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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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 *



시작노트

"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 " 詩作 note

흔히들 가장 중요한 최초의 교육기관은 바로 가정이라고 한다.
그만큼 가정이 성장하는 어린이들에게는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어있는 아이들이라야 학교교육도 올바른 방향으로 습득해나가게 된다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가정교육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양육하는 것이 가정교육의 정석이며 왕도라고 자신 있게 제시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냥 되는대로 각 가정마다 분위기나 가족 구성원의 성격과 특징에 따라 천차만별의 규범과 제약으로 소위 양육의 틀을 정해놓고, 학교교육이 개시되기 이전에 임시방편으로, 또는 학교교육과 병행하여 지속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것을 막연한 가정교육의 전부라고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가정교육이라는 것이 대충 특별한 사고 없이 그 시기를 무탈하게 넘기기만 막연하게 바라며 일방적으로 제약과 속박만 강조하면서 부모 스스로는 균형잡힌 교육은 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이 피상적인 방식 말고 더 나은 교육의 방법은 무엇일까 ?
물론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가장 좋은 가정교육의 방법이라고는 필자도 역시 명확하게 제시하기는 여간 버거운 노릇이 아니다. 
예로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들의 가정교육지침서인 ‘탈무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 할 가정교육의 지침서 중 하나이다.
물론 시대가 변하면서 여러 가지로 변모한 진리와 정의의 형태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는 내용과 성격이 다소 현실적으로 괴리를 느끼게 하는 것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역사의 통념적으로 볼 때 그 이상의 지침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많은 교육 기관에서 ‘탈무드’를 참고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늘 귀감으로 삼고 본받기를 원하는 옛 성현이나 위인들의 언행과 업적들을 통하여 가정의 자녀들이 심성 곱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각종 위인전이나 가르침의 교본들을 구입해서 자녀들에게 읽히고 있는 것도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가정교육의 한 방편이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의 일화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크다.
어느날 한 어린 아이를 데리고 찾아온 어머니가 간디에게 부탁한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너무 사탕을 좋아 하는데 어떻게 좋은 말씀 좀 해주셔서 사탕을 그만 먹게 말려주세요.”
그러자 간디가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어머니에게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
일주일 뒤 다시 찾아간 모자에게 간디는 말한다.
“얘야, 사탕을 먹으면 이빨이 썩는단다, 그러니 많이 먹지 말거라.”
“아니, 그런 말이라면 지난 주에 말씀하셨어도 될 걸 왜 구태여 다시 오라고 했나요 ?”
“지난 주에는 나도 사탕을 먹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일주일째 사탕을 안먹고 있어요.”
교육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솔선수범이다.
자녀들에게 가르침이나 훈육의 조건을 구비하여 지침을 제시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스스로 거울이 되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녀들은 부모의 생각과 행태, 습관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 배우고 답습하기 마련이다.
자신은 올바르게 처신하지 않으면서 그걸 바라보는 자녀들이 올바르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외부의 교육기관에서 당연히 완벽한 인간성을 주입시켜서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시켜줄 것이라고 믿는 막연한 과신이나 오판을 해서는 안된다.
부모의 완벽한 정체성을 보여줌으로서 자녀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다지는 푯대로 삼게 자연스러운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가정교육의 근본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넣고 다른 새의 어미가 품어서 부화시키고 일정 기간 동안 기르도록 방치하기 때문에 비겁하고 모성애가 없는 못된 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연구팀이 오랫동안 현상조사 등을 통해 연구한 결과 수컷 뻐꾸기는 암컷 뻐꾸기가 알을 한 개씩 갖다 넣은 둥지마다 찾아다니면서 밤새도록 울음소리를 낸다고 한다.
부화된 새끼들이 날 수 있을 때 까지 아빠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자신들이 뻐꾸기임을 알게 해주는 일종의 교육 방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학습과 지도를 통한 본능적 자각을 일깨우는 것이 짐승의 세계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교육 방법인 셈이니 한낱 미물들의 본능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왠지 숙연한 기분이 든다.

부모가 세상과 친밀한 삶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면 자녀들도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포근한 보금자리의 연장으로 인정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세상을 적대시 하거나 이웃의 모두를 대립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자녀들도 역시 세상을 싸움과 복수의 대상으로 간주하게 되고 당연히 늘 전의만을 불태우는 전사로 자라나게 된다.
자존감이 결여된 채 열등감과 독선에 빠지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친밀하다’는 표현은 그냥 ‘친하다’와 ‘밀접하다’의 합성어로만 해석해서는 부족하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엄마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깃들어 있는, 말로는 표현 못할 뿌듯한 행복과 연대감이 바로 친밀감의 가장 대표적인 시선이다.
세상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이어지고 이웃과 더불어서 우리의 생활이 엮여지고 있다는 끈끈한 친밀감이야 말로 우리가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교육의 화두인 것이다.
오늘날 지나치게 단편적인 목표의 달성과 경쟁에서의 승리에만 의존하는, 그래서 진실성은 결여된 채 오로지 학습 기계로 키워지고 있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진정한 홍익인간의 이념과 근본적인 교육의 보람을 맛보게 해줄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헌신하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도 한 방편이다.
공중도덕이나 법질서를 준수하는 것 못지 않게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과의 교류나 연대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도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양보나 봉사, 구제의 의미도 단순하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반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는 점과, 이웃과의 관계 형성에 있어서도 이해하고 용서함이 아니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겸양의 미덕이 먼저라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필자는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수시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을 품게 되었다.
자판의 글자를 찾아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왜 이렇게 배열을 뒤죽박죽으로 해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냥 아라비아 숫자판처럼 한글이나 알파벳도 차례대로 배열해 놓았으면 더 좀 쉽고 빠르게 자판을 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외국의 키보드도 자판 사정은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1867년에 처음으로 수동타자기가 발명되었다.
당시로서는 정말 세상이 뒤집어질만한 발명품이었다.
펜이나 잉크가 필요 없는 발전된 필기도구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얼마나 가지런하고 멋들어진 글씨체인지 아마도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을 게다.
그런데 처음 발명 당시에는 정말 글자의 배열이 나란히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빠르고 능수능란하게 타자를 쳐대는 바람에 글자만 일방적으로 빨리 써지고 다른 정리 작업이나 분류 작업 등의 협력 업무들은 미처 보조를 맞추지 못하게 되자 원활한 사무 정리가 어려워 일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러자 생산업체에서 생각해낸 묘안이 바로 글자를 마구 섞어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배열이 뒤섞여진 자판이 타자기로 만들어졌고 일일이 찾으면서 자판을 치게 되자 의도한 바 대로 업무의 형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자판을 머리로 암기하여 보지도 않고 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자 다시 혼란이 왔지만 그 때는 다른 분야의 기술도 발전되어 속도의 밸런스가 맞게 되었다.
그리고 50년쯤 뒤에 또 글자의 배열이 나란한 효율적인 새 타자기가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뒤섞인 자판에 익숙해진 사용자들의 거부로 정착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져 오늘날의 컴퓨터 자판으로 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종의 관성대로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젖어들고 습관이 되어지는 것을 ‘경로 의존성’이라고 하는데 바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공식대로 원인과 결과가 형성되어지고 결론지어지는 가정교육의 단면을 내포하는 비유이다.

‘각인잠’이라는 말이 있다.
태어나면서 보고 듣고 인식한 것이 평생을 간다는 의미이다.
그러가 하면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말도 있다.
모든 책임과 탓을 자식에게 전가하는 비겁한 발상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각각 원인과 결과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식은 부모의 거울’임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폭력 가정에서 가정 폭력을 경험하며 성장한 아이들이 나중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른으로 자라나는 것이고,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 부모의 무관심과 방관으로 사회를 문란케 하는 범법자로 내몰리기 십상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기성세대가 먼저 미래지향적인 의식구조로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견지한다면 성장하는 자녀들이 이를 거스른 채 부모의 웬수로 자라날 이유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라는 말은 뇌리에서 지워버리고 ‘내 자식은 웬수가 절대 아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먼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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