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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의 시집에 총 1,72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1997년 10월 8일 인쇄된 詩集입니다.

다른 부제는 정하지 않고 그냥 분류만
22편씩 3개의 章과
14편 1개의 章으로 하였으며,
합계 80편의 詩가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클래식음악 감상문'이 7편 실려있습니다.

감상적인 내용의 詩가 가장 많이 포함된 詩集인데
이 詩集만 보아서는 평소의 林森의 詩風과는
다소 상이한 면모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 증인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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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시어요 *



시작노트

" 오시어요 " 詩作 note

5월은 정말 이름 있는 날이 많은 달이다.
달력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거의 절반에 가까운 날짜 밑에 무슨 날이라는 표시가 되어있는 걸 알 수 있다.
1일인 ‘근로자의 날’로 시작해서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을 거치면서 31일의 ‘바다의 날’에 이르기까지 기념하고 축하해야 할 일이 정말로 많은 축복의 달이다.
그 많은 기념일 중에서도 오고 가는 가족 간의 정을 특히 강조하는 이름이 많이 있다 하여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물론 ‘가정의 달’이라는 제목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달에만 특히 가정에 충실하고 가족간의 정을 돈독히 하라는 뜻은 아니다.
1년 365일 가족의 정이 충만하고 행복한 사랑이 오갈 때에 바로 힘찬 삶의 전진을 기약할 수 있고 가정에서의 활력소와 충전이 곧바로 사회생활의 밑거름으로 이어진다는 건 두말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살기에 너무 바빠서, 혹은 다른 과도한 생각 속에 치여서 미처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허투루 지내게 될 수도 있는지라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다시 한번 되짚어 봄이 마땅할 거라 여겨 아마도 이런 이름의 날들을 제정해놓은 듯 하다.

사실 가족이라는 개념이 현대에 와서는 예전에 비해 상당 부분 그 가치가 퇴색되었거나 의미 자체가 재정립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대가족제도 하에서 한 집안에 3,4대가 모여서 살았으니 자연스레 어른과 아이들의 구분이 지어졌고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도 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된 오늘날은 사정이 그렇지를 못하다.
문화가 발전하면서 바쁜 일과로 하루를 보내는 현대인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간소하고 명료한 단순 가족 관계에 적응할 수밖에 없게 되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핵가족화라는 형태가 급속도로 번지게 되었고 지금의 도시생활 가구 중에는 3대가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든 세태가 되어져버렸다.
이른바 가족 간의 해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에 이른 것이다.
안타까운 건 이러한 현상 자체의 결과가 아니다.
소위 21세기의 트렌드라 불리는 이러한 과정에 이르는 동안에 만연하게 된 무관심과 방관의 보편화가 인간의 기본적인 정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엄청난 것은 그러한 사실 자체를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가족 간의 정이 발전적인 내일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무슨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서 부모나 더 나이 많은 할아버지 세대에 대한 존경과 효성은 이미 찾아보기 힘든 고전이 되어졌다.
알게 모르게 확산되어져 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관이 마치 오래전부터 있었던 우리의 전통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질서’라는 전제와 ‘자유’라는 전제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건지, 그리고 그것들의 조화가 어떠한 상승적인 인간 관계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건지 우리는 심각하게 되돌아 보아야 한다
‘질서와 무질서’, ‘관계와 무관계’, 그리고 그 영역을 무섭게 넓혀버린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가족 간의 정, 혈연으로 엮여져 있는 부정할 수도 없고 간과해서도 안되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되짚어 보면서 오늘의 삶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를 반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소 좁은 의미의 비유일지 모르지만 부부 간의 관계는 최악의 경우에 이혼이라는 절차로 끝을 낼 수도 있고 주종 간이나 거래 상의 인연은 일을 그만두거나 거래를 중단하면 끝나는 것이지만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숙명적인 천륜의 관계이다.
전제적으로 말하자면 자녀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성장하였다 해도 부모의 앞에서는 영원한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항상 부모에게는 어떤 조건도 이유도 달지 말고 순종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순종하는 일은 정말 보기에 아름답고 귀한 소중한 일이다.
부모 생존 시에 정성을 다해서 순종하는 자녀는 후일 후회가 없을 것이다.
또한 순종의 상태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필연적으로 축복의 약속을 수반하고 있다.
부모에게 잘 하는 가정에서 보고 배우며 자라난 자녀들이 역시 다시 그 부모에게 잘 하게 되며 어떤 일을 해도 잘되는 걸 볼 수 있다.
상투적인 말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또한 부모도 부모의 입장에서의 도리가 있음을 알라고 권면하고 싶다.
가정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눈높이를 일방적으로 설정해놓고는 그 틀 속에 자녀를 꿰맞추려 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자녀를 노여웁게 하는 행위는 결코 바람직한 양육의 방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리 부모일지라도 자녀를 터무니 없이 이치에 닿지도 않게 어떤 것을 강요하거나 마음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나를 통해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내 소유물이거나 내 부속품이 아닌 바에야 자녀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생각과 권리가 있고 내일에 대한 계획과 독창적인 갈 길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양 있는 훈계와 올바른 방법으로 양육해야 한다.
복음성가 중에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자녀는 마땅히 존중받고 사랑받을 권리와 자격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어린 아이들이 다시 세상의 주역으로 우뚝 서서 다음 세대의 세상을 짊어지고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하늘의 게시에 따른 양육 방법이라 믿으며 절대적인 지침으로 삼아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녀를 양육하는 데 인용한 ‘탈무드’의 교육법이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가장 모범적이며 바람직한 진리로 자리매김 된 것을 보면 문화나 역사나 전통 등의 시대적인 여건 보다 우선하는 진리는 양육이라는 문제에서도 불변인 듯 하다.
얼마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부모를 공경하겠다는 청소년들이 동남아는 70%에 달했는데 우리나라는 20%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
아무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 효도를 다 하라, 하고 요구를 해도 그것이 청소년들에게는 똑바로 전달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강요에 따른 역효과나 반대 급부가 있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자녀들의 가치관에서 부모를 공경하겠다는 자발적인 마음이 싹틀 수 있는 사회적인 여건과 제도적인 문화가 뒷받침되고 그러한 교육 기반이 형성되어질 때 비로소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게 되고 나아가서 가족 간의 정이라는 화두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대로라면 점점 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잘못되어져 가다가 급기야는 돌이키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그 후에는 원하지도 않던 가정의 파국과 가족의 완전한 분해라는 비극적인 결말이 결국에는 우리를 엄습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진정 무섭고 소름 돋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외부적인 교육이나 지식의 주입으로 자녀들의 마음을 정화시키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부모 스스로가 먼저 마음을 갈고 닦고 정화시킨 후에 선하고 참한 공경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대로 보고 배우게 하는 솔선수범의 자세가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가 갈고 닦아야 할, 그리고 노력해야 할 마음에 대해 오늘도 몇 가지 제언해본다.
우선은 향기로운 마음이다.
향기로운 마음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다.
나비에게, 벌에게, 바람에게, 자기의 달콤함을 내주는 꽃처럼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베풀어주는 마음이다.
다음이 여유로운 마음이다.
여유로운 마음은 풍요로움이 선사하는 평화이다.
바람과 구름이 평화롭게 머물도록 끝없이 드넓고 넉넉한 하늘처럼 비어 있어 가득 채울 수 있는 자유이다.
그 다음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존재에 대한 나와의 약속이다.
끊어지지 않는 믿음의 날실에 이해라는 구슬을 꿰어놓은 염주처럼 바라봐주고 마음을 쏟아야 하는 관심이다.
그리고 정성된 마음이다.
정성된 마음은 자기를 아끼지 않는 헌신이다.
뜨거움을 참아내며 맑은 녹빛으로 은은한 향과 맛을 건네주는 차처럼 진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실천이다.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할 마음은 참는 마음이다.
참는 마음은 나를 바라보는 선이다.
절제의 마디를 그어서 오롯이 자라며 부드럽게 마음을 비우는 대나무처럼 나와 세상 이치를 바로 깨닫게 하는 수행이다.
다음에는 노력하는 마음이다.
노력하는 마음은 목표를 향한 끊임없는 투지이다.
깨우침을 위해 세상의 유혹을 떨치고 머리카락을 자르며 공부하는 스님처럼 꾸준하게 한 길을 걷는 집념이다.
또한 생각할 것이 강직한 마음이다.
강직한 마음은 자기를 지키는 용기이다.
깊게 뿌리내려 흔들림 없이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한결같은 믿음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할 마음이 바로 선정된 마음이다.
선정된 마음은 나를 바라보게 하는 고요함이다.
싹을 틔우게 하고 꽃을 피우게 하며 보람의 열매를 맺게 하는 햇살처럼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을 환하게 하는 지혜이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추어질까 ?

그러면서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자녀들에게 눈으로 보여지는 앞에서만 잘하려고 노력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함부로 행동한다거나 생각 없는 처세로 자기 자신의 품위와 가치를 떨어뜨리게 되면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게 되고 급기야 자녀들에게조차 따돌림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누구나 잘 보여지지 않는 뒷모습은 감추기 어려운 생의 빈 틈과 취약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생의 빈 틈을 잘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현대인들은 자기의 빈 틈을 보이는 일을 무언의 금기로 여긴다.
심지어 사람들은 빈 틈을 감추기 위하여 말과 표정과 몸짓을 철저하게 관리하기도 한다.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입과 눈과 손은 모두 앞에 달려 있거나 일관성 있게 앞으로 움직이는 데에 익숙하다.
뒷모습은 대체로 패자의 고개 숙인 모습으로, 또는 소멸을 예비하는 삶의 허무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여겨질 뿐이다.
뒷모습이 노출하는 빈 틈은 그래서 때로는 빈 틈 없이 관리되는 앞모습보다 절실하고 소중한 생의 가치들을 보여줄 때가 있다.
'그리운 것은 모두 등 뒤에 있다.' 라는 詩처럼 앞모습은 말을 하지만, 뒷모습은 말이 없다.
그런데 뒷모습은 말은 없지만, 말없음 가운데 더 많은 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뒷모습에서 삶의 고단함과 쓸쓸한 풍경을 무심히 느끼곤 한다.
당신은 당신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뒷모습은 당신이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던 당신의 빈 틈이었음을 알면 된다.
살고 난 뒷자리, 그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당신의 앞모습이 뒷모습까지 투영되는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뒷모습이란 단순하게 뒤에서 보여지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발자취일 거라고 생각한다.
잘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뒷모습에 당당할 것이고 당당한 만큼 어느 누구에게라도 보여주기를 서슴치 않을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발자취가 자랑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루 하루가 우리들의 발자취이다.
내일이 되면 오늘은 나의 뒷모습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부끄러울지도 모를 오늘이었을 것이다.

뒷모습을 가꾼다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사는 절반의 자아를 찾아가는 작업이 아닐까 ?
그렇게 50%를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나머지 50%를 보이지 않는 뒷모습 속에서 충실히 채워갈 때 우리의 진정한 삶의 보람은, 자녀들에게 비추어지는 거울 같은 우리의 모습은, 화려하고 아름답게 빛이 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상이 변하고 모든 사회적인 여건과 귀천이 뒤바뀌어도 부모를 향한 영원한 공경의 마음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날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 자신도 그리 되고 싶어서, 부모를 조금이라도 더 닮아지고 싶어서 애를 쓰고 노력하게 될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진리임이 자명하다.
예컨대 부모는 자녀의 영원한 ‘임’이다.
생명이 다할 때 까지 간절히 사모하고 바라예는 ‘임’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으로 진하게 엮여진, 붉은 피의 예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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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즉도 채빈 덜 되었죠만

허나 이젠 오시어요,
하오면 -

임 오신단 전갈이어든
비나리 떨리는 한가슴 만큼
손끝 고운 맵시로라도
수려하니 분단장 아니될 지경

어설픈 이 내 모양
해맞이꽃 새 순 돋아
바리 엮은 물결 세월
밤낮으로 지새 반기울저

기둘리고 또 기둘려,

영 오쟎던
바로 바로 그 임인 걸
진즉,
언제이든 오시어요
홀연,
바람인 양 오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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