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6집. 인생 복사기  


  "6집. 인생 복사기"
1996년 3월 28일 인쇄된 詩集입니다.

목차는 크게 넷으로 분류되며
'날궂이 굿 - 자연예찬'에 21편,
'씻김이 굿 - 인간지정'에 21편,
'내림이 굿 - 영혼고백'에 21편,
'살풀이 굿 - 세상백태'에 21편,
합계 84편의 詩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章의 분류에서 알 수 있듯이
서경시, 서정시, 고백시, 서사시로 규정지을 수 있는
각 章마다에 완전히 다른 성격의 詩들이 실려있으며
그 詩風을 비교 분석하면서
감상하실 수 있는 詩集입니다.
[ 도서출판 가람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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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따리 장사 *



시작노트

" 보따리 장사 " 詩作 note

산다는 게 참 좋게만 말하기 그렇다. 언제나 한결같은 소망으로 더 나은 내일을 기원하며 오늘을 버둥대지만, 막상 다시 열려지는 내일은 늘상 똑같은 모양새, 별 볼 일이 없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결론짓자면 참 뭣 같다. 그러나 어쩌랴? 다 알면서도 또 내일을 기다리며, 헛된 짓거리일 걸 뻔히 인지하면서도 판에 박은 소망 나부랭이에 꿈을 실을 뿐인 걸. 그래야, 그렇게라도 해야, 오늘을 견디고 살아낼 수 있으니, 어쩌면 더없이 처량하고 초라한 폼새에 모양 빠지지만 기왕지사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 아주 넋을 놓지는 말자. 지레 포기하고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는 말자.

모르긴 해도 한 번은, 딱 한 번 쯤은 더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데, 만일 정신 안 차리고 있다가 그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그 뒤에 우리는 정녕 무엇으로 살까? 제아무리 길고 지루한 오늘의 이야기들도 지나고 보면 하냥 어제의 짧은 꿈이었을 뿐이니, 이미 가버린 사연일진대 붙잡고 버둥거려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허접하고 한낱 거품일지 모르지만, 다가올 내일은 그래도 우리에게 꿈과 희망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이라도 넌지시 건네주고 있지 않음인가? 바로 그게 정답이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 그 내일이 우리에게 삶의 의욕과 목표를 부여해주고 섰다. 그러니 힘겹더라도, 버겁더라도 오늘, 지금은 웃자. 웃으면서 참아보자.

얼추 25년 가량 전에 지은 시다. 운영하던 사업체가 잘못되고, 오갈 데 없는 처지지만 그래도 명색이 석사학위이니 학벌은 받쳐주는지라, 변두리 보습학원 몇 군데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냄새나는 오늘을 살아내던 시절의 절절한 고백이다. 당시에는 아직 오기도 남아 있었고, 호시탐탐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지라 아예 꿈을 송두리째 내던지지는 않았던 듯 싶다. 그러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위기만 탈출하면 다시금 푸른빛 소망이 펼쳐지게 될 거라는 불확실한 미래에 운을 다걸기하고 있었을 게다.

물론 원치 않은 떠돌이 강사의 경력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인연과 인간관계를 발판 삼아 이내 다른 업에 도전하면서 학원가 ‘림삼선생’의 경력은 불과 수년 만에 종을 치게 되었다. 그리고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 헛헛한 웃음으로 살아 온 삶을 되새김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 뒤로도 삶의 형편이 제대로 풀려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맹세컨대 필자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표본이었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로 버틴 삶이었다. 오히려 지난한 강사 시절이 그립고,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아련한 추억의 노트가 되어졌다. 아이러니한 과거지사다.

그렇다고 오늘 필자의 추억에 은근히 담겨있는 이 아픔의 기운이 체념이나 포기는 물론 아니다. 어차피 나이 들어 이미 황혼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이 현실에 별쭝난 희망이나 계획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아마도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꾀죄죄한 인격과 인품의 소유자로서 느끼는 애매한 자각이, 아쉬움과 그리움의 어중간한 중간 쯤의 상념을 부채질하고 있어서, 문득 달착지근한 회상의 시간에 푹 젖어 머물러 본다. 그래도 남겨진 오늘을 조금은 더 알차게 메꾸고 싶은 마지막 패기는 남아 있기에.

누군가 말했다.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곱게 늙으라고. 젊은이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배척당하지 않으려고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구태여 지적받으면서 살아갈 이유는 없다. 쓸 데 없는 자존심 내세워 호통이나 치고, 스스로 소외되는 영역을 애써 가꿀 필요는 없다. 늙어간다는 건 연륜과 경험이 쌓여간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석양볕이 더 뜨겁다는데, 아주 늦기 전에 후회 없도록 남아있는 모든 능력과 열정을 다 불태워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배우고 가꾸며 노력해야 한다. 혹시 아직도 부족한 뭔가가 있지는 않은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매진해야 한다.

보여지는 겉모습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데 남은 힘을 다 쏟아야 한다. 영국 런던 ‘템즈 강변’에서 한 허름한 차림의 노인이 낡은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를 하고 있었다. 노인 앞에는 모자가 하나 놓여 있었지만 아무도 그 모자에 동전이나 지폐를 넣지 않았으며, 노인의 연주에 관심조차 두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금이 간 낡은 바이올린은 소리가 좋을 리가 없었고, 노인의 떨리는 손은 자꾸 연주를 틀리게 했다.

그 때 웬 낯선 외국인 한 명이 노인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선생님의 연주 잘 들었는데 제가 드릴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이올린을 조금은 다룰 줄 아는데 제가 몇 곡만 연주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노인은 그 외국인에게 낡은 바이올린을 건넸다. 외국인은 잠시 현을 조율하고 나서 천천히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낡은 바이올린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템즈강에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외국인의 바이올린 연주에 감동한 사람들은 노인의 모자에 돈을 넣기 시작했고, 돈이 수북하게 쌓이고 연주가 끝나자 누군가 소리쳤다. “저 사람은 바로 파가니니다.” 그 외국인은 당대 최고의 바이올린 명연주자였던 ‘니콜로 파가니니’였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 니콜로 파가니니는 현이 한 줄만 남은 바이올린으로도 훌륭한 연주와 곡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얼핏 보면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그것을 누가 다루느냐에 따라 단순한 물건이 될 수도 있지만,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가장 아름다운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사물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무뎌지는 몸과 함께 감성 역시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어도 뛰어난 감성으로 멋진 작품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매우 불행한 인생을 살아왔다. 첫 번째 아내는 평생 병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했으며, 두 번째 아내는 집에 화재가 발생해 화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임종을 앞둔 롱펠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숱한 역경과 고난의 시간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시를 남길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이 궁금합니다.”

롱펠로는 정원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과나무가 바로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사과나무는 보는 것처럼 수령이 오래된 고목인데 해마다 단 맛을 내는 사과가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 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항상 새로운 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뿌리가 깊고 굵은 나무는 더 많은 양분을 흡수할 수 있다. 가지가 크고 넓게 퍼진 고목은 더 많은 꽃을 더욱 화려하게 피울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겹겹이 나이테를 둘러온 고목의 몸에는 어린 나무들과 비교할 수 없는 건장한 가지와 건강한 새 순, 그리고 향기롭고 탐스러운 과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나이테를 꾸준히 키워갈 수 있다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젊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긍정적인 태도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 어느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작은 것에서부터 진정한 의미를 찾고, 소소한 일상에서 커다란 삶의 진실을 깨닫는 데에는 배움이나 학식에 따른 차별이 없다. 그저 진솔하고 겸손한 본연의 자세가 요구될 뿐이다.

영국 런던 ‘캔터베리’ 대성당에 ‘니콜라이’라는 집사가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인 17세부터 성당의 사찰 집사가 되어 평생을 성당 청소와 심부름을 하였다. 하지만 자기 일이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맡은 일에 헌신하고 최선을 다했다. 그가 하는 일 중에는 시간에 맞춰 성당 종탑의 종을 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성당 종을 얼마나 정확하게 쳤던지 런던 시민들은 도리어 자기 시계를 니콜라이 종소리에 맞추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엄격한 모습은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의 두 아들 역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노환으로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가족들 앞에서 의식이 점점 멀어지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가족들이 놀라는 가운데 그는 종탑으로 갔다. 바로 그 때가, 그가 평생 성당 종을 쳤던 바로 그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정확한 시간에 종을 치고, 그 뒤 종탑 아래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에 감동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영국 황실의 묘지에 그를 안장해 주었고, 그의 가족들을 귀족으로 대우해주었다. 그리고 모든 상가와 시민들은 그날 하루는 일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공휴일로 되었다. 니콜라이의 직업은 심부름꾼, 종치기, 청소부였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자신의 의지와 헌신과 노력으로 그 일을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내었다.

자신의 하는 일이 하찮은 것인지 고귀한 것인지는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어떠한 일이든 진심으로 헌신하고 노력한다면 그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이 될 수 있다. 행복의 비밀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예컨대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임시로 하는 직업은 애초에 없다. 필자가 별 애착이나 긍지도 없는 떠돌이 강사 생활을 했던 당시에 영혼이 결여된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지금은 모두 성인이 되어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들을 하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상담을 원하던 어느 여성의 고백이 있었다. - 이미 돌아가신 저희 시부모님은 생전에 트럭에 과일을 가득 싣고 팔았는데, 남편은 어린 시절 팔고 남은 과일을 식사 대신 먹던 가난할 때의 기억에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남편이 어느 날 사과를 잔뜩 사 들고 들어왔습니다. 남편이 사과를 사 온 것도 신기한데 사 온 사과들은 하나같이 모나고 상처 난 것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남편에게 싫어하는 사과를, 그것도 상태도 좋지 않은 것을 왜 사 왔느냐고 물었지만 남편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남편은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계속 모난 사과를 사 들고 들어왔지만, 남편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캐묻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가는데 한 할머니가 남편을 보고 말했습니다. “사과 사러 왔어? 오늘은 때깔 좋은 놈들로 골라놨으니까 이거 가져가. 상처 난 사과 그만 사 가고.” 남편은 할머니한테 넉살 좋게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오히려 조금 삐뚤어진 사과가 달고 맛있어요.”

상처 난 사과만 잔뜩 골라 산 남편은 저에게 미안한 듯 말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안 팔려서 할머니가 집에 가져가서 먹기 싫어하는 손주 애들한테 먹인다고. 다른 좋은 것 팔고 그 돈으로 손주들 한테 맛있는 거 사주면 좋잖아. 할머니가 이런 장사하는 거 정말로 힘들기도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 해서...” 저는 그제서야 남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상처난 사과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

배려는 손바닥에 떨어트린 한 방울의 향수 같은 것이다. 주먹을 쥐면 향수의 모습은 감출 수 있어도 향수가 뿜어내는 향기는 반드시 주변에 아름답게 퍼지기 마련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당신의 손 안에 계속 간직하다 보면, 배려의 그 아름다운 향기가 당신의 주변으로 물씬 퍼져나갈 것이다. 마음을 자극하는 단 하나의 사랑의 명약, 그것은 진심에서 나오는 배려이다. 이 나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삶의 진리다.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서투른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다. 단, “정직이 베스트인가?”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No.”라고 답할 것이다. 필자가 만든 격언(?)에 “어두운 정직보다 밝은 빈 말이 좋다.” 라는 것이 있다. 자연스럽게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은 원래 그러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속 좁은 필자 같은 사람들은 특별히 노력을 해서 칭찬해야 겨우 몇 마디 칭찬을 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거북하지만 이것도 점차 익숙해져간다.

나이가 들면 운동 부족으로 좀처럼 몸이 잘 굽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움직여가다 보면 부드러워진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서서히 풀리면 편안하게 사람들을 칭찬할 수 있게 된다. 희한하게도 진심이든 빈 말이든 남을 칭찬하다 보면 자기도 칭찬을 들을 기회가 늘어간다. 처음에는 겸연쩍지만 역시 칭찬받으면 기분 좋기 마련이다. 칭찬하는 데 인색한 사람은 틀림없이 칭찬받는 기쁨을 모르든가 잊어버린 사람이다.

그런 생활도 나름대로 좋겠지만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진다면, 허세여도 좋으니 말을 해보자. 혹은 엽서에 써도 좋다. 어느 쪽이든, ‘당신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좋았다.’ 라든가 ‘멋진 스카프입니다.’ 라는 말 정도면 된다. 너무 아부에 가까운 칭찬을 하려 하면 나오지 않게 되므로 일단은 간단한 유연 운동부터 시작하면 된다. 조금 유연해지면 ‘스카프’뿐만 아니라 ‘스카프와 립스틱색이 어울려서 멋지다.’고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칭찬을 듣게 된다.

칭찬을 들으면 나 자신에게도 자신감이 붙게 되고, 멋진 코디네이트를 할 줄 아는 상대를 더욱 기분 좋게 칭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부자연스럽고 그리 익숙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칭찬하여 볼 것, 이것만으로도 당신의 주변 공기는 더 아름답게 변할 것이다. 이미 다 끝나버린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이며 긍정적인 삶의 태도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때에 따라서는 역발상이 새로운 질서와 창조를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한 층 더 발전된 내일의 결론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한 마디의 칭찬으로 내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관심과 집중으로 이미 결론이 난 사안의 면모를 일신할 수도 있다. 그런 예기치 않은 시도와 의지가 바로 내일을 개척하는 선구자적 안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의 대화를 주목하자. “건축가는 어차피 유리가 깨져서 왔으니 유리 값은 주지 말고, 대신 그 귀한 유리들을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까우니
아예 이렇게 더 작게 깨뜨려 벽과 창에 장식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 거야.” “아하.”

“사람들도 생각해보니 그럴 듯 하거든. 그래서 모두들 동원해서 유리를 더 잘게 깨뜨렸어. 그리고는 그 조각들을 벽과 창, 그리고 아치형 천장에 빠짐없이 붙여나갔어. 크고 작은 유리조각들을 벽에 붙여놓으니 유리들은 빛을 받아들이는 각도도 다 다르고 반사하는 빛의 크기도 각각이어서 오색찬란하고 화려한 빛의 궁전이 만들어진 거야. 멀리서 보면 마치 보석으로 장식한 궁전처럼 보이게 된 거지.” “참 잘 생각했네.” “절망을 보석으로 바꾼 거지.” “절망을 보석으로?”

“이제는 다 틀렸구나 하고 남들이 생각하는 순간, 아니다, 다시 시작해보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적을 만드는 거야. 가장 절망적인 걸 가장 아름다운 걸로 바꾸어놓는 게 기적 아닌가?” 이란의 ‘빛의 궁전’을 건축하게 된 계기를 적어놓은 글이다. 아무리 귀하고 값나가는 물건도 절대 가치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작고 하챦은 것이라 할지라도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부가가치가 달라진다.

마치 사막에서는 한 보따리의 진주보다 한 모금의 물이 갈급한 목을 풀어주는 소중한 생명수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 너무나 적절해서, 스스로에게는 자부심이 되고, 보여지는 이들에게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런 멋진 하루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 생각과 행동이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해본다. 스스로를 체크하고 테스트해보면서 보다 나은 점수를 획득하기 위한 시도에 박차를 가한다.

3분 테스트, 예전 어느 워크샵에 갔을 때의 일이다. 프로그램 첫 머리에 한 교관님께서 자리에 모인 우리들에게 시험지를 나누어주며 3분 안에 풀라고 하셨다. 받아 보니 맨 위에 ‘끝까지 다 읽어보고 문제를 푸십시오.’ 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꽤 많은 문제들이 이어졌다. 교관님은 초시계를 꺼내 “5초, 10초.” 하며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문제라는 것이 고작 숫자를 쓰라거나, 동그라미를 그리라거나, 이름을 거꾸로 써 보라는 등 연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듯한 것들이었지만 누구 하나 의문을 제기하거나 투덜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째깍째깍 초침 소리를 의식하며 모두들 최대한 빠르게 연필을 움직일 뿐이었다. 3분이 다 되어갈 무렵 여기저기서 “앗!”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맨 끝 문항을 보는 순간 필자의 입에서도 절로 “어이쿠!” 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끝까지 읽어 보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문제를 풀 필요는 없습니다. 시험지에 이름만 쓰십시오.’
당혹해하는 우리를 보고 교관님은 말씀하셨다.

“시험지 첫머리에 끝까지 다 읽어보고 풀라고 쓰여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급하셨나요? 내가 시간을 재고 있고 옆 사람이 열심히 푼다는 이유로 그 문제들을 서둘러 풀었나요? 남들이 다 탄다는 이유로 목적지도 모르는 기차에 올라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이 ‘3분 테스트’의 교훈이었다. ‘왜’ 라는 질문 없이 그저 바쁘게 움직이는 것, 방향 감각 없이 빠른 속도에 휘말리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이다.

젊은 시절에는 그저 자신의 열정과 넘치는 활력을 믿고 세상의 어떤 일에도 주저함 없이 도전하곤 했었다. 만일 실패한다면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오기도 있었고, 나름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배어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황혼의 햇살이 낯설지 않은 이즈음, 다시 생각해본다. 자신의 자존심과 자만심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주변의 모든 이웃들과 친인들의 협조와 이해가 만들어주는 성공과 성취의 열매를, 아무런 감사나 보은의 마음이 없이 따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매하고 파렴치한 것인가를. 지금 필자의 어제와 오늘을 다시금 되짚어 조명해본다. 그리고 조심스레 내일을 예단해본다.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좁은 문 밖으로 아직은 길게 이어져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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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고단한 보따리 장사
오늘은 이 학원
내일은 저 학원
글품 팔아 연명하는 떠돌이 강사 인생

입만 열면 훈계 충고 장황한 웅변,
그럴듯한 말치장 단정한 몸가짐,
정갈한 차림새에 유식한 척 고고한 척
미소 잃진 않지만,

넌더리나는 만원 버스
아수라장 지하철 떡시루로 시달리며
이쪽 끝에 저쪽 끝에 마다않고 돌아치는
구겨진 자존심 꽁지 빠진 구관조

벗겨진 머리에 도리우찌 눌러쓰고
꾸부정한 허리춤엔 변함 없는 고뇌의 끈
고생처럼 얹혀있는
책 보따리, 말 보따리, 팔자 보따리

첫 새벽길 나서는 황혼 깃든 어깨엔
어느새 트레이드마크 되어진
검정 가죽 멜빵 가방,
터덜 터덜 발걸음에 햇살은 또 깃들고
시름 때문 느는 주름 눈시울 적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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