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 孤島의 默示錄... 토해낸넋두리前"
출판 예정 두번째 詩集의 제목입니다.

林森의 인생에 있어서 또다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시작인
2008년 후반기부터 2010년 전반기까지
약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마르지 않는 샘물인 양
정말 많은 量의 詩를 짓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의 나날을 헤쳐나오면서
量産된 詩이니만큼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비감어린 내용과
칙칙한 파스텔톤 색깔의 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시대의 방랑자 다운 林森의 詩心과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우는 詩語의 조화가
오묘하게 조합을 이루고 있는지라,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떡이게 만들고
한 데 어울려 함께 눈물짓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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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묘지 터 *



시작노트

" 공동묘지 터 " 詩作 note

한동안 필자가 신세를 졌던 곳을 기억하면서 쓴 시다. 배경만으로도 금세 알 수 있듯이 결코 정상적인 사람들이 머무는 곳은 아니다. 나름 굴곡진 삶의 매듭에서 풀어내지 못한 회한을 통째로 뭉뚱그리며, 세월을 죽이던 그곳에서 필자는 정말 많은 사연들을 접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무수한 이유들을 들어주고 고백하면서 그들과 교류하다가 필자가 발견한 것은 결국 누구나 매달리는 공통분모, 삶의 애착이었다.

그래서, 되돌아 나온 이 세상의 페이지에서도 역시 그늘은 짙게 존재의 이유를 들먹이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다시 퇴폐적인 분위기에 적응한 필자의 어줍잖은 철학은 숱한 거짓이야기들을 지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필자의 실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허무한 그림자만 난무했다. 그 그림자들을 모아 모아서 필자의 시는 피로서 쓰여졌다. 그러면서 차츰 차츰 필자의 아픔도 슬픔도 세월 속에 녹아들었다. 지금 필자는 퍽이나 다행스럽게도 행복이라는 가면을 쓰고, 그렇게 요란한 꿈의 노래를 부르면서 오늘을 달린다.

거기 도무지 내일은 없었다. 어차피 생명은 의미도 없었다. 기억이나 생각 따위는 애초 창조되지 않았다. 그저 막연한 숨소리만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서있었다. 그러니 거기서 기쁨을 찾는다는 건, 어떤 즐거움을 기대한다는 건 그야말로 꼴값이었다. 오직 주어진 원초적 몸부림에만 충실하게 임하면서 하루씩 죽여나가면 그 뿐, 더 이상은 필요도 조건도 아니었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다가 종내는 지옥에서 탈출한 필자는 이제 웃으면서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삶의 미학이다. 달착지근한 맛을 내는...

8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젠 9월의 문이 바투 서서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새 달에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나려나? 어떤 예기치 않던 사건 사고들이 줄을 이어 우리를 습격하려나? 어떻게 각색되고 편집된 기상천외한 사태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려나? 지레 겁을 먹고 새 달을 째려본다. 더 이상은 놀라지도 경악하지도 않으리라. 이제는 어떤 자극이나 도전에도 과감하게 맞서리라. 지금부터는 도리어 선제공격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리라. 스스로 세워놓은 방책에 흐뭇해 하면서 극악한 미소를 머금는다. 결국에는 그러다가 또 제일 먼저 화들짝 놀라고 말테지만 말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세상사에 휘돌리다가 저 구석으로 허접쓰레기 모양 처박힐 바에는 얼른 조금 남은 이성 줄 다잡아 작은 아지트라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가서는 가을의 기운 소중하게 주워 모아 담은 주머니 괴춤에 매달고, 슬며시 계절찬가라도 한 자락 불러제끼리라. 그러다 보면 넌지시 주어지는 복락의 작은 조각이라도 얻어걸릴 지 뉘 알랴? 그리고 어차피 그런 행복을 좇아 바지런하게 움직이는 게 삶이고 일상인 것을.

행복한 삶을 파는 가게가 어디에선가 문을 열었다. 돈으로 진정한 행복을 살 수 있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이 그 가게에 몰려들었다. 돈 많은 한 청년이 그 가게를 찾아가 오랜 시간 동안 긴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겨우 가게로 들어갔다. 1층에서는 현명한 아내와 소박하지만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는 삶이 있었다. 2층에는 아름답고 성실한 아내와 착하고 똑똑한 아이들과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이 있었다. 위 층으로 올라갈수록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욕심에 청년은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는 아름답고 성실한 아내와 착하고 똑똑한 아이들과 부유한 가정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이 있었다. 4층에는 완벽한 가족과 함께 부와 명성을 모두 누리는 건강한 삶이 있었다. 하지만 청년은 1층부터 4층까지의 행복한 삶은 쳐다보지도 않고 마지막 층인 5층으로 무작정 올라갔다. 당연히 그곳에는 더 크고 더 화려한 행복한 삶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5층에는 커다란 표지판이 하나 놓여 있었고,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행복을 파는 가게에 오신 손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죄송하게도 5층까지 올라오실 정도인 손님의 욕망을 충족시켜드릴 행복한 삶은 저희 가게에서는 준비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손님은 저희 가게에서 어떤 것도 구매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나가시는 문은 이쪽입니다.” 행복한 삶을 파는 이 가게는 곧 망할 것이다. 무조건 5층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현실이 척박하고 어려워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고자 노력한다. 행복을 파는 가게에는 처음부터 발도 들여놓지 않고 지금 주어진 환경에 만족할 것이다. 행복은 다른 곳에서 사 오거나 만들 수 없다. 마음 안의 만족 속에서만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은 현재와 관련되어 있다. 목적지에 닿아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대대로 조선 시대 왕들이 기거한 ‘경복궁’은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그런데 그 궁궐 안에 주춧돌도 쓰지 않은 허름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지붕을 짚으로 엮은 것도 아닌 억새풀을 얹어 놓았고 방바닥에는 아무것도 깔지 않아 평민들이 지내는 초가집보다 더 초라한 집이었다. 한 때 이 집에 기거했던 사람은 ‘세종대왕’이었다. 세종 재위 5년에 발생한 강원도 대기근.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흙을 파먹는 상황에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구휼하는 동안 국무를 보며 기거했던 집이 바로 그 초가집이었다.

세종 즉위 후 10년간 가뭄이 들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동시에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하고자 하셨다. 이 허름한 초가집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세종대왕의 거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혹시라도 신하들이 초가집 방바닥에 지푸라기라도 깔아두면 크게 노하시며 거친 흙바닥에서 주무시는 생활을 몇 년이나 하셨던 세종대왕. 그 행동과 마음으로 세상을 빛낸 진정한 성군이었다.

세종대왕은 역시 달랐다. 항상 언제나 자신의 몸을 낮추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누구보다 존경받는 위인으로 남아 계신 것이다. “내가 꿈꾸는 태평성대란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원만하게 하는 세상이다.” 라는 말을 남기신 세종대왕의 마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만족하기 힘든 현실에 불만을 품고, 적응하기 쉽지 않은 오늘의 삶에 이유와 핑계를 만들어 붙이며, 자신의 척도에만 꿰어 맞추려드는 아집이 오늘날 수많은 정신병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차라리 온전한 정신으로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그럴싸 한 명분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궤변을 합리화하고, 오히려 세상의 보편성에서 원인을 찾아 헤맨다. 나름 창안한 정의를 내세워 일반적인 진리나 진솔한 풍습마저도 무시한다. 그리곤 아귀가 맞지 않는 자신의 삶의 패턴을 세상 탓으로 돌리며 제 발로 걸어 정신병원을 찾아들어간다. 마치 치기어린 젊음으로 세상에 대적하고자 했던 필자의 운명적인 과거의 암운처럼. 이미 후회도 반성도 늦어버린 결과를 되돌릴 수는 없는 건데, 그걸 한참이나 늦어버린 뒤에야 가까스로 깨닫는 비애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정녕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옛 중국 춘추시대 ‘공자’가 태산을 유람하는 중 산기슭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한 노인을 만났다. 공자는 노인의 행복한 표정이 궁금했다. “선생께서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노인은 여전히 악기를 연주하며 대답했다. “나의 즐거움은 아주 많지요. 하늘이 만물을 낼 때 모든 것 중에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내었는데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첫째가는 즐거움이요.”

그리고는 다시 이어서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빛나는 해와 달도 보지 못하고 강보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되기도 하는데 나는 이미 90세나 되니 그 또한 내 즐거움이요.” 마지막으로 노인은 공자에게 말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도를 닦는 이에게 당연히 있는 일이며 죽음이란 산 사람에게 있어서 당연한 종말이오. 그러니 이제 나는 당연히 있는 일에 처하여 살다가 제 명에 죽게 되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소?”

공자는 노인의 말에 감탄했다.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선생은 스스로 만족한 마음으로 행복한 마음을 너그럽게 가질 수 있는 분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행복한 사람의 마음과 그들의 생활에는 공통적인 만족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만족을 위해서는 마음 속에 있는 욕심과 탐욕을 비워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만족하게 살고 때때로 웃으며 많이 사랑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간단하면서도 소중한,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예화를 좀 더 돌아보자. 어느 고을의 원님이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신분을 감춰 낡은 옷을 입고 마을 여기저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는 도중 원님은 너무도 목이 말라 마을에서 가장 부잣집으로 보이는 대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집주인은 원님의 허름한 옷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물 한 사발 청하는 원님의 얼굴에 물을 확 뿌리고는 호통을 쳤다.

“너 같은 거지는 물을 주면 밥을 달라고 할 것이며, 밥을 주면 나중에는 술을 달라고 할 게 분명하니 일찌감치 쫓아내는 것이 상책이지.” 면박을 당한 원님은 다음날 좋은 옷을 입고 아전들과 함께 그 부잣집을 찾아갔다. 부자는 원님이 어제 그 사람인 줄은 모르고 크게 술상을 차려 원님을 대접했다. 그런데 원님은 받은 술을 마시지 않고 자신이 입고 온 옷에 천천히 뿌리는 것이었다. 놀라 부자가 물었다. “아니, 왜 좋은 옷에 술을 부어 더럽히십니까?
옷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그러자 원님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낡은 옷을 입고 왔을 때는 물벼락을 맞았는데 오늘 좋은 옷을 입고 오니 술상을 내주는구려. 그러면 이 술상은 내가 아니라 이 옷이 받아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지금 옷에 술 한 잔 드리는 중이오.” 그러자 사정을 깨달은 부자는 너무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사람의 가치는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그 사람 안에 쌓여 가는 것이다. 겉모습으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려 드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잘못된 행동이다.

자신의 가치를 쌓는 것만큼 다른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는 것 역시 오랜 시간을 들여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덕목이다. 사물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겉모습은 꾸미기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화가 무쌍하고 그에 따른 평가가 달라지기 쉬운 반면, 은근하고 꾸준하며 자연스러운 모습은 항상 변함 없는 가치와 진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인 가치를 어디에 두는가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나름이다.

인도에서는 우기 때마다 홍수로 큰 피해가 발생하자 ‘브라마푸트라 강’에 커다란 댐을 건설했는데 댐으로 35개가 넘는 마을이 수몰되어 사라졌고, 강 가운데 ‘마줄리 섬’도 점차 침수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마줄리 섬은 바다가 아닌 강에 형성된 섬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거대한 섬이다. 이 섬을 지키기 위해 인도 정부도 노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마줄리 섬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 명의 환경운동가다.

1979년 당시 16세 소년이었던 ‘자다브 파양’은 홍수로 많은 나무가 쓸려가 버린 마줄리 섬에서, 나무 그늘이 없어 햇빛에 타죽은 수많은 뱀을 보고 섬을 지키고자 결심한다. 그리고 자다브는 섬에 나무를 심었다. 그의 나무 심기는 무려 40년이나 계속되었고 그동안 마줄리 섬에는 여의도 면적 두 배가량의 숲이 조성되었다. 자다브 덕분에 현재 마줄리 섬은 뱅갈 호랑이, 인도 코뿔소, 인도 코끼리 등 수많은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되었다. 마줄리 섬은 여전히 침수될 위기에 처해 있지만, 자다브는 그동안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섬을 지켜나가겠다고 한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안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필요와 욕심으로 인해 무분별하게 훼손되곤 한다. 인간은 자연의 많은 것을 망칠 수 있지만, 반대로 자연의 많은 것을 회복시킬 능력도 있기에 지금의 이익보다는 먼 미래를 생각해서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생명체들을 존중하면, 그들도 우리를 존중해준다.” 이 말은 ‘아라파오 인디언’ 사이에 전해오는 격언이다. 우리가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당장의 편리와 만족만을 추구한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 필경 자연의 거대한 복수를 재앙으로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

기찻길이 지나가는 작은 시골에서 한 농부가 열심히 밭을 일구고 있었다. 일하던 농부는 이제 해도 뜨겁고 허기도 져서, 식사하고 잠시 쉴 생각으로 그늘에 앉아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열었다. 그런데 평소 보지 못하던 개 한 마리가 달려와 농부를 향해 맹렬히 짖어대었다. 배가 고픈가 싶어 음식을 조금 던져주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짖기만 하는 것이었다. 의아해하던 농부가 자세히 보니 개는 기찻길 한 쪽과 농부를 번갈아 보며 짖어대었다.

“기찻길 저쪽에 뭐가 있는 거니?” 호기심이 생긴 농부가 기찻길 쪽으로 다가가자 개는 농부를 안내하듯이 앞장서서 뛰었다. 개를 따라간 농부는 깜짝 놀랐다. 한 소녀가 철로에 발이 끼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고, 멀리서는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농부는 서둘러 소녀를 도와 발을 빼주었다. 소녀의 발에 상처가 조금 남았지만 다행히 기차가 가까이 오기 전에 피할 수 있었다.

“너희 집 개가 똑똑해서 정말 다행이구나. 이 개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 그러자 소녀가 농부에게 말했다. “우리 집 개가 아니라 조금 전 처음 본 개예요. 굶주린 것 같아서, 가지고 있던 빵과 물을 조금 나누어 주었더니 계속 따라오고 있었어요. 덕분에 살았네요. 정말 고마운 개예요.” 동물들의 사랑에는 계산이 없기에 배울 것이 있다. 때로는 빵 한 조각처럼 작은 사랑이라도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으면 동물들은 은혜를 갚기 위해 본인들의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판단할 수 있다.

한 젊은 청년이 인생을 충실히 보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에 옮겼다. 가장 먼저 '건강한 삶'을 위해 꾸준히 운동하고, '사랑받는 삶'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먼저 배려했으며, '풍족한 삶'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명예로운 삶'을 위해 정의롭고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남다르게 노력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청년은 누구보다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청년은 만족할 수 없었다. 무언가 부족한 듯한 느낌에 항상 걱정과 불안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청년은 자신의 스승을 찾아가 물었다. “충실한 삶을 위해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훌륭히 실행하고 있는데 여전히 뭔가 부족합니다. 저에게 빠진 것이 무엇인가요?” 스승은 청년의 버킷리스트를 보고 말했다. “훌륭하고 일리가 있는 계획이네. 그런데 자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을 때 이런 것 들은 오히려 큰 고통이 될 걸세.” 그리고 스승은 청년의 리스트 맨 윗줄에 한 줄을 더 적어 주었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 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재물과 성공적인 삶을 살아도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하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풍족한 혜택으로 편안하게 살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행복한가 그렇지 못한가는 결국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있다. 일상에서 찾는 소소한 행복이 삶의 궁극적인 큰 행복과 상통한다는 작은 깨달음이 정작 필요할 때다. 그것을 상실한 사람은 종국에 스스로 지은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환자로 살아가다가 황량한 공동묘지에 몸을 누이게 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9월에 우리는 가을이라는 명제를 가슴에 담는다. 여름내 지치고 시달렸던 몸과 마음의 우환들을 시원하고 상쾌한 가을바람에 실어 보내고 산뜻한 몸가짐으로 다시 태어날 때다. 비록 지난 날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과 정의로움으로, 스스로 묘지에 몸을 가둔 바 되었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마음으로 거듭날 때다. 목하 가을의 기운이 온 천지를 물들이기 시작한다. 아울러 우리의 내일은 소망과 꿈으로 물들여가야겠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행동으로 우리의 내일을 열어가야겠다. 그런 다짐으로 9월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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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즉도 아기무덤 즐비한 공동묘지 터,

갖가지 짐승뼈들 하얗게 바래지거나
검은 깃털 덮힌 날짐승 살덩이들 악취 풍기며
질척한 흙으로 썩어가던
후미진 그 산속,

정신병원은 게 다가 새록이 꿈 심으며
터전 마련했다더라

그래서 종사원이 자꾸 죽어나간다 하던가 ?
어쨌거나,

날 밝아오면서 묘지가로 비 내리기 시작한다
하늘이 먹장구름 습기에 휘어감기며
초가을 한기 머금은 스산한 빗발
스물스물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스스스 -
빗발이 병원 지붕 촉촉이 적시고있다
이렇게 아침 세우에 젖고있다
가을은 바로 곁에까지 와 있으되
아주 찬 기운 느껴지지는 않는다

공용 스피커에서는
유행가 가락 구성지게 터져나온다
너무나 너무나 슬픈 가사이다
제목은 나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심사 울적한 판에
구성없이 간지게 흘러나와 처연히 뒤울리는 맛
무척이나 사위스럽다

새날 새밤 새날 새밤
회한은 반복된다, 되감은 테이프마냥

음침한 빗소리와 서늘한 빛기운 속
동상인 양 굳어있던 나는
달팽이처럼 움직이며 아침 시작한다
공동묘지의 새로운 또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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