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9집. 돼지 껍데기  


  "9집. 돼지 껍데기"
1998년 6월17일의 이 詩集을 끝으로 하여
더 이상은 詩集을 출판하지 않았으니
현재까지의 마지막 詩集인 셈입니다.

52편의 일반詩와
童詩集 '자라는 나무가 되어'에서
비교적 성장한 수준의 어린이들에게
권장할 만한 내용으로 사료되어 발췌한
39편의 童詩를 선별,
'童詩모음 코너'를 뒷부분에 덧붙여 편집한 詩集입니다.

특별한 독자층을 확정하지 않았기에
詩集의 성격이 약간은 애매모호한 관계로
독자들에게 '무리수를 두었다'는 비판과 아울러
그리 좋은 작품평을 듣지 못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긴 시간이 흐르도록
더 이상의 詩集을 출판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詩集입니다.
[ 초롱불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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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르시스의 새벽 *



시작노트

" 카타르시스의 새벽 " 詩作 note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7080가요 중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애절한 여가수의 독특한 창법으로 널리 알려진 국민가요 중의 하나이다.
제목 자체에서 풍겨지는 뉘앙스 만으로도 바로 남녀의 특성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나타내고 있다는 걸 쉽사리 알 수 있다.
이별이라는 전제라면 남자는 떠나가고 여자는 남겨져 기다린다는 역할 분담이다.
이별 앞에서라면 누구나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 별 하자 없이 받아들일 현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라고 하여 서로의 입장을 바꾼다면 어떨까 ?
아마도 그런 제목은 아무도 인정 못할 것이다.
어쩌면 미풍양속을 해치는 선동적 가요라고 하여 금지곡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가 배처럼 사방팔방 마음대로 돌아치고 남자는 항구인 양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런 여자를 다소곳하게 기다리고 있는다 ?
에이! 한 마디로 언어도단이고 어불성설이다.
그런 모양새의 노래라면 애저녁에 유행될 리도 없다.
그러니 고금동서를 통해서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가 이 노래의 제목에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는 거라고 여긴다는 건데 과연 시절의 흐름을 망각하는 필자의 망상이며 망언일까 ?
아무튼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고 사회의 풍조가 날로 변화하는 현대에 와서는 남녀의 구분이 애매모호해지고 어느 분야에서나 성별의 차이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오늘날이기에 구태여 남성의 역할이니 여성의 몫이니 하는 구태의연한 구분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런 연결선 상으로 여성의 인권을 부르짖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버린 과거사의 외침이 되어졌고 남녀 평등의 시대를 넘어서더니 오히려 여성 상위 시대의 현상이 도처에서 심심챦게 보여지고 있는 이 시기에 새삼 남녀의 구분을 논하자는 건 더더욱 아니다.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많은 분야에서 분명히 여성의 역할이 남성의 영역을 넘어서서 이미 수많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맡은 바 책임과 업무를 잘 수행해내고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는 해도 막상 그 점을 증거로 제시하여 막무가내로 남녀의 구분을 완전히 다 허물어버리자니 왠지 뭔가가 좀 부족하고 괜히 허망하다.
감성적이며 낭만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주어야 할 어떤 영역에서라도 그냥 좀 내버려두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니,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스럽게 입장 정리되어 서로를 바라보면서 따스한 마음으로 교감하며 사랑하고 보듬어주는 각자의 역할이 아직도 어딘가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
축복받는 남녀의 결합과, 서로를 의지하고 안아주는 사랑 안에서 영원한 행복과 안락이 싹틀 수 있는 터전이 만들어지고 기쁨도 쑥쑥 자라나는 것이라면 말이다.
물론 그 마저도 관점에 따라서 해석의 각도가 다를 수는 있다.

최근의 발표를 보면 ‘돌싱(돌아온 싱글)녀’와 초혼 남성이 결혼하는 건수가, ‘돌싱남’이 초혼 여성과 결혼하는 건수를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청은 얼마 전 이런 내용을 담은 ‘우리나라의 이혼 재혼 현황’을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지난 해 여성의 재혼 건수는 56만 5천건이고 남성의 재혼 건수는 51만 1천건으로 집계되었다.
여성의 재혼 건수는 1982년에는 17만 2천건으로 남성의 26만 4천건에 훨씬 못미쳤었으나 1995년부터는 여성의 재혼 건수가 남성을 추월한 상태이다.
게다가 지난 해 초혼 남성과 돌싱 여성의 혼인 건수는 1만 8천 900건으로 초혼 여성과 돌싱 남성의 결합인 1만 3천 500건 보다 5천 400건이나 많았다.
초혼 남성과 재혼 여성 부부의 구성비는 1982년 15.1%에서 2012년 26.9%로 11.8%포인트 늘어난 반면 남자 재혼과 여자 초혼 부부의 구성비는 44.6%에서 19.2%로 추락했다.
이는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아진데다 출생 성비 불균형으로 혼인 적령기 여성 인구(27~31세)가 부족한 영향이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마치 불변의 전통처럼 내려오던 풍조 중의 하나인 ‘여필종부’라는 사자성어는 이제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구습이 되어진지 오래이다.
어떤 식이든 일단 결혼을 해서 시집으로 호적을 옮긴 여성은 본인의 행과 불행은 고사하고 남성의 유고나 존재유무를 떠나서 무조건 시집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강제 관념에 종지부가 찍어진 것이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IMF)를 거치며 급증했던 이혼이 ‘이혼 숙려제’ 도입 등으로 감소하는 가운데 60대 이상의 ‘황혼 이혼’은 되레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통계 자료나, 50대 이상의 ‘황혼 재혼’이 급증했다는 발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난 해 60세 이상 남성의 이혼 신청 건수는 8500건, 여성은 4100건을 기록했다.
30년 전에는 남성과 여성이 각각 1800건, 400건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또한 재혼 여성 중 50대 이상 비중은 1982년 6.0%에서 지난해 21.8%로 늘었는데 물론 같은 기간 재혼 남성 가운데 50대 이상의 비중도 15.5%에서 35.6%로 확대되기는 했다.
아무튼 현재 이혼과 재혼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크게 바뀌고 있으며 여성의 인생관이 자식이나 주변 이목 보다는 개인 생활과 노후 행복에 방점을 두면서 이혼과 재혼을 시도하는 여성이 급격하게 늘고 있는데 결국은 혼인 시장에서도 여풍이 당당하게 불고 있다는 방증임에 틀림없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결혼과 가족 제도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이 해체되면서 요즈음 안방극장의 TV 프로그램 트렌드도 달라지고 있다.
높은 시청률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일일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고, 일부 드라마는 시집살이 대신 호된 처가살이를 조명한다.
그런가 하면 일부 채널에서는 가족 단위 시청자 대신 1인 가구를 겨냥한 프로그램을 내놓기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재혼’ ‘나홀로족’ ‘처월드’ 등 3가지 키워드가 요즘 안방극장의 주트렌드라고까지 불리고 있는 것이다.
대충 살펴보아도 단순한 이혼을 넘어 재혼은 요즘 드라마의 주된 소재이다.
사극을 빼면 방영되고 있는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 재혼했거나 재혼을 앞둔 등장 인물들이 비중있게 등장한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어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가와의 갈등으로 이혼했으며, 최근에는 자신을 짝사랑하다 암에 걸린 남성과 재혼한 상태라는 내용이 주된 설정이고, 같은 시간대에 방송하다 근래 종영한 어떤 드라마에는 재혼으로 이어진 4남매가 가족애를 쌓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 전개된 드라마가 있었다.
그리고 ‘시월드’ 보다 막강한 ‘처월드’도 요즘 방송에서 유행하는 또 다른 가족 트렌드다.
기존의 어떤 ‘부부 토크쇼’는 올해 6월부터 ‘백년 손님’이라는 부제를 달고 유명인 사위와 장모 사이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를 관찰 카메라 형식으로 내보내고 있다.
어떤 주말드라마는 시집살이 못지않은 처가살이를 하는 큰사위와 장모의 갈등이 주요 에피소드로 다루어지고 있다.
결혼을 규범으로 여기던 시기가 지나고 개인주의가 강해지면서 시청자도 재혼과 1인 가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으며 이러한 처가살이의 부각은 실추된 오늘날의 남성의 사회적 위상 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변화한 가족상은, 전해 내려오던 전통적 가부장제에 대한 거부감이 오늘날에 와서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제는 남성의 독자적인 영역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만큼 아예 없어졌다고 해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그만큼 남녀 능력의 근본적 차이나 성적인 구분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음이다.
이른바 ‘유니섹스’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던 시절만 하더라도 남성 편중화되어 있던 분야로 점차로 진행되어 나가는 여성의 영역 확대나, 여성 고유의 이미지를 벗어나 중성화되어지는 생활의 패턴이 조금은 낯설게 여겨지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래서 어떤 직업이나 호칭 앞에 여성의 경우 접두사처럼 ‘여류’ 라는 말을 덧대어서 사용하거나 꼭 ‘여’자를 붙여서 불렀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당연시 되어진지 오래이니 구태여 ‘여사장’이니 ‘여형사’니 ‘여배우’니 할 이유도 없고 ‘여류명사’니 ‘여류작가’니 하는 표현도 따로 분류할 필요가 없다.
단지 원론적인 성별의 구분이 요구되는 경우에만 나누면 되는 것이다.

요즘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여군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어떤 분야 보다도 전쟁이나 군대라는 특수한 집단에서는 강한 남성의 역할이 특별히 존중되며 필요시된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군인과 여성이라는 관념의 연결은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부당하다.
육체적으로 고되고 과격한 훈련의 반복과,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의 극복이라는 면에서 시작되어 궁극적으로 군인의 필수 조건이 완결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통념일 게다.
그런데 막상 여군의 숫자와 분야별 분포가 늘어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결론을 보면 신체적으로 결코 여성이 약하지 만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성이 지니지 못한 감수성이나 세심함마저 두루 갖춘 여군의 효용성은 지금까지 갖고 있던 통설을 완벽하게 뛰어넘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병영 문화의 창조나, 통제되고 폐쇄된 군생활의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정도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수준이 되었다.
100년 넘게 유지해 오던 징병제를 2010년 7월 폐지하고 모병제를 도입한 ‘스웨덴’이나 아예 ‘여성 병역 의무화 법안’을 마련하라고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노르웨이’,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절대 강국 ‘이스라엘’의 경우 등을 보면 오늘날 군사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군대 내 여성의 수와 역할을 확대하려는 것은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반적인 추세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공식적으로 국가 선언을 한 1948년 이전부터 여성 징집을 실시해온 이스라엘의 여군 비율은 총 인구의 30%에 달한다.
이는 남성은 10명 중 7명, 여성은 절반이 징집된 결과이다.
18세가 된 이스라엘 여성은 자국 남성(3년)보다는 짧지만 한국 남성의 의무 복무 기간 보다 긴 2년 동안 ‘이스라엘 방위군(IDF)’에서 복무하는데 6주간의 기본 군사 훈련 후 통상적으로 서무나 통신ㆍ전자, 운전ㆍ정비, 각종 교관, 헌병, 복지, 경찰 등 비(非)전투 병과에 분포되어 있다.
이스라엘 국방부 관계자는 “여성들은 ‘장기간 관찰’ 같은 분야에서 남성보다 탁월하다. 그래서 감시나 관찰과 관련한 보직이 여성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투병으로서 여성은 한계가 있지만 성별 특성에 맞는 보직을 맡긴다면 군대 전체의 전력이 크게 상승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남을 설득해야 하는 정신 교육이나 인사, 전투 지원 등에 해당하는 임무의 경우 꼼꼼하고 치밀한 여성에게 강점이 있는 만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현대전에서는 적을 섬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우선돼야 하는 게 점령지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므로 이기는 전쟁을 위해 사람과 소통하는 데 장점이 있는 여성의 군 참여를 확대하는 것도 나름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여군이 늘어나면 우선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군의 조직 문화이다.
군대의 특징으로 꼽히는 극단화된 남성 문화가 깨지면 자연스레 이와 결부된 비효율성 등도 더불어 극복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군대 내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이나 인권 침해는 남성의 지배적인 조직에서 흔히 드러나는 남성우월주의나 권위주의, 경직성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이스라엘 같은 강군이 되려면 병사 개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하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를 원천적으로 주도해갈 수 있는 게 바로 여성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군 확대는 사회 전반의 양성 평등 실현과 함께 여성 능력의 최적화 방안 관련 정책 수립에 획기적인 성과와 진전을 거둘 수 있다.
그렇다고 앞뒤 없이 단편적으로 무조건 여성을 군대로 보내 힘든 짐 나누어지자고 필자가 무리한 시대적 선동을 획책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단지 극한적인 남성만의 구역으로 여겨지던 군대에까지 여성의 역할과 효율성이 보다 더 극대화될 여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올해 ‘노벨 평화상’ 유력 후보였던 ‘파키스탄’의 여성 교육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16)’가 상을 받지 못하게 되자 전 세계 곳곳에서는 아쉬움이 터져나왔다.
말랄라를 지원해온 측은 그녀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발표 직전 ‘유럽 의회’가 주는 최고 권위의 ‘사하로프 인권상’을 받았으니 내친 김에 노벨 평화상까지 받기를 기대해왔다.
파키스탄에서 여성 교육권을 주창해 온 말랄라는 작년 10월 9일 통학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탈레반 무장대원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았다.
다행히 총알이 뇌를 빗나가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현재 수술과 치료를 받으면서 ‘영국 버밍엄’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다.
말랄라는 수상자 발표 이후 성명을 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OPCW’는 전 세계 화학 무기를 없애기 위해 현장에서 활동하는 중요한 조직”이라며 “그들이 국제 사회로부터 마땅한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해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호의를 베풀어준 전 세계 모든 이들과 파키스탄 국민과 언론에 감사한다. 앞으로도 어린이의 교육권을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이며, 사람들이 내 뜻을 계속해서 지지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앞서 말랄라는 파키스탄의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직 노벨상을 받기엔 충분치 않으며 여전히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겸손한 태도를 보인 바 있다.
물론 “말랄라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는 말랄라를 사랑한다. 이미 말랄라는 우리의 영웅이 됐기 때문에 노벨 평화상을 못탔다 해도 크게 상관 없다”고 말하는 어느 학생의 표현처럼 그녀의 수상 여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오늘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지도자의 반열에 나이 어린 소녀가 어엿하게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그 사실이 기성세대의 모두를 숙연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의 시작 노트를 적으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시선으로 보여지는 여성관을 비교적 장황하게 나열하였다.
물론 제한된 지면에 더 이상의 자세한 추론을 이어가기는 힘들다.
그래서 어떠한 결론이나 맺음말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여성의 존재 가치를 단편적으로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하자는 필자의 제안은, 지금까지는 별다른 의미나 생각을 부여하지 않고 의례껏 여성이니까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여겼던 많은 장단점들이, 여성이기에 앞서 당연히 존중되어야 할 인격과 인권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개념 정립을 다시 할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시대적 관점이 필요할 것이고, 사회에 만연된 그릇된 시선이 아직도 있다면 거기에 일침을 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어떤 ‘이탈리아’ 고급 브랜드는 2011년부터 여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10분 분량의 ‘여성의 이야기(Women’s tale)’ 시리즈를 매년 두 편씩 발표해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흑인 여성 최초로 감독상을 받은 시리즈의 제작자는 “영화 제작은 우리 브랜드가 여성의 삶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며 “영화에 우리의 브랜드인 옷이 나오긴 하지만 부수적인 것일 뿐이며 근본적인 영화의 주제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영상과 스토리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자사의 브랜드 철학을 알리는 ‘브랜드 필름’이 최근 새로운 마케팅 수단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브랜드 필름은 제품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과거의 노골적인 ‘애드 무비(광고 영상)’나 드라마에 제품을 노출하는 ‘간접 광고(PPL)’와는 내용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최근에는 ‘제품을 얼마나 잘 보여줄 것인가’ 보다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를 어떻게 다르게, 다양하게,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줄 것인가’가 더 핵심적인 마케팅 목표로 떠오르고 있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오늘날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사회 현상의 대변이며 그 대표적인 화두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바로 ‘여성’이다.
모름지기 ‘여성’은 영원한 마케팅의 목표인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모든 꿈의 절반 이상이 ‘여성’의 몫이며 그 ‘여성’이 오늘과 내일의 역사와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 주체임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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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으로 임 가시네
나 예 두고 그냥 가시네,
잠에선 진즉 깨어났건만
자는 체 하는 걸 임은 모르시지

잘 가시라 -
짧은 인사조차 매듭짓지 못하고
뒷모습 보기도 전 쏟아질 눈물인걸

겨울로 난 길 따라 바람이 불고
머리내음 가시지 않은 베갯머리에
소리 없는 그림 그려 얼룩이 지면
세 평 누리 드리워진 고적의 바다

몸은 가도 마음 예 두니 정작 이별은 아니라,
말도 안되는 위로로 체면치레 대신 마오
남겨지는 외롬이 얼마나 커도,
속으로 속으로 가슴 하마 해져도,
차마 붙들지 못하는 걸 임은 정녕 모르시오

찬 서리 매운 바람 한 움큼 던져놓고
마음 얹어 남겨 둔들 무삼 소용 있으리,
정녕 이별 아닐지라도 임 가시고 예 없거늘....

메아리, 그림자, 흔적, 카타르시스 -
안개 짙은 새벽으로
긴 긴 여운 또 솟아나
긴 긴 하루 또 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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