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빗속의 해후(邂逅) " 詩作 note

정말 덥다. 며칠 째 이어지는 열대야에, 그렇지 않아도 짧은 여름밤을 거의 뜬 눈으로 지새우기 일쑤다. 그러니 한낮에는 의례 꺼뻑거리며 졸기도 자주 하고, 마치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늘어진 닭벼슬처럼, 기운을 못차리고 비실댄다. 불쾌지수도 극에 달해 툭하면 짜증을 내고, 이웃끼리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도 퍽이나 잦다. 그야말로 여름의 더위대란이다.

그래도 이따금씩 내려주는 소나기나, 장마 뒤끝에서 엉절거리는 빗가락 덕분에 물구경이라도 하는 날에는, 조금은 폭염을 달래보기도 하면서, 겨우겨우 올 여름과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즈막이 실로 가엽다. 그렇지만 이제 얼마 안있으면 필경 이 더위가 가고 바람 솔솔 부는 가을 오리라. 종착역이 없을 듯 기승을 부리는 이 지겨운 뙤양볕도 슬슬 힘을 잃어버릴 날 머지 않으리라. 그 희망 있음에 우리가 산다. 억지로라도 웃음 지으며 서로를 보듬는다. 그게 인정이다. 그게 인심이다. 그게 바로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고, 오늘 헤어지면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 있을 터, 슬픈 일 뒤에는 기쁘고 행복한 일도 더러 찾아올테고, 불편하고 버거운 몸뚱아리에도 생기가 깃들어 건강 되찾는 소망의 내일 기다리고 있을테니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 삶의 조화라는 것이,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한결같이 신비롭고 오묘하다. 차마 예측하기 힘든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미래에서 슬며시 모습 숨기고 손짓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러운 삶의 행보마다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오늘도 햇살을 본다. 하늘을 마주한다.

오늘이 있음에 감사한다. 새 하루가 열렸음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어제까지의 실수와 실패를 딛고 일어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 눈물겹도록 기쁘다. 그렇게 시작하는 오늘이라는 제목 위에 진심을 모아서 미소를 보낸다.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하고 부지런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해 농부가 무를 심었더니 농사가 어찌나 잘 됐는지, 커다랗고 튼실한 무들을 많이 수확하게 되었다.

농부는 이 모든 것이 고을을 잘 다스려주는 원님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수확한 무 중 가장 크고 튼실한 것으로 골라 원님께 바쳤다. 원님은 농부의 진실된 마음을 무엇으로 보답할까 생각하다 마침 큰 황소 한 마리가 있어 이를 농부에게 보답의 뜻으로 주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다. 그리고 평소에 욕심 많던 한 농부도 알게 되었다. 그는 착한 농부가 무를 바쳐 큰 황소를 얻었으니, 본인은 원님한테 황소를 바치면 더 귀한 것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

황소를 받은 원님은 그 보답으로 무엇을 줄까 고민하였다. 그래서 지난 번에 착한 농부가 가져다준 무를 주었다고 한다. 욕심은 끝이 없다. 하나를 가지면 또 다른 하나를 가지려고 온갖 욕심을 부린다. 하지만 그 하나는 눈앞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이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의 하루는 어제보다 훨씬 행복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아침 시간에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감사라는 단어다. 그리고 하루 종일 머리 속으로 되새기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감사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가장 축복받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고 말한 ‘C. 쿨리지’의 충언을 잊지 않으려고 반복해서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진실한 감사의 교류야말로 진정한 인간관계의 핵심이며 기본이다. 감사는 겸손과 겸양을 뒷받침하는 인륜의 원천이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사람은 아니다. 사람답게 사는 사람, 사람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의 행적이 이루어지고, 제대로 그려진 삶의 궤도가 성립될 수 있다.

상투적이지만 지루하지 않은, 쉽게 여겨지지만 결코 수월하지만은 않은 마음의 조화가, 때론 우리를 참으로 사람이라는 본분에서 벗어나는 실수나 처신을 저지르게 하기도 하고, 지난 일을 후회와 반성의 파노라마로 탈색시키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선택한 기회와 조건이 때로는 족쇄가 되고, 발목을 잡아 넘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늘 조심하면서 우리의 여정이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래 전 ‘아르헨티나’에서, 출산한 지 얼마 안된 신생아를 한 강아지가 자신의 우리 안에 데리고 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자초지종을 살펴보니 강아지는 버려진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기를 자신의 우리로 데려왔고, 자신의 새끼들과 함께 두어, 아기가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돌봐줬던 것이다. 미혼모에 의해 버려진 신생아로 밝혀진 아기는 강아지 덕분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우리가 미물이라고 여기는 강아지이지만 감히 추측할 수 없는 큰 일을 한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무어라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일어났을 때 현장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많은 구조견이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희생당한 구조견들을 위해서 기념비까지 제작되었다고 한다. 강아지도 생명이 귀한 것을 안다. 하물며 사람일진대, 한 생명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모든 생명에 대해서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모두의 속내에 깃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명경시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현대사회에 울리는 자그마한 경종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생명은 둘도 없이 귀중한 것인데도,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이 생명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진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과연....” 이라고 표현했다. 필자의 감사의 마음이 닿는 인연의 끝에는 세상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와 책임을 귀하게 생각하는, 작고 소박한 믿음이 깔려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사람들과 무수한 인연을 이어간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시 만나짐, 반가운 해후와 원치 않은 만남의 굴레, 그렇게 연결되어지는 각종 운명의 끈이 얼기설기 엮여진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혼란스럽게 꼬인 매듭을 풀지 못해 헤매기도 하지만, 혹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와 주변의 지원으로 암담하던 매듭이 술술 풀려지기도 하는 행운을 맛볼 때도 있다. 모든 세상만사가 새옹지마처럼 돌고 도는 것이라, 윤회의 어디 쯤에 지금 서있는가를 파악하기 보다는 항상 최선을 다한다는 삶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처해진 환경을 탓하고, 풍족하지 못한 여건을 원망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불평불만을 일삼는다고 해서 다른 상황이 펼쳐질 리는 없다. 세상에는 자신 보다 못한 여건에서 훨씬 멋진 성공을 이룩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한탄할 시간이 있으면, 아래를 향한 마음가짐으로 감사를 심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성공으로 향하는 문은 제대로 눈을 뜨고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열리게 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맞은 편 회사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어느 샐러리맨의 고백이 눈길을 끈다. - 저는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항상 일이 많아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무실 맞은 편 건물의 같은 층에도 항상 우리처럼 일이 많은지 야근이 잦은 회사가 있었습니다. 고작 5m쯤 떨어진 곳에 창문이 뚫려 있다 보니 블라인드가 설치되어 있어도 서로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말없이 일하는 우리와 달리 맞은 편 회사 직원들은 끊임없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끔 점심시간에는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와 큰 웃음소리가 창을 뚫고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회사 보다 훨씬 자유분방하고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희 직원들도 어느새 대리 만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희와 마찬가지로 항상 야근과 업무에 시달렸는데,어째서 맞은 편 회사 직원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을까요?

그러던 작년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저는 밀린 업무로 인해 쉬는 날이지만 잠시 출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맞은 편 회사 사람들도 출근했더군요. ‘너희도 참 힘들겠다!’ 생각하며 일을 시작하는데 저 쪽 사람들이 창문에 달라붙어 뭔가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저는 창문으로 가서 보았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힘냅시다!’ 라는 글자가 붙어있었습니다. 저에게 보내는 행복한 메시지 같았습니다. 정말 그것은 제가 본 가장 멋진 창 밖 풍경이었습니다. -

늘 어려운 상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가짐이 감사와 긍정으로 바뀐다면 삶이 바뀔 수 있다. 어려운 공식이 아니다. 다만 알고 있으면서도 가볍게 여겨 행하지 않음이 원인이다. 자신 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며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마음가짐, 이것이 감사의 마음과 더불어 우리가 진실로 생각해야 할 삶의 팁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향하여 배려와 양보와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면 어찌 세상에 아름다움의 꽃이 피어나지 않겠는가?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일진대.

불치의 병을 앓게 된 남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 있었다. 남자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는 두 사람 앞에 놓인 가혹한 운명을 탓하며 절망했다. 그러나 슬픔도 잠시, 사랑에 대한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는 이내 아픔을 털고, 현실과 당당히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다니던 직장을 사직하고 그를 간호하는 데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렀다.

병실에 함께 있던 환자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회복해서 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병세가 악화되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한 달이라는 시한부를 판정받기에 이른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알려져서 그 둘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이 몰려왔다. 기자들의 질문은 이어졌고, 인터뷰 중간에 신문에 실을 사진을 찍자고 하자 여자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그녀를 잠시 밖으로 내보내고 기자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사진은 찍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의아한 기자들은 왜냐고 물었다. 남자는 대답했다. “제 여자 친구는 나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겠어요? 전 그녀가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행여 저와 찍은 사진으로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게 되면, 그래서 저와 사귀었던 명확한 과거가 생기게 되면, 그녀의 행복을 찾는 데 방해가 될 거에요.”

사랑이란 무엇일까? 고통스러운 죽음을 앞두고서도 남겨질 연인을 도리어 걱정하고,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는 게 사랑, 아닐까? 누구나 사랑을 할 자격이 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할 대상이 있다. 부모형제이든, 연인이든, 친구이든, 그리고 특별한 사연으로 이루어진 이웃이든, 우리에게는 사랑을 주고 받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과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해보자. 지금 곁에 있는 그에게, 혹은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해보자.

어쩌면 눈부신 여름날....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으로 넘쳐나지 않을까? “사랑은 눈 먼 것이 아니다. 더 적게 보는 게 아니라 더 많이 본다. 다만 더 많이 보이기 때문에, 더 적게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랍비 ‘줄리어스 고든’의 말이다. 진실한 사랑을 나누는 숭고하고 고운 마음 속에는 감사와 긍정의 에너지가 알차게 맺혀있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아름다운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인연의 생명이다.

그렇게 자라난 씨앗이 종국에는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열매를 선사한다. 삶의 행복은 어떤 조건이나 드러난 가치가 아니라, 내면에서 소중하게 살아 숨 쉬는 감사와 사랑이다. 조선 ‘숙종’임금은 밤중에 미복 차림으로 백성의 사는 형편을 살피려 미행을 자주 다녔다. 숙종의 미행은 언제나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허름한 작은 오두막집 앞을 지나는데,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양반들이 사는 기와집 동네를 지나면서도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에 숙종은 어리둥절하여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오두막집에 들어가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했다. 그 사이 숙종은 문 틈으로 방 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방 안에는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가 새끼를 꼬고 있었고 올망졸망한 어린아이들은 짚을 고르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빨래를 밟고 있었고, 부인은 옷을 깁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의 얼굴들이 모두가 어찌나 밝고 맑은지 도무지 근심 걱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숙종은 주인에게 물었다. “사는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이곳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더이다.” 주인은 희색을 띤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살아도 빚도 갚아가며,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가 봅니다.”궁궐로 돌아온 숙종은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집에 살면서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말에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다음 날 숙종은 신하를 시켜 어젯밤 그 집에 감춰진 재물이라도 있는지 조사해 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집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숙종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주인에게 전에 했던 말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부모님 공양하는 것이 곧 빚을 갚는 것이고, 제가 늙어서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게 바로 저축이 아니겠습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 밖에요.”

우리는 대관절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만족할 수 있을까? 돈이 많으면 과연 행복할 수는 있을까? 어느 정도 생활이 편리해질 순 있겠지만 부자는 더 큰 부자를 부러워하고, 더 큰 부자는 더욱더 큰 부자를 부러워할 것이다. 진짜 부자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을 기적이라 여기며 때때로 좋은 음악을 듣고, 향기로운 꽃에 매혹되는 사람,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소한 것으로 생각한 이것이 바로 행복이며, 어떤 부족함도 없는 마음의 진짜 부자인 것이다. 행복을 두 손 안에 꽉 잡고 있을 때는 그 행복이 항상 작아 보이지만, 그것을 풀어준 후에는 비로소 그 행복이 얼마나 크고 귀중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행복이 결코 외부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서 조심스레 빚은 반죽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야 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선물하는 첩경이라는 말이다. 행복의 조건은 절반의 현실과 절반의 꿈이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근본 재료가 감사와 사랑임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상담을 청한 어느 여성의 고백이다. - 오늘도 어김없이 빈 상자며 빈 병을 현관 앞에 내놓자마자 그 할머니가 다녀가십니다. 이 동네에 이사 와서 바로 오시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수년 째 마주치는 할머니입니다. 처리하기 곤란한 재활용품을 치워주니 고맙다는 생각도 들지만 남루한 옷차림의 할머니에게서 지저분함이 묻어올 것 같아 아이들에게 접근조차 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수년 째 마주치면서 인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빈 병, 빈 상자로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가 혹시나 다른 것을 요구할까 봐 하는 걱정이 앞서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그 할머니였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저는 앞뒤 상황을 알지도 못한 채 불편한 기색부터 드러냈습니다. “이거...” 할머니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나에게 할머니는 말했습니다. “아까 가져간 상자 안에 이게 들어있더라고, 이 집 거 같아서.”

정신없이 청소하다 흘린 만원이 빈 상자 안으로 들어갔나 봅니다. 나는 고맙기도 하고 측은한 마음도 들어 할머니께 말했습니다. “할머니 괜찮으니 그냥 쓰세요.” 그러자 할머닌 먼지로 뒤덮인 손을 흔들며 “아냐, 난 공짜는 싫어, 그냥 빈 상자만 팔면 충분해.” 하시며 만원을 내 손에 쥐여주곤 손수레를 끌고 떠나셨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누구보다 깨끗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하시는 할머니에게 그간 마음으로 쏟아부었던 온갖 생각들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본다. 그리고 판단한다. 우리는 들리는 이야기만 듣는다. 그리고 믿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하고,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까지 들어본 후에 판단하고 믿어야 한다. 적어도 사람을 판단함에서는 그래야 한다. 그래야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다. 그래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온다. 언제나 초심자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매 순간을 새롭고 신선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한 경지를 맛본다. 그처럼 피어오르는 존재의 큰 기쁨은 초심으로부터 온다. 편견 없는 마음으로부터 온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돋아나게 만드는 마음이 바로 초심이다.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이 바로 초심이다.

고고하게 홀로 피어있는 한 송이 꽃 보다 무리지은 들꽃이 더 아름다운 건, 그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고 뜨거운 가슴으로 서로를 위로하기 때문이다. 혼자 바쁘게 기어다니는 개미 보다 줄지어 행진하는 개미가 더 아름다운 건, 그들에겐 아름다운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정물화 보다 풍경화가 더 아름다운 건, 그 곳엔 어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어제 만났던 사람들이든, 그 전에 만났든 사람들이든, 다시 만나는 그들과의 모든 해후에 우리의 마음을 담자. 감사와 사랑과 긍정의 진심을 얹어 그들에게 전해주자. 그리고 기꺼이 나누자. 사랑과 감사와 긍정을 다시 만나는 해후에 실어보자. 주위의 사람들을 귀찮은 존재로 여길 것이 아니라 내가 정성을 다해 사랑할 대상으로 생각하자.

만나지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경쟁상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귀한 존재로 생각하자. 불안과 걱정으로 찌든 어제까지의 인간본능에서 벗어나, 참되고 활기찬 오늘의 건강 상태로 관계를 이끄는 것은 바로 진실한 사랑이다. 진정이 담긴 감사다. 그리고 긍정의 삶이다. 그런 마음의 가꿈이 필자가 새 오늘을 시작하는 이유다. 살아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