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1997년 10월 8일 인쇄된 詩集입니다.

다른 부제는 정하지 않고 그냥 분류만
22편씩 3개의 章과
14편 1개의 章으로 하였으며,
합계 80편의 詩가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클래식음악 감상문'이 7편 실려있습니다.

감상적인 내용의 詩가 가장 많이 포함된 詩集인데
이 詩集만 보아서는 평소의 林森의 詩風과는
다소 상이한 면모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 증인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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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물인 양 흘러 흘러 - 1 *



시작노트

" 강물인 양 흘러 흘러 - 1 " 詩作 note

오늘은 제법 긴 시를 골라보았다. 필자의 시 중에는 이보다 훨씬 긴, 서사시나 연작시, 또는 역사시들도 더러 있지만, 실상 시라는 건 짧아야 제 맛이다. 촌철살인의 함축된 언어로 하고픈 말을 콕 집어서 표현하는 재주가 모자라다보니, 필자의 시는 너저분하게 길어지는 경우가 퍽도 많다. 그래서 막상 시를 쓰고 나면 누가 볼까봐 얼른 숨긴다. 이런 걸 시라고 썼느냐는 핀잔이라도 들을 것 같아서 잽싸게 감추는 게 습관처럼 되어졌다.

그리고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슬그머니 뒤져보면서 당시의 시심을 추측하곤 한다. 그래도 역시 남부끄럽고 민망한 느낌에, 다시 처박아두곤 하는 버릇을 되풀이하다보니, 지금에 와서는 서랍이나 책 무더기 속 여기 저기서 예기치 않게 숨어있던 습작들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물론 짧은 시는 짧은 만큼 강렬하고 신축성 있는 멧세지가 담기지만, 길게 쓰여진 시라도 어쩌면 나름대로 더 다정하고 자연스러운 감동을 줄 수 있지는 않을까?

이 시도 아마 예전 어떤 시절의 애절했던 마음을 농축시키려 딴에는 무진 머리를 쥐어짰던 시인 듯 한데, 고백컨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필자가 무덤덤한 성품을 갖고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보다는 살면서 너무도 많은 슬픔과 이별을 겪다보니 웬만한 충격에는 단련도 되었고, 미상불 필자의 삶이란 게 아픔만 쉼 없이 이어진 현실들의 모듬이다보니 아마도 헤어짐에 이골이 난 것 같기도 하다.

만일 그도 아니라면 건망증이나 초기 치매의 이유이던가. 좌우간 이 시를 복기하면서도 필자는 오늘 또 다른 이별 하나를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새록새록 솟아나는 옛 상처를 지긋이 누르면서,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려고 애쓴다. ‘무덤덤하게 보내기’, ‘아닌 척 하면서 뒤돌아서기’, ‘슬퍼도 그냥 웃기’, ‘남의 일처럼 여기기’, 기타 등등 이른바 필자가 갖고 있는 기술은 참 다양하고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어디 필자의 마음 한 구석일지라도 아픔 부스러기가, 슬픔 나부랭이가, 자그만 흔적의 편린이, 스며들 여지인들 있겠는가?

그렇기에 모름지기 사람에게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는 법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건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신이 퍽 대견스럽다. 대범하게, 의연하게, 꿋꿋하게 보내면 되는 건데 무에 어려운 일이 있는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인 양 돌아서면 되는 건데 이별이 뭐 대수냐? 깊게 패이는 상처라고 해봐야 내일이면 오늘보다 덜 할 게 확실한데 말이다. 답도 알고 문제도 아는 이 현실이 참 쉽다.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면 되는 거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마무리 지으면 되는 거다.

그리고나서 눈치 봐서 깊은 밤, 혼자만의 공간에서 가슴 부여잡고 속으로 속으로 울부짖을 걸 차마 누가 알겠는가? 이 가슴 속으로 속으로 끓어오르는 통곡의 울림을 뉘라서 감히 들을 수 있겠는가? 속으로 속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애간장을 누구인들 정녕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지금 아무도 모르는 상처 하나를 또 빚으면서, 깊은 속으로 속으로 담을 채비를 차곡차곡 마련하는 중이다.

어차피 삶이라는 게 다 그런 거다. 기쁨 보다는 슬픔이, 행복 보다는 불행이, 웃음 보다는 눈물이 더 많이 모여져서 반죽을 하는, 소위 엿같은 거다. 거지같은 거다. 그리고 정말이지 개똥같은 거다. 다른 말로 표현하기가 싫다. 지면에서 사용하면 절대 안되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저속한 언어를 슬쩍 사용하고나니 이제 조금은 후련하다. 어느 정도는 속이 풀린다. 이만 하면 삶을 관조하는 자세가 나올성 싶다. 이 쯤에서 삶을 바라보는 객관적 관점이 만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삶이란 건 특별한 공식이나 궤도가 정해져 있지는 않는 거다. 그 때 그 때 변화무쌍한 여건과 환경들이 당시에 가장 안성맞춤인 삶의 얼굴을 만들어낸다. 오늘 이렇게 살았다 하여 내일 다시 그 모습이 진실일 수는 없다. 오늘 이루지 못한 것이 내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달성되어 있을 수도 있고, 오늘 결론이 내려졌다 해도 내일은 다른 조건에 의하여 예기치 않았던 결론을 추가로 빚어낼 수도 있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미리 예측할 수도, 앞당겨 섣부른 결과를 인정할 수도 없음이다. 그저 부드럽고 유연한 마음가짐으로, 늘 진실하고 정의로운 마음가짐으로, 삶을 대한다는 겸손하고 착한 자세가 필요한 이유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어울려서 살아간다.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주고받으면서 살아간다. 사랑을, 이익을, 축복을 공유하면서 나눈다. 그 가운데서 행복과 만족과 보람을 느끼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투자를 한다. 이른바 사회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뭔가를 주고받을 때를 살펴보면, 어떤 사람은 주로 먼저 주고 나중에 받는다(Give & Take). 또 어떤 사람은 받고 나서 나중에 준다(Take & Give). 사람들은 누구를 더 좋아하며, 누가 더 성공할 가능성이 클까? 얼핏 보면 그게 그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효과 면에서 보면, 그 둘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주변에서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모습들을 잘 보면 ‘받는 만큼만 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들은 보수 이상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그러면서 ‘더 많이 주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고용주라면 과연 이들에게 더 많은 보수를 지급하겠는가?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싶다면 먼저 보수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회사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보수를 지불하면서라도 사장이 붙잡고 싶은 사원이 될 것이다.

가끔 사회생활을 하는 젊은 친구들로부터 고용주와의 관계로 인한 고충에 관해 이야기를 들을 때, 또는 개인 사업을 하는 이들로부터 소비자에 관한 불만의 소리를 들을 때, 필자가 늘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내게 주어진 한도액에서 절약을 해서 내 돈을 만드는 것도 참 힘이 들더라. 하물며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에 옮겨 담으려면 얼마나 더 많은노력을 해야 하겠느냐?”

물질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경우 이 말이 절대적으로 적용이 된다 생각이 들지만 그러한 이해관계를 떠난 순수한 인간관계일 때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무조건적인 베풂이 때로는 상대방에게 거부감이나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또는 주고 받는 것에서 적당함과 형평성을 잃고 너무 주기만 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받는 것에만 길이 들게 하는 것은, 그것이 물질일 경우에는 더더욱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감사함에 무디어지게 하는 타성은 생각보다 무서운 질환이다. 그래서 구제의 경우에도 무조건적인 구제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해악이 되는 법이다. 주는 것과 받는 것, 어찌 보면 필자의 주장과는 맥에 있어서 약간의 괴리가 느껴지긴 하지만, 나름의 ‘Give & Take’에 대한 견해다. 단순한 주고받음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다른 각도로 보면 주고받음의 한 단면이다. 행복을 주고받고, 아픔을 주고받고, 그리움을 주고받고, 기다림을 주고받고, 그렇게 서로의 삶을 주고받는 것이다. 추억을 주고받고, 흔적을 주고받고, 그러다가 잊혀짐을 주고받고, 각자의 다른 삶의 길을 주고받고, 그러면서 서로의 내일을 주고받는 소위 주고받음의 연속이며, 그것이 바로 영원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인연과 업보며 운명과 윤회다.

그 많은 주고받음의 요소 중에서 가능하면 더 많은 축복의 요소들을 주도록 하고, 더 적은 상처의 요소들을 건네도록 애쓰면서 살아가는 게 사람이 지녀야 할 의무적 천성이며,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 삶의 구성요소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남에게 축복을 많이 전할수록 자신이 축복을 더 받게 되고, 남에게 아픔을 덜 줄수록 자신의 상처가 줄어든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크게 일으킨 ‘찰스 키터링’은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83회 생일 때 그의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이제는 연구를 중단하고 좀 쉬시지요.” 그러자 키터링이 대답했다.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흉하게 늙는다. 나는 항상 미래를 바라본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노년을 걱정한다. 건강하고 우아하게 늙고 싶은 것이 한결 같은 바람이다.

노년기를 우아하게 보내려면 세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첫째, 영혼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둘째, 무슨 일에나 함부로 참견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셋째,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남을 헐뜯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흉하게 늙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독약이 있다. 그것은 ‘불평, 의심, 절망, 경쟁, 공포’다. 이 다섯 가지 독약의 양이 많을수록 노년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진다. 반대로 사람을 우아하게 늙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묘약도 있다. 그것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이다.

돌아가신 장인어른은 늘 필자에게 말씀하셨다. “많이 웃어라. 인상쓰지 마라. 인상쓰는 습관은 미간의 주름을 깊게 한다. 미간의 주름이 깊으면 슬픈 일이 생긴다.” 가족을 조국에 두고 일제의 징병에 동원되셨던 아버님은 미간의 주름이 깊으셨었다. 아마도 미간의 주름이 깊어서 슬픈 일을 당하셨다라기 보다 젊은 시절의 오랜 아픔이 그 분의 미간에 주름을 깊게 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이를 먹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얼굴의 밝기가 달라지는 것 같다. 그것이 곧 관상이 된다. 어두운 그림자를 향하고 있느냐,아니면 밝은 곳을 향하고 있느냐, 밝음도 어두움도 늘 우리 곁에 같은 얼굴로 공존한다. 하지만 무엇을 바라보느냐의 선택은 우리의 자유 의지라 생각한다. 그 의지로 주고받음의 공식을 이어가면 된다.

우리에게 다가온 사람은 향기로운 사람이다. 그 사람과 맺어진 인연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을 알게 해준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움인 것을 가르쳐준다. 별빛이 고울 때의 모습으로도, 달빛의 영롱한 빛으로도, 우리 안에 들어온 사람의 향기는 어느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 사람은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있는 특별한 사람이다.

가슴 한구석에 담아 넣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중한 마음이다. 무엇인가에, 어떠한 것에 특별히 좋고 싫은 것 보다 사소한 것 하나에 마음을 넣고, 그 마음에 특별히 느껴지는 것이 진심 아닐까? 봄이 오면 풀 내음과 꽃에서 풍기는 향기, 여름의 시원한 바람과 뜨거운 햇살, 가을의 하나 둘 사라지는 낙엽, 그리고 겨울 속에 가득한 하얀 눈에서 우리는 그들만의 특별함을 느끼고 만지므로 또 하나의 소중함을 간직하게 되나보다.

작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가는 특별함이란 그 어떤 특별함 보다 소중하고 값지다. 힘들 때 어깨의 힘이 되어준 벗이 그렇고, 그리움에 지칠 때 함께 그리워해준 이가 있어 행복한 것 처럼 언제나 특별한 사람에겐 행복의 문이 열려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세상이 정겹다. 다정다감한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랑과 축복을 주고받고 싶다. 비록 지금 아프고 슬프지만 영원하지 않을 이 상처를 속으로 소중히 보듬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신 미소를 주고 싶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서로에게 미소가 되어보자. 어제보다 조금 더 겸손해져서 서로서로 대할 때 얼굴에 가득한 미소가 되고, 그 미소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그 이상이 되어, 행복한 마음으로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아침에 우리는 부드러움으로 하루를 열어보자. 목소리를 조금 더 부드럽게 하여 듣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화평해지고, 그 화평한 마음들이 동료가 되고 이웃이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가 맞이하는 매일의 아침이 어느 한 날 소중하지 않은 날은 없겠지만, 우리가 좀 더 겸손하고 부드러움으로 아침을 맞이하여,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가 되고 화평함이 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행복할까? 고통은 나눌수록 가벼워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음껏 행복을 전하고, 그 행복을 곱배기로 되돌려 받는 매일 매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주고받음의 기본 법칙 중에 있는 ‘이미지 대로 된다’는 걸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혹시 주위에 정직하고 양심적이며 친절하지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뻔뻔스럽고 못된 사람인데도 더 잘 사는 사람이 있지는 않는가? 굳이 힘들여 찾지 않아도,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지만 불행하게 살다 죽은 사람은 너무 많다.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행복하게 사는 법칙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빌린 돈을 어떻게 갚을까?’ 라든가 의리나 도덕성을 잃을 때의 부끄러운 모습 등 어두운 이미지만 그리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으로는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개인적인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과는 반대로,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지만 윤택하게 잘 사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단지 자신의 미래를 밝고 풍요롭게 그릴 뿐이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복과 성공을 원한다면 도덕적인 것 위에 덧붙여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밝게 그릴 줄 아는 일이다. 모든 일은 자신이 그린 이미지대로 실현된다. 잠재의식은 옳고 그름의 판단력 없이 의식이 그려낸 이미지 대로 실현한다. 잠재의식은 선한 것과 이기심을 따지지 않고, 무엇이든 그린 것을 실현시켜주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자주 제언하고 있지만, 말은 씨가 된다 라든지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일이라든지 웃으면 복이 온다든지, 실은 단지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를 그 말들이 갖고 있는 무한의 능력을 필자는 믿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필자의 앞날에 대한 밝은 청사진을 그리곤 한다. 멋지고 기쁘고도 즐거운 내일의 얼굴을 그린다.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똑같은 상황임에도 사람들의 갖고 있는 성향에 따라 대처 방법이 다 다르다. 물론 그 대처 방법에 따라 결과 또한 다르다.

좋은 확신을 갖고 문제에 맞서는 이들에게 문제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지만, 자신과 일에 대한 불신으로 맞서는 이들에게는 문제 그 자체로 불행이라 생각하기에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나락으로 빠져들 확률이 대단히 크다. 좋은 확신, 적어도 필자와 인연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확신이 삶의 커다란 무기요 방패가 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그러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행복은 따놓은 당상일 거다.

필자는 확신한다. 믿는다. 필자는 굳게 믿는다. 오늘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이 일은, 내일이면 다시 만날 약속이리라. 오늘 흘러내리는 이 눈물은, 내일 짓게 될 미소의 연습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행복하다. 슬프지만 행복하다. 내일은 필경 슬프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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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의 여신 미소짓는 하오에는
사람들의 표정이 살아난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 내려지는
천상의 축복이
굉음으로써 파지마냥 흩어져 오고,

오늘만큼은 이별 조차 아름다운
기약의 인연 되어
웃음으로 꽃피어 난다.

어차피
만나는 이들 보다는 헤어지는 이들이 많은
세상,

떠나고 보내는 무수한 인연들을
버릇 마냥 보아오다 정작
이제 우리가 헤어질 때 된 거라면
우린 우리의 찬란한 이별 위에
조심스레 소담한 축복 뿌리리라.

산등성 명멸하는 별 빛 처럼,
교차로 떨어져 쌓이는 빗줄기 처럼,

가슴 저린 사연일랑 맨 밑에 깔고
아름다움으로 추억하기 위함이라면
눈물 어우러진 작별의 입맞춤 대신
서로에겐 소중한 마음, 웃음을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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