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위로 이동

* 시온의 평화 *



시작노트

" 시온의 평화 " 詩作 note

성서에는 발음하기 어려운 명칭들이 많이 나오지만, ‘시온’은 짧고 말하기 쉽다.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는 수많은 찬송가와 시에서 그 이름을 언급한다. 미국의 거의 모든 도시마다 시온 혹은 ‘시온 산’이라는 명칭을 단 교회가 있으며, 시온이라는 도시도 몇 개 있다. ‘유타 주’에는 ‘시온 국립공원’도 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작은 산이다. 해발 약 790m 정도이며, 시온 본연의 뜻은 ‘요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예루살렘의 남동쪽, 혹은 남서쪽이라고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 원래 ‘여부스족’의 땅이었으나 ‘다윗’이 빼앗아 ‘다윗 성’이라고 알려졌다. 다윗이 ‘언약궤’를 그곳으로 가져간 탓에 시온은 신성한 이미지를 얻었다. 후에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야훼의 성전과 거대한 궁전을 건설하여 ‘유대 민족’의 생활과 신앙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시온이라는 이름은 신의 성전이 있는 장소를 나타내게 되었다. 실제 성전은 ‘모리아 산’에 있었다. 그 뒤 시온은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에는 유대인 망명자들이 이스라엘의 고향을 가리켜 시온이라고 불렀다. ‘시편’을 보면 유대인 망명자들이 시온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시편에는 예루살렘보다 시온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온다. 시편을 비롯해 성서에 시온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시온이 단지 하나의 산이나 도시에 불과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시온은 신의 존재를 상징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시온의 아들 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통적 유산이다.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의 나라를 세우려 한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운동은 1890년대에 시작되었으나 시오니즘이라는 명칭은 지금도 이스라엘 국가를 보존하려는 유대인들의 노력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성서’에서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시온을 다르게 바라보았다.

시온은 ‘지상의 장소’가 아니라 ‘천상의 장소’이고 신도들의 진정한 고향이었다.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시온 산이 지상의 한 장소가 아니라 영적인 장소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시의 주장과는 전혀 연관점을 찾을 수 없는,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필자가 감히 시온을 언급할 수 있는 이유다. 지금도, 이 시간에도 시온은 존재한다. 우리들의 영 속에.

비단 이것의 의미에 종교적인 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나약하고 미완성의 존재인 인간에게는 믿고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영원불멸의 절대자일 수도 있고, 전지전능한 신일 수도 있다. 아무튼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이나, 늘 무력감과 부족함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질곡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진정한 의미의 피난처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만들어놓은 신앙과 믿음이 때로는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인간 내면의 도덕이나 규범보다도 우선하는, 그리고 법률이나 규칙보다도 우위에 있는 지향점의 끝에 종교는 오롯이 존재한다. 영원히 이어질 영생을 향한 로망도 절대자를 향한 신앙의 꼭지점에서 비로소 촛불처럼 피어난다. 스스로를 비판하고 징치하는 꾸짖음이나 깨달음까지도 초월하는, 올바른 진리의 얼굴이 바로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신의 형상이며 모습이다. 우리가 언제까지라도 마음으로 그려내는 가장 친근한 그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조심스레 생명을 이어간다. 그게 삶이다.

살아있을 동안만이라도 자신이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고 싶어 허덕이면서, 무척이나 애를 쓰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비록 길지 않은 삶이 끝나고 영원한 잠에 빠지는 것이 거부할 수 없도록 주어진 숙명이지만, 우리에게 부여된 삶의 시간만큼은 언제나 가장 소중하고 최고로 의미 있는 시간들이어야 한다. 얼마 전, 영안실에 안치됐던 80대 노인이 되살아나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노인은 일주일간 자식들의 극진한 효도를 받다 다시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못했다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

누구에게나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다. 몇 번을 되살아나도 결국은 그 끝에 이별의 시간은 엄연히 존재한다. 어쩌면 그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지 모른다. 부모님의 하늘나라 휴가를 바라기 전에, 후회 없이 효도하고, 후회 없이 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얼른 말씀드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고 말한 ‘조지 앨리엇’의 독백을 기억하게 된다.

‘정채봉’ 시인의 시를 인용한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 아니 아니 아니 아니 / 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 /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 원이 없겠다 //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 젖가슴을 만지고 /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 숨겨놓은 세상사 중 /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 엉엉 울겠다”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의 엄마가 되살아나는 게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자신이 하늘나라로 갈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레 다시 만나게 될테지만, 잠시 동안의 이별이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만큼, 우리의 순간 순간을 정말 알차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한 부자가 하인과 함께 여행할 때였다. 어느 날 보니 흙이 묻은 신발이 다음날에도 여전히 더러워져 있기에 하인을 불러, 앞으로는 신발을 잘 닦아 놓으라고 했다.

그런데 하인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신발을 닦아 봤자 주인님께서 나들이를 하시게 되면 다시 더러워질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 날 오후, 어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부자는 식당 주인에게 1인분의 식사만 주문했다. 하인은 당황해하며, 주인님을 모시고 다니려면 자기도 식사를 해야 한다며 배가 무척 고픈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하인의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녁은 먹어 뭣하나? 내일이면 다시 배가 고파질텐데...” 하인은 아침에 했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흔히 등산하러 다니는 사람에게 “어차피 내려올 산 뭐하러 올라가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우리 인생이 그렇다. 어차피 다시 배고플 거지만 매 끼를 맛있게 먹고, 어차피 더러워질 옷이지만 깨끗하게 세탁하며, 어차피 죽을 걸 알지만 죽지 않을 것처럼 열심히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끝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 끝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모양은 모두 다르다. 얼마나 성실하게 매 순간을 살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성실함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관대함의 잣대로 남들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각오와 다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은 사랑했던 여인이 떠나고, 난청이 찾아오면서 한 때 절망에 빠졌다. 현실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어느 수도원을 찾아갔다. 수사를 찾아간 베토벤은 힘들었던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나아갈 길에 대한 조언을 간청했다. 고민하던 수사는 방으로 들어가 나무 상자를 들고 나와 말했다. “여기서 유리구슬 하나를 꺼내보게.” 베토벤이 꺼낸 구슬은 검은색이었다.

수사는 다시 상자에서 구슬을 하나 더 꺼내보라고 했다. 이번에도 베토벤이 꺼낸 구슬은 검은 구슬이었다. 그러자 수사가 말했다. “이보게, 이 상자 안에는 열 개의 구슬이 들었는데 여덟 개는 검은색이고 나머지 두 개는 흰색이라네. 검은 구슬은 불행과 고통을, 흰 구슬은 행운과 희망을 의미하지. 어떤 사람은 흰 구슬을 먼저 뽑아서 행복과 성공을 빨리 붙잡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네처럼 연속으로 검은 구슬을 뽑기도 한다네. 중요한 것은 아직 여덟 개의 구슬이 남아 있고, 그 속에 분명 흰 구슬이 있다는 거야.”

‘행복 총 양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같은 양의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고통스러운 일만 많았다면 이렇게 생각하자. ‘앞으로는 행복할 일만 남았다...’ 그것이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다. 이 세상에 언제까지 계속되는 불행이란 없다. 불행의 시기가 지나가면 반드시 언젠가는 행복의 때가 찾아온다.

10년째 ‘만성 가성 장 폐쇄 증후군’으로 먹지도, 소화시키지도 못하는 ‘예지’라는 아이가 있다. 수차례의 대수술과 시술로 인해 지쳐있으면서도, 노숙인들에게는 김밥 나눔을, 어린이 병동에 있는 친구들에게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선물했던 누구보다 눈부셨던 아이, 그런 예지는 병원에서 봉사하는 직원들을 만나면 삼촌, 이모라 부른다. 봉사자를 만날 때는 아픈 표정보다 웃는 미소만 보내주었던 천사 같은 아이다.

특유의 긍정적인 마음으로 병마와 잘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예지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고 한다. 현재 ‘패혈증’으로 전신에 ‘감염 수치’가 올라간 상태이며, 한 차례 ‘심정지’까지 왔던 상황이란다. 소식을 듣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직 예지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다. 지금 의식이 없는 채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예지가 다시 회복되어 밝은 미소를 되찾을 수 있도록 두 손을 모아 기도한다.

엄마는 면회 시간이 될 때마다 삼촌, 이모들이 보낸 문자를 예지에게 읽어준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예지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지만, 천사 같은 예지에게 기적이 일어난다면 참 좋겠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주변의, 바로 나 자신의 일들이 운명처럼 다가와 우리를 힘겹게 할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일들이 해피엔딩으로 종결되는 건 아니지만, 절실한 우리의 바람과 기원이 있으면 우리의 앞날은 꿈과 소망으로 차근차근 메꾸어질 기회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소중한 가족들에게 사랑과 성원을 기울이면서, 주어진 삶의 역경을 너끈히 헤쳐나가는 우리의 모습들이야 말로 결국은 자신의 힘이 되고 근본이 된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족간의 사랑이 있어서 우리의 내일이 덜 힘 든 것이다. 필자와 상담을 하던 어떤 여성의 고백이 심금을 울리기에 지면에 옮겨본다. -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께 지어드린 별명은 ‘변태’였습니다. 한여름만 되면 아버지는 속옷만 입고 제 옆에서 주무셨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변태야!”

엄마도 딸 옆에서 뭐 하는 거냐며 나무라셨습니다. 아버지는 여름이면 왜 속옷 바람의 맨 몸으로 제 옆에서 주무시고, 변태 아빠라는 별명에도 아무런 변명을 안 하시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안계시지만, 이제 저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찾았습니다. 일기장을 읽는데 갑자기 눈물 섞인 웃음이 나왔습니다.

‘여름에 모기향을 피워놓으면 딸이 잔기침을 하기에 잠자기 2시간 전에 모기향을 피웠다가 아이가 잠들 때는 끈다. 그래도 모기들은 극성이다. 어떤 날은 모기들이 계속 윙윙거려서 밤새 한 숨 안자고 딸 옆에서 모기를 잡았다. 딸을 위해서라면 하나도 힘들지 않다. 다만 다음날 회사에서 온종일 졸게 돼서 문제다. 그래서 꾀를 내었다. 딸이 잠든 옆에 팬티만 입은 맨 몸으로 눕는 거다. 그렇게 하니까 모기들이 딸 대신 나를 문다.

“아빠는 변태야!” 딸은 사정도 모르고 아침에 깨서는 나를 근처에도 못오게 한다. 아내도 딸 옆에서 뭐 하는 거냐며 질책한다. 얼굴이며 팔다리에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고, 물린 곳이 가려워 수시로 긁고 있으니 회사 동료들이 저보고 피부병이 있냐면서 싫어한다. 어떤 오해를 받아도 좋다. 사랑하는 내 딸아이가 밝고 활발하게,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커 주기만 한다면... 좋은 집보단 좋은 가정을, 부자 아빠보단 친구 같은 아빠가, 재산보다는 사랑을 물려주고 싶다. 사랑한다, 딸아...’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에서 빛바랜 기억 속의 아버지를 봅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언제나 남들에게 베푸셨던 아버지... 비싼 선물을 사주진 못하셨지만 값진 추억을 만들어주셨던 아버지... 많은 재산 보다 진실한 사랑을 물려주고 싶던 아버지셨습니다. 이제 그 분의 얼굴 뿐 아니라 마음마저 닮아가는 나를 보게 됩니다. 나도 내 아이에게 그런 부모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랑의 치료약은 없다. 이것이 가족의 얼굴이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들이 하나씩 모여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사회로 나아가는 문을 만들고, 길을 닦아주는 것이다. 우리의 든든한 반석이 되고,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인 시온이 되고, 우리에게 평화의 지표가 되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하모니가 피어나는 요람이 바로 가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사랑을 넉넉히 나누어주는 것 뿐이다.
어느 젊은이가 매일 통근 기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을 했다. 기차 노선에 경사진 언덕을 오르는 곳이 있었는데, 여기를 지날 때면 속력이 떨어져 철로 옆에 있는 집 안이 들여다보이곤 했다. 그런데 수많은 집들 중 어떤 한 집에 늙은 노인이 항상 누워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그 모습을 본 젊은이는 가슴이 아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노인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 병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카드를 보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날마다 언덕 철길을 통해 출근하는 한 젊은이가” 라고 써서 보냈다. 며칠이 지났다. 그 날도 출근길에 젊은이는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방은 텅 비어 있고 창가에는 램프가 켜져 있었다. 유리창에는 큰 글씨가 씌어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 종이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그대에게 축복을” 이란 글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물질적인 빚은 물질만 준비되면 언제라도 갚을 수 있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사랑의 빚은 아무나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아름다운 사랑을 넉넉히 나누어주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 그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해주는 일, 그런 일들이 모여 세상을 더욱 밝게 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받은 줄 아는 사람만이 줄 수 있다고 한다. 태초에 사랑으로 잉태되었고, 부모님의 육신을 빌어 세상의 빛과 만난 우리는 그 자체로 사랑이라는 이름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줄수록 넘친다고 한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말이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서로에게 미소가 되어보자. 어제보다 조금 더 겸손해져서 서로서로 대할 때 얼굴에 가득한 미소가 되고, 그 미소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그 이상이 되어,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아침에 우리는 부드러움으로 하루를 열어보자. 목소리를 조금 더 부드럽게 하여, 듣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화평해지고, 그 화평한 마음들이 동료가 되고, 이웃이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나 행복할까? 우리가 맞이하는 매일의 아침이 어느 한 날 소중하지 않은 날은 없겠지만 내가 좀 더 겸손하고, 부드러움으로 아침을 맞이하여 만나는 이에게 미소가 되고, 화평함이 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행복할까?

고통은 나눌수록 가벼워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하던가? 만나는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고, 그 행복을 되돌려 받는 매일 매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영혼 안에, 가까운 우리의 주위에, 멀리로 퍼져나가는 세상 속에, 아름답고 영원한 시온성이 튼실하게 쌓아진다면 정말 좋겠다. 그 시온성의 평화를 이야기하며, 서로 열심히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언제까지라도 오손도손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신나겠다.


" 시온의 평화 " 詩作 note 닫기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안즉은 그 언덕에 城이 있기 훨씬 전이었네라
시온에 흑암만 있어서
누리에 비 오시는데, 바람 부는데,

인간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져
온누리 적시는 걸
겨우 역사라고 부르더니만,
사연들 한 소절 한 소절이 맺어져
한세상 덮이는 걸
한껏 신앙이라고 받들더니만,

사무치는 고뇌에 몸부림 몸부림 하면서
쌓여가는 번뇌에 진저리 진저리 치면서
질곡 우에 전설로 탑 쌓았네라
음부 아래 신화로 터 닦았네라

그러다가, 그렇게 비루한 삶을
삶이라 여기며 살아내다가,
기적인 양 새롭게 하늘 여는 문 보여지니
영광이 삶의 또 다른 얼굴이었음을....

시온 城에 안개 걷히면
시온 城에 햇살 비치면
설운 고백 스러지고
찬미소리 환희로 울려지네
슬픈 사연 지워지고
기도소리 기쁘게 번져가네

어둡던 땅 축복으로 물씬 밝는 아침
시온의 평화 이제 열리네
빛으로서 우리, 부르시나니
저기 시온 그 城

펼치는 나래 깃에 평안의 쉼터 장만하고
내딛는 행보 마다 충만의 언약 마련하고
기다림의 긴 긴 계절
임마누엘 오시네,
시온의 아침언덕에 내리시네

 | 배경이미지 새로적용  | | 글자 크게 글자 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