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9집. 돼지 껍데기  


  "9집. 돼지 껍데기"
1998년 6월17일의 이 詩集을 끝으로 하여
더 이상은 詩集을 출판하지 않았으니
현재까지의 마지막 詩集인 셈입니다.

52편의 일반詩와
童詩集 '자라는 나무가 되어'에서
비교적 성장한 수준의 어린이들에게
권장할 만한 내용으로 사료되어 발췌한
39편의 童詩를 선별,
'童詩모음 코너'를 뒷부분에 덧붙여 편집한 詩集입니다.

특별한 독자층을 확정하지 않았기에
詩集의 성격이 약간은 애매모호한 관계로
독자들에게 '무리수를 두었다'는 비판과 아울러
그리 좋은 작품평을 듣지 못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긴 시간이 흐르도록
더 이상의 詩集을 출판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詩集입니다.
[ 초롱불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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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적 사명, 고난 극복을 위하여 *



시작노트

" 시대적 사명, 고난 극복을 위하여 " 詩作 note

거창한 제목의 이 시는 실상 별 내용도 없어서 쑥스럽지만, 밝히자면 20여년 전에 적은 습작시다. 지난 시들을 뒤척이던 중에 언뜻 눈길이 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드러난 겉 내용 보다는 숨겨진 속 뜻이 구절마다 담겨있는 듯 하여, 다시 읽는데 괜시리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 시절에도 지금처럼 혼란과 좌절의 전염병에 온 국민이 집단으로 감염된 적이 있었던 걸까? 문득 역사의 윤회를 실감한다. 한낱 미물보다도 못난 인간들의 허접한 행태가, 거침없이 반복되는 물거품같은 권력 쟁탈전들이, 실로 부질없음의 의미를 실하게 알려주고 있다.

2016년을 뜨겁게 달군 유행어로 무엇이 있을까? 최근 어느 언론매체에서 조사해보니 “히트다 히트” “뭣이 중헌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등이 선두권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가장 마음을 씁쓸하게 만드는 유행어가 바로 “내가 이러려고 *** 했나?”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패러디를 해서 인용했던 유행어다. 이 말이 생겨나게 된 원인을 아는 우리로서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다.

급기야 이 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처해서, 우유부단한 자신을 자학하는 일종의 자학 개그로 자리매김되었다. 이야말로 남이 알까봐 걱정되는 사연이다. 이제 이런 상처와 회한을 안고 한 많은 사연을 주저리 주저리 쌓아올린 올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며칠 안남았는데도 거리에서 캐롤소리가 들려나지 않게된 것도, 성탄특수라는 계절용품의 매출이 급감하게 된 이유도, 우리는 이미 안다. 그리고 이제는 당연한 걸로 여긴다.

그렇지만 맥 빠지는 이 상태로 밝아오는 새 해를 맞이할 수는 없다. 새로운 날들의 태양을 이렇게 음습하고 폐쇄적인 벽을 쌓은 상태로 대면해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굽이치는 혼탁한 파도에서 얼른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온 국민의 가슴 속에 뿌리내린 패배주의와 우울증을 뿌리 째 뽑아버려야 한다. 상처를 그냥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흔적을 아예 지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노력과 시도로, 뼈저리는 아픔일랑 저 깊이 묻어버리고 새 살이 솔솔 돋아오르도록 애써야 한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남아있는 희망이 존재한다. 아직도 영 늦어버린 건 아니다. 최상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모두가 힘을 모아 차선의 선택을 통한 봉합과 평화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리고 비록 진흙탕과 험지에 피어나는 꽃일망정, 소담스런 봉오리로 맺어지게 하기 위한 어울림의 행진을 시작해야 한다. 잘못한 것은 철저하게 반성하되, 더 이상의 채근이나 몰아부침 보다는 용서와 안아주는 미덕으로 손 마주잡아야 한다.

그게 우리의 민족성이다. 그게 우리의 전통이며, 그렇게 이어온 것이 찬란한 부절의 역사다. 우리가 이룩해온 위대한 발자취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줄 우리만의 이야기다.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집단 의견전달 방식을 지금 지구촌의 모든 나라들이 깜짝 놀라는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다. 평화와 질서의 첨단을 보여준 우리의 저력은 지금 세계의 역사조차 바꿀 기세다. 우리의 힘이 고스란히 보여진 우리의 합창소리는 아직도 거대한 메아리로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우리의 고귀한 현주소다.

이 쯤에서 충분히 자부심을 갖도록 하자. 그리고는 여유롭게 중단하면 되는 거다. 어지러운 틈바구니에서도 비틀거리지 않던 우리 국민들의 행보를 멋지게 마무리하자.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한 해가 갈무리되고 있는 이 시점에, 잊어야 할 건 다 잊고 깨끗하고 떳떳하게 새 해를 밝히자. 봄이 오기 전에 얼른 우리의 새 싹을 위한 파종이 완성되어야 하니까.

옛날 어느 왕이 세자빈을 얻기 위해 나라 곳곳에 방을 붙였다.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규수를 일일이 심사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마지막 후보로 열 명의 처녀를 발탁했다. 왕은 열 명의 처녀에게 소량의 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한 가지 숙제를 내주었다.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한 달 동안 먹고 지내다 오너라.” 왕이 나눠준 쌀의 양은 성인이 아무리 아껴먹어도 부족한 양이었기에 모두 놀랐다.

어떤 처녀는 이것을 가지고 죽을 쑤어 먹었고, 또 어떤 처녀는 열 등분하여 조금씩 조금씩 한 달 동안 아껴 먹었다. 한 달의 기간이 지나고 처녀들은 다시 궁전으로 돌아왔다. 다들 비실비실하였고, 어떤 처녀는 쓰러져서 업혀올 정도였다. 그런데 유독 한 처녀는 얼굴이 아주 환하고 통통해졌을 뿐 아니라, 떡을 한 시루 머리에 이고 궁전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왕이 그 처녀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적은 쌀로 한 달 동안 먹고, 또 떡까지 해서 왔느냐?” 그러자 처녀는 왕에게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저는 그 쌀로 떡을 만들어서 장터에 가서 장사했습니다. 거기에서 남은 이윤으로 쌀을 사고, 또 떡을 만들어 팔고 해서, 저도 먹고 집안사람들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은 쌀을 가지고 임금님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지혜의 왕으로 불리는 ‘솔로몬’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는 신에게 다름 아닌 ‘지혜’를 구했다. 그러자 신은 지혜 뿐 아니라 건강과 부, 명예까지 덤으로 주었다. 지혜는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을 심어준다. 좌절의 상황에서 머물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딛고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어느 순간에나 가장 먼저,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의 첫걸음이다.

“참된 지혜는 항상 인간을 침착하게 하고, 바른 조화를 기초로 사물을 관찰하게 한다.” ‘린위탕’의 이 말은 오늘처럼 온 세상이 혼란과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시점에 반드시 돌아볼 말이다. 이 난국을 헤쳐나갈 참된 지혜가 절박하게 요구되는 시기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질책하기 보다는 사랑하고 보듬어주어도 부족한 하루들이다. 이 바쁜 하루들에 어찌 쓸 데 없는 행위와 생각으로, 소중한 시간들을 낭비하려만 하는가?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 오늘도 회개와 반성의 페이지를 연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따뜻한 하루’라는 사회단체에 접수된 최근의 사연 하나가 필자를 눈물짓게 만들었다. “딸을 위해서라도 나는... 살아야 합니다” 라는 제목의 사연이었다. - 저는 5년 전까지만 해도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하면서, 가정도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딸 효진(가명)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가출까지 하면서 모든 게 더욱 엉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 뿐인 딸을 위해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살림과 육아는 많이 부족했지만, 엄마 없는 아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딸 효진이를 더욱 잘 챙겼고, 일용직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가진 건 건강한 몸 하나이기에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건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는데 그마저 하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딸을 혼자 키운 지 1년 쯤 되었을 때, 목 부위에 혹이 생겨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저에게 말했습니다. “두경부 비인두암 3기입니다.” 이름도 생소한 병명은 코안 쪽 뇌 밑에 생기는 암이라는데... 그저 혹인 줄 알았던 것이 암이었던 것입니다. 난 아직 젊은데, 죽음은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바로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에 혼자 남을 딸을 위해서라도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위해 딸을 여동생 가족에게 부탁하고 암과의 사투를 벌였습니다. 암의 전이를 막기 위해서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했습니다. 점점 음식 섭취는 불가능하고 침이 나오지 않아 대화마저도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85kg이었던 건장한 몸은 나날이 빠지기 시작했고, 음식물은 위에 구멍을 뚫어 바로 넣으면서 생명을 연명했습니다. 얼마나 힘들던지 그냥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에게서 온 한 통의 핸드폰 문자를 보고 그동안 가슴 깊이 담아놓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세상에 아빠하고 나하고 둘밖에 없는데 아빠마저 없으면 난 어떻게 해? 아빠! 아무리 아파도 힘내. 내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하는지 알지!’ 오랜 기간 암 치료를 끝내고 돌아오니 그나마 있던 돈도 다 써버렸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지인으로부터 빌린 자금으로 아는 분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투병 중인 몸으로 사업을 하기란 쉽지 않았기에 함께 사업을 하는 분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처럼 일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병원에서 치료받는 동안 사업을 정리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믿었던 지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빚까지 떠안게 되니까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도로 집을 나간 아내, 암 투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 중단된 사업, 게다가 무일푼의 빚쟁이 신세에, 하나밖에 없는 딸을 4년 째 동생 집에 맡겨야 하는 내 처지가 한심하고 서글펐습니다.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나....’ 하늘이 무척이나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늘은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강물은 바람 한 점 없이 평온하기만 합니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어느 다리의 난간 위에 올라섭니다. ‘한 발자국만 디디면 나도 저렇게 편안해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내 나에게 한 사람의 얼굴이 스칩니다. 아빠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나중에 꼭 아빠를 호강시켜주겠다는 이쁜 딸 효진이가 바로 그 얼굴입니다.

세상은 계속 나에게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겐 하나 뿐인 소박한 꿈이 있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있는 딸 효진이를 데리고 와서 아빠가 해 주는 밥으로 함께 식사하는 것, 그것이 이 지독한 고시원 생활에서 버티는 큰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건강할 때는 감사할 일에도 감사함을 모르며 살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나중에 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면 실패하고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봐라, 나도 해냈다!” -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솟아올라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게 어찌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에 불과한가? 무시해버리고 말 하찮은 사연인가? 진정 금전과 권력의 투쟁에 바쁜 일상인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항변할 수 있는가?

삶의 벼랑 끝에서도 딸 효진이를 위해 살아야만 한다는 아빠 손혁진 씨.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싶다. 다시 건강해져서 딸 앞에 당당한 아빠가 되도록, 딸과 함께 오순도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희망을 전해주고 싶다. 비단 직접적으로는 상관없는 타인의 이야기라고 간주해도 딱히 반박할 수는 없겠지만, 한 편으로 돌아보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웃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가슴 아픈 사연일 수도 있는 것이다.

행여 나의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나에게 닥친 현실이라는 자각으로,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 주위를 돌아보며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가슴과 가슴으로 이어지는 끈에 소중한 매듭을 엮어 영원히 아름다운 인연으로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딸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어느 날, 열 살 된 딸이 큰 소리로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친구와 심하게 싸운 딸은 톨스토이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아빠, 저 심술꾸러기 아이가 막대기로 나를 때렸어요. 제발 저 아이를 좀 혼내주세요!” 톨스토이는 속이 상했지만 빙그레 웃으며 딸을 꼭 껴안고 속삭였다. “아빠가 그 아이를 혼내주면 그 아이는 너를 더 미워할 수 있단다. 그 아이를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너의 사랑이 전해지면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톨스토이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딸에게 말했다. “얘야, 이것을 그 아이에게 갖다 주렴.” 그 후 톨스토이의 딸과 그 아이는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다.

자녀가 친구와 다투고 오면 부모들의 마음은 무척이나 속상할 것이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 친구를 혼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딸에게 미움 대신 사랑을 가르쳤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건 강풍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영원히 자신을 성장시키는 경험이다. 남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수양과 소양의 방편으로 정작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같은 문제를 보고도 각자의 위치나 견해에 따라서 해석은 제각각 달라지게 마련이다. 찬성과 반대의 의견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다. 실패와 성공이, 선과 악이, 최선과 최악이, 일등과 꼴찌가, 진보와 보수가, 결국은 같은 선 상에 위치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드러나는 현상이 반대일 수도, 같은 색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절친이 되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지금은 목숨을 걸고 지켜낼 것 같은 의리가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무의미하게 탈색되는 경우도 숱하게 보여진다. 예컨대 세상사는 인지상정이다.

어느 중학교의 조회 시간이었다. 교장선생님이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을 소개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섰다. 학생들은 도통 들으려 하지 않았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교장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오늘 여기 새로 오신 선생님은 왼쪽 팔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순간 학생들은 놀란 듯 갑자기 조용해졌다. 학생들의 눈과 귀가 모두 단상으로 모였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은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선생님은 물론 오른팔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재치 있는 유머는 학생들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칫 화를 낼 수도 있던 상황에서 교장 선생님은 간단한 유머로 분위기를 순식간에 반전시켰던 것이다. 누구나가 간단하게 생각하면 아주 쉬운 일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이성 보다 앞서는 감정 때문에 쉽사리 실행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최단 거리는 웃음이라고 한다. 재치 있는 유머는 웃음을 낳고, 사람 간의 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준다. 자칫 차가워질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며, 패배와 좌절의 순간에서 사람들에게 한 모금의 미소를 선물해준다.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은 스프링이 없는 마차와 같다. 길 위의 모든 조약돌에 부딪칠 때마다 삐걱거린다. 각박하고 삭막한 세상일수록 유머와 재치는 빛이 난다. 상황이 급박하거나 여유가 없을 때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위트는 청량제의 역할을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어떤 심리학자가 겪은 일이다. 하루는 공사판에서 흥미로운 인부를 만났다. 모든 인부들이 바퀴 2개짜리 수레를 쳐다보면서 손잡이로 밀고 가는데, 딱 한 인부만 수레를 끌고 갔다. 심리학자는 다른 인부와 다른 행동을 하는 그가 혹시 자아(ego)가 강한 사람은 아닐까 하고 이유를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레를 보면서 밀고 가는데, 어째서 당신만 끌고 갑니까?” 그러자 인부는 별 이상한 것을 다 물어본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이야기하였다.

“하도 밀고 다녀서 이젠 꼴보기 싫어서 그래요.” 심리학자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수레를 끌고 가는 인부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은 평생 수레만 봐야 하지만, 그처럼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은 하늘과 땅, 세상을 볼 수 있다. 바로 인생의 주인공이 그가 되는 것이다. 인생의 수레는 많다. 자식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 돈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 대박만 쫓아다니는 사람, 사랑만 찾아다니는 사람…

그들은 하루 종일 수레만 쳐다보며 밀고 다니는 인부와 다를 바 없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살아가는 건지 아니면 살아지는 건지를 잘 구별해야 한다.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면 ‘살아간다’는 말이 맞지만 다른 누구를 위해 살고 있다면, 즉 주인공 자리를 누구에게 빼앗겼다면 그것은 ‘살아지는’ 것에 불과하다. 이 예화는 ‘차길진과 함께 떠나는 영혼 산책’ 중에 나오는 내용 중의 한 단락이다. 참으로 절묘한 삶의 팁이다.

우리의 올 해가 지금 막바지에서 깔딱거리며 숨차게 달려가고 있다. 세월의 수레바퀴가 씽씽 바람소리를 내며 겨울 속으로 내닫고 있다. 이 세모의 계절에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 혼자만의 행복과 부를 위한 고독한 행보에 몰두하거나, 스스로 만든 울타리 안에 갇혀서 왕따가 되어 멍청한 인간 관계에 몰입하면서, 혹여 제대로 되지 않은 그림에 자화자찬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 건가? 새삼 소름돋아 돌아보는 아침이다. 자, 일어나자. 이제 다시 움직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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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없이 살아진 지난 날
차라리 무색하여
내심 번민 뒤에 알게 된
여운, 튼실한 덩어리.

미련 폴 폴 날리며 파계한 진실
인정으로 가리고,
바구니 가득 담긴 소망 집어
한알 씩 씹으면
목줄기 타고 상큼히 뒷맛 느껴지리.

온갖 질곡 이기고
새론 길 찾아나서야 하는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면,
정녕 지금이 그때라면,
길고 질긴 생명의 노래
시작되어질 마지막 순간
이젠 자신있게 말하자.

하늘로 돌아 가리라 -

무지개빛 영롱한 천상의 낙원은
어차피 고통의 뒤안길이라야
반가웁게 열리어질 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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