 극심한 노동에 시달렸다. 점점 몸이 망가져 서 있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지만 어딘가 살아 있을 아내와 부모님만 생각하면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오직 가족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는 결국 살아남아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와 다른 가족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지 않으며 어떤 고통과 시련도 견뎌 낼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내용처럼,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것처럼, 지금 필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의미는 사랑이 아닐까 싶다. 정말 힘들다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자. 예상치도 않았던 힘이 솟아나게 될 것이다.

비록 처해있는 환경이나 주어진 여건이 원만치 않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정말로 버겁고 거센 도전과 난관에 직면할 수도 있다. 역경이 너무나 크게 다가와 온 몸과 영혼을 집어삼키려 들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길은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진리를 우리는 남의 일로 여기고 간과할 때가 많다. 바로 자신에게 해당되는 진리인 것을. 바로 자신을 위하여 하늘이 지어준 명언인 것을.

18세의 어린 나이에 ‘골육종’이라는 뼈암 진단을 받은 캐나다 청년 ‘테리 폭스’, 그는 결국 다리 한 쪽을 절단하기에 이르렀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좌절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 있는 다른 암 환자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들을 위한 모금 활동을 하기로 했다. 모금의 방법으로 테리 폭스는 마라톤을 선택했다. 남은 한 쪽 다리와 의족에 의지해 마라톤을 시작했고, 무려 143일 동안 캐나다 대륙의 2/3에 달하는 5천373km를 달리는 기적을 이뤄냈다.

하지만 144일째 되던 날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 달리기를 중단했지만 2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는 순간까지 다시 일어나 달리겠다던 테리 폭스가 사망한 다음 날 캐나다 정부는 조기를 걸었으며, 국민도 함께 애도하며 조기를 달았다. 그가 떠난 직후 2,700만 달러였던 ‘어린이 암 연구기금’은 오늘날 6억5,000만 달러로 커졌다. 그리고 그의 뜻은 전 세계로 퍼져, 지금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60개국에서 ‘테리 폭스(Terry Fox) 달리기’ 행사가 열리고 있다.

테리 폭스가 좌절하고 병상에만 누워 있었다면,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에게 지금 물음표를 던져 본다. “지금 성공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Yes or No.” 답은 두 가지 중에 하나다.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는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했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앞은 볼 수 있으나, 비전이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우리 스스로가 아무런 희망이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 가장 불행한 삶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작은 도전이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시작이다. 바로 지금 도전을 시작하자.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한 대학에서 선언한다. “10년 이내 인간이 달 위를 걷게 하겠다!” 그러나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자 케네디는 그들을 불러 그 일이 왜 불가능한지 명확한 이유를 대라고 말했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의 지식과 연구결과를 총동원하여 ‘유인 우주선이 달 위에 착륙할 수 없는 이유’를 너무도 자세히 설명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더 많은 과학자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 ‘가능하다’고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비록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총격으로 암살당하지만, 그가 바란 대로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은 바위로 뒤덮인 달 표면의 ‘고요한 바다’에 인류 최초로 발을 내디뎠었다.

오늘 당신이 만난 누군가에 의해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 만나는 사람이 바뀌면,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도 있다. “자, 오늘 당신이 만날 사람은 누구인가?” 이 세상에 본래부터 위대한 사람은 없다. 단지 평범한 사람들이 일어나 맞서는 위대한 도전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도전들이 모여서 위대한 역사를 이룩해간다. 위대한 인류의 영원한 행보는 그렇게 이어져 갈 것이다. 바로 위대한 도전의 산물로 형성되어 갈 것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지은 ‘위대한 개츠비’는 세계 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이 소설은 1922년 미국 ‘뉴욕’과 ‘롱아일랜드’를 배경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 무너져 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예리한 필치로 그린 소설이다. 중서부 출신의 ‘닉 캐러웨이’가 증권업을 배우려 동부 뉴욕 외곽의 ‘웨스트에그’로 건너와 이웃 저택에 사는 ‘개츠비’와 친구가 되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자동차 수리공 ‘윌슨’이 아내의 외도 상대이자 그녀를 죽인 범인이 개츠비라 믿고 저택 수영장에 있던 개츠비를 총으로 쏴 죽인 뒤 자살을 하고, 조문 전보조차 보내지 않은 개츠비의 장례식이 결국 닉과 개츠비의 아버지 ‘개츠’ 씨 등 두세 사람만이 참석한 채 쓸쓸하게 치러진다는 결말의 이야기 까지 보면서, 어쩌면 이 소설이 왜 이렇게 위대하다고 평가받는지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소설이 던지는 여러 물음은 결국 하나로 요약된다.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소설의 시점과 형식상 닉 캐러웨이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겠다. 그는 ‘톰’의 대학 동창이자 ‘데이지’의 먼 친척임에도 출신 성분(서부 출신으로 출세를 위해 동부로 옴)과 내적인 성향에 있어 개츠비 쪽에 가깝다. 이런 그의 눈을 통해 보아도 개츠비는 알쏭달쏭한 인물이다. 한 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인간형인 것이다.

폐 일언하고, 개츠비는 정녕 순수와 낭만의 화신인가? 가령 헤어진 지 오 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미 유부녀가 된 ‘옛 여자’ 주변을 부나비처럼 맴돌고, 그녀의 남편까지 동석한 자리에서 어설프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비상식적일 뿐더러, ‘뷰캐넌 부부’의 반응을 고려한다면 애처롭고 우스꽝스러운 행위다. 그의 최후 역시 비극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처구니 없다. 이 경우에는 동정도 이래저래 톰의 희생양이 된 자동차 정비공 윌슨에게로 가는 것이 더 마땅하리라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개츠비는 그 정체가 드러날수록 ‘신화’가 아니라 ‘희화’가 된다. 속물들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큰 저택과 많은 옷과 가구를 소유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활 계획표’를 짜가며 아등바등 애면글면 살았던, 심지어 어두운 일도 서슴지 않았던 바보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럼에도 개츠비란 인물이 정녕 위대한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동시대의 다른 작가, 가령 ‘헤밍웨이’나 ‘포크너’와는 다소 다른 무게감을 주는 피츠제럴드 역시 수수께끼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는 단언컨대 위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묘사해 낸 부나비 같은 우리 삶의 풍경을 보자. 밤마다 개츠비의 저택을 장식하는 불빛과 재즈 소리, 이른바 ‘개츠비 룩’으로 단장한 미녀들의 현란한 춤, 무도회가 끝난 뒤 수북이 쌓이는 오렌지 껍질... 이것은 비단 1920년대(재즈의 시대), 대공황 직전의 미국의 풍경만은 아니다.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우리는 무작정 소비하고 향유하며, 무작정 어리석은 꿈에 젖는다. 이 질펀한 향연의 끝은 ‘웨스트에그(신흥 부촌-개츠비의 저택)’와 ‘이스트에그(토착 부촌-뷰캐넌 부부의 저택)’ 사이, 즉 ‘재의 계곡’이 아닐까 모르겠다.

혹시 아직 이 소설을 접하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조심스레 강추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대하다는 정의가 어떤 것이며, 우리는 왜 개츠비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야 하는지를 소설 속에서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현실의 삶에 어떻게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인용할 것인가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위대한 진리를 어떻게 새롭게 재조명해서, 효과적으로 각색해서, 현실의 이야기로 변화시키고 적응시킬 것인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과연 돈 앞에서 도덕적 존재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화두이며 궁극점이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개츠비를 쉽게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 더욱이 개츠비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파티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사망 소식을 알리지만, 아무도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이 없는 현실에 크게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사실. 돈이 없어지면 불행하게도 결국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열심히 돈을 벌었지만 결국 몸과 마음은 상처 뿐일진대, 돈이 가져다 준 행복과 더불어 밑바탕에 깔려 숨어있는 또 다른 삶의 공허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의 목적은 돈이 아닌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잃고 허상만을 쫒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면, 이 소설의 작가는 이미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위대하게 되는 비결을, 마치 마술처럼 알려주게 된 거니까 말이다.

이젠 정말 새벽으로는, 잠결에도 이불자락을 슬그머니 끌어당기게 되는 계절의 전환점에 있다. 이 여름은 이제 이렇게 보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주머니 속으로, 방 안으로, 가까운 곁으로 가을을 불러들이자. 가을의 숨결과 더불어 호흡하고, 가을의 생각과 함께 숨을 쉬면서 가을로 가자. 가을이 되자. 그리고 가을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자.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경이로움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가슴 안에 느낌표를 잊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슴 안에 잠들어있는 느낌표를 깨우자. 따스한 가을의 햇살 한 줌에, 길 가에서 우연히 본 아이들의 미소에, TV나 신문에서 본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들에 감동하는 가슴이 되자.이 세상 전부를 얻는다 해도 자신의 영혼에 느낌표가 잠들어 있다면 아무런 행복도 얻을 수 없다. 소중한 것은 언제나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필자는 간절히 바란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 언제나 따스한 애정의 숨결을 불어넣어 “아!” 하는 감탄사를 연발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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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은 유난스러이 추웠었지.
어둠 깃든 밤바다의 울음 소리가
마음 만큼이나 서글픈 목소리로
솔밭가를 서성거렸고,
새벽이 올 때 까지
쥐어뜯은 가슴팍에선
새빨간 피가 분수 되어
바다로 바다로 흘러들었지.

신마져 배신해버린
조잡스런 인간들을 줏어모아
삶이랍시고 주어진 일과는 바로
죽어 나자빠지는 연습
그 뿐이었고,
이토록 보고 싶은 햇살을 도둑맞아
바짝 말라버린 하늘 끄트머리에서
몸부림 하며 떨어져내리는
검정 색깔 모래들은
칼날 바람 되어
몸뚱이를 다섯 토막이나 날려버리고
외다리만 버티고 서서 그래도
새벽이 다 가도록
바라보는 눈에선
더운 눈물이 흘러 내렸지.

희끗한 머리카락을
온통 풀어 헤치고
뻘 속으로 기어들어,
나를 외면한 하늘따위야
없음이 나으리란 신앙은 남아 있었기에
결국
깊이 깊이 대가리 쳐박고
한 입 가득 절망을 삼켜 그렇게
동맥을 끊어보곤 했었지.

내일쯤 해서
모가지가 성하여 혹여
숨결이 남아진다면,
어디에선가 나만을 기둘릴
그 여인을 찾아 나서야지.

손가락 마디에 불을 댕겨
암흑을 몰아버리며
차라리 물귀신으로 남고만 싶었던
그 해 여름은 참
지독히도 추웠었지.

[ 86년 여름이 가는 충남 비인 앞바다의 가장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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