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16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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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순세살의 초여름 *



시작노트

" 예순세살의 초여름 " 詩作 note

모처럼 근래에 지은 습작을 시작노트의 소재로 삼았다. 아니, 실은 어제 밤에 적은 시다. 어쩐지 순탄치 않은 이즈막의 현실들이, 통곡의 벽처럼 굳건하게 앞을 막고 있는 듯한 기분에, 밤으로는 자꾸 가위가 눌려서 편한 잠조차 쉽사리 들지 못하는 이유로 해서, 필자의 오늘들은 퍽도 버거운가 보다. 그래서인지 시가 자못 우울하다. 아마도 누군가를 극도로 미워하는 심사가, 답답하고 마음에 안드는 일의 진행이 복합적으로 반죽되어 필자를 자극하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모든 심상의 원인은 본인에게 있는 것이거늘 어째서 주변을 탓하고, 남의 잘잘못을 끄집어내서 원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지, 이런 필자의 미련함이, 모자람이 야속하기도 하다. 어쩔 수 없는 필부의 용렬함에 조소를 머금으며 스스로를 반성해본다. 다른 유능한 시인들이 어찌 필자와 같으랴만, 부족한 능력으로 시 한 편 지어내는 작업이 아주 수월하지는 않기에, 필자는 애써서 시를 적고난 후에는, 그래도 후련하고 정화되는 마음에 한결 세상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따뜻하게 변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때로는 심적인 고통이나 부담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때는 억지로라도 시심을 유지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비록 졸작이나마 시를 통해서 단련을 이어가고자 하는 소박함이 있어 돌아보면 흐뭇하다. 그렇게 일련의 마음 작업이 지난 뒤에, 조금의 시간적 여유를 두고 다시 읽어볼 때는, 시의 내용은 비교적 관조자의 입장이 되고자 노력하면서 천천히 바라보곤 한다. 그런 시각에서 이 시는 졸작이다. 그냥 이렇게 한 번 소개하고는 숨겨둘 수준의 넋두리다.

길지 않은 여름이 다시 시작된다. 물론 아직도 봄이라는 이름으로 한참을 더 살아야 할테지만 그래도 우리 곁에는 여름의 입김이 슬쩍 슬쩍 묻어나고 있음도 부인할 순 없다. 앞으로 몇 번의 여름이 필자에게 숙제로 주어질 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무척이나 늙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컨대 회갑을 한참 전에 지난 입장이라면 속된 말로 꺾어진 건 사실이니, 그냥 언제라도 순리대로 삶에 부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음이다.

그래서 새로운 계절이 열릴 때마다 감회가 새롭게 다가선다. 이 여름에는 어떤 좋은 답을 삶의 답안지에 적어낼까? 궁리와 고민으로 밤을 잊을 때가 많다. 이제라도 가능하면 후회나 반성이 덜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으로 하루하루를 메꾸어가는 날들이다. 필자의 시를 좋아하는, 그래서 부족한 필자의 시를 읽고 싶어하는 극소수의 팬들에게는 오늘 보너스를 하나 드릴 참이다. 시작노트에 시를 한 편 더 적어본다. 한 주에 두 편이라면 횡재는 아니지만 제법 수지 맞는 건 맞다다.

오래 전에 지면으로 소개한 적이 있는 내용이다. 필자의 일곱 번째 시집 ‘구름에 달처럼 살아가는 이야기’에 수록되어 있는 ‘마흔의 여름은 가고’이다. 예전에 시작노트로도 한 번 다루었었다. 마흔살 시절에 느끼는 여름의 감상은 어땠었는지 짐짓 궁금하기도 해서, 이른바 관조자의 입장에서 예전의 작품들을 뒤적이다가 언뜻 발견해냈기에 기꺼이 공유하고자 한다.

‘진한 향기로 / 삶의 페이소스 인영시킨 채 / 찬란한 내 마흔살의 여름, / 무더운 기억만 미덥사리 흘리고 / 그렇게 평화로 저물다 // 채근된 계절 줄 이어 서서 / 갉힌 낙엽 사이로 / 못다한 어떤 사연 속 비추이면, /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를 / 마흔살의 세월이 요철되어지고- // 부는 바람마저 차라리 / 아픔으로 승화되어, / 밤열차 떠난 자리에 / 못박힌 듯 서있는 계절 위로 / 초록의 꿈만 덩그라니 남아 / 다시 올 여름 그리다 // 그대, / 다시 오라 //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 내 마흔살의 인생 살이 / 모두어 담고 / 추억으로 윤회된 인연 마다 / 귀히 여기리니, / 속절 없는 여름이여! / 가버린 내 여름이여! / 그대여, 다시금 오라’

당시에는 당시의 입장에서 안심하고 계절을 보낼 수는 없었던 듯 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 시절에도 조급하고 몸이 단 과제 하나 끌어안고 끙끙대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제는 오늘까지 이어지면서 필자의 해묵은 고민을 숙성시키고 있다. 이렇게 삶을 마감할 때까지 고민이 지속되다가, 마땅한 명분 하나 변변히 마련 못하고 사그러질 지도 모른다는 또 하나의 고민으로 짧은 여름밤이 자못 길다.

그렇다고 고민만 하고 있으면 뉘라서 호시절 정답을 밀어줄 것인가? 결국 모든 책임과 결론은 자신의 몫인 것을. 다잡고 일어서서 종주먹 틀어쥔다. 그리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옹골찬 호령소리와 함께 세상 향한 발걸음에 힘을 싣는다. 어느 병원 2층에는 중환자를 위한 특별병실이 있었다. 병실에는 창가에 침대를 하나밖에 놓을 수 없었는데 그 침대에는 ‘지미’라는 결핵 말기 환자가 누워 있었다.

지미는 매일같이 창밖에 보이는 경치를 감탄하며 다른 환자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날씨도 화창한데 어린이들이 소풍을 가는 날인가 보네. 저기 알록달록한 색깔의 가방을 멘 아이도 있고, 즐거운 듯이 손에 든 가방을 흔들어 보이는 아이도 있어요. 그리고 나비 한 마리가 한 아이의 주변에서 춤을 추네요.” 날마다 생생하게 바깥 이야기를 들려주는 지미의 이야기에 동료 환자들은 잠시나마 아픔을 잊곤 했다.

환자들에게는 지미로부터 창밖의 얘기를 들을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모두가 잠에서 깨었을 때 지미의 침대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그러자 ‘톰’이라는 환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간호사를 불렀다. “내가 저기 창가에서 잘테니 내 침대를 옮겨주시오.” 유일하게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그 침대는 순서가 있었다. 하지만 톰은 그 순서를 무시하려는 것이었다. 성품이 거칠었던 톰을 막을 수 없었다.

톰은 드디어 창밖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해 했다. 창가로 옮겨 침대에 눕자마자 창밖을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비벼 보아도 지미가 얘기하던 그 아름답던 풍경은 볼 수가 없었다. 그저 검게 그을린 벽돌담 뿐이었다. 지미는 다른 환자들이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생명의 끈을 놓지 않도록, 보이지도 않는 바깥 풍경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로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한 줄기의 희망만 있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언젠가는 건강해질 거라는 희망, 끝내는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오늘보다 내일이 더 살기 좋아질 거라는 희망.... 희망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생각이며 부정보다는 긍정을, 불가능보다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그러니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희망을 심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꽃 피우고, 세상에 생기를 주어 이 땅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다.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바로 ‘헬렌 켈러’의 말이다.

오늘 암담하고 벅찬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어는 바로 ‘희망’이다. 희망이 있기에 꿈이 있고, 내일이 있고, 행복이 있으며, 사랑이 있다. 희망이 없으면 어둠과 절망과 싸움과 포기와 파멸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한 줄기 빛나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가 그걸 부여잡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은 우리 모두의 정답이다. 평생 찾아 헤매는 문제의 답이다. 그래서 희망은 우리의 신앙이다.

영국의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의 이야기다. ‘2차 대전’ 당시 ‘옥스퍼드 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위엄 있는 차림으로 천천히 단상에 올라갔다. 청중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의 입에서 나올 근사한 축사를 기대했다. 처칠은 청중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힘 있는 목소리로 짧은 한 문장을 외쳤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연설이 끝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청중에게 한참 뒤 그는 소리를 높여 다시 외쳤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청중들은 다음 연설을 기다리자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라고 외치곤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때야 청중들은 처칠에게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하지 못하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포기하는 것이 실패다.

세상에 어느 사람도 힘들지 않은 삶은 없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절망과 어려움을 희망과 용기로 바꾸고, 성공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안게 될 것이다. 오늘도 처칠은 우리에게 말한다. “Don't give up. (포기하지 말라) Never give up! (절대 포기하지 말라!) Don't you ever and ever give up!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라!)”

희망을 품은 사람이야 말로 바로 행복으로 가는 직행열차의 승차권을 획득한 것이다. 행복의 조건은 복잡하거나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단순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의 싹은 튼다. 어느 날 ‘공자’가 조카 ‘공멸’을 만나 물었다. “네가 벼슬한 뒤로 얻은 것은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이냐?” 공멸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대답했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랏일이 많아 공부할 새가 없어 학문이 후퇴했으며, 둘째, 받는 녹이 너무 적어서 부모님을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습니다. 셋째, 공무에 쫓기다 보니 벗들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공자는 이번엔 공멸과 같은 벼슬에서 같은 일을 하는 제자 ‘복자천’을 만나 같은 질문을 해 보았다. 복자천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잃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 글로만 읽었던 것을 이제 실천하게 되어 학문이 더욱 밝게 되었고, 둘째, 받는 녹을 아껴 부모님과 친척을 도왔기에 더욱 친근해졌습니다. 셋째, 공무가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우정을 나누니 벗들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공멸과 복자천, 그들은 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똑같은 일을 하고도, 똑같은 수입을 가지고도, 한 사람은 세 가지를 잃었다고 푸념하는데 한 사람은 오히려 세 가지를 얻었다고 감사해 한다. 공멸과 복자천의 차이가 있다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이처럼 같은 상황 속에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행복의 비결은 좋아하는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라는 ‘제임스 베리’의 말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또 하나 행복의 조건은 바로 ‘베품’이다. 선행과 봉사의 미덕은 일일이 필설로 형언할 필요가 없다. 이웃을 위한 배려와 양보의 마음이 바로 행복을 향한 첫걸음임을 명심해야 한다. 미국인들은 무언가 매우 특별하게 말하고 싶어 할 때, “애플파이 같다.”고 말한다. 또 미국의 가장 큰 도시인 ‘뉴욕’을 부를 때 ‘가장 큰 사과’라고도 한다. 이처럼 미국에서 사과는 매우 미국적이며, 아주 특별하다.

사과를 이렇게 특별한 과일로 만든 배경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1774년에 태어난 ‘존 채프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미국의 개척시대에 많은 지역을 돌며 사과 씨를 뿌렸다. 그 이유는 현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미국인들이 배고픔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조니 애플시드’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것은 아무 대가 없이 평생을 사과를 보급한 헌신과 희생이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받는 것에만 익숙해 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좇아가는 시대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면, 내일은 누군가가 그 그늘에서 쉬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내 것을 하나 내줌으로써 내 주변이,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상을 구하지 않는 봉사는 남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행복하게 한다.

남에게 드러내서 보여주는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심상, 즉 보여지지 않는 마음의 씀씀이가 더욱 중요하다. 우선 마음이 움직여야 몸도 따라 움직여지기 마련이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억지춘향식의 강요나 마지못한 겉치레식의 행동은 곧 실체가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렇기에 진실한 마음의 베품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중국 ‘송나라’ 때의 명재상 ‘범문공’이 젊은 시절 당대의 유명한 역술가를 찾아갔다.

이 역술가는 한 눈에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어서 집 대문에 들어서면 이미 샛문을 통해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했다. 그래서 성공할 사람 같으면 정중하게 마당까지 나가서 맞이하고, 벼슬도 제대로 못 할 사람 같으면 아예 문도 열어보지 않고 그냥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범문공도 자신의 앞날이 궁금해서 이 역술가를 찾아갔더니 문도 열어 보지 않은 채 그냥 들어오라고 했다.

범문공이 역술가에게 물었다. “제가 재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역술가는 그런 인물이 못되니 헛된 꿈을 접으라고 했다. 그러자 범문공이 다시 역술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의원은 될 수 있겠는지 다시 봐 주십시오.” 역술가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당시에 의원이란 직업은 오늘날처럼 처우가 좋은 직업이 아니라 여기저기 떠돌아 약 행상을 하는 직업이었다. 재상을 꿈꾸다가 아니라고 하니까 돌연 의원이 될 수 있겠냐고 묻는 범문공에게 역술가는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범문공이 대답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해 제 한 몸을 바치고자 합니다. 재상이 되어 나라를 바로잡고 떠받들면 좋겠지만 안된다고 하니 나라를 돌며 아픈 사람이라도 고쳐주고자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역술가는 큰 충격을 받고 말했다. “대개는 사람을 볼 때 관상, 족상, 수상으로 보지만 심상(心象)이라는 것도 있소이다. 내가 실수를 한 듯하오. 당신은 심상으로는 단연 재상감이오. 부디 힘써 이뤄 보시오.”

이후 범문공은 송나라의 훌륭한 재상이 되어 후세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사람의 그릇과 성공은 외모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그 사람의 됨됨이, 즉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외모를 가꾸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마음을 먼저 가꿔보는 건 어떨까? 결국 삶이란 우리가 되고자 했던 완벽한 인격체로 거듭나는 과정인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 선인장처럼 자신의 환경에서 완벽하게 적응한 식물도 드물 것이다. 사막이란 곳은 매우 덥고, 한 달 이상씩 비가 내리지 않아서 좀처럼 물을 구하기 힘든 곳이다. 그런 선인장의 가시는 본래 잎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막의 뜨거운 햇볕이 많은 수분을 증발시켰기 때문에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잎을 작고 좁게 만들다 보니 차츰 가시로 변했다고 한다.

수분의 증발을 막기 위해서 잎 대신에 가시를 갖게 된 것이다. 딱딱하고 가느다란 가시는 수분을 밖으로 거의 빼앗기지 않기 때문에 사막에 사는 선인장에겐 안성맞춤이다. 또한, 가시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사막에서는 동물들이 식물을 통해 수분을 섭취하기도 한다. 선인장의 가시는 이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보호 장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시는 날카롭고 뾰족하여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가시를 발견하고는 쉽게 비난하곤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 가시를 “없애라.”, “잘라라.” 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누구도 상대방에게 그 가시가 왜 생겼는지, 어떤 의미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가시는 그 상대를 지켜주는 도구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혹시 주위에 가시 같은 사람이 있다면 비난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자.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성경에 나오는 어휘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참고 견디라는 의미에서 건네주는 덕담이기도 하다. 힘들고 지난한 시절을 인내하면 언젠가는 좋은 시절이 올 거라는 희망의 멧세지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시절도 때가 차면 기운다는 경고의 함축도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듯이, 이 여름이 가을로 이어지는 건 시간 문제다. 다음 기회란 없다. 단지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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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랑이는 바람결
코앞으로 다가온 예순세살의 초여름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윽고
서른살 언저리의 초여름
추억해내곤 몸살 앓아지다

모자람만 가득해도 충만하던 시절,
가진 것 없어 더욱 빛나던 꿈,
홀로여서 차라리 서럽지 않던 싱그러움,
그리고 흘러진 세월, 또 세월

삶에 있어 힘든 순간은
언제나 지금 뿐
- 만약, 만약에 말이지
세월 뚝 분질러
다시 살아볼 기회 주어진다면
적어도 이렇듯 비루하게 살아내진
않을 터, 안타까워 너무 -

살아온 날들 구비마다 질곡마다
어찌 살 에는 아픔 없었고
힘겹지 않은 시절 이어왔으랴만
돌아보는 아련한 숨결속으론
먼 그리움들만 소쿠리 한가득

문득 갈 길 가다가
산으로 난 조봇한 층층계 걸터앉아
푸르러가는 잎사귀 부여잡으며
내 예순셋의 초여름에게 초청장 보내다

- 가난한 내 삶
비록 몇 올 남지 않았을 계절 잔치에
당신을 정중히 초대합니다 -

고개 들면 천천히 올라가는 누리
촛점잃어 망연한 눈길
마알간 하늘끝 가 닿으니
새하얀 구름처럼 오늘도
삶은 순리대로만 흘러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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