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1997년 10월 8일 인쇄된 詩集입니다.

다른 부제는 정하지 않고 그냥 분류만
22편씩 3개의 章과
14편 1개의 章으로 하였으며,
합계 80편의 詩가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클래식음악 감상문'이 7편 실려있습니다.

감상적인 내용의 詩가 가장 많이 포함된 詩集인데
이 詩集만 보아서는 평소의 林森의 詩風과는
다소 상이한 면모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 증인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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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밭 머리로 *



시작노트

" 갈밭 머리로 " 詩作 note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치고, 가을을 타는 남자에게 나이 제한은 있는 걸까? 혹시 60대 이상이라면 가을을 느낄 자격을 이미 상실한 건 아닐까? 가을이라고 해도 센치해지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걸까? 웬지 모를 조바심에 종종걸음 치면서, 가을의 끝자락을 붙들어 시절을 한탄하며 서있는 모양새가 거울에 비추어진다. 새삼 세월무상을 절감하게 되어 조금은 아쉽고도 섧다.

언제였던가? 필자도 가을이면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낙엽지는 공원에서 석양을 등지며 흠씬 감성에 젖던 시절이 있었다. 그 가을엔 더없이 그리워지는 누군가를 운명처럼 만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들떠 목적지도 없는 여행길에 올랐던 추억도 참 많다. 그렇게 허전하게 지는 가을이 아쉬워, 다시 올 가을까지도 못 기다리고, 주변의 모든 인연들에게 먼저 작별의 손짓을 보내고는 눈물을 흩뿌리던, 그러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애써 초연한 척 하던 객기의 방랑질도 퍽이나 잦았었다.

그렇게 필자의 가을은 무수한 사연과 기억을 열매처럼 매달고 왔다가는 이내 갔다. 우연과 필연의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인연에 매달려 눈물짓던 가을 밤, 별리의 가슴이라 파란 색으로 멍들어가는 숱한 불면의 밤들을 허공의 먼지인 양 헤아리며 필자는 그렇게 나이를 먹어왔고, 어언 지금은 황혼의 문턱에서 또 가는 가을을 바라보고 섰다.

이제 11월, 달랑 두 장 남은 달력같이 서늘한 감촉이 바람 속에서 묻어나는 걸 보니 영락없는 가을의 끝자락이다. 뒷산의 하양나무 숲 사이에서 바시락거리며 오르락 내리락 겨울채비에 여념이 없는 다람쥐와 청설모들을 문득 바라보면서도 옷깃을 여미게 되는 걸 보니, 미상불 필자도 슬슬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해야하는가보다.

무엇부터 해야 하나? 가을을 보내는 마음이 자못 부산스러운데 딱히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막연한 시선 끝에 걸리는 소회가 남다르다. 삶 가운데 앞으로 얼마나 더 가을의 끝을 마주하게 될까? 가을이라는 제목을 몇 차례나 더 필자의 시 속에 담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가을이, 짧지 않은 삶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가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과연 이렇게 맥없이 보내도 되는 걸까?

변변한 이야기 거리 하나도 미처 장만하지 못했거늘 어째서 이리도 가을은 짧기만 한 건지 야속하기 그지없다. 한 편으로는 가을에게 미안하고 짐스럽다. 제대로 계절을 누리지 못한 주변머리가 어쩐지 면구스러우면서도 겸연쩍다. 그렇더라도 다음에 다시 가을이 올 제는 단단히 작심하고 시절을 만끽해봐야겠다. 다짐을 하고 나니 조금은 위로가 된다. 비록 올 가을은 이렇듯 겅중겅중 보내버릴 터수지만, 내내 이어져갈 필자의 가을 이야기는 아직 다 끝나지는 않은 거다.

내년의 가을은 정녕 멋지고 환희로운 절정의 계절을 만들고야 말리라. 세상의 그 어떤 행복보다 찬란한 삶의 결실이 영글어, 진정 풍성함으로 넘쳐나는 최고의 계절로 빚어올리고야 말리라. 그래서 사랑과, 사랑과, 또 다른 사랑들이 끊임없이 이어져가는 가을의 이야기를 써보리라. 그래! 이제야 속이 좀 풀린다. 얼굴에 미소가 생겨난다.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거늘. 눈 들어 창밖으로 한껏 익은 가을을 떳떳하게 바라보자.

어느 잡지사에서 무작위로 대상을 정하여, 가을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어떤 거냐는 질문을 했더니 ‘단풍, 낙엽, 코스모스, 억새’ 등의 순서로 가을 정경이 상위권에 올랐다고 한다. 물론 자연에서 펼쳐지는 광경들이 직접적으로 가을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는 가을을 현실적인 생활의 계절 보다는, 낭만과 감성의 계절로 인식하고 있는 의식이 더 강하다는 증거라고 여겨지는 결과다.

‘추수, 오곡백과, 천고마비, 한가위’ 등의 실질적인 단어들도 더러 선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가을 하면 떠오르는 건, 가을만이 지니고 있는 자연의 색깔과 모습일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아름답고 황홀한 풍경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계절이 가을이고, 오늘날에는 이 가을을 맛보기 위해서 지금도 수많은 외국의 관광객들이 앞다투어 여러 공항과 항만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축복받은 우리나라의 사 계절이 다시금 파노라마처럼 계절별로 연상되어지니 자못 뿌듯해진다.

외국에서 살고있는 필자의 지인이 며칠 전에 귀국을 했다. 오랜만에 찾은 고국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궁금해 했는데, 뜻밖에도 낙엽을 밟으며 걸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늘 여름만 존재하는 동남아에서는 초목의 푸른 잎만 보이기 때문에 울긋불긋 단풍든 우리나라의 산야가 더없이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발밑에 부서지며 자박자박 소리지르는 낙엽을 밟아보는 게 우선이란다.

그래서 낙엽의 몸짓이 유난히 정겨운 ‘워커힐 호텔’ 옆의 ‘아차산 등산로’로 안내했더니 눈이 휘둥그레 해지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꺼워 했다. 참 잘한 일이었다. 행복에 겨워 같이 걸으며 우리는 가을과 시와 삶을 이야기 했다. 그리고도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역시 분위기를 띄우는 요인 중에서도 압권은 수북히 쌓인 길 가의 낙엽들이었다.

“잎새와의 이별에 나무들은 저마다 가슴이 아프구나” ‘이해인 수녀’의 ‘가을일기’ 중에 한 구절이다. 지금처럼 가을이 저물어가고, 겨울 문턱에 들어서는 계절이 되면 영락없이 나뭇잎이 하나 둘 소리 없이 떨어지게 된다. 나무들은 무성했던 잎을 떨어뜨리며,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긴 채 춥고 황량한 겨울을 예고한다. 비단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낙엽을 보며 한결같이 쓸쓸함을 느낀다.

반면에 과학자들은 한 잎의 낙엽을 대하면서도 여지없이 ‘숭고하고 장엄하다’고 생각한다. 수만 년 동안 식물이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낸 진화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한 생애를 마친 나뭇잎은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 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다.

온도가 떨어지고 일조량이 줄어들면 식물들은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식물의 잎에 있는 엽록체는 광합성을 통해 포도당을 만든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포도당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해 성장하고, 자신의 씨앗을 남긴다. 햇빛이 줄어들면 엽록체의 광합성 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동물로 비유하면 먹을 것이 부족해진다는 뜻이다. 또한 식물 세포는 많은 수분을 함유하고 있는데, 온도가 내려가 얼어버리면 세포가 파괴될 수 있다.

식물은 생존을 위해 잎에 있는 엽록소를 분해해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아름다움 대신 생존을 택하는 것이다. 나뭇잎의 색이 변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식물은 낙엽이 떨어지고 새 순이 돋아나는 과정을 통해 생명을 이어간다. 녹색을 띠고 있는 엽록소가 분해되면서 녹색이 사라진다. 잎이 갖고 있던 빨간색, 노란색 색소가 드러나면서 울긋불긋한 단풍이 생긴다.

봄과 여름철 나뭇가지에 단단히 매달려 있던 잎이 살랑살랑거리는 서늘한 가을 바람에도 힘없이 떨어진다. 잎이 늙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이처럼 잎이 떨어지는 현상을 ‘탈리’라고 부른다. 식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노화에 관여하는 호르몬이 존재한다. 반대로 힘이 남아도는 봄과 여름에는 ‘옥신’이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은 식물이 왕성한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가을이 되면 잎이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에틸렌’ 분비가 왕성해진다. 나이가 들어가는 셈이다. 이 때 잎에 있는 영양분은 줄기나 가지로 이동하고, 기능을 잃어버린 잎은 식물과 분리돼 땅으로 떨어진다. 식물이 불필요하게 많은 잎을 갖고 있는 건 겨울을 나기에 비효율적이다. 잎에서 뽑아낸 영양분으로 식물은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뒤, 날이 따뜻해지는 봄이 오면 엽록소를 다시 만들어 푸른 잎이 피어나게 한다.

잎의 노화는 식물이 오랜 기간 진화를 거쳐 만들어낸 생존전략이다. 식물 노화 유전자는 인간에게도 유용하게 활용된다. 사과나 토마토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도 노화 과정이다. 수확한 토마토를 먼 거리까지 이동시키게 되면 에틸렌이 분비되면서 물러져 상품가치가 떨어진다. 에틸렌 분비 유전자를 제거한 토마토는 설익은 파란 토마토가 된다.

이를 판매하는 곳까지 옮긴 뒤 에틸렌을 처리해주면 먹기 좋은 빨간 토마토가 된다. 오렌지나 사과도 마찬가지다. 모두 노화 유전자를 활용해 인간에게 유익하게 쓰이고 있는 셈이다. 또한 식물 노화 유전자는 인간의 노화를 연구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인간과 식물 유전자는 상당수가 비슷하기 때문에, 식물에서 발견된 노화 유전자 기능을 인간 유전자와 비교하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인간 노화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식물 노화 연구는 생물 전반으로 확대해 활용할 수 있다. 낙엽이 쌓여갈수록 인간 노화에 대한 지식도 많아지는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상관관계다.

낙엽을 소재로 한 시의 대표작이라면 누구라도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을 꼽는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에서 시인이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한 의미는 무엇일까? 시에서 보면, 보편적으로 낙엽은 하강적 이미지로서 생명 소멸의 의미 혹은 쓸쓸한 마감의 분위기를 부여한다. 그래서 시는 더욱 애상적 느낌을 준다.

아울러 시의 의미 구성의 중요한 요소인, 시 제목도 관련되어 있고 하니, 이 시구에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의미를 추정해 보자면, 아마도 “자연 만물이 모두 소멸해 가는 것이니, 사람 또한 늙고 언젠가는 소멸해가는 존재이다”와 같은 멧세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올 해는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00년이 된다.

문인이나 예술가들의 탄생과 별세 100주년, 200주년이 되면 이런저런 행사며 기념사업, 이벤트를 성대하게 치르는 프랑스 문화 풍토인데 구르몽 시인의 경우 다소 조용한 듯 하다. 문학의 위상이 바뀌고 대중의 관심이 비껴간 까닭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시인의 대표작 ‘낙엽’은 자칫 고루한 서정토로, 시대에 뒤떨어진 감상주의의 발로로 여겨진 탓은 아닐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해마다 이맘 때면 시인의 시는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1960~70년대 문학소년소녀들이 시집 갈피에 단풍이나 낙엽 등을 곱게 끼워 넣고 읽던 옛 정취는 현재는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사람들에게 감성체계가 존속하는 한 ‘낙엽’의 원초적 감동, 생태적 공감대는 영속성이 있으므로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가을이니만큼 별 일 없으면 의례껏 단풍은 붉게 물들을테고, 또한 시절 좇아 낙엽은 떨어져 쌓이기 마련이다. 한 뼘의 여유가 없어 시 한 구절을 읊어보기 힘든 각박한 현실이지만, 여름 한 철 싱싱했던 녹음의 기억을 뒤로 하고 쓸쓸히 떨어지는 잎사귀를 바라보며, 우리 모두 실상은 낙엽처럼 덧없고 허망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가을이다. 그러기에 이 짧은 삶에서, 절실하도록 그리운 사랑을 사뭇 소중히 보듬고 싶은 계절이 가을이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필자가 지은 시 중에도 ‘낙엽’이라는 단순한 제목의 졸시가 있다. ‘떨어져 이미 / 뒹굴던 낙엽이 문득 / 솟구치는 바람에 허공을 부유한다 // 저 낙엽의 뒤를 미는 바람, / 발레리의 바람이 / 게 숨어있었다 // 그래, / 나도 살아야겠다 / 예서 멈출 순 없다, / 발레리의 한쪽 팔 / 힘주어 부여잡고- / 기왕지사 바람에 맡기운 몸뚱이 // 가야할 때를 알고 가는 낙화처럼 / 행복치는 않겠지만 / 아직도 이 세상엔 / 내 할 일 조금은 남아 있을 터 // 그걸 찾자, / 찾아 이루자, / 일어서야겠다, 지금’ 비록 허무하지만 허망하진 않은 현실을 관조하는 나름의 뜻을 담아보고 싶었나 보다.

우리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본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추억해본다. 우리가 지나온 길을 되새겨본다.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골목을 지나도, 돌아보면 결코 매일 같은 길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햇빛이 가득 차 눈이 부시고, 어느 날엔 비가 내림으로 흐려서 불투명하거나, 어느 날엔 바람에 눈까지 내려, 바람 속을 걷는 것인지 길 위를 걷는 것인지 모를 것 같던 날들도 있었다.

골목 어귀 한그루 나무조차 늘상 같지는 않아 어느 날은 꽃을 피우고, 어느 날은 잎을 틔우더니, 무성한 나뭇잎에 바람을 달고, 빗물을 담고, 그렇게 계절을 지내고는 빛이 바래고, 낙엽이 되고, 자꾸 비워가는 빈 가지가 되고, 이윽고 헐벗어가는, 하냥 일정한 모습의 나무는 아니었다.

문 밖의 세상도 그랬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서고, 저녁이면 돌아오는 하루를 살아도 늘 어제 같은 오늘이 아니었고, 또 오늘 같은 내일은 아니었다. 슬프고 힘든 날 뒤에는 비 온 뒤 청아하게 개인 하늘처럼 웃을 날이 있었고,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의 뒤에는 언뜻 조금씩 비켜갈 수 없는 아픔도 섞여있었다.

느려지면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생겼고, 주저앉고 싶어지면 일어서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매일 같은 날을 살아도, 매일 같은 길을 지나도, 하루하루 삶의 이유가 다른 것처럼 언제나 같은 하루가 아니고, 계절마다 햇빛의 크기가 다른 것처럼 언제나 같은 길은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필자는, 평생을 그리 위험한 지류를 밟고 살아오진 않은 모양이다. 남들보다 빠르게 꿈에 다다르는 길은 알지 못하고 살았지만, 자신의 삶을 완전히 겉돌 만큼 먼 길을 돌아오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아직도 가끔씩 다른 문 밖의 세상들이 유혹을 한다. 조금 더 쉬운 길도 있다고, 조금 더 즐기며 갈 수 있는 길도 있다고, 조금 더 다른 세상도 있다고 말이다. 어쩌면 필자라는 사람이 우둔하고 어리석어서 고집처럼 힘들고 험한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돌아보고 잘못된 길을 왔다고 철푸덕 주저앉아 후회만 하는 경우는 없으니 그것으로도 족하다.

이젠 필자가 가지지 못한 많은 것들과, 필자가 가지 않은 길들에 대하여 욕심처럼 꿈꾸지는 않기로 한다. 이젠 더 가져야 할 것보다 지키고 잃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 어느새 필자의 나이, 한 가지를 더 가지려다 보면 한 가지를 손에서 놓아야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필자가 행복이라 여기는 세상의 모든 것들, 이젠 더 오래, 더 많이 지키고, 잃지 않는 일이 남았다.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하루하루, 아직도 어딘가 엉뚱한 길로 이끄는 지류가 위험처럼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삶도 남아 있을진대, 아직도 세상 속으로 향한 저 문을 나서는 일이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방향 없이 막무가내로 흔들어버리는 거센 바람들, 어쩌면 산다는 게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 고백컨대, 홀로 사색하는 이 시간을 원하였지만 실상은 내심 조바심이 된다.

조심스레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마음을 모두어 본다. 모여지는 상념들에 의한 깊은 사랑의 언어들, 오늘도 가슴 깊이 새기어가고자 애타해본다. 들리워진 펜 사이로 펼쳐지는 그리운 사랑의 얼굴들이 오늘도 오색의 그림을 만들어 간다. 오직 사랑만을 위하고 위해, 남겨진 가을의 날들을 착하게 메꾸어보고 싶다. 뚝 뚝 떨어지는 가을 하늘, 한 잔 가득 담아 마시고 싶다. 가을 한 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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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부르는 이름 사이로
그리운 눈물 차오르면
추억하는 향기 있어 황홀한 연가
지금은 가슴 시리도록
울리기만 하여라

낯선 어딘가
저기쯤의 갈밭머리로 휘돌아 소녀,
나풀나풀 사라져 가고
그 자리 대신 피어오른
아련한 그리움에
점점이 묻어나는 아지랑이 때문으로
마냥 더 설운 이름이던 시절

담뿍 배어진 쟈스민향 하얀 손수건에
작은 얼굴 차라리 파묻어
눈물 얼룩진 뒷동산 어귀
저녁놀 붉어올 제
왈칵 솟구치던 추억
가슴으로 품어 안으며

어디였던가,
저기쯤의 갈밭머리로 소녀는
수줍게 돌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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