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8집. 우짜 멧시지가 웁노?"
1997년 10월 8일 인쇄된 詩集입니다.

다른 부제는 정하지 않고 그냥 분류만
22편씩 3개의 章과
14편 1개의 章으로 하였으며,
합계 80편의 詩가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클래식음악 감상문'이 7편 실려있습니다.

감상적인 내용의 詩가 가장 많이 포함된 詩集인데
이 詩集만 보아서는 평소의 林森의 詩風과는
다소 상이한 면모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 증인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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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악의 소나무 *



시작노트

" 치악의 소나무 " 詩作 note

멀리 올려다보이는 산자락이 녹색 발판처럼 보인다. 그저 한 철 내내 눈 덮인 봉우리로만 보여지더니만, 뿌연 안개 사이로 헐벗은 맨 살 드러내놓고 추위에 떨며 서있더니만, 어느 결에 봄 바람 물씬 맞아 흠뻑 물이 오른 건지 세상사가 신기하기만 하다. 게다가 녹색 물결 사이로 노란 빛, 붉은 빛 샘솟듯 솟아나는 모양새는 분명 봄꽃의 손짓이렷다. 그것 참! 이제 몇 밤 지새다보면 금세 온 산이 각양각색의 색깔 잔치로 필경 난리를 떨테지. 이러니 신비롭다 하지 않을 재간 있을 손?

치악이 아름다운 이유는 계절마다 달리 보이는 외양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숨결의 형태도 죄다 다르기 때문이다. 처음에 치악을 잘 몰랐던 시절에는 그저 사철 구분 없이 치악의 장엄함과 화려함만 눈에 들어오더니, 차츰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철 따라 갈아입는 치악의 옷이 계절 좇아 변한다는 신묘함의 진리를 얼추 깨닫게 되었다. 거룩하고 웅대한 대자연의 뜻을 일개 범부가 어찌 속속들이 다 알겠느냐만, 그래도 이제사 아주 조금일 망정 자연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음이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으랴?

필자가 영 치악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도는 이유다. 시시때때로 치악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기도 하고, 치악이 부르는 손짓에 온 몸이 움찔거리기도 하는 걸, 궁금해서 수삼일 이상은 치악을 벗어나지 못하고 되도는 필자의 용렬함이 차라리 스스로 대견하고 차마 정겹다. 이제 다시 찾아와 준 봄의 이름표도 필자의 가슴팍에 진하게 매달고, 방방곡곡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천지의 이웃님들아! 흐드러지는 치악의 봄이거든 얼른 와서 맛들 보시게나.”

추운 겨울을 몰아내고 온 누리에 따스한 바람을 전해주는 봄의 입김을 쐬고 나면, 모든 사람들도 이 봄을 닮아 따스한 마음으로 탈바꿈할 것 같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을 녹여줄 서로의 체온을 갈구하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손 맞잡을 것 같다.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너끈히 인동을 해낸 치악의 푸르른 소나무처럼, 힘차고 상큼한 기운을 서로에게 불어넣어주면서 봄의 노래를 목청껏 불러제낄 수 있을 것 같다.

한 아주머니가 떡볶이를 사기 위해 분식을 파는 포장마차로 갔다.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장사하고 계셨다. 그때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폐지를 수거하여 힘들게 살아가시는 분이신 것 같았다. 포장마차 옆에 세운 수레는 폐지로 가득했다. “저기 주인 양반, 따뜻한 국물 좀 주시오.” 주인아저씨는 할머니가 부탁한 따끈한 어묵 국물뿐만 아니라 떡볶이 약간에 순대를 얹은 접시 하나를 내놓았다.

할머니는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식사를 아직 못하셨는지 다른 질문 하나 없이 금세 한 접시를 다 비우셨다. 할머니가 계산을 치르려고 하자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할머니, 아까 돈 주셨어요.” “그런가? 아닌 거 같은데...” 옆에서 지켜보던 아주머니도 눈치를 채고 한 마디 거들었다. “할머니, 저도 아까 들어오면서 미리 돈 내시는 거 봤어요.”

할머니는 알쏭달쏭한 얼굴이었지만, 주인아저씨와 옆에 아주머니까지 계산했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았다. 할머니는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나셨다.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배려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무너질 수 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고 싶은 마음... 그 작은 배려하는 마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바다에 붓는 한 방울의 물보다 하찮은 것이다. 하지만 그 한 방울이 없다면 바다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의미심장한 이 말은 ‘마더 테레사’가 우리에게 남긴 말이다. 어떤 거창하고 원대한 계획과 실천만이 세상을 끌고 가는 원동력이 아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약소한 선행들이 모여서 커다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수 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이 봄에 다짐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다.

나중에, 다음 기회에, 어떤 계기가 마련된 이후에, 조금 형편이 나아진 뒤에, 우리가 마음 먹고 하려고 하는 선행은 이미 그 때가 되면 아무 필요가 없는 헛된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 바로, 현재 처해진 여건 하에서, 형편이 닿는대로, 사정이 허락하는대로, 우리는 즉시 실천해야 한다. 곧바로 행동해야 한다. 아주 작은 선행을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첫 걸음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사이 좋은 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정년 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가 여유로운 전원 생활과 여행을 꿈꾸며 행복한 노후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 지금은 자신들에게 한없이 인색하게 살기로 했다. 부부에게는 현재보다 은퇴 후 노후를 어떻게 잘 보낼지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행복한 노후를 하지 못했다. 남편은 정년퇴직을 2년 앞두고 폐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또한, 홀로 남은 아내는 평생 함께 한 남편의 빈 자리 때문인지 우울증에 걸려 치료를 받아야 했다.

어느 날, 시집간 딸이 혼자 사는 어머니의 집을 찾았다. 청소하던 중에 벽장 속에서 종이 상자를 발견했다. 종이 상자 안에는 전원 생활에 대한 계획과 여행 안내 책자가 있었다. 딸은 차마 그것들을 치우지 못했다. 부모님의 이루지 못한 꿈과 노후 계획들이 가득 차 있어서 감히 들 수조차 없을 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나침판도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가끔은 가슴 저리게 사랑하고 현재를 즐기자. 가끔은 가슴 저리게 꿈꾸고 행동하자. 계획만큼 중요한 건 소중한 사람들과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자. 현재를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기쁨의 행로의 일부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현재 처해진 상황이 너무나도 처참하고 잔혹하며, 결코 벗어나지 못할 수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쟁의 실상과 폐해를 온 몸으로 감당하며 하루 하루를 겨우 연명해가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일상이 어렵고 힘들다고 푸념하고 불평불만을 토로할 때, 그조차도 힘겨워 말로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굶주림 속의 아이들도 세상에는 참 많다. 사람의 일이지만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죽음 보다도 못한 삶의 명맥을 이어가는 비극적인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문제로 제시하는 삶의 시험이다. 지난 2월, 국내 한 화상전문병원에 ‘아프리카’ 소년이 찾아왔다. 부모도 없이 국제 구호단체의 안내로 협력자를 만나 저 머나먼 땅,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온 ‘예세’였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18시간 걸리는 탄자니아, 그리고 그 탄자니아 수도인 ‘도도마’에서도 13시간을 더 들어가야 나오는 오지마을에 예세는 살고 있었다.

예세의 몸엔 사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온 몸을 덮은 화상 자국과 제때 치료하지 못해 생긴 수많은 고름들... 한 눈에 봐도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지난 해 여름, 예세는 끔찍한 사고를 만났다. 아이는 간질이 있어 가끔 발작 후 정신을 잃곤 했는데 가족들은 늘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기도하고 바랐다. 그런데... 결국, 일이 생기고 말았다.

어느 날 가녀린 아이의 몸은 발작증세를 일으켰고, 뜨겁게 끓고 있던 물 위로 넘어졌다. 오른쪽 얼굴과 머리 뒷부분, 오른쪽 어깨까지 심한 화상을 입었다. 엄마는 그렇게 아들을 잃는 줄 알았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안도하기도 잠시... 어른도 참기 힘든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다. 예세가 사는 마을이 워낙 외진 곳이라 병원 하나 없는 상황이었고, 시내에 병원이 있다 해도, 지독한 가난은 아이를 치료할 수 없게 만들었다.

치료가 긴급한 상황이었지만 전문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예세의 상처는 방치되어 점점 깊어갔다. 예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아이였다.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함께 축구도 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행복한... 꿈 많은 아이였다. 그러나 그날의 사고 이후, 예세는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눈에 봐도 심각한 화상 흉터 때문에 자신감을 잃은 예세는 친구들과의 대화도 점점 줄어들었다.

천사 같은 미소를 띠던 예세의 얼굴엔 미소가 사라졌다. 갈 수 있는 곳은 집 앞마당이 전부인 예세는 무더운 날에도 누가 볼까.. 모자가 달린 옷을 푹 뒤집어쓴 채 마당에서 시간을 보냈다.사고가 발생한 지 반 년이 지났지만, 화상 상처엔 여전히 고름이 흐른다. 목 뒤에서 계속 흐르는 고름과 덕지덕지 붙은 고름 딱지들.. 살갗이 뜯기는 극심한 통증과 얼굴과 머리에 남은 심각한 화상 흉터들... 예세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나서지만, 마당을 채 벗어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에게 그나마 어렵게 구한 화상 연고를 발라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예세의 부모님은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아이를 치료해주시고, 아이가 받는 고통을 제게 달라고요.” 부모님의 마음이 하늘을 울린 걸까? 예세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단체의 도움으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비용적인 부분 때문에 부모님은 함께 올 수 없었다. 게다가 딱한 사정을 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시작했지만, 앞으로의 치료비가 더 걱정이다.

예세는 화상이 심한 얼굴과 오른쪽 어깨 부위, 머리 뒷부분에 재건 성형수술을 수차례 진행할 계획이다. 아동의 경우 성장에 따라 화상 부위의 지속적인 치료와 수술이 필요하고, 퇴원 후 화상 부위가 감염되지 않게 관리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탄자니아에서 화상 부위를 관리하기에 어려움이 있어, 한국에서 최대한의 치료를 받고 돌아갈 예정이다.

중증화상 아동이다 보니, 사고 직후 상처가 매우 심각하다. 아이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봐주어야 할 이유다. 또한 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응원과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세의 사연을 처음 접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가 겪었을 고통의 시간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저 작고 여린 몸을 덮고 있는 화마의 자국을 지워내고 세상을 향해 당당히 나아가길 소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따뜻한 마음들이 모아지기를 소망한다.

이 세상에는 정말 무서운 것이 많다. 그 중에서도 화마는 우리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불러오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한 번 심술을 부리기 시작하면 좀처럼 잠재우기가 힘들 정도로 기승을 부리는 것이 불이다. 화재 현장을 가보면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온통 잿더미로 변해버린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된다. 우리의 온정과 배려가 정말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현장이 바로 화마가 할퀴고 간 곳이다. 절망과 폐허만 남고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화재의 현장에서 가슴을 치는 이유다.

얼마 전에 우리는 진정한 영웅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불이 난 아파트에서 주민들을 대피시키신 ‘故 양명승(60)’ 경비원 아저씨. 그는 지나가는 주민들이 안색이라도 안 좋으면 늘 먼저 다가가 “오늘은 얼굴이 안 좋으시네요. 무슨 일 있으세요?” 라고 안부를 먼저 묻는 살뜰한 성격이었다. 또 무거운 택배가 오면 주민들 집 앞에 가져다줄 만큼 친절했고, 매 순간 할 일을 찾아서 하느라 경비실에 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을 만큼 성실했다.

그런데 지난 3월 18일, 그가 근무하는 아파트에 불이 났다. 불은 아파트 내부로 옮겨 붙지는 않았지만, 환풍구를 통해 연기가 퍼지고 있었고 정전으로 인해 엘리베이터도 정지됐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불이 났습니다. 빨리 집 밖으로 나오세요!” 평소 심장질환을 앓아왔기에 자신의 몸을 먼저 챙겨야 했지만, 그는 경비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아파트 9개 동을 일일이 오르내리며 마지막까지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덕분에 많은 사람이 대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본인은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돌아가시고 만 것이다. 고인이 되신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빈소에는 수십여 명의 아파트 주민들이 찾아왔고, 조의금과 함께 애도의 뜻을 표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유가족분들에게 연락을 드렸다. 경비원으로서 마지막 순간까지 남을 위해 헌신하다 떠난 故 양명승 님의 의로움을 기리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안식하고 있는 경기도에 위치한 추모관을 찾아 참배하고 유가족에게도 후원금을 전달하는 발길들이 이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민들을 대피시켰던 의로운 양명승 님. “꼭 기억할게요.” 라는 어느 쪽지처럼 우리 모두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영웅이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안식하고 있을 그는 진정한 이 시대의 영웅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작은 정성으로 큰 뜻을 이룬 영웅의 마음들이 모여 어려움에 처한 우리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견인차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소리만 요란하고,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허울 뿐인 지도자들이 보고 배워야 할 정도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한 지침이 설정되어 있는 건 아니다. 누구나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하루가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다. 하루가 희망차게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소중한 오늘을 무의미하게, 때로는 아무렇게나 보낼 때가 있다. 하루 하루가 모여 평생이 되고, 영원이란 말이 된다. 어떤 사람이 이 하루라는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곧 일생이다. 좋은 일생이 있는 것처럼 좋은 하루도 있다. 불행한 일생이 있는 것 같이 불행한 하루도 있다. 하루를 짧은 인생으로 본다면 하나의 날을 부질없이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 곧 좋은 일생을 만드는 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선물이며 시간이고 생명이다. 오늘이라는 소중한 당신의 하루를 아름답게 보내야 한다. 그래서 필자도 오늘 하루를 열심히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삶이란 것도 사랑이란 것도, 늘 함께 할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영화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에서의 대화도 그런 우리의 못남을 잘 말해주고 있다. “늙기 전엔 아무도 젊음이, 삶이 좋은 줄을 몰라. 죽기 전엔 삶이 얼마나 고마운 건지 모르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전 보다는 훨씬 더 열심히 살아갈 거야.”

우리 앞에 펼쳐진 삶은 항상 풍성하게 펼쳐진 잔치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곧잘 삶이 아름답지도, 살아볼 가치도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건 결코 삶이 빈약한 잔치이거나 황폐한 잔치이기 때문이 아니다. 삶에 초대된 우리들이 그 잔치를 즐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잔치에 아무리 좋은 음식과 재미있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흥미가 없다면 그 잔치는 결코 아름다울 수도 재미있을 수도 없다.

지금 당신 앞에는 과연 무엇이 있어서 당신이 흥미를 가지고 휘파람을 불며 임하고 있는가? 아니면 무관심해 시큰둥한 반응으로 임하고 있는가? 바쁘게 생활하면서 피곤하고 지쳐있을 때 간혹,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을 것이다. 부인이나 가족들에게 괜한 투정과 짜증스러움을 부리다가도 한 잔의 술에 마음을 풀어보며, 내게 주어진 운명이려니 하고 넘어가게 되지만, 그럴 때 가족들의 소박하지만 성의 있는 이벤트나 부인의 따뜻한 마음과 정성을 담은 말 한마디에 용기와 활력이 불끈 솟아오르며, 지쳐있는 모습이 저절로 사그러짐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각계 각층에서 자기 역할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그 모습을 멋있고 대견스럽게 생각해주는 것은
그 누구 보다도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금강석처럼 견고한 사랑으로 결속되어, 서로 눈빛 만 마주쳐도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그야말로 찰떡궁합같은 연분으로 행복한 미래가 주어질 것이다.

어떤가? 마음만 알아주면 된다고 그냥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힘들어 하는 가족을 위하여 오늘 행동으로 옮겨 본다면, 큰 감동을 받아 더욱 더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으로 이어지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바야흐로 봄이 물컹 그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똑같은 하루들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분명히 봄의 하루는 다르다. 멈칫거리는 사이에 얼른 가버릴지도 모를 봄의 따스함을 이렇게 맥없이 보내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예컨대 똑같은 푸르름이라 말하지 말라. 봄의 물이 오른 소나무 잎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푸른 빛은 세상 어떤 아름다움 보다도 싱그럽고 신선하거늘, 치악에 웅비하는 소나무의 잎 하나 하나가 온 세상에 희망과 사랑을 전해주는 멧세지를 품고 있으니, 이 짧은 봄 지나치기 전, 그래서 후회로 내년 봄을 기둘리는 우를 범하기 싫거든, 지금 나서라. 치악의 소나무, 그 푸른 향기를 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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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첩된 산자락
초연한 혼백 켜켜이 묻고
심산에 은거하는 낙락장송
차라리 경외로 침잠하는
집요한 벽공
구름과 어깨 겯고 서
영원의 젊음으로 남고파 전율하는
고목의 그 뜨거이 어린 시름
돌고 도는 세상사에
한 수
무아경지 일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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