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9집. 돼지 껍데기  


  "9집. 돼지 껍데기"
1998년 6월17일의 이 詩集을 끝으로 하여
더 이상은 詩集을 출판하지 않았으니
현재까지의 마지막 詩集인 셈입니다.

52편의 일반詩와
童詩集 '자라는 나무가 되어'에서
비교적 성장한 수준의 어린이들에게
권장할 만한 내용으로 사료되어 발췌한
39편의 童詩를 선별,
'童詩모음 코너'를 뒷부분에 덧붙여 편집한 詩集입니다.

특별한 독자층을 확정하지 않았기에
詩集의 성격이 약간은 애매모호한 관계로
독자들에게 '무리수를 두었다'는 비판과 아울러
그리 좋은 작품평을 듣지 못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긴 시간이 흐르도록
더 이상의 詩集을 출판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詩集입니다.
[ 초롱불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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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꼬시의 겨울 *



시작노트

" 칸꼬시의 겨울 " 詩作 note

겨울이야기다. 지금 겨울이니 의례껏 겨울의 이야기를 써야함이 마땅하다. 하면 보자. 겨울 하면 우선 떠오르는 단어가 추억이다. 유독 필자의 겨울에는 사연이 넘쳐난다. 가을에 쌓은 사연들도 무시 못할 처지지만, 필자에게 겨울은 다른 세 계절에 비해서, 기억 저 편의 먼 이야기들이 참 길기도 하다. 그 중에는 아름답고 빛나는 추억들도 더러 있지만, 왠지 가슴 시리고 눈물겨운 이별과 회한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필자는 겨울이 슬프다. 슬프다고 울고만 있을 순 없다. 그래서 필자는 겨울 추억을 속으로 삭인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렇게 아팠던 아픔들을 통해 조금은 더 성숙해진 인간성으로 세상을 보려고 애쓴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것이 또 다른 무슨 기쁨을 전해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필자가 겪었던 먼 옛날의 이야기들이, 다가올 내일의 근간이 됨은 분명타. 슬프던지, 즐거웁던지...

예컨대 그 시절 ‘칸꼬시’에서 보냈던 한 겨울은 정녕 아름답고 잊을 수 없는 필자의 소중한 겨울이야기다. 꼬치구이집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광고를 하고자 함은 아니다. 비단 다른 이름이어도 좋다. 다만 필자에게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을 별처럼 박아놓고 때로는 반짝이면서, 때로는 흩어지면서 오늘까지 이어지는 그 시절의 사연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밤이면 그 무언가가 못견디게 그리워진다.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목하 정유년의 새 해가 밝았다. 어둡고 다난한 지난 해의 찌꺼기들은 다 묻어버리고, 진정 새로운 희망과 목표를 향해 줄달음 칠 시점에 섰다. 우리에게 다가올 내일들이 한결같이 소중하고 보람되기를 간절한 염원 담아 빌어본다. 아울러 우리가 소중하게 갈무리해둔 지난 날의 기억들은, 속에서 싹트고 열매 맺어 더욱 풍요롭고 화사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제발 운수 좋은 어떤 날 골라서, 우연히라도 추억 속의 사람을 거리에서 마주치게 되는 행운이 오기를 학수고대한다. 무관심한 척 떨리는 가슴으로 옛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그렇게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나이 먹어가고 싶다. 언제까지라도 기억 깊은 곳의 주인공처럼 변치 않는 청춘의 삶으로 늙어가고 싶다. 새 해라고 해서 별 다른 일이야 있으랴만은, 어쩌면 필자에게도 예기치 않던 행운 한 자락 쯤은 아직 남겨져 있을지 누가 알까? 오묘한 신의 섭리에 따라 다시금 맺어지는 인연들마다 축복으로, 행복으로 길게 길게 이어가고 싶다. 그게 다시 주어진 새 해의 첫 바람이다.

칸꼬시에서 힘겹게 지샜던 그 해 겨울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지금에 와서 새록새록 되살아남도, 헤어진 뭇 인연들이 하나 하나 못견디게 보고파지는 생뚱맞음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굴레를 붙잡고 늘어지고 싶은 헛된 욕심도, 무릇 인간이기에 지니게 되는 부질없는 미련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해버리자니 조금은 섭섭하다. 그래서 다시 다짐한다. 늘 준비하면서 살아가리라. 언제나 깨어서 대비하리라. 다시 만나면 나눌 옛 이야기들이 정겹고 신선하기를 바라면서, 필자에게 추억을 만들어주었던 그 시절을 내내 보고파 하리라.

순우리말에 ‘끄트머리’라는 단어가 있다. 끄트머리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끝이 되는 부분’이고, 둘째, ‘일의 실마리’라는 뜻이다. 참 신기하게도 끝과 시작이 함께 공존하는 단어다. 이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옛 우리 선조들은 끝을 끝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시작으로 보았던 것이다. 참으로 절묘하다. 지금이 시작이라면 이 시작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동시에 순간적인 이전의 끝에 닿아 있음이다. 그래서 끝이 곧 시작이고, 시작은 끝의 다른 이름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속성이 있다.

“큰 나무도 가느다란 가지에서 비롯된다. 10층 탑도 작은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데서 시작된다.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처음과 마찬가지로 주의를 기울이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 라고 말한 ‘노자’의 가르침이 정겹다. 시작을 해야 하는 시점에 서서 옛날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필자의 이 말이 궤변일까? 아무튼 시작하면서 돌아보는 옛날이 역시 정겹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너무도 유명한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다. 그런데 한 해를 시작하는 요즈음, 정작 이렇게 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이렇게 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지, 올바른 계획으로 착실하게 준비는 하고 있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사랑할 때도. 일할 때도, 삶을 살아갈 때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한다면 후회는 없으리라. 시작된 새 해에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고 권유하고 싶다. 나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아무도 날 대신해 해줄 수 없다. 자신의 삶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소중한만큼, 자신이 소중하다는 자존감을 갖고 시작되는 새 해의 일상에 임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식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고치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나방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방은 바늘구멍만 한 구멍을 하나 뚫고, 그 틈으로 나오기 위해 꼬박 한나절을 애쓰고 있었다. 고치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그렇게 아주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낸 후 번데기는 나방의 되어 나오더니 공중으로 훨훨 날갯짓하며 날아갔다.

이렇게 힘들게 애쓰며 나오는 나방을 지켜보던 윌리스는 이를 안쓰럽게 여긴 나머지, 나방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칼로 고치의 옆부분을 살짝 그었다. 나방은 쉽게 고치에서 쑥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좁은 구멍으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방은 영롱한 빛깔의 날개를 가지고 힘차게 날아가는 반면, 쉽게 구멍에서 나온 나방은 무늬나 빛깔이 곱지 않았다. 그리고 몇 차례 힘없는 날갯짓을 하고는 그만 죽고 만 것이다.

오랜 고통과 시련의 좁은 틈새를 뚫고 나와야만 진정한 나방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내야 한다. 인생에서 험난한 고통과 투쟁 속에서 몸부림쳐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외로움과 슬픔, 고통을 이기고 나면 우리는 더 성장한 모습이 될 것이다. 힘겨운 상황에 부닥치고 모든 게 장애로 느껴질 때, 단 1분조차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때야말로 절대로 포기하면 안된다. 바로 그런 시점과 위치에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와이 군도’ 북서쪽 끝에 있는 작은 ‘카우아이’ 섬. ‘쥐라기 공원’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섬은 한 때 지옥의 섬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다수의 주민이 범죄자, 알코올 중독자, 정신질환자였고 청소년들은 그런 어른들을 보고 배우며 똑같이 자라고 있었다. 학자들은 ‘카우아이 섬의 종단연구’라는 것을 시작했다. 1955년에 태어난 신생아 833명이 30세 성인이 될 때까지의
성장 과정을 추적하는 매우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많은 학자의 예상은 그러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인생에 잘 적응하지 못해 비행청소년이 되거나 범죄자, 중독자의 삶을 살 것이다.” 심리학자 ‘에미 워너’ 교수는 833명 중 고아나 범죄자의 자녀 등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201명을 따로 정해 그들의 성장 과정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3분의 1에 해당하는 아이들에게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그들은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대학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등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보다 더 모범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에미 워너 교수는 이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했다. 조사 결과 이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끝까지 자기편이 되어 믿어주고, 공감해주고, 응원해주는 어른이 최소한 한 명은 곁에 있었던 것이다. 부모, 조부모, 삼촌, 이모... 최소한 한 명이.

실패하고 좌절해도 괜찮다고, 무조건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한 사람이 있었기에 자신의 환경을 이기고, 비관하지 않고, 밝게 자랄 수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속도는 느려도, 시행착오는 겪을지라도, 오롯이 꿈을 향해 걸어가는 힘이 생긴다. 혹시 나를 믿어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한 사람이 있었는가? 훈계하고 꾸짖기보다, 그랬구나, 힘들었구나! 공감해주는 것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올바르게 성장하게 하는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 말기의 왕족인 ‘이하응’은 조선왕조 제26대 ‘고종’의 아버지다. 이하응의 아들 ‘명복’이 12세에 제26대 고종으로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을 대신해 섭정하였다. 그런 이하응이 젊었던 시절 이야기다. 몰락한 왕족으로 기생집을 드나들던 어느 날이었다. 술집에서 추태를 부리는데 ‘금군 별장(종2품 무관) 이장렴’이 말렸다. 화가 난 이하응이 소리쳤다. “그래도 내가 왕족이거늘... 일개 군관이 무례하구나!”

그러자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호통을 쳤다. “한 나라의 종친이면 체통을 지켜야지. 이렇게 추태를 부리고 외상술이나 마시며 왕실을 더럽혀서야 되겠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뺨을 때린 것이니 그리 아시오.” 세월이 흘러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어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렀다. 이장렴은 부름을 받자 죽음을 각오하고 가족에게 유언까지 했다.

이장렴이 방에 들어서자 흥선대원군은 눈을 부릅뜨면서 물었다. “자네는 이 자리에서도 내 뺨을 때릴 수 있겠는가?” 이에 이장렴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대감께서 지금도 그때와 같은 못된 술버릇을 갖고 있다면 이 손을 억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장렴의 말에 흥선대원군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그 술집에 다시 가려고 했는데 자네 때문에 안 되겠군.” 그리고 자기 오른손으로 자기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내가 오늘 좋은 인재를 하나 얻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장렴을 극진히 대접하고 그가 돌아갈 때는 친히 문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그리고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금위대장 나가시니 앞을 물리고, 중문으로 모시도록 하여라.” 무장답게 목숨을 걸고 지조를 지킨 이장렴도 대단하지만 인재를 알아본 흥선대원군 또한 훌륭하다. 오직 나라를 생각하는 충신과 지혜로운 주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난 해에 시작된 나라의 혼란과 방황은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아무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 채로 지루한 줄다리기만 계속되고 있고, 애꿎은 시민들만 거리로 내몰려 촛불을 들고 있다는 자괴감마저 든다. 분명 새 해는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진정한 새 해는 언제나 밝아오려나? 요원하기만 하다. 서로 남 탓만 하면서 자기 잘못은 감추려고만 하는, 비겁한 지도자들로 넘쳐나는 이 나라의 실태가 실로 한심스럽다.

‘KFC 할아버지’로 유명한 ‘커넬 할랜드 샌더스’. 그는 6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페인트공, 타이어 영업, 유람선, 주유소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어느덧 40대가 된 그는 평소 요리 실력을 살려 자신만의 조리법으로 만든 닭튀김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요식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장사가 잘되는 듯 하였으나 곧 시련이 닥쳤다. 식당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어버렸다.

이후 어렵게 재기해 다시 식당을 오픈했지만 바로 옆에 고속도로가 놓이게 되면서 찾아오는 손님이 하나도 없게 되었고, 가게는 곧 경매에 넘어갔다. 65세 노인이 된 그는 가진 거 하나 없이 힘든 삶을 살게 되었다. 그에게 있는 돈이라곤 사회보장금으로 지급된 105불이 전부. “105불을 가지고 무엇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다 늙어서 무슨...”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포기와 체념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힘들지만 낙심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낡아빠진 트럭을 끌고 다시 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꾸준히 개발해 온 독특한 조리법을 팔아보기로 했다. 트럭에서 잠을 자고 주유소 화장실에서 면도하며 미국 전역을 돌았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그가 믿었던 소중한 꿈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영업을 위해 찾아가는 식당마다 그의 소스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다.

실패하면 방법을 달리해서 또 도전했다. 할 때까지, 될 때까지, 이룰 때까지... 무려 1,008번이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1,009번 째에 자신의 조리법을 받아들인 식당을 찾아냈다. 오늘날 ‘KFC 1호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65세의 나이... 105달러라는 턱없이 적은 사업자금... 1,008번의 거절... 우리는 지금 막 새 해를 시작했다. 그런데 도전이 두려워 미루고 있는 일들은 없는지, 정신 바짝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자.

성공을 이룬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많은 좌절과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것과,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성공자의 모습과 자신의 얼굴을 비교해보자. ‘커넬 할랜드 샌더스’는 말한다. “훌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이 시점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주지해야 할 일이다. 우리에게 정녕 중요한 삶의 덕목은 바로 ‘실천하는 행동력’이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안영’은 왕에게 간언하는 재상이었다. 어느 날 한 신하를 본 왕이 안영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 같은가?” 그러자 안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사람은 전하의 의견에 장단을 맞추지 않고, 단순히 동조할 뿐입니다.” 왕이 궁금한 듯 다시 물었다. “장단을 맞추는 것과 동조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안영이 대답했다. “장단을 맞추는 것은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비유컨대 국물과 같습니다. 고기, 양념, 소금 등을 넣어 끓여,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는 맛을 내는 것이지요.”

왕은 더 궁금해져서 말했다. “음... 계속해 보아라.” 안영은 이어서 대답했다. “사람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전하가 긍정하는 것 속에 부정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려내서 전하의 긍정을 완전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거꾸로 전하가 부정하는 것 속에 긍정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려내서 전하를 옳지 않은 부정에서 구하는 것이 조화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전하가 긍정하는 것을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을 부정하니 그것은 동조하는 것이지 조화가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동조하는 사람을 곁에 가까이 둔다. 자신의 의견에 무조건 찬성하는 사람, 자신의 행동을 무조건 칭찬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만족해한다. 그러나 이렇게 달콤한 말만 속삭이는 자와 함께하다 보면, 흐르는 강물이 고이게 되면 그만 썩게 되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혜가 사라지게 된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동조하는 이가 아니라 조화로운 이를 곁에 두어야 한다. 옳은 것은 옳다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는 자를 곁에 둘 때 지혜로운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다.

세월이 참 빠르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을 덧없는 세월에 마음까지 따라가지는 말자. 세월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무거운 짐만 싣고 오지 않았던가? 무거운 짐, 빨리 벗어 버리려 애쓰지 말자. 세월은 우리 곁을 떠나갈 때도 그 무게를 짊어지고 가지 않던가? 무엇을 얻고 잃었는가를 굳이 되새김 할 필요는 없다. 이룬 것도 없이 나이 한 살 더 늘어났다고 책망하지도 말자. 욕심은 끝 없는 갈망일 뿐, 만족이란 없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자. 한 톨의 쌀이 모아지면 한 말이 되고, 한 말이 모아지면 가마니가 필요하듯, 우린 마음만 가지면 언제나 무거운 짐도 벗어버릴 수 있다. 나눔을 아는 마음은 가벼운 삶을 걸어갈 수 있다.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훈훈한 마음으로 세월을 이끌고 가자.

강물같이 흘러만 가는 세월에 나이가 깊어간다. 뒤 돌아보면 아쉬움만 남고, 시작점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또한 세월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인생을 음악처럼 살다보면, 저마다의 시기와 기간이 있듯이 인생에는 수많은 갈피가 있다. 인생의 한 순간이 접히는 시간의 갈피, 그 사이사이를 사람들은 세월이라 부른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아지면서 부터 그 갈피들은 하나의 음악이 되어진다.

자신만이 그 인생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무렵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계절의 갈피에서 꽃이 피고 지듯, 인생의 갈피에서도 후회와 연민과 반성과 행복의 깨달음이 피어나는 것 같다. 먼 훗날, 인생이 연주하는 음악을 후회 없이 들을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다. 그것이 새 해를 시작하는 화두다. 우리 모두가 시작해야 할 새 해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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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꼬시의 겨울은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에 닿아 있다.
칸꼬시의 겨울은
삼포능자의 빙점과 설국으로 통한다.
칸꼬시의 겨울은
팻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다.
그래서 칸꼬시의 겨울은
유난히도 눈을 많이 내리운다.

창밖에는 지금도 밤눈 오고요,
함박눈 펑 펑 밤 새 오는데

꼬치 굽는 연기와 구수한 냄새,
제법 운치 있는 음악과 그럴듯한 색전구,
근심 걱정 덮어주는 흥겨운 소주판,
주객이 전도되는 가족적 분위기,
인간미 묻어나 어우러지는 대화들,
너, 나, 우리, 모두

칸꼬시의 겨울에는 술이 지천으로 익는다.
칸꼬시의 겨울이면 눈이 지천으로 익는다.
칸꼬시의 겨울에선 밤이 지천으로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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