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1집. 그대와 같이 부르는 이 사랑의 노래 있는 한"
동인지 형식이 아니고 단독 출판한 詩集으로는
林森의 첫번째 공식詩集으로서
92년3월20일 '도서출판 명보'에서 인쇄하였습니다.

처음 詩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의 作品을 총 망라하여
그 중에서 61편만을 선정한 詩集이며
序詩의 제목은 '정',
내용은 총 5개의 章으로 분류하여 엮었는데 순서대로
'序曲의 章' '發端의 章' '矛盾의 章' '追求의 章' '反省의 章'입니다.

고인이 되신 작사가 '박건호님'의 권두시가 처음에 있고
'박일송님, 이외수님, 정화석님, 최성현님, 박재우님'의 추천사가
'사색의 창을 열면서'라는 프롤로그에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林森, 그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가호성님'이 적어주셨습니다.

林森의 초기 詩風을 짐작할 수 있는 詩集입니다.
[ 도서출판 명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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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자 일기 *



시작노트

" 생존자 일기 " 詩作 note

비교적 오래 전에 지은 시다. 아마도 스물 하고도 예닐곱 해는 더 묵은 것 같다. 당시에 이런 저런 일로 필자의 심리상태가 몹시도 불안해서, 마치 시한부라는 선전포고를 들은 것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었음 직 하다. 어쩌면 내일이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과 불안심리는 그 시절 필자의 삶을 꽤나 피폐하게 만들었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마지막 남은 소망자락을 움켜쥐고 발악을 하듯이 현실을 극복하여 헤쳐나갔던 가슴 저리는 추억이 있어, 지금에 와서 돌이켜봐도 퍽 안타깝고 우울하다.

늘 고백하는 거지만 대체 산다는 게 뭔지, 즐겁고 행복한 삶의 얼굴은 왜 유독 필자에게만 외면하면서 그리도 인색하게 굴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원통하다. 그러니 어쩌랴? 그렇게 본의 아닌 투쟁과 고난으로 점철된 험난한 여로였을망정, 그것들이 모두 모여서 이룩한 줄거리가 바로 귀하고 소중한 필자의 한 평생 삶이었던 것을. 어느 한 시절의 삶이라도 그저 헛되이 버려서는 안 될 주옥같은 이야기들이었던 것을.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결국은 오늘의 필자를 빚어낸 원동력이며 근본이었음을 익히 알기에 그냥 그 모든 아픔들을, 슬픔들을 뭉뚱그려서 가슴 속 깊이로 묻어버린다.

‘백세 인생’이라는 신조어가 낯설지 않게 여겨진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그리고 요즘은 그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각종 과학적인 데이터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울러 사람의 수명을 늘리게 하는 여러 가지 의약품이나 도구들이 속속 발명되기도 하고, 갖가지 운동법이나 건강관리 요령들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의 관심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목하 새로운 세상은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의 전성기로 열리고 있나 보다.

그러니 그 연령대의 대열에 슬쩍 한 다리 걸친 필자도 결사적으로 급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그다지 꼴사나운 짓거리는 아니리라. 아무튼 우리에게 남겨진 삶의 여분은 예측컨대 무지무지 길지도 모르는 것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제 2의 인생을 살기 위한 설계와 기획에 심사숙고해봐야겠다. 그러자니 이제부터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제법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농담 삼아 건네는 덕담 중에 기분좋게 감칠 맛 나는 내용이 있다. “정말 재수 없으면 당신은 백오십까지 살 지도 몰라요.”하는 말이다. 맞다. 필자도 정녕 재수가 아주 없을 지 누가 알겠는가?

어제의 시간이 흘러가고, 오늘이 어제로 지나가고, 내일이 오늘로 바뀌는 과정 속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교체된다. 쉼 없이 변하는 지금이라는 시간에 우리는 많은 의미와 진리를 부여한다. 그렇게 발전하며 상생하며 우리는 역사를 이어왔다. 또한 이 엄청난 세월의 축적에서 탄생된 문명과 자존의 가치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증명하며 시간을 압도해왔다. 그렇게 시간은 우리들의 도구였고 기록이었으며 내일로 향하는 교두보였다. 앞으로도 변치않는 진실을 우리에게 열어줄 시간의 이름이, 우리를 영원으로 이끌고 있다.

한 노신사가 시장 한구석에 서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노신사는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로 알려진 ‘새뮤얼 존슨’이었다. 큰 명예와 많은 제자의 존경을 받는 시인이 왜 시장 구석, 땡볕 아래 서서 울고 있는 것인지 사람들은 궁금했다.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달려와 이유를 물었다. “스승님, 어찌 된 일입니까? 혹시 무슨 큰 변고라도 생긴 겁니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러자 새뮤얼 존슨이 제자들에게 대답했다.

“사실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는,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낡은 책을 팔며 장사하던 곳이었네. 어느 날 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다고 나에게 하루만 장사를 해달라고 했는데, 나는 가난한 장사치인 아버지의 모습이 부끄러워 거절했다네.”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이어서 말했다. “사실 그날 아버지는 심각하게 몸이 좋지 않았는데, 이후 병치레를 하다가 끝내는 돌아가시고 말았네. 오늘 그 때의 기억이 생각나서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네. 그 날로 돌아가 아버지 대신 내가 나갈 수만 있다면 이런 명성도 다 포기할 수 있건만...”

모든 후회는 괴롭다. 그리고 항상 조금 늦은 감이 있다. 이 괴로운 후회를 통해서 사람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후회스럽지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면 그 사람의 삶을 바꾸는 큰 계기가 생길 것이다. 후회해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있지만 후회한다고 이미 늦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후회를 거듭하면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후회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완성된 결과나 완전한 결론을 바란다는 건 욕심이다. 언제나 조금은 모자란 미완성의 모습이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의 모습이다. 그래야만 더 나은 결과를 위한 도전이나 노력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미완성이라고 하면 누구도 쉽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미완성이기에 때로는 더욱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다.

‘가곡의 왕’이라 불리며 ‘마왕, 송어’ 등을 작곡했던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는 몇 건의 미완성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교향곡 제8번 b 단조’의 ‘미완성 교향곡’이다. 보통 교향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지만 슈베르트가 25세에 작곡을 시작한 미완성 교향곡은 3악장 중간에서 끝난다. 작곡을 시작하고 요절할 때까지 6년이란 세월이 있었고, 그 사이 다른 걸작품도 많이 완성한 슈베르트가 이 곡을 왜 끝까지 미완성으로 남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작품은 미완성인 상태로 완전한 걸작으로 칭송받고 있다. 여백의 미를 알고 즐길 수 있는 우리 한민족은 오히려 이런 미완성 작품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모자라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완성되고 완전한 것에서 얻으려고만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빈 터에 씨를 뿌리고 꽃을 피워 그 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마음, 바로 그 마음을 통해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모든 미완성을 괴롭게 여기지 말자. 미완성에서 완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은 일부러 인간에게 수많은 미완성을 내려주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꼭 아름답지만은 않다. 하지만, 진실한 아름다움은 외부의 어떤 조건이나 보여지는 현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추어지고 숨겨진 어떤 그늘로부터 조용한 몸짓으로 싹터 오르는 그림자에서 시작된 작은 기적, 우리는 비로서 아름다운 꿈을 발견할 수도 있고, 정작 커다란 행운이나 행복의 결과를 만들어낼 소중한 씨앗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묘하기에 삶은 어쩌면 더 멋지고 싱그러운 건지도 모른다.

인천지법의 ‘심재완’ 판사는 하루가 꽤 바쁘다. 판사의 업무 이외에, 길거리에서 접착제 흡입의 위험성을 알리는 유인물을 나눠주는가 하면 청소년들이 쉽게 접착제를 사지 못하도록 캠페인을 하고 있다. 심지어 접착제 제조공장을 찾아다니며 환각 물질 성분인 ‘톨루엔’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설득하고 있다. 바쁜 업무로 매일 피곤한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심재완 판사는 왜 귀한 시간과 노력을 이곳에 쓰고 있을까?

그동안 수많은 재판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사채업자나 조직 폭력배에게 빚 독촉을 당하는 청소년부터, 부모에게 심한 폭력과 학대받는 청소년도 만났다. 대부분은 그렇게 세상에서 방치되다가 결국 환각물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등학생도 접착제를 흡입하다 법정에 끌려와요. 청소년 접착제 중독이 유행처럼 퍼져 있어요. 상태가 아주 심각합니다.” 자신이 겪은 수많은 청소년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심재완 판사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본인이 직접 나섰다. 먼저 청소년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접착제 흡입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년 반 만에 인천 지역의 접착제 범죄가 10분의 1로 줄었다. 하지만 심재완 판사는 앞으로도 더 많은 청소년이 접착제 흡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판사라는 직업은 세상의 어두운 면을 자주 바라본다.

심재완 판사도 어린 청소년들이 혼란 속에서 잘못되는 모습을 봐야 했지만, 그 모습을 바꾸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스스로 노력했다. 이같이 따뜻한 사명감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당연히 존경받으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닌 사명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책무는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가장 기초적인 사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봉사와 관심의 사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정체를 감추고 있던 슈퍼히어로처럼 등장해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는 암행어사의 멋진 모습을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익숙하게 보아왔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멋지게 나오는 암행어사들의 활동은 고생스럽기 짝이 없는 고된 일이었다. 임금이 직접 내린 암행어사 업무지침서인 사목은, ‘도남대문외개탁(到南大門外開坼)’이다. 즉, ‘숭례문’을 나가 한양을 떠나기 전까지는 열어보지도 못해 자신이 살펴야 하는 감찰지가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길을 떠나야 한다.

철저히 신분을 감추고 사람들 속에 숨어 감찰을 진행했는데, 혹여 감찰 대상인 지방 관리에게
정체가 발각된다면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유명한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는 암행어사 시절 처벌한 관리들의 미움으로 인해, 훗 날 정치보복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 33년(1896년)’ 74세의 ‘2품 암행어사 장석룡’의 보고서를 끝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암행어사는 백성들이 삶 속을 직접 들어와 낮은 자들의 설움과 굶주린 자들의 고통을 직접 살핀 사람들이었다.

1822년 ‘평안남도 암행어사 박내겸’의 일기 중에 나온 내용이다. “평양 관찰사의 잔치를 구경하다가 몽둥이를 들고 온 감영 아전들에게 백성과 함께 쫓겨났다.” “관청으로 들어가 굶주린 자들을 구하기 위한 죽사발을 받아들였다.” 백성들의 삶에 깊이 들어가 고통과 슬픔을 보고 들었던 암행어사들은 바로 임금의 눈과 귀였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어디에 있어도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삶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헤아림은 비단 지도자들만의 덕목은 아니다. 우리가 배우자나 자식을 대할 때, 친구를 만날 때, 동료와 일을 할 때, 언제나 역시 그들의 눈높이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일상적이며 사소한 과정에서 보여지는 어두운 단면을 어떻게 느끼고 감수하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우리 삶의 본질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구태여 특수한 어떤 상황을 만들어 거기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듯이 자연스러운 접촉과 인간관계에서 가장 원초적인 교류와 만남이 성사되어지는 것이다.

16살 소년 ‘보얀 슬라트’가 ‘지중해’에서 스쿠버다이빙을 즐기고 있을 때 물 속에 물고기들보다 비닐봉지가 더 많이 떠다니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24살이 된 보얀 슬라트는 바다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젊음을 다 바치기로 했다. ‘태평양’ 수면에는 자그마치 한반도 넓이의 7배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양의 쓰레기 섬이 한데 뭉쳐 떠다니고 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쓰레기 섬이 아직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보얀 슬라트가 18세에 설립한 비영리단체 ‘오션 클린업(The Ocean Cleanup)’에서는 길이 600m에 달하는 해양 쓰레기 수거장치를 태평양에 설치하였다. U자 모양의 이 장치는 수심 3m까지 늘어트린, 물고기가 걸리지 않는 특수 막으로 쓰레기를 수거한다. 이 장치가 태평양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모으면 태양광 에너지를 사용한 센서를 통해 위치를 파악하여 선박으로 수거한다.

보얀 슬라트는 이 수거 활동을 지속해서 확대하여 해양 쓰레기의 50%를 청소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수십억 명이 넘는데 치우는 사람은 너무도 적기 때문이다. 60억 명의 무관심을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길 수 있을까? 쓰레기 섬을 만든 장본인은 어쩌면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 긴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저질러 버린 이 엄청난 비극을 그냥 상식적으로 해결하기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변명하며 외면하는 것은 그저 무책임하고 비겁한 일이다.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조금 덜 쓰고, 조금 덜 버리고, 조금 더 신경 써서 분리수거를 잘하면 된다. 생각 외로 간단하고 극히 기본적인 일이다. 과연 사람은 언제 가서야 자연을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제압하고 폭행하고 파괴하는 일을 그만둘 것인가? 그것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비수를 꽂는 결말을 만들게 된다는 뻔한 진실을 도대체 어느 때가 되어야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하게 될 것인가?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다.

‘갈릴리 바다’와 ‘사해’는 같은 물줄기에서 형성된다. 그 맑고 시원한 물줄기는 ‘헤르모 산’에서 흘러내린다. 갈리리 바다는 하구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정경을 이루는 이 바다는 물을 내준다. 물줄기가 갈릴리 바다에서 모였다가, 하구를 통해 다시 흘러나가 ‘요르단 평원’을 비옥하게 한다. 한편, 사해 바다는 똑같이 맑은 물줄기에서 물을 받지만 외따로 떨어져 있다. 사해에는 하구가 없다. 그래서 사해는 물을 내보내지 않고 그대로 갖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타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도 두 바다와 똑같이 처신한다는 점이다. 이타적인 사람은 내주고 그 너그러움으로 풍요로워지지만, 이기적인 사람은 갖고 있기만 해서 외따로 썩게 된다. 마음이 너그럽고 풍요로우려면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기쁨과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무의미한 삶의 모습으로 그냥 태만하고 생동감이 없는 타성의 삶을 살아간다면 언제까지라도 아무런 기쁨이나 보람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어머니가 어린 소녀에게 저녁식사에 사용할 감자를 가져다 달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자 어린 소녀는 그 중에서 제일 작은 감자를 골라서 가져왔다. “얘야, 왜 작은 것만 가져 왔니?”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제일 작은 것들을 먼저 다 먹으려구요. 좋은 건 아껴두었다가 먹는 게 좋겠지요. 그래야 나중엔 제일 크고 좋은 감자를 먹을 게 아니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작은 감자를 다시 창고에 쏟으면서 말해주었다.

“얘야, 그러면 우린 매일 작은 감자만 먹게 되는 것을 모르니? 오늘 먹을 감자는 제일 좋은 것을 고르렴. 그럼 매일 제일 큰 감자만 먹게 될 것이란다.” 하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중에 뭔가 큰 것을 주어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랑법이다. 서로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나중에까지 남겨 두는 것은, 결국 제일 작은 것을 지금 주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미래에 최선의 것을 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최선의 것을, 항상 최선의 것을 골라 서로에게 주려고 한다면, 우리는 매일 최선의 것을 즐기고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은 지금 바로 해야 한다. 그것이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통상 사물의 가치를 어떤 기준에서 평가할까? 현대의 물질 문명에서는 물론 금전의 가치로 사물을 평가하게 된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대부분 금전의 가치가 먼저 잣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사물과 사람의 가치는 물질로 평가될 수 없다. 길가에 핀 들꽃은 물질적 가치는 사소하겠지만 우리에게 추억과 아름다움의 여백을 채워주는 면에서는 그 무엇보다 가치가 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의 잣대로 보면 값비싼 보석보다 더욱 값진 것이다. 사랑의 가치를 금전으로 잴 수 없듯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 가치의 잣대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물질의 평안은 결코 삶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가 고픔에도 물질에 초연하라는 것은아니다. 물론 물질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될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넘친다고 꼭 행복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흔한 말로 조금 더 편할 뿐이다. 아니, 어쩌면 더 불편할 수도 있다. 넘치게 갖기를 원하는 것은 즉, 욕심이니까 말이다. 욕심에는 만족이 없는 법이다. 아무리 귀한 것도 너무 많으면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법이며, 아무리 객관적으로 가치 있게 평가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쓰임새에 따라 그 가치가 재평가 되는 것이다.

100원을 100만원처럼 사용할 것인가, 100만원을 10원어치의 가치보다 못하게 사용할 것인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을 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가늠이 되어질 것이다. 그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또 속해 있는 것들 중의 하나로 예를 든 것일 뿐, 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들의 가치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무한하다 생각한다. 시간이 그렇고, 생명이 그렇고,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피상적인 것으로까지 그 모든 것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느냐는 아마도 삶의 주인인 각자의 몫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가끔 필자는 가까운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되지?” “밥만 먹여주면 되지?” 하고 말을 하고 나서 서로 마주보고 웃곤 한다. 더 가치있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은 단적으로 결론을 지을 만큼 그리 순진하고 단조로운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종합적이고 복잡다단한, 마치 실핏줄처럼 세밀하고 신비한 그물망으로 짜여져 있는 회로를 하나씩 이어나가는 고단한 작업이 바로 삶의 여정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 진정으로 기쁘고 환희에 찬 축복이라 여기면서 주어진 나날들을 감사와 겸손으로 메꾸어가는 작업, 씨줄과 날줄을 기묘하게 엮어나가는 그물코 작업과정처럼, 우리는 오늘 하루도 조심 조심 한 걸음씩 내딛는다. 기왕지사 살아있는 목숨, 활기찬 소리를 울리는 우리의 심장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진력을 기울인다. 그렇게 오늘이 가면 다시 내일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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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가고 있다
이미 통고받은 그 날짜를 채우려
한 발씩 한 발씩
다가가고 있다

시한부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하고
내 목 죄는 생명은 성큼
학 걸음걸이

산다는 것이,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이,
이다지 황홀한 기쁨임을 왜
진즉에 알지 못했는가!

저 밝은 햇살이,
찬 밤바람이,
노래하는 새와 시냇물이,
눈 부라리던 이웃들이 모두
내 사는 보람이었음을

가장 화려한 것이
가장 초라한 것의
또 다른 얼굴이었음을

나는 죽어가고 있다
어쩜 오늘 밤
화들짝 죽어자빠질 지도-
좀 더 살고 싶어!
더 좀 살고 싶어!
아주 조금쯤이라도,
그게 더 라면

나는 잠을 자지 못한다
이불 자락을 움켜 쥐고
동공 잃은 눈만 껌뻑거리며
나 살아있음을 듣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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