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 자유 그리고 자유로움"
네번째 가상詩集입니다.

2012년 봄부터 씌여진 詩들입니다.
實驗詩적인 성격의 習作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오늘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역사의 章입니다.

처음 詩人의 길에 入門한 이래로
이제껏 40년 이상을 지어온 詩이지만 아직도
정확한 詩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판도라의 상자를 가슴에 품어안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풍운아로 떠돌며
詩의 본질을 찾아 헤매고 있는
詩人 林森의 애환이 드러나 있습니다.

林森의 고행은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쭈욱 ~~

詩人의 멍에를 天刑으로 걸머지고 있는 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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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나절 *



시작노트

" 저녁나절 " 詩作 note

아직 나이 먹지 않았을 적에는, 나이 든 노인들이 “세월이 쏜 살 같다“ 말하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면 되는 것을, 세월은 세월이거늘 새삼 빠르기를 한탄해야 할 이유같은 건 애초 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던 그 시절이었다.

하루 하루 자신만만하게 열심히 살면 그것으로 되었지, 후회나 한숨일랑은 아무 소용없는 삶의 사족이라 여기던, 자신만만한 청춘의 나이였으니 대충 그럴 만도 했을 게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어찌 이즈막에는 이리도 세월이 빠른지 모르겠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쏜 살 같이 밤낮이 교차된다. 뭔가를 작심하고 시도해보려고 해도 너무 빠른 세월에 도대체가 적응을 하기가 쉽지를 않다.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다.

아침인가 하고 뒤돌아보면 하마 어스름 저녁나절이다. 석양이 비추고 땅거미가 지면 이내 서늘해지고, 찬 바람이 몸을 감싸니 얄궂기만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나름의 성취를 이루어놓으며, 여유로운 노년맞이로 준비하는 건데, 이래저래 후회막급이다.

굳세기만 하던 힘도 떨어지고, 팔팔하던 기운도 쇠하고, 명석하던 두뇌마저 어찌 된 영문인지 잘 작동이 안된다. 아마도 나이를 퍽이나 먹은 증거인가보다. 이제부터는 젊음의 추억은 고이 접어두고 현실에 걸맞는 생활 태도로 다시금 삶의 설계를 조정해야 할 듯 하다. 그게 차라리 현명한 처사다.

그렇게 시절에 적응하고, 계절에 순응하고, 세월과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걸어가리라. 남겨진 시간 짧다고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롭고 차분한 행보를 이어가리라. 그리 다짐해본다. 봄이 오는구나 했더니 어느새 대낮에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외출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햇볕이 제법 뜨겁다.

짧은 봄의 한 가운데에 이미 들어섰나보다. 바야흐로 봄꽃들의 시간이 다해 간다. 대신 신록이 꽃만큼 아름다워지고 있다. 여울 곳곳마다 연둣빛으로 물드는 중이다. 이맘때면 노랗고 붉던 산야가 변해가는 풍경은 늘 세인의 머릿속을 맴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얼른 가까운 교외라도 나가서 눈으로 확인해보는 게 상책이다. 자연과 동화되어 잠시나마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 숨 한 번 쯤 쉬어보는 여유가 절실하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봄에는 꽃 흐드러진 자연 속에서 어떤 흥취를 느끼는가를, 여름에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어떤 매력에 끌리게 되는가를, 가을이면 단풍과 낙엽이 교차될 때 어떤 정감에 사로잡혀 자연을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겨울의 압권인 맵찬 바람과 눈덮인 산야에서 어찌해야 멋진 계절의 낭만을 맛볼 수 있는가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저절로 안다.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족을 칭하는 표현 중의 하나인 ‘홍익 인간’과 ‘단군 자손’의 의미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비록 넓지 않은 땅덩어리지만, 이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에서 터를 잡고 사시사철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우리 한민족의 긍지와 자랑 중에서도 압권은, 누가 뭐라 해도 단일민족의 공고한 뿌리였다.

그런데 이 오래된 사실이 언제부터인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문명과 생활양식이 변하듯이, 우리의 전통과 역사가 조금씩 그 색깔을 달리하면서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문화적 변화를 심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와서는 모름지기 우리가 필히 인정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생겨났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늘어나던, 우리나라에 거주하게 된 외국의 이주민이 벌써 170만 명에 달하는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대한민국을 찾아오는 이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 2030년에는 5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이른바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에서 ‘다문화국가’로 완전히 변모한 것이다.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는 국민보다 우리나라로 이민을 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아지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이민은 단적으로, 자기가 살던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일을 가리킨다.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민이 있고, 사회문화적인 영향으로 이루어지는 이민이 있다. 또 개인적인 이유로 이민을 결심하게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가정과 고향, 나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를 원칙적으로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떠나야 하는 이유와 사정이 생겨났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로 이민이 진행되게 되는 것이다.

이민자들을 제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에는 많은 사회문제가 생겨난다. 정책적인 부분이 갖추어져 있지 않을 때에는 이민들의 의료, 주거와 관련된 기본적인 인권 보장도 어렵다. 노동에 대한 임금을 받는 과정에서의 차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문화적인 부분에서 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이민 2세대, 3세대들이 겪는 차별과 경제적인 부담감도 필연적으로 매우 크다.

우리나라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이미 생산 인구의 부족을 체감하고 있다. 그 자리를 많은 이민들이 채우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이민 인구 중 약 60%에 가까운 이민이 직업을 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조사되고 있어서, 이 현상은 더 분명하다. 하지만 청년들의 실업률이 높아가면서, 높은 실업률에 대한 불만이 이유도 없이 이민을 향하기도 한다.

작금의 우리 농촌을 돌아보면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집은 거의 대부분 이민의 자녀들,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다. 알코올 중독이나 장애가 있는 남편, 늙은 시부모님을 부양하는 일도 힘들텐데, 한 술 더 떠서 식당이라도 다니면서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다만 얼마라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이들은 계속 일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가족들은, 혹시 한국 국적을 얻게 되면 가정을 등지고 떠나버릴까 걱정되어 이들이 쉽사리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게 하곤 한다. 그러다보니 이들이 사회와 직장에서 받는 차별은 더욱 커지고, 심할 때는 현대판 노예처럼 갇혀서 식모살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반의 문제들이 정책이나 제도적인 한계의 이유만은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 속 깊이 뿌리내린 어떤 아집이나 이기적인 편협이 무의식 중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오늘날의 세계를 ‘지구촌’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이미 전 세계가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글로벌 문화가 지구촌 곳곳에 널리 퍼져있고, 너와 나가 아닌 우리라는 단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현실을 대세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사실 한 형제요 가족이다. 특별히 그렇게 때문에 이민의 문제는 더 큰 도전이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내 눈에 보이는 나라와 국경, 피부색만 따져서 ‘우리’와 ‘남’을 가르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부터 먼저 현대화의 물결에서 뒤처지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낯 뜨거운 광경을 목격했다. 어린 아기를 동반한 젊은 주부가 지하철에 탑승을 했는데, 아기가 자꾸 칭얼거리며 보채는 것이었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서 승객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기의 울음소리에, 앉아있던 승객들이 대부분 신경이 쓰여서 힐끔거리며 무언의 압박을 아기엄마에게 가하게 되었다.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아기가 울음을 그치질 않아서 엄마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 때 피부색이 약간 검은 외국인 여성 둘이 근처에 서있다가, 아기에게 다가가서 달래며 가방에서 사탕같은 걸 꺼내 건네주었다. 아마도 동남아 쪽의 이주민인 듯 했다. 웃으면서 외국어로 아기를 얼르며, 사탕을 까주려고 하였다.

그 때 아기의 엄마가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면서 사탕을 빼앗아 내동댕이를 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얼른 아기를 품에 당겨 안으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벌어진 순식간의 일인지라 누구도 만류할 수도 없었고, 졸지에 봉변을 당한 그 여성들은 어안이 벙벙한지 쭈뼛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선의를 가지고 아기를 달래려다가, 마치 못할 짓을 저지른 죄인이 된 것처럼 얼굴까지 붉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라서 주워담을 수도 없고, 모든 승객들의 원망어린 시선이 일제히 그 아기엄마에게 향했다.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아기엄마가 얼른 외국 여성들에게 사과를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 일이 특별한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별 것 아닌 있을 수 있는 해프닝이었는지, 명확한 구분을 지을 수는 없다. 또한 잘못되었다고 해서 무슨 처벌을 한다거나 단죄를 요구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외국의 이주민들과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각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이다. 피부색이 흰 외국인에게는 다소 호감을 갖고 있으면서, 반면에 그렇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무시하거나 비하하기를 서슴지 않는 무의식적인 언행이 우리 뇌리에 비일비재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걸 부정하지 말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들과의 관계 개선은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고, 그렇게 거듭난 의식의 대전환이 우리 민족의 새로운 지평을 비로서 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잘못된 생각을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와 화합의 손길을 서로 맞잡는 용기가 필요할 때다.

비단 외국의 이주민들과의 관계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이미 깊숙하게 뿌리박아 만연되어 있는 사회 곳곳의 불신과 증오의 벽을 우리는 서둘러 허물어야 한다. ‘R 스콧 허드’라는 신학자는 ‘용서가 어려울 때’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쉽지 않지만 반드시 가야하는 길, 용서와 화해에 대한 아름다운 여정의 이야기를 전한다.

생활고로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주택구매 등을 포기한 5포 세대, 자녀교육을 둘러싼 사회문제에 분노해 그 해결에 적극 동참하는 앵그리맘, 분노 조절이 절망적 수준에 다다른 우리 사회에서 타인을 용서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사료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제와 해답은 동시에 그 속에서 존재한다.

모든 길은 ‘사랑’으로 통한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사랑이다. 물론 사랑은 기회 있을 때 마다 항상 필자가 다루는 화두이지만,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든 용어이다. 각자의 체험에 따라 사랑은 그 모습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막연하게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의 것을 표현하기도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사랑은 모든 딱딱한 것을 부드럽게 만들고, 모든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만든다. 사랑의 마술은 언제나 변화무쌍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성으로 다가서서 새로운 얼굴로 감싸안는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까지도, 변치 않는 습관까지도, 고착화된 고정관념조차도 사랑으로는 다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하다.

이슬람 율법에는 정당한 보복이란 뜻을 가진 ‘퀴사스(qisas)’라는 사형 집행 제도가 있다. 퀴사스는 2008년 이란 여성 ‘아메네 바흐라미’가 자신의 얼굴에 초산을 던져 실명케 한 남성에게 똑같이 실명을 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바흐라미는 2011년 7월 형 집행일에 가해자의 사면을 요청했다.

사형제 폐지 운동을 벌이는 ‘국제 앰네스티’는 이란의 공개 처형제를 비난해왔다. 이 단체의 ‘바하레 데이비스’는 “퀴사스 처벌은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이 당국의 사면이나 감형을 받을 수 없게 만드는 미개한 제도”라고 비판했다.

이란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광장의 흰 벽 앞에 나무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위로 쇠파이프 구조물에 올가미가 달려 있다. 살인자가 최후를 맞이할 교수대다. 사형을 집행한다는 발표에 살인자의 친·인척들은 눈물과 탄식을 쏟아냈고, 어머니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은 눈가리개를 쓴 이가 형장에 끌려나왔고, 곧 목에 올가미가 걸렸다.

8년 전 20대였던 ‘빌랄 압둘라’는 이란 북서부 ‘마잔다란’의 작은 마을 ‘로얀’에서 ‘압둘라 후세인 자다’라는 18세 소년을 살해했다. 자다의 아버지는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시장을 걷는데 압둘라가 그를 밀었다. 기분이 상한 아들은 그를 발로 찼다. 그러자 그 살인자가 양말에서 흉기를 꺼내들었다”고 설명했다. 압둘라는 자다를 칼로 찌른 뒤 도망쳤지만 곧 경찰에 붙잡혔고, 지난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압둘라의 사형 집행일, 검은 차도르를 쓴 자다의 어머니가 교수대를 향해 걸어왔다. 이슬람 율법상 정당한 보복, 즉 퀴사스에 따라 아들을 죽인 자를 죽일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아들을 죽인 압둘라의 뺨을 때린 뒤 외쳤다. “용서하겠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압둘라의 목에 걸린 올가미를 풀어줬다. 자다의 아버지도 도왔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아들을 용서받은 어머니는 서로 껴안고 통곡했다. 부축을 받으면서 교수대를 내려온 압둘라도 아이처럼 크게 입을 벌리고 흐느꼈다.

둘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던 부부는, 큰 아들 자다를 잃어 아픔이 더했다. 그러나 몇 차례 사형 집행을 미뤄달라고 한 끝에 복수 대신 용서를 택했다. 계기는 있었다. 자다의 아버지는 “3일 전 아내의 꿈에 나타난 자다가 자신은 좋은 곳에 있으니 보복하지 말라고 했다”며 “사형일까지 고민 끝에 결정했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그는 압둘라가 아들을 고의로 죽이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란의 법률상 피해자 가족은 형의 집행을 결정할 권한만 있을 뿐 풀어줄 권리는 없다. 그래서 압둘라는 일단 다시 수감됐지만 나중에 사면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

용서라는 행위는 사랑과 직결된다. 사랑의 마음 없이는 용서의 행동이 뒤따를 수 없다. 그래서 용서와 사랑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 화해와 평화로 이어지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일전에 지인의 추천으로 대학로에 있는 전용소극장에 가서 연극을 한 편 보고 왔다. ‘기억의 조건’이라는 제목이었다.

미해결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여 결말을 추구해가는 내용이었는데, 정말 뇌운동이 부지런해야 따라잡을 수 있는 수사극이었다. 요즈음의 수사극은 한 마디로 대단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완전 범죄와 완벽 수사기법, 뛰는 놈과 나는 놈의 현란한 밀당(밀고 당기기), 죄를 돕기도, 잡기도 하는 놀라 자빠질 최첨단 과학 기술, 귀신같은 수사관과 더 귀신같은 범죄자의 황당한 대결이, 보는 사람의 뇌를 자극하고 잠시도 쉴 틈을 안준다.

이 연극도 사건 자체가 미해결인 이유가 먼저 드러나 있다. 용의자들은 확보가 되어 있지만, 그들의 기억이 깊이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기억을 살려내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건은 해결이 되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고,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사랑과 용서의 결핍으로 인한 사회적 모순을 발견하는 일이다.

쓸쓸하고 어리석은 자가당착의 모습이 현대를 버겁게 살아가는 자화상을 보는 듯 하여 뒷 맛이 개운치 않았다. 느낌 생각 의견 판단 등을 다 걸러낸 순수 기억,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능할까? 주인공들이 기억해낸 건 공포와 후회, 그리고 환한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과연 무엇을 후회했으며 무엇을 기뻐했을까? 기억해야 하는 건 그 안에 있다. 기억이란 생각해 내는 일이 아니라 지워버리는 일이다.

지워낸 그 자리에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을 채워 넣도록, 연극에는 없는 용서와 화해라는 말이 맴돈다. 나와 너를 용서하고, 나와 네가 화해하는 것, 그것으로 삶은 힘들게, 그러나 분명 조금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렇게 사랑의 숨결이 모두의 가슴에서 조심스레 싹튼다면, 그래서 우리가 서로 서로 어깨 겯고, 손 맞잡아 함께 앞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미래는 필경 밝고, 맑고, 환한 평화의 시공간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으리라.

본래부터 내국인이었거나, 외국에서 온 이주민이었거나,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구태여 구분 짓지 말고, 어설프게 억지로 편을 가르지도 말고, 함께 공유하는 공동의 목표점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보자. 같이 가는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힘 모아 찾아보자. 그것이 이 저녁나절 우리가 찾아야 하는 정확한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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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기대인 개밥바라기
곰살궂은 웃음 흘려
길섶에 슬금 숨어
넉살부리더니만

지는 해 아쉬워
깜냥껏 눈바래기 해주곤
두멍 흠씬 들고 온 너울가지로
내 눈에, 얼굴에, 입술에,
석양 글썽 묻혀 키스를 하네

물렛간 도래샘에서
쪽잠들어 덧새던 산새 한마리
푸드득 봄비늘 털어
밤으로 오르는데

하늘까지 하늘까지
눈감고 날아오르누나
춘삼월 볕끝 길어
안즉도 저녁나절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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