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5집. 비 내리는 날 오후  


  "5집. 비 내리는 날 오후"
수록된 序詩의 제목은 '사랑의 서시'이며
목차에서는 '봄 ! 초록빛 생명이 움트는 새 날'에 11편,
'여름 ! 푸른 바다 파도위 갈매기의 사연'에 11편,
'가을 ! 낙엽쌓인 포도의 회색 하늘 정취'에 11편,
'겨울 ! 백설의 광야에 홀로 선 소나무'에 11편,
그리고 '뒷풀이 한마당 -
멍석깔고, 재주넘고, 행복찾는 짓거리'에 16편,
합계 61편의 詩와 後記로 편집된 詩集입니다.

1995년 11월6일 인쇄되었으며
이 詩集에는 비교적 서사적인 내용과 형식을 지닌 詩가
다른 詩集에 비해서
더 많이 실려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 초롱불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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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길 *



시작노트

" 강원도 길 " 詩作 note

필자도 사람이다.
엄연한 사람인 이상 이런저런 실수도 하게 마련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본의 아니게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할 때도 있다.
때로는 무의식중에 그러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일부러라도 억하심정으로 저지레를 좀 하고 싶을 때도 있어서, 다른 이들의 이목은 무시하고 막장처럼 굴 때도 더러 있다.
그러면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질타와 힐난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마치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신랄한 비판과 평가절하의 손가락질로 퍽이나 신나 하는 측도 제법 많다.
“어떻게 시를 쓰는 시인이 그럴 수가 있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람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그런 행동을 하다니?”
등등의 극악무도한 욕설과 지적질이 난무한다.
그러면 필자는 되지도 않는 이유를 들어, 남과 스스로에게 반발을 하곤 한다.
“왜 나는 그러면 안되는 건데? 다른 이들은 은근슬쩍 다 하는 짓거리인데, 유독 나만 그렇게 처신하면 안되는 이유가 뭔데?”
따지고보면 참으로 허무맹랑한 핑계요, 앞뒤 안맞는 합리화다.
모름지기 도덕과 예의 기준은 비교가 아니고 절대가치에 있거늘,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짓는 데에 다른 사람의 행동은 전혀 그 기준이 되지 않는 법인데 말이다.
필자가 일전에 강원도의 한 문화센터에서 세미나를 할 때다.
반 농담조로 인사말을 선창하면서, 모두 따라서 외쳐보라고 주문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아직도 공사중입니다.”
“불편하지만 제가 참겠습니다.”
그러니까 배석자들은 뜬금없는 필자의 요구에 의아해 하면서도, 엉겁결에 모두 큰 목소리로 따라서 하였다.
그리고는 이내 실없는 인사말이 싱거워서인지 하나같이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공사중인 현장을 빈번하게 맞닥뜨리곤 한다.
때로는 길을 가다가, 혹은 아예 집 근처에서, 막다른 골목의 예기치 않은 공사 현장을 지날라치면 어쩔 수 없이 많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사과나 양해의 팻말이라도 설치해놓았다면 그건 그래도 양반이다.
어떤 곳에서는 아무런 예고나 안내조차도 없이, 무방비와 무대책으로 땅을 파헤치거나 가림막을 불시에 세워놓고, 통행을 방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딴에는 조심하느라고 하지만 미끄러지거나 적재물에 걸려서 넘어지기도 하고, 졸지에 흙탕물 세례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길바닥에 방치된 못이나 쇳조각 등으로 인해 자동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경험하게 된다.
물론 그 정도가 심하다거나 지대한 피해가 유발된 경우라면, 근본적인 배상과 보상 등을 요구하기도 하고, 더 심한 사안일 때는 법적인 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이런 작은 불편함이나 사소한 피해는 그냥 감수하고 넘어가게 되는 게 일상의 다반사다.
사실을 사실대로,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고 양해하는 것이 비단 더 편해서는 아니겠지만, 작은 일로 귀찮은 문제를 유발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타성은, 웬만한 시빗거리라면 그냥 눈감아주라고 늘 귓속말로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반적인 아량과 참을성이, 특수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외로 적용되기도 한다.
작은 실수만으로도 여지없이 지탄을 받고 마는 부류들, 즉 성직자나 교사, 대중연예인, 문학가나 예술가, 정치가나 사회지도층 인사 등의 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하는데, 한마디로 완벽한 처신과 언행만이 용납되는 계층이다.
“어떻게 저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이 말 한마디면 이미 헤쳐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날만 기다려야 하는 운명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가 가장 합리적이고 양심적이며, 세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걸로 착각을 하고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게 편하고 심신이 안정되기 때문이겠지만, 아무튼 그런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을 재면서 살아간다.
자신은 누가 뭐래도 최고로 진실되고,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며, 가장 현실적인 판단으로 남을 대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실인즉 그렇지가 않다.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이상을 그리며, 가상의 진실을 모범답안지인 양 마음속에 설정해놓고, 다른 사람들의 보여지는 모습을 그 기준으로 판단하여 채점한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은연중에 그 기준을 상대에게 요구한다.
불편한 진실을 강요하면서 동참하라 강권한다.
그러다보면 주변이 힘들어지고, 거리감이 만들어지게 되는데도 본인만은 그걸 모르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다.

대개의 부모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자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안다고 생각을 한다.
그게 얼마나 크고 위험한 착각이고 오류인지를 모른다.
그러니 그런 지적을 받을 때면 오히려 굉장히 반발을 하고 분노한다.
이 세상에서 내 자녀를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고 공정하지도 못한 시각으로 자녀를 보게 되는데,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녀에게 기대를 갖고 자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자기식의 자기 이상으로, 자기 기준의 생각으로 자녀를 바라보며, 대하며, 요구하는 마음이, 결국은 자녀의 현실을 무시하고, 개성을 말살하며, 나아가서는 진실을 도말하는 처세임을 알아야 한다.
지나친 집착과 억압이 곧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거짓되게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런 착각이 심화되어 크나 큰 상처를 주게 된다는 사실도, 그리고는 마침내 심각한 비극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결코 우리가 가볍게 넘겨서는 안될 사안이다.
어쨌든 사람에게는 욕심이라는 무서운 본능이 있어서, 그것이 앞을 막아서버리면 다른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니 진정한 자유의 삶을 기대하는 건 무리수일 수밖에 없다.
정치가들을 보면 겉으로는 국민의 뜻과 민심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개인의 탐욕과 사적인 견해가 범벅이 되어 정책이니, 방침이니, 반영이니 하면서 소위 국민의 대변자인 양 하기 좋은 말로 번드레하게 치장을 하곤 한다.
물론 목적을 위한 거짓과 위선인 경우도 있지만, 본인 스스로조차 그것이 기만이며 빈 공약이라는 걸 아예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그래도 가장 우수한 머리로 잘난 사람들이 하는 게 정치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건 바로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제대로 된 삶의 기준이 설정되지 않았으면 헤맬 수밖에 없다.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려 하지 않고, 남의 작은 실수나 티끌에도 광분하는 게, 모름지기 만물의 영장이라는 하찮은 사람들의 오래 된 습성인 걸 어쩌랴!

살아가다보면 이따금 화가 참 많이 날 때가 있다.
그것도 가까운 인연이거나, 내가 도움을 주었던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
그런 때, 한참 동안 화를 삭히지 못하다가 마음을 돌려 정리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마음이 어디서 왔나?’ 하고 돌리는 경우이다.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돌리다 보면 차츰 잘 돌려지게 된다.
그리고 ‘이 마음이 어디서 왔나?’ 하고 보면, 그 근원지에 화가 나게 하는 실체란 없다.
실체도 없는 허깨비를 놓고 혼자서 고민하거나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화나는 것, 참고 돌리는 것, 실체가 없는 그 자리를 아는 것 등이 다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안다면 그 누구를 탓할 것도 없고, 복을 지어 놓고 복 받기를 기다릴 일도 없다.
비단 화나는 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모든 일의 근본인 이 마음의 원리를 안다면 금방 놓아질 일인데, 모르기 때문에 그게 이 순간의 전부인 줄 알고 붙들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눈, 즉 심안으로 바라볼 줄 안다면 이미 선인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노력하고 애쓰는 마음으로 정진해볼 일이다.
겉모습에 의존하지 않고 혜안으로 사람을 느낄 수 있다면, 가슴으로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그 사람은 아름다움이 사라지거나 상대방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소멸되거나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불변의 이치이며 진리이다.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한 세월이 흐른다 해도, 비단 상대방이 곁에 없어도 변질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지개같은 환상의 아름다움과 노을빛의 숭고함이 깃든 세월의 한자락에서 꿈의 빛깔을 볼 때면, 순간적인 시력에 의존함이 아닌 영혼의 깊은 울림에서 그를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비탈진 세월의 양지에서도, 그 세월의 언덕 후미진 음지에서도 피어나는, 서로 다른 아름다움이 무한하게 자라난다는 걸 알게 되는 날들속에서, 우리가 간혹 역류하는 격한 감정들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갈까를 깨닫는 것이 삶의 지혜에 이르는 첫 걸음이다.
산다는 것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며, 행복하기 위한 가파르고 힘든 고개 길을 넘어가는, 만족을 향한 여정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은 것에서 오는 만족으로 느끼는 비워진 마음, 비워낸 마음, 헤아리는 아름다움이 있기에 늘 행복하게 느끼며 살아내는 건 아닐까 싶다.
또한 아주 작은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을 누릴 때 마음 안에서 향기처럼 피어나는 행복이야말로 진정 삶의 질이 달라지는 행복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어진다.

언뜻 보아서는 건강하고 강인하게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하지만 그 나무는 겉모습만 괜찮게 보였지 그리 강하지도 않고, 점점 쇠약해져가는 나무였다.
겨울이 다가와 바람이 강해지자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른 나무들이 그런 자신을 얕보는 것 같다고 느낀 나무는, 새로운 나뭇가지를 자라나게 하여 훨씬 더 강하고 멋있게 보이도록 만들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태풍이 몰아쳤고, 그 나무는 뿌리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을 때 옆의 나무가 자신의 몸에 기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
태풍이 그치고 바람도 잠잠해지자 그제야 그 나무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무는 자신을 도와 준 옆의 나무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이런 세찬 바람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을 수가 있나?
모진 태풍 속에서도 나를 도와 줄 힘까지 지닌 비결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없겠나?”
도와 준 나무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자네가 새로운 가지를 만들기에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는 동안
나는 뿌리를 땅속으로 깊숙히 내렸다네.”
물론 필자도 그리 별 다르지 않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나 모양새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을 하면서 산다.
굳이 외양만을 꼬집는 것이 아니라, 일처리를 한다든지 하는 데에도 내용보다는 형식에 우선 치우칠 때가 참 많은 것 같다.
뿌리가 실하면 줄기가 튼튼하고, 줄기가 튼튼하면 꽃과 잎은 자연히 푸르고 아름다우며, 수확하는 열매 또한 풍성한 법이다.
우리의 삶도 자연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실 있는 삶은 후천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바로 자신감과 여유로부터 표출되는 건강한 아름다움이다.
그런 아름다움으로 행복한 삶을 위한 기초공사를 해야 할 것이다.

행복으로 향하는 티켓은 바로 미소다.
삶속에 깃들어있는 미소야말로 행복의 바로미터요, 행복을 수놓는 첩경이다.
미소는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이루어낸다.
받는 사람의 마음을 풍족하게 하지만, 주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지 않는다.
미소는 번개처럼 짧은 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기억은 영원히 지속되기도 한다.
미소 없이 살아갈 수 있을만큼 부자인 사람도 없고, 미소의 혜택을 즐기지 못할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다.
미소는 가정에서 행복을 꽃피우게 하고, 직장에서 호의를 베풀게 하며, 친구 사이에는 우정의 징표가 된다.
지친 사람에게는 안식이고, 낙담한 사람에게는 희망의 빛이다.
세상 어려움을 풀어주는 자연의 묘약이다.
하지만 미소는 금으로 살 수도 없고, 강요할 수도 없으며, 훔칠 수도 없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산다는 마음과, 더불어 가는 마음 하나면 좋겠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나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상처를 주는 말로 다치게 하기보다는, 다정한 조언의 말로 다독이면서 힘을 복돋아주는 그런 마음이면 좋겠다.
살아오면서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 많은 지식을 쌓은 만큼 베푸는 방법도 알리라고 본다.
상대를 헐뜯고 경멸하기 보다는 그의 자리에 빛을 주고 기도해주는 마음이 더 소중하며, 의심하기 보다는 믿어주고 상대의 상황을 이해해주는 그런 마음이면 좋겠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변화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늘도 변화가 있고 계절도 변화가 있듯이, 우리 삶도 희망의 변화가 있기에 변화의 아름다움을 품어내는 우리들의 마음들이면 정말 좋겠다.
우리는 아직도 공사중이다.
어쩌면 세상 끝날 때까지 공사가 완료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미완성의 공사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불편함을 주기도 하고, 급기야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한편, 내가 공사중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지금 계속 공사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사로 인하여 내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불편을 참고 견디다보면, 나보다 먼저 상대방이 나로 인한 불편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금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도 이렇게 인사를 한다.
“저는 아직도 공사중입니다.”
“불편하지만 제가 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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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등진 길손 팔자
살인 양 내닫노니
산 산 사이 협곡마다에
물푸레 상수리 들메낭구 푸른 등걸

눈물만큼한 진실 이치
세상 다시 없을 터에
울음되어 술 술 풀리어가는 애환
옷고름자락 비집어 걸려있는데

산 껴안은 강줄기
묏부리 족족 늘어 감겨
흐드러진 아리랑 장단
햇살 받아 너울거리면

자연 좇아 회귀한
나그네 여한만 살아남아
층층이 추곡의 손짓
모래결로 부서지는 듯

길은
왼종일 멀기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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