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선택
14권의 시집에 총 1,72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3집. 당신은 나의, 나는 당신의  


  "3집. 당신은 나의, 나는 당신의"
1995년 3월 23일에 출판된 詩集입니다.

詩人이 직접 '책 머리에'라는 인사글을 썼고
총 4개의 章으로 나뉘어져있는데
'방황하는 자아'에 15편,
'현실을 찾아서'에 15편,
'해묵은 운명'에 15편,
'살며 사랑하며'에 15편,
합계 60편의 詩가 실려있습니다.

유난히 連作詩가 많아서 총 60편이지만
훨씬 많은 量의 詩를 감상하시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 도서출판 가람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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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악예찬 - 1 *



시작노트

" 치악예찬 - 1 " 詩作 note

지난 주말에 ‘치악(雉岳)’을 찾았다. 명실상부한 만산홍엽이 거기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눈이 채 다다르지 못할 꼭대기에서부터 시작한 단풍의 물결이 마치 폭포수처럼 아래로 아래로 쏟아져내리고 있는 절경은, 선계의 그것인 양 황홀하고 신비한 장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허기사 부족한 필설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냥 이 쯤에서 칭송을 멈추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짬이 된다면, 아니 없는 시간이라도 좀 내서 모두들 한 차례씩 다녀가셨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해마다 이 맘 때면 치악은 홍역을 치른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단풍 탐방객들의 거친 발자국에 숨 돌릴 새도 없이 짓눌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꺼이 그 너른 품을 벌려 치악은 오는 이들 모두를 사랑으로, 아량으로 감싸준다. 한 자락이라도 더 보고 즐기라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추억을 남기라고, 그동안 애써 갈고 닦아 치장한 계곡과 능선의 단풍들을 모두 펼치고 서서, 위용을 떨치는 치악은 한 마디로 하늘이 내린 대자연의 보고다.

너무도 짧기만 한 단풍의 계절이라서 그 숨찬 체험의 대열에 함께 하지 못할세라 서둘러 치악을 찾은 필자가 숨가쁜 호흡으로, 서서히 초입에서 흥분된 가슴을 진정하고 서있을 때 젊은 부부가 지나치면서 ‘구룡사’의 위치를 물어온다. 되물으니 멀리 부산에서 치악의 절경 소문 듣고, 별러서 찾아왔단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치악의 전설과 내력, 그리고 여러 가지 비사들까지, 묻지 않은 점 개의치 않고 주섬주섬 주저리로 풀어놓았다.

눈치를 보니 이내 귀찮아하지는 않는 듯 여겨져 입을 열어놓은 채로 천천히 함께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할 말이 너무 많았기에, 그냥 헤어지기는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어서였다. 그런데 되레 그 부부가 황송해 하면서 필자에게 치악의 가이드냐고 물어왔다. 얼떨결에 실은 치악의 홍보대사라고 필자를 소개했더니, 무척이나 반가워 하면서 자기들이 복이 있어서 제대로 대사님을 만났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관직 사칭으로 처벌을 받을지 모르지만, 일단은 아지 못할 사명감에 불타올라 최선을 다해서 치악의 또 다른 이야기들을 이모저모 주워섬겼더니, 종국에는 수십년을 치악의 판촉을 담당하신 분 같다고 하면서 치하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동안 동행을 하면서 치악을 홍보하고 난 후에 길을 따로 잡게 되었는데, 혼자가 되어서 치악의 여기저기를 휘둘러보던 필자는 순간 머리를 때리는 어떤 충격에,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실없이 웃음 흘리면서 치악의 자랑을 하긴 했는데,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치악의 자락에서 호흡하며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정말 좋겠다는 부러움의 말에 어깨까지 으쓱하긴 했는데, 또한 꼭 다시 찾아오라는 주인 입장의 인사말을 자신있게 건네긴 했는데, 그런데 말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귀한 치악의 삶을 살아가면서 필자는 그동안 대관절 얼마나 그 가치를 실감하면서, 그 풍광에 감사하면서, 그 의미를 가슴 깊이 되새기면서 살아왔던가? 과연 치악의 얼굴을 마주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으로, 치악이 가르쳐준 기상과 정의를 실천하는 생활로, 치악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아량과 사랑을 베푸는 마음으로, 긴 세월들을 떳떳하다 자부하며 살아오긴 했던가?

가까이 있다보니 별다른 준비나 과정 없이도 어렵지 않게 찾곤 했던 치악산. 조금만 시간을 내면 쉽사리 여러 방면의 코스를 골고루 경험하면서 오르곤 했던 치악산. 그러자니 치악은 정말 손쉬운 주머니 속의 장난감이었다. 고백컨대 언제부터인가 특별한 감흥도 흥취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그런, 심심한 마음 그대로 오르내렸던 치악산이다. 애착이나 자부심은 어디론가 가버린지 한참 되었고, 더도 덜도 말고 특별히 갈 데가 없으면 심심풀이로 찾는 흔한 대타 등산코스에 불과하다고 여긴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산을 오를 때 마다 언제나 반갑게 만났던 산친구들, 오롯이 뻗어진 오솔길과 험난하면서도 정겨운 기암괴석의 골짜기, 졸졸 소리로 귀를 간질이던 계곡물과 울울창창 하늘로 팔 벌린 천년 고목들, 그 사이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던 다람쥐와 온 세상에 청명한 기운을 심어주던 새들의 노래 소리, 조봇한 길가에 무리지은 들꽃들과 이따금 큰 대자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풀밭들까지, 그것들을 뇌리에서 다 잊은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걸 어느 순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 다리가 풀려, 찰라 그 자리에 서있을 힘조차 사라진 것이다.

살기가 차마 버거울 제면, 하루를 보내기조차 힘겨울 제면, 슬그머니 찾아들어 힘을 얻고 위로를 받곤 했던 날들이 참 많이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바쁘다는 핑계로 치악을 외면하기 시작하더니, 일방적인 스케줄에 의해 어쩌다 방문한 치악과의 해후에도 필자는 아무런 성의조차 보이지 않기 시작했었음이다. 예컨대 만나서 반갑고, 찾아서 즐거운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고, 늙어가는 몸뚱아리의 야외 체력 단련장으로, 건강을 지키 위한 수단의 체험 학습장으로 그 위상이 변모되었는데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냥 코스를 따라 걷는 트레킹 연습을 언제부터인지 습관처럼 반복하기 시작했었음이다.

그나마도 집중한다는 명목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나만의 세계에 침잠하면서 오직 길 따라 걷기만 하다보니, 오가는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는커녕 부딪칠까 두렵고, 말을 걸면 짜증이 나는, 그야말로 스스로가 왕따가 되어, 산에서 만나는 가장 밥맛없는 등산객으로 자신을 반죽해서, 형편없는 구석에 자리매김 시키고 있었음이다. 정말 치악을 보기가 이렇게 미안하고 부끄러울 수 없다. 할 말이 없다. 꼭 ‘유구무언(有口無言)’그 짝이다.

그렇담 이 가을을 계기로 다시 살아나자. 필자를 나아주고 키워준 치악과 다시 한 번 손잡고 사귀어보자. 치악이 바라는, 치악이 시키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의 씨앗을 힘써 심어보기로 하자. 그래서 명실공히 치악의 진실한 홍보대사가 되어, 부끄러움 없이 치악을 만천하에 홍보할 수 있는 스스로의 자격을 취득해보자. 남은 가을이 가기 전에 치악을 더 좀 부지런히 찾아, 그 거룩한 정기를 깊이 깊이 받아 안자. 그리고 치악으로 인해 거듭나자.

물론 그것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최선의 학습 방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단지 치악이 주는 가르침은 언제나 변함없이 필자에게 힘을 선사해주고 자신감을 심어준다는 믿음이 있으니 겁내지 말고 도전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스위스’의 위대한 교육자인 ‘페스탈로치’는 어린 시절 몸이 약하고 수줍음이 많아 또래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와 함께 산책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다.

페스탈로치는 할아버지가 틀림없이 자기를 업고 건널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할아버지는 페스탈로치의 잡은 손을 놓더니 혼자 펄쩍 뛰어 시냇물을 건너는 것이었다. 페스탈로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거렸다. “뭐가 무섭다고 그러느냐?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서서 힘껏 뛰어라!” 할아버지 말에 페스탈로치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못 건너면 할아버지 혼자 먼저 갈 테다.” 두려움에 놀란 페스탈로치는 엉겁결에 펄쩍 뛰어 시냇물을 건넜다. 그러자 뒤돌아섰던 할아버지가 달려와 페스탈로치를 다정하게 안아주면서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잘했다. 이제 넌 언제든지 네 앞에 나타난 시냇물을 건너뛸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려 있단다.” 할아버지의 말씀과 그날의 경험은 페스탈로치가 어른이 된 뒤 많은 실패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보다 좌절을 딛고 일어설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희망을 심어주고 용기를 주는 말은 열등의식에서 벗어나 인생의 위대한 승리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여긴다. “당신이 느끼는 열등감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라고 말한 ‘엘리너 루즈벨트’의 말을 가슴으로 새겨볼 일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루를 살아간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과도 만나지만,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과 새로 만나서 관계를 형성해가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이정표다. 그러한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고 이익을 줄 사람만 골라서 만날 수도 없고, 만나기 싫은 사람이라고 해서 전혀 보지 않고 살아갈 수도 없다. 우리 삶에서 사람과 이어지는 인연 하나하나가 삶의 본질이니만큼 어떤 만남이라도 삶에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자신의 숙제다.

오래전 옆집에 살고 있던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겪은 일이다. 어느 날 아이는 학교 수업 중 갑자기 배가 아팠다. 다행히 양호실에 다녀온 아이는 조금 나아졌다. 그래도 집에서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선생님은 조퇴를 시켜주셨다. 아이는 책가방을 들고 집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아이는 도중에 배가 아파 한 발짝도 걸어갈 수 없었다. 택시를 세우려 했지만 아이 혼자여서 그런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택시 한 대가 아이 앞에 섰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배를 움켜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며 집이 어디냐,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얼마쯤 달리다가 어느 약국 앞에서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약봉지를 들고 왔다. “얘야, 일단 이 약을 먹어보렴!” 아이는 택시를 태워준 것만도 고마운데 약까지 사주셔서 어린 마음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집 앞에 도착한 아이는 놀라서 뛰어나오는 엄마를 보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엄마로부터 택시 기사 아저씨가
걱정을 많이 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주변에는 어려움에 닥친 사람을 그냥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에게 참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베풂은 또 다른 베풂을 낳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름지기 치악이 가르쳐주는 교훈 중에 하나라고 여기는 덕목이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몸도 내 몸같이 소중히 여기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일을 먼저 그에게 베푸는 미덕을 앞서 실천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문득 끝이 없이 무한한 부모의 사랑을 닮은 치악의 웃음을 기억한다. 그러면서 변화무쌍한 이 사회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의 근원을 조심스레 터득해간다. 이 또한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외부의 여건이나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굳은 심지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다.

지난 10일 중국 ‘저장(浙江) 성 원저우(溫州)시’에서 주택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주택 4채가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잠을 자던 주민들이 모두 매몰되었다.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6명만이 살아남았다. 그 중 사고 발생 12시간 만에 한 여자아이가 극적으로 구출됐는데, 구조대원들은 눈물겨운 장면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얼굴을 십자 형태로 교차해 딸을 꼭 끌어안은 채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를 몸과 머리로 막아냈기 때문이다.

부모가 온몸으로 딸을 감싼 덕분에 다행히 아이는 가벼운 상처만 입고 무사했다. 자신의 목숨은 버린 채 마지막까지 딸을 살리고자 한 부모의 사랑이 아이를 살린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자녀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부모 마음이다. 그런데 왜 어떤 이들은 아이들을 폭행하고 생명을 잃게 하는 걸까?

얼마 전 6살 입양 딸을 장기간 학대하여 숨지게 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이런 뉴스가 나올 때마다 아이들이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없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화가 나고, 큰 슬픔에 감정을 추스를 수 없다. 이러한 유사 사건들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주변의 관심이 필요하다. 내 아이만 잘 키우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아이의 또래 친구들도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따뜻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겠다.

치악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일어나는 파문을 잠재운다. 사랑의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주는 마음이 요구되는 현실에 가슴이 저리다. 작은 힘이나마 먼저 나서고자 하는 성의를 싹틔운다. 화가 ‘이중섭’이 하루는 병을 앓고 있는 지인에게 문병을 갔다. 절친한 친구이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시인 ‘구상’이었다.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는 친구를 찾아온 이중섭은, 구상이 아픈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문병이었기에 늦게 찾아온 것을 미안해하며 작은 도화지를 건넸다. “자네 주려고 가지고 왔네. 이걸 가지고 오느라 늦었네. 자네가 좋아하는 천도복숭아라네.” 삶이 궁핍했던 이중섭은 직접 그림을 그려 선물한 것이다. 그리고 장수를 의미하는 천도복숭아를 그려 친구의 쾌유를 기원했던 것이다.

복숭아는 친구 구상에 대한 이중섭의 순수한 사랑의 표시였다. 가장 좋은 선물은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를 위한 시간과 정성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 나에게 소중한 ‘한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선물’ 하나 건네 보는 건 어떨까? 중요한 것은 그 보내는 선물에 있지 않고 그 마음에 있다. 바로 치악이 은근히 바라는 넓고 깊은 마음의 표시가 이것이다.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겪은 일이라며 어느 상담자가 한 말이다. 어느 날, 초등학생으로 되어 보이는 한 아이가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건네며 10분만 인터넷을 할 수 있느냐고 했다. 그는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규정대로 500원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그 아이는 100원밖에 없는데 10분만 하게 해주면 안 되냐고 계속 생떼를 썼다.
내일 400원 더 가지고 오라 했지만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빠한테 편지 써야 한단 말이에요.” 그는 꼭 컴퓨터로 쓰지 않아도 된다며 편지지에 써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또 울먹이며 대답했다. “편지지에 쓰면 하늘나라에 계신 저희 아빠가 볼 수 없어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하늘나라에 계신 아빠에게 편지를 써도 답장이 없어 이메일을 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컴퓨터는 모든 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하늘나라에도 갈 거라고 아이는 천진하게 말했다.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가슴이 짠해져서 컴퓨터 한 자리를 내어 주고 꼬마가 건네는 100원을 받았다. 10분 후, 꼬마가 와서 자신의 이메일을 하늘나라에 꼭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가 남기고 간 편지에 그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TO. 하늘에 계신 아빠께. 아빠, 저 승우예요. 거기는 날씨가 따뜻해요? 춥지 않나요? 여기는 너무 더워요. 아빠, 밥은 드셨어요? 저는 조금 전에 할머니랑 콩나물이랑 김치랑 먹었어요. 아빠~ 이제는 제 편지 보실 수 있을 거예요. 피시방 와서 아빠한테 편지 쓰니깐요. 아빠 많이 보고 싶어요. 꿈속에서라도 아빠 보고 싶은데 저 잘 때 제 꿈속에 들어와 주시면 안 돼요? 아빠, 저 이제 그만 써야 돼요. 다음에 또 편지할게요. 세상에서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승우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한테 드림

누군가 내게 도움을 청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귀 기울여주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에겐 가장 간절한 소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아마도 이 또한 치악이 우리에게 바라면서 건네주는 삶의 좌우명일 것이다.

오늘도 치악은 저기 우뚝 서서 필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앞에도 서있고 뒤편에도 있다. 그렇기에 치악의 목소리는 어딜 가도 들을 수 있다. 필자에게 눈웃음을 치면서 치악은 오늘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세상을 사랑해라. 그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인연들에게 치악의 사랑을 전해라. 그래서 그들도 모두 서로 사랑하는 이 가을이 되어지기를 바란다는 걸 꼭 전해주어라.”

치악이 붉은 옷을 입고 서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그 옷들을 모두 벗고, 한동안 숨 죽이고 세상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안다. 치악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있다는 것을. 가을이든, 겨울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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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 구비 돌아치는 산삼 약수 바가지에
머루 다래 지천 널려 기와 불사 참배객 탑돌이하면
구룡 주지 합장 예불,
치악의 새벽에는 늘 향기가 있네

뱀딸기 흐드러져 날다람쥐 새참,
정한수 떠놓고 여명에 부산떨던
산행객들 되돌 무렵
뉘라도 반겨 맞아 낯설지 않은
집채 바위 이끼 머금어 위용당당한 뒬안으로
하늘 천녀 하강하여 목욕하는 속살 향기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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