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백설산 (純白雪山) " 詩作 note

한 겨울을 나타내는 색은 뭐니뭐니 해도 하얀색이다. 우선 대표적인 것이 눈이요, 얼음이니 온 천지에 하얀색으로 둘러쌓인 삶의 모습 자체가 백색누리다. 그래서 겨울에는 하얀 마음을 갖고 서로 보듬고 사랑하라는 권면의 말이 퍽도 자연스럽다. 밀가루, 설탕, 우유 등 하얀색을 띠고 있는 음식들도 겨울에는 다른 계절에 비해 한결 빛이 난다. 아마도 겨울이면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인지하는 마음까지도 하얗게 조화로울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맛깔스러이 여겨지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 불과 며칠 남지 않은 금년의 마무리 시점, 연말연시만 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분주하고 괜시리 하릴없이 겅중거리게 된다. 무슨 큰 일이나 치른 것처럼 잡다한 일상이 피곤하고 쉽사리 지치게도 된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어떤 계획이나 목표치를 대충이나마 매조지고 돌아올 새 해의 또 다른 일정을 구상하느라고, 그렇지 않아도 별로 맑지 못한 머릿 속이 뒤죽박죽이 된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짙은 회색이나 암갈색, 아니면 어두운 먹빛 투성이인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하얀색을 그리워한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순수, 순결의 하얀색으로 칠하는 하루의 일과가 밝고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은 체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오늘 추천시의 제목에는 그냥 하얀색이 아니라 ‘순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정말 새하얗게 눈이 내려 쌓인 산야의 모습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것도 더욱 특별한 나만의 시간, 아무도 밟지 않아 발자국의 흔적이 전혀 없는 새벽의 공간, 그 벅찬 첫 대면의 감동을 오롯이 주워담은 마음으로, 터질 듯 부풀어오르는 환희를 한껏 노래하고 싶었다. 수삼년 전 어느 겨울날에 적은 시인데 오늘 새삼 들춰보니 옛 감격은 그대로다. 모름지기 당시 마주친 ‘순백’의 세상을 기억 속에 깊이 각인시켜놓은 때문이리라.

물론 표현한 시어들이 난해하기도 하고 일반적인 사용 언어와는 달라, 시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다소 벽이 느껴지고 생소하게 다가서는 시일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 입장에서 대하기 쉽진 않을 거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좀 송구스럽지만 시를 천천히 소리내어 노래하듯이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귀찮더라도 사전을 찾아 궁금한 단어를 확인하면서 문맥을 이어가보시면 어떨까 생각한다. 오랜만에 국어 공부 하시는 셈 치고...

아무튼 목하 시간의 추가 너무나도 빠르게 내달리고 있는 연말 즈음이다. 한 해 삼백날 이상 이어온 삶의 시간들이 늘 똑같은 길이였고, 일정한 속도였을테지만 그 체감지수가 예전과 지금은 사뭇 다르게 여겨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못난 변명은 ‘시간이 없어서...’이다. 세상에 시간이 없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말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부여된 무형의 자산이다. 그렇지만 나태하자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풀어질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한 약속, 앞으로 5년 후에는 어떤 단계로 발전할 것이고, 그것을 위해 올 해에는 무엇을 할 것인지, 또 이번 달, 그리고 오늘, 무엇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끊임 없이 고민하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을 대충 보내고,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뤄두고, 하긴 해야 하는데 귀찮으니까, 술 한 잔 먹고 잊어버리고, 그러다 보면 내가 꿈꾸던 것과는 정 반대의 모습으로, 나락에 빠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둘러대는 변명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고 못된 것은 바로 ‘시간이 없어서’ 라는 변명인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가장 잘못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결코 시간을 무의미하게 방목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시간을 무책임하게 무방비로 늘어놓지도 말아야 한다. 나름대로의 철저한 시간 관리가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는 첩경이 될 수 있고, 올바른 길을 걸어나가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할 것이다.

“나뭇가지와 뿌리는 다르게 생겼을 거라 생각하지? 하지만 나뭇가지의 모양은 땅 속으로 뻗은
뿌리의 겉 모습과 같은 법이야. 그래서 자세히 보면 겉하고 속이 다른 사람은 없어. 그대로 티가 나게 돼 있거든. 음식도 마찬가지야. 오늘 음식이 부실하면 오늘 음식 만든 사람의 마음이 부실한 거고, 오늘 음식이 충실하면 그 음식 만든 사람이 충실한 것이야.” ‘임지호’의 ‘마음이 그릇이다, 천지가 밥이다’ 중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늘의 음식 맛은 오늘에 비롯된 맛이 결코 아니다. 어제, 그제의 음식 솜씨가 오늘의 음식 맛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오늘 갑자기 만들어진 맛이 절대 아닌 것이다. 예컨대 음식 맛은 손 맛이고, 손 맛은 마음 맛이다. 얼마나 마음을 기울여 반복하고 반복하느냐가 오늘의 음식 맛을 결정한다.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세상의 모든 나무들은 보이는 것과 꼭 닮은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배를 한곳에 멈추어 있게 하기 위하여 줄에 매어 물 밑바닥으로 가라앉히는, 갈고리가 달린 기구를 ‘닻’이라고 한다. 닻의 갈고리가 흙바닥에 박히어 배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인생이 시련에 직면했을 때 극심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내면에 있는 강력한 힘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누구나 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그 닻을 찾아야만 한다.

그 마음의 닻 속에서 시련을 견뎌내는 강인한 힘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거라는 믿음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부터 위험을 감수하고 인생을 바꾸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다의 파도처럼 인생의 시련은 무시로 다가온다. 그 때마다 닻을 단단히 내려놓지 않으면 배도, 인생도 파도에 휩쓸려 표류하게 된다. 내 안의 닻이 약하면 작은 파도에도 뒤집힌다. 거센 파도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 안의 닻을, 그 닻의 힘을 키우자. 그 힘에서 무한한 자신감을 찾자. 그러면 새 꿈이 보일 것이다.

나이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집어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치켜세웠고, 마흔에는 아이들을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고, 쉰에서야 바뀌어야 할 사람이 결국 자신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을 다 내려놓게 되었다. 바로 ‘지천명’의 논리다.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디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얼굴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얼굴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의 선택이 삶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실수하는 것이 정상이고, 신은 용서하시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사랑이란, 실수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깨달음이다. 사랑은 사람과 하늘이 나눠 가진 성품이다. 우리가 일을 하지만, 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다. 무엇 보다도 사람과의 관계가 참 중요하다. 자신을 내려놓기 전에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은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한 번 깨지면 회복하기가 힘들다. 관계가 고통스러운 까닭은 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을, 인간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수가 전공이고, 부족함이 특징이다. 이제 얼마 후면 올 해가 저문다. 우리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과제들, 달성하지 못한 목표들, 미완의 일상들을 다 펼쳐놓은 채 시간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완벽한 끝맺음이나 화려한 성취가 아니다. 하얀색으로 뒤덮인, 하얀 눈이 내려쌓인 ‘순백설산 (純白雪山)’의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