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1997년 10월 8일 인쇄된 詩集입니다.

다른 부제는 정하지 않고 그냥 분류만
22편씩 3개의 章과
14편 1개의 章으로 하였으며,
합계 80편의 詩가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클래식음악 감상문'이 7편 실려있습니다.

감상적인 내용의 詩가 가장 많이 포함된 詩集인데
이 詩集만 보아서는 평소의 林森의 詩風과는
다소 상이한 면모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 증인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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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 *



시작노트

" 고백 " 詩作 note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베스트셀러 ‘1Q 84'의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긴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출간되기 전부터 수많은 애독자들과 평론가들의 성급한 입방아에 무수하게 오르내리던 신작에 대한 평가는 이제 무분별한 추종이나 폄하를 넘어 실질적인 텍스트와 증거를 가지고 얘기할 수 있게 된 시간이다.
사실 소설의 내용은 색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하루키 소설에서 접할 수 있었던 ‘끊임없이 장애물을 돌파하며 문명의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성(聖)스러운 세계, 시원(始原)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여정’으로 대변되는 그동안의 작품에 또 하나의 아류를 보태는 결실을 넘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조금은 느껴진다.
‘하루키는 여러 편의 소설을 썼지만 실은 단 하나의 소설을 썼고, 그 단 하나의 소설을 끝없이 개작해 오고 있을 따름’이라는 비평을 한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이렇듯 하루키 서사에 대한 원초적 단조로움에 대한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도 하루키 월드가 여전히 호응을 얻고 있는 대표적 이유는 무엇일까 ?
435쪽에 이르는 독서를 마친 소감은 단적으로 ‘하루키는 자신이 구축한 하루키 월드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렇지만 한편, 소설 속에서 잔잔하게 순수의 시절을 호출하는 쓰쿠루의 독백은 단순하면서도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4명의 친구로부터 절교 선언을 들은 소심한 쓰쿠루는 한 때 죽음과 소멸이라는 화두에만 몰두하지만 16년이 흐른 뒤 그들을 차례로 찾아나서는 순례의 길은 속도와 물량이 지배하는 후기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있는 우리가 결국은 믿고 의지해야 하는 마지막 대상이라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
아마도 하루키 서사에 대한 원초적 단조로움에 대한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도 하루키 월드가 여전히 호응을 얻고 있는 대표적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초판 발행분 20만권이 바로 불티나듯 성황리에 팔려나가는 상황을 접하면서 이를 기회로 하여 침체된 출판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좋은 결과로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부디 청량제와 오아시스의 역할을 하는 문화적 충격이 됨으로서 우리 국민들이 다시금 책을 사랑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런데 실은 여기서 필자가 주시하는 바는 따로 있다.
‘새로운 내용으로 소설을 쓴다는 느낌이 아니고 그냥 머릿속에, 마음속에 있는 걸 자연스럽게 풀어내서 모은 작품’이라는 하루키의 어느 방송과의 인터뷰를 접하면서 ‘아하 !’하며 무릎을 치게 되었다.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더 예민하게 소년과 청년의 감수성을 계속 유지하는 작가에 대한 시샘과 경탄이기도 하였다.
세계의 독자들 심금을 울린 대작을 출간하고서는 하는 말이 ‘그냥’ 풀어냈단다.
자연스럽게 머릿속, 마음속의 것을 어렵쟎게 ‘그냥’ 끄집어냈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바로는 그토록 엄청난 대작을 완성하기까지에는 보통 사람은 감히 추측하기도 어려운 노력과 감당키 어려운 부담이 밑바탕이 되고 출산의 고통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동통으로 써내려간 피와 땀의 산물인 작품일 것이라고 누구라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풀어냈다고 담담하게 다소 맥 빠지게 표현하다니....
그런데 바로 그것이 답이었던 것이다.
모름지기 역사는, 기적은, 창조는 어마어마한 분위기를 전제로 하는 건 아니다.
복잡하고 거창하고 장구한 준비와 절차를 갖추어야만 비단 그에 합당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선각자나 주인공은 늘 무엇이든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즉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요는 그렇게 항상 채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질적인 과정은 겉보기에 지극히 미미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사람이라야 쉽사리 심오하고 거대한 결과물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나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선결되어야 하는 기초적이고 우선적인 조건들을 무시하고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단단한 기초 위에 쌓아 올리는 건축물이 튼튼한 건축물이라는 건 우리가 불변하는 대자연의 진리처럼 익히 알고 있는 명제이다.
대자연의 질서란 참으로 신비롭고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많은 가르침을 준다.
우리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기에 대자연의 질서는 우리의 삶에도 어김없이 적용이 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절대자의 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생의 기초 질서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수레의 바퀴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수레를 끌 수 없듯이, 아니면 바퀴 하나의 크기가 작으면 전체가 뒤뚱이고 덜컹이듯이 부모 자식 간에 또 형제 자매 간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해야 할 몫에 성실하지 못하면 기초 질서에 균열이 오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 균열은 아주 미세한 충격과 자극에도 크게 반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서로 상호 보완이 잘 이루어진다면 아무리 커다란 위기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그 극복이 어렵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V자를 그리며 하늘을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왜 그런 형태로 날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V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기러기 무리는 혼자서 날아가는 것보다 최소한 71퍼센트는 더 먼 거리를 날 수가 있다고 한다.
각각의 기러기가 젓는 날개짓이 바로 뒤에 따라오는 다른 기러기에게 상승기류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기러기 한 마리가 대열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그 기러기는 곧바로 대기의 저항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탈했던 기러기는 자연스럽게 재빨리 대열에 다시 합류하게 된다.
대열의 선두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는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는 금방 다른 기러기가 대신한다.
뒤따라가는 기러기들은 앞서가는 기러기들이 속도를 유지하는 데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 계속해서 큰 울음소리를 낸다.
뒤에서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다는 격려의 멧시지인 셈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한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사냥꾼의 총에 부상을 입어 대열에서 낙오되면 다른 두 마리의 기러기들이 낙오된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움을 주고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두 마리의 기러기는 낙오된 기러기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함께 머물다가 다른 기러기들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자신들의 대열을 따라간다.
이는 우리가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하고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기러기들의 세계에서는 생존과 운명이 걸린 가장 기본적인 진리이며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연스러운 몸짓이다.

특출난 존재가 따로 있으면서 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고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호 양보와 협력의 상생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점이어야 한다.
‘스티븐 코비’와 ‘로저 메릴’의 공저인 ‘제 4세대 시간 경영 -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에는 이런 글이 있다.
‘사는 것에서 자만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수입이 자신의 요구에 맞는지 어떤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수입이 다른 사람의 수입보다 많은지 어떤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외모(머리카락, 옷, 체형)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다.’
그 모든 자만의 뿌리는 비교라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절대 가치란 비교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존재한다.
행복의 가치 또한 다르지 않아서 모든 우월성을 상대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그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때론 자만하게 되고 때론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더욱이 삶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만함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만족하고 그 만족함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그런 삶이라면 그건 어떨까 ?

살면서 언젠가 한번쯤 이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들 평탄하게 잘 들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늘 어려울까 ?’
‘남들은 아우토반 고속도로처럼 잘 나가는데 내 길은 왜 맨날 울퉁불퉁 가시밭 길일까 ?’
그렇게 우리는 남의 손에 쥔 떡을 크게 보고 내 손에 쥔 액을 더 크게 본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질투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급기야 험담까지 한다.
‘위대한 캐스비’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 사람을 욕하기 전에 그 사람이 지금 지고 있는 짐을 헤아려 보라.’
그 어떤 사람도 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의 등에도 내가 모르는 그만의 짐이 얹혀 있다.
그 짐은 내 짐 보다 더 무거울 지도 모른다.
또,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금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그 사람의 신을 신고 세 달만 걸어보아라.’
그렇게 그는 나 보다 더 불편한 신발을 신고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걷는 길 보다 훨씬 험난한 사막을 그가 걷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헌 신짝같은 자존심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누군가에게 민폐일 거란 생각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다.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일종의 자기 포장이다.
어쩌면 열등감이 심한 사람일수록 그 포장은 더욱 화려할지도 모른다.
때론 자기의 치부를 더욱 크게 부각시킴으로 열등감을 만회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지향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 포장으로 우린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몫의 복이 있고 그 복이란 내가 얼마만큼 받아들여 누리느냐에 따라 내 것이 되기도, 혹은 영영 사막의 신기루처럼 환영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잊지 말자.
내 분량의 복은 내 안에서 거두어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로 모이는데 그 중심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중심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있음이라고 한다.
또한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드는데 그 중심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방의 쓸모가 있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있음(有)이 이로움을 만드는 것은 없음(無)이 쓸모를 만들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있다.
홀로 완전함을 이루기는 어렵다.
음과 양, 밤과 낮이 모여 하루가 형성되는 것이 대자연의 자연스러운 진리이듯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게 일목요연하다.
보여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
실체란 실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작은 수단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루어내는 일들과 또한 하고자 하는 일들이 과연 무엇을 위함인가를 생각해보자.
의미없는 듯 느껴졌던 것들이 모여 조심스러운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종내는 커다란 보람으로 승화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공급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임을 느낄 때 우리 스스로의 삶의 전차에 힘찬 가속을 붙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가족에게나 혹은 일터에서나 우리는 어떤 수단인지를 생각하고 우리가 하는 일에 보람과 가치를 느끼면서 시작하고 맺는 하루 하루들이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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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세월 먹고
하이얀 포말로 산화되는
나는 파도,
칠십 오만번이나
쉬임없이 해안선 넘나드는
나는 파도,

하루의 살이인 양
내 하루 삶 온전히
그대 향해 열렸나니 오로지
그대 마음속 각인키 위한
내 칠십 오만차례의 사랑
넘쳐나는 정열

하루에 다 쏟아부으리,
백천의 세월 흘러도
새로이 시작되는 영원 앞에 서서
그대 눈속이라야
이윽히 나 전율타가
이내 숨 죽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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